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전 라틴어(Latina classica)카이사르(Caesar)
그리스어카이사로스(Καισαρος)
독일어체자르(Cäsar), 카이저(Kaiser)
러시아어체자리(Цезарь)
에스파냐어세사르(César)
영어시저(Caesar)
이탈리아어체사레(체자레)(Cesare)[1]
교회 라틴어체사르(Caesar)
포르투갈어, 프랑스어세자르(César)

CAIVS IVLIVS CAESAR[2]
(BCE 100년? 7월 12일?/7월 13일?[3]~ BCE 44년 3월 15일)

그는 결코 황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황제를 뜻하게 되었다[4]

1 개요

로마가 낳은 유일한 천재. - 테오도르 몸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유명한 정치인이자 명장, 그리고 카사노바의 대선배[5]. 서구권의 황제 이미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6] 영어로는 가이어스 줄리어스 시저(Gaius Julius Caesar)라고 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가 낳은 걸출한 인재로서 포에니 전쟁 이후 표류하기 시작한 로마 제국[7]의 체제를 개혁하려고 했던 인재인 동시에, 공화정을 파멸시킨 독재자라는 양극의 평가가 존재하는 인물이다.[8] 카이사르는 호민관의 권위를 세우겠다고 얘기한 지 한달도 안 되어서 자기 계획에 반발한 호민관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공화정만으로 로마가 결코 유지될 수 없다는걸 알아차리고 개혁을 꿈꾸던 인물이라는 평과 그저 최고가 아니면 참지 못했던 성격 때문에 최고 권력자 자리에 도전했던 사람이라는 평이 갈린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하지만 엄청나게 유능하고 정말로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가 행했던 정책은 당시 로마에서 정말로 필요했던 것들이다.

여담이지만 시대의 영웅이라고 추앙받는 다른 인물들과 달리 너무 늦은 나이에 일어섰다는 특이한 사항이 있다. 나이 마흔에 되어서야 겨우 두각을 드러냈기에 아주 빠른 속도로 로마사를 화려하게 장식했을지도... 그리고 여러 번 결혼했으며 그 와중에도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어머니와 연애한 이력이 있듯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2 이름의 어원

카이사르 본인이 살던 시대에는 고전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어서[9] 카이사르[10]에 가까운 발음이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름을 표기할 때 사용한 카르투쉬에 분명히 "카"이사르로 표기되는 등 사료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로제타 석에서도 "KAISRS"라는 발음표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다름아닌 라틴어 'Caesar'의 그리스식 표기 'Καισαρος(카이사로스)'를 다시 상형문자로 옮긴 것. 참고로 같은 석판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클레오파트라"의 이름 또한 확인이 된다.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기는 카이사르다.[11] '캐사르'라고 읽는 사람도 있다. 한국어 성서(성경)에서는 '가이사'라는 표기로 나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물론, 이때의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이르는 말

속설로는 '카이사르'라는 단어는 본래 카르타고어로 '코끼리'를 뜻하는 카이사이(Caesai)의 변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12]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크게 활약을 해서 이런 별명을 얻었는데, 이 별명이 가문명으로 정착되었고 카이사르는 그의 후손이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는 주화에 코끼리 모양을 새기기도 했다... 귀여운데? 어찌보면 로마에게 멸망한 카르타고의 '코끼리'라는 낱말이 한 로마 병사를 거쳐서 카이사르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황제를 뜻하는 대단한 말까지 승격되어 현대(독일어 Kaiser, 러시아어 tsar)까지 생명력이 남은 셈이다...라는 게,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국내에도 널리 퍼진 주장.

그러나, 대다수 역사가들은 카이사르라는 이름은 카이사리에스(Caesaries)의 변형으로 본다. 저 단어의 뜻은 "풍성한 머리를 가진"이란 뜻으로, 아마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상 중 한 명이 태어났을 때부터 풍성한 배냇머리를 가지고 있어서[13] 붙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집안 남자들에게 계속 대머리가 유전되다보니 희망사항으로 저런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도 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대 로마 시대에도 자라나라 머리머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대머리가 대개 부계 유전이라는 사실과 카이사르가 대머리였다는 걸 보면 꽤 신빙성이 높은 설이다. 카이사르는 율리우스 가문의 씨족 중 한 개의 이름 즉 코그노멘(Cognomen)이고 주로 먼 조상중 한명의 별명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그리고 코그노멘에는 주로 그 시조뻘되는 사람의 신체적 특징을 담고 있는게 유난히 많아서[14] 더 신빙성이 가는 설이다. 다만 카이사르 개인은 이름이 코끼리에서 왔다는 설을 굉장히 좋아했다. 아마도 풍성충보다는 거대한 동물인 코끼리가 더 폼도 나고, 정작 이름과는 달리 자신은 대머리였다는 아이러니함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생애

3.1 젊은 시절

로마 공화정 말기에 태어났으며 자신은 귀족이면서도 로마의 전통적인 두 파벌 중 민중파(포풀라레스)의 사람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토지개혁 등 그라쿠스 형제가 못 이룬 꿈을 일부분 이룬다. 그가 청년기 때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민중파 식 개혁에 반발하여 일어난 원로원 귀족파(옵티마테스)의 거두 술라의 살생부로 대표되는 독재정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15] 어린 시절 가정교사는 당시 웅변가이자 문법학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니포였다. 그니포는 갈리아 출신이었다고 하는데 훗날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으로 큰 명성을 얻은 점을 보면 묘한 우연이다. 시 여사의 조카는 카이사르가 이때 마구 싸대기를 맞은 원한을 품고 갈리아를 정복한 것일 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냈다.

16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 17세에 유피테르(제우스)의 고위 사제 '플라멘 디알레스'로 선출되었다.

마리우스의 친척이라는 것 때문에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으나 많은 사람들의 탄원[16]이 있었고 카이사르도 본래 술라가 부인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단호히 거부하고선 동방으로 도망쳤다.[17] 여하튼 술라의 뜻을 거스르고도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이때 사제들은 말을 만지거나 로마 밖에 하루 이상 나가는 일 혹은 자기 침대가 아닌 곳에서 사흘 이상 자거나 군대 업무를 보는 게 금지되어 있었고, 당연히 사제직을 박탈당했다[18]. 이게 전화위복이 되어 군 경력을 일찍 시작할 수 있었고, 사제직을 잃은 게 젊은 시절 군 경력과 전공에 도움이 된 셈.

술라가 사면해준 다음에도 안전을 확신하지 못해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입대했는데, 이 시절에 시민관[19]도 받았고 비티니아 궁정에서 해군 관련 업무도 보았다. 그리고 바로 이 때 평생을 따라다닌 비티니아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의 동성애 스캔들이 시작되었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 문화를 굉장히 존중했고 상류층의 경우 그리스에 유학을 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관례일 정도였지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동성애를 윤리적 죄악으로 여긴 것은 아니지만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으며 특히 성관계에서 수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그래서인지 이런 역할은 보통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담당) 카이사르는 수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소문이 났다. 니코메데스 4세는 죽을 때 비티니아를 유증의 형태로 로마에 넘겨주었는데[20] 당시 로마인들은 카이사르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진실이 어떻건 몇몇 사람들만 빼고 다 그 스캔들을 믿었다.[21] 심지어 카이사르의 병사들조차 그랬다. 농담과 장난을 좋아하던 카이사르도 대머리와 동성애로 놀리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그와 친했던 병사들은 개선식 등등에서 잘도 놀려먹었다.[22]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자 안전을 확신하고 로마로 돌아왔고, 레피두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참여하지 않고 변호사로 나섰다. 이때 변호사로서의 실력도 좋고, 부패나 비리를 저지른 전직 총독등 높으신 분들도 거리낌없이 디스하며 고소를 날려대어 명성을 얻었다. 키케로도 카이사르의 변론을 보고 "어느 웅변가가 그대를 능가하겠는가?"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한창 변호사로 주가를 올리다 수사학 공부를 하러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 몰론[23]에게 유학하러 가다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는데, 시종일관 해적들을 아랫사람 취급하며 거만하게 굴고, 해적들이 몸값으로 20달란트를 부르자 자기 몸값이 그것밖에 안되냐며 화를 내며 50달란트로 올렸다.[24] 그러면서 몸값이 오는 동안 해적들과 어울리며 술먹고 놀러다녔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늬들 전부 십자가형에 처해 주겠다'고 했는데 물론 해적들은 농담인줄 알고 재미있어했다. 또한 자신의 자작시를 낭독하는데 그걸 듣다가 잠들어버린 해적들을 야만인이라고 욕하는 패기까지 보여주었다. 어째어째 몸값을 마련해서 풀려났는데, 정말로 자신의 말을 지켜 아시아 속주에서 함대를 모아 해적들을 싸그리 체포했다. 아시아 총독 마르쿠스 융크투스는 카이사르의 요구대로 처형하는 대신 이들을 노예로 팔고 싶어했지만, 카이사르는 기어이 그들을 십자가형에 처함으로서 약속을 지켰다.[25] 매우 유명한 일화인데 카이사르를 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일화라는 설도 있다.

사실 그는 갈리아 전쟁 이전만 해도 단지 이단아일 뿐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지는 못했다.[26] 폼페이우스가 20대부터 창창한 무공으로 성큼성큼 출세가도를 달릴 때, 그는 단지 로마의 탕아 정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여자 후리는 기술이 가히 신기에 달해 불륜 상대의 남편에게는 칼 안 맞고 다른 정부들의 질투를 사지 않는 완벽한 하렘 구성 능력으로 훗날의 통솔력을 미리 보여준다. 실존했던 하렘 마스터. 현대인이었다면 미연시 주인공이다 사실 그냥 탕아 정도로만 취급받지는 않았다. 안찰관 시절에 보여준 퍼포먼스와 마리우스 공적비 복구, 최고제사장 역임, 성공적인 스페인 통치와 포르투갈 제패 등 정치적인 면에 있어서는 폼페이우스를 제외한 젊은 세대에서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27]

그는 법무관이 되어 직무를 수행한 뒤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 서쪽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현재 포르투갈 지역을 제패하는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이로서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28]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받게 된다.

3.2 장년기

기원전 59년, 총독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41세의 나이에 생애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된다. 원로원은 반체제 인물로 낙인찍힌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출을 방해하기 위하여 그에게 개선식과 집정관 후보 등록의 양자택일을 강요한다.[29] 당시 규정대로라면 집정관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직접 로마 시내에 들어와 입후보 지원서를 내야했는데 개선식 이전엔 로마 시내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었던 것이였다. 결국 카이사르는 개선식을 할 권리를 포기했고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 그는 로마 시내에 들어올 때 백마를 타고 들어왔다고 한다.

집정관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 교섭을 했다. 폼페이우스는 당시 해적을 소탕하고 폰투스, 유다, 시리아를 정복한 뒤 귀국하여 자신의 휘하에 있었던 퇴역병에게 퇴직금으로 영토를 지급하는 문제 때문에 원로원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해 보였던 이 영토 지급에 원로원이 반발한 이유는 당시 퇴역병에게 지급해야할 영토는 로마의 국유지였는데 문제는 이 로마의 국유지 대부분을 로마 원로원 계급들이 제멋대로 사유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만일 이 영토를 병사들에게 지급해준다면 자연스레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질색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협력하였고 여기에 당시 로마 최고의 거부였던 크라수스[30]를 끌어들여 삼두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들이 맺은 협정의 내용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 당선되는데 필요한 표를, 크라수스는 돈을 지원하고 카이사르는 집정관이 되어 이들이 원하는 정책을 시행해주는 것이였다.[31]

카이사르는 이 삼두협정 덕에 집정관에 무난히 당선되었고 여기서 그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최초로 발휘하여 율리우스 농지법을 성공적으로 민회와 원로원에서 통과시킨다.

농지법은 로마의 국유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법안으로 당시 정계에선 일종의 금기와도 같은 것으로 이 농지법을 주도한 기원전 140년대의 그라쿠스 형제와, 기원전 100년대의 사투르니누스 같은 호민관들은 살해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이것을 무난히 해낸 것이었다. 다만 그라쿠스의 농지법과는 목적과 법안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데 그라쿠스는 원로원에게 국유지 한계치 이상의 양은 소유할 수 없게 못 박고 빈민들에게 임대시켜 정착시키게 하는 급진적인 내용이라면,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퇴역병을 정착시키는 땅을 주는 목적만이 담긴 법안이었다.

어쨌든 이로서 국유지 임대권의 매매가 인정되었고(임대 20년 이후), 원로원 귀족들이 장악했던 캄파니아의 옥토는 제외되었고, 몰수된 자에게는 폼페이우스가 약탈하거나 보상금으로 받은 재화를 보상금으로 지급하게 했다. 그런데도 폼페이우스의 인기와 퇴역병들, 빈민들의 힘을 합쳐서 간신히 귀족들을 압박해 통과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원로원과 민회의 의사록을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는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를 만들었다.

이외에도 징세업자의 속주세 예납제를 폐지하고, 갈리아 땅에서 세력을 불리던 게르만족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와 동맹을 맺었다.

동료 집정관이자 정적인 비불루스는 카이사르가 개혁을 단행하는 동안 한 업적이 없어서 둘이 집정관에 취임했던 기원전 59년은 "율리우스와 카이사르가 집정관이던 해"라고 불렸다.

카이사르의 임기가 점점 만료되자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견제하기 위해 임기 후 임지로 중요하긴 하지만 전쟁 같은 화려한 업적은 없는 "산림과 도로"로 배정하려고 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삼두정의 배경을 활용하여 자신의 임기를 갈리아(프랑스)로 바꾼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임기를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헬베티 족(지금의 스위스 안팎에 거주)이 민족 이동을 하려고 준비중인 것을 알고 있지 않았나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헬베티 족은 민족 이동을 위해 3년간의 준비를 하였고 카이사르가 집정관이었을 때는 이들이 준비를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헬베티 족이 갈리아 내부로 침입한다면 갈리아 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군사적 업적을 세울 기회를 노렸던 카이사르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기를 '산림과 도로'에서 갈리아로 바꾼 것이다. 카이사르가 헬베티 족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갈리아 전기에서 단 보름만에 헬베티 족에 맞서기 위한 5개 군단을 소집했고 이 중 3개 군단을 새로 뽑았다고 서술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갈리아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한 것처럼 카이사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어서가 아닌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전쟁이 날 가능성이 높음을 보고 그 자리를 선택한 것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3.3 갈리아 전쟁 시기

이후 집정관에서 물러난 그는 갈리아 총독(이 당시에는 지중해 연안의 남부 프랑스만 지배) 으로 부임하였고 여기서 카이사르는 갈리아 제패라는 업적을 남긴다.

카이사르가 부임하던 해에 헬베티족[32]이 고향 땅을 떠나 갈리아 내부로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때 헬베티족은 전 갈리아의 풍요로운 영토를 힘으로 빼앗은 뒤 전 갈리아를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이 원정을 위해 이들은 3년의 준비를 해왔다.

3년간의 준비가 끝나자 헬베티족은 마을을 전부 불사르고 자신의 영토를 지나 갈리아로 침입한다. 우선 이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신을 보내 이들이 로마 속주 통과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를 거부하고 만일 이들이 통과한다면 무력으로 저지하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힌다. 할 수 없이 이들은 기회를 엿보았으나 카이사르가 협상하면서 서둘러 건설해놓은 강의 방책을 보고 단념하였다.

결국 하이두이의 유력자 둠노릭스의 중재를 통해 이들은 세콰니 영토를 거쳐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과는 달리 세콰니, 하이두이족 영토를 지나면서 약탈을 시도했고 하이두이 족의 요청으로 개입한 카이사르가 이들을 쳐부수었다.

그 뒤 갈리아인들은 족장회의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게르만족을 쳐부숴 달라고 요청한다. 카이사르는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까지 올라온 뒤 당시 네비족 영토에 깊숙히 들어와있던 게르만 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와 결전을 벌여 이들을 격파한다.

그 이듬해에 카이사르는 사비스 전투에서 로마 세력이 들어온 것에 반발하는 갈리아 북부인들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다. 그 뒤 4년 동안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의 여러 반항을 진압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그동안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 영토에 침입하거나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등의 모험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로마에서 총독 임기를 연장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7년째엔 베르킨게토릭스가 주도한 갈리아 전체 민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이들의 초토화 작전에 고전한다. 갈리아 족은 그야말로 완전한 청야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즉 카이사르군의 진격로에 있는 마을들을 완전히 불사르고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베르킨게토릭스는 젊은 데다 보잘것 없는 부족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아바리쿰에 있던 부족들은 이것에 불복하였고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의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이들의 도시는 강과 절벽에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지휘관인 카이사르와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로마 군단병의 공세에 무너지고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학살된다.

이렇게 되자 청야전술을 주장했던 베르킨게토릭스의 발언권은 매우 강해졌으며, 그 결과 갈리아 인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지휘를 인정한다. 특히 12만에 달하던 아바리쿰 거주민들의 몰살은 갈리아 인들이 마을과 터전을 자신들의 손으로 불사르는 게 더 낫다 라고 느끼게 하였다. 그 결과 베르킨게토릭스는 거의 완전하게 청야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현지 조달밖에 방법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보급할 길이 끊기게 된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와 그의 본군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그를 생포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있는 게르고비아로 진군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이사르는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10개 군단에서 4개 군단을 떼어 부관 라비에누스에게 주어 다른 부족을 공략케 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병력은 아비라쿰를 공략했을 때의 60%에 지나지 않았다. 아비리쿰도 10개 군단을 동원하여 간신히 점령했을 정도인데 베르킨게토릭스가 친히 있던 게르고비아를 6개 군단만으로 점령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즉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력과 적의 전력을 오판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를 공격하였으나 이곳 역시 천혜의 요새였고 베르킨게토릭스의 본군이 머물고 있었으므로 방비가 철저했다. 게다가 4개 군단이 줄어들었으므로 로마의 공격도 아바리쿰 시에 비해 거세지 않았다. 때문에 이 도시는 여러차례 공격했어도 끄덕도 하지 않았고 결국 군량이 다 떨어진 카이사르는 철수키로 결정한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철수하기 전에 '이대로는 그냥 못 가겠다'라고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총공격을 한 뒤 큰 피해를 입히고 철수하려고 계획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거세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걸 병사들이 오해하고 적진에 깊이 뛰어들고 만다. 그 결과 선두부대는 고립되고 많은 수가 전사하였으며 결국 본때를 보이려던 카이사르는 오히려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나게 된다. 즉 게르고비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으로 갈리아 족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이때 카이사르를 갈리아에 불러들였던 장본인이었던 하이두이족이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베르킨게토릭스에게 붙는다. 하이두이는 카이사르를 불러들여 그 덕분에 갈리아의 맹주노릇을 하였는데 게르고비아의 패배로 카이사르에게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하이두이 족의 땅에 대부분의 군수자금과 군수물품, 그리고 갈리아 부족들에게서 잡아둔 볼모들을 머물게 하였는데 하이두이족은 이것을 모조리 압수하고 로마인들을 살해한 뒤 카이사르를 배반한다. 그 뒤 하이두이는 배신한 대가로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하는 갈리아 연합군을 그들이 지휘하겠다고 하였으나 갈리아 족장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거부당한다. 그제서야 하이두이족은 카이사르를 배신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되자 빨리 군량이 있는 곳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군 하여 루아르 강으로 가서 군량을 확보한다. 이때 카이사르에게서 4개 군단을 받아두었던 라비에누스는 상대한 족장을 이긴 뒤 돌아와 카이사르에게 합류한다.

이때 카이사르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는데 당시 카이사르가 달성했던 갈리아에서의 군공에 원로원은 시기하고 있었고 특히 삼두정의 동료였던 폼페이우스가 유난히 그랬다. 때문에 로마 정부로부터의 지원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멋대로 임지를 벗어나 침략 활동을 벌이고 있다며 그를 탄핵하여 갈리아 족에게 넘기자는 의견까지 제시되는 상황. 게다가 그때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 말이었으므로 널널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임기는 단 1년만 남겨두고 있었으며 게다가 이미 삼두 정치가 끝장났으므로 더 이상의 총독 임기 연장은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베르킨게토릭스는 무사히 그 해를 넘긴 뒤 카이사르의 마지막 임기인 다음 해만 버티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물건너가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카이사르는 거의 분명히 정치 생명이 끝났을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모든 갈리아 부족이 배반했고 하이두이 족의 배신으로 모아둔 상당한 물자와 볼모가 날라갔기 때문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일단 임지로 철수한다면 그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는 갈리아의 해방이라는 그의 목적을 십중팔구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도 이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게르고비아에서 졌다고 그대로 철수하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머물고 있던 루아르 강과 속주 사이에 있던 세콰니 족을 공격하였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속주의 물자를 쓸 수 있는 루트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베르킨게토릭스가 대군을 집결하고 카이사르 눈앞에 나타난다. 이는 베르킨게토릭스가 더 이상 청야전술을 쓰지 않고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맞붙겠다는 것이었다.

만일 베르킨게토릭스가 청야전술을 계속 쓸 생각이었다면, 카이사르가 향하고 있던 세콰니족을 이주시킨 뒤 그 영토를 불살라야했다. 비록 이로써 카이사르가 속주의 루아르강의 루트를 만들 수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카이사르는 적에게 고립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보급을 꾸준히 교란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가면 카이사르에게는 그다지 큰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승리에 고무되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사기가 고양된 부족들의 압력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카이사르 앞에 갈리아 족 전체에게서 긁어모은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건 것이었다. 특히 당시 카이사르는 게르고비아 때와는 달리 라비에누스가 4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여 10개 군단 전부를 휘하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면에서 전투를 거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이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 족을 살육하다시피[33] 하고, 도망가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추격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황급히 알레시아로 들어간 뒤 성문을 닫았고 카이사르 군은 이 도시를 겹겹이 봉쇄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그의 대군이 이토록 쉽게 분쇄될 것이라 생각치 못했고[34] 알레시아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으므로 알레시아엔 고작 보름 남짓 먹을 식량이 있었을 뿐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식량을 아껴먹어 30일간 버티기로 하였고 외부의 구원을 기다린다.

베르킨게토릭스를 구하기 위해 갈리아 족은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공격하였고 베르킨게토릭스도 이에 호응해 성밖으로 나와 공격한다. 카이사르는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셈이었으나 미리 방벽과 참호를 만들어둔 데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과 전투력이 워낙 갈리아족보다 뛰어났으므로[35] 갈리아 족은 앞뒤로 공격한다는 전술적 우위와 자기 지역에서 많은 수로 공격한다는 이점을 안고도 패배하고 만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이 패배로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였고 구심점을 잃은 데다 두 차례의 패배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적 손실을 입은 갈리아 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함으로써 갈리아는 평정된다.

그 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 만에 제패해버린 사건은 로마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범갈리아 연합론(?)을 내세워 봉기한 베르킨게토릭스알레시아 전투에서 물리치고 갈리아 지배를 결정적으로 확립함에 따라 서서히 원로원의 견제를 받게 된 그는 마침내 원로원의 최종통보를 받고 루비콘 강 앞에서 모든 군대를 해산한 뒤 로마로 올 것을 요구받는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게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여러 타협안을 제시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은 카이사르 자신이 갈리아 총독을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것이였다. 카이사르는 군대 지휘권을 반납하는 순간 원로원의 수많은 정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목숨을 걸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였다. 원로원은 이 제안을 거부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총독 말기에 원로원과 이토록 심하게 대립하게 된 원인은 카이사르를 비호해주는 가장 중요한 두 인물들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삼두결속이 깨졌기 때문이였다. 크라수스파르티아 원정에서 지휘관으로서의 극도의 무능력함을 보인 끝에 자기 아들(젊은 크라수스) 및 군대와 함께 전사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의 죽음, 카이사르에 대한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로 기울어지게 된다.[36] 그 결과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의 대성공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서 고립되게 되었다. 반대로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라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단히 강력한 후원자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고 카이사르에게 대단히 강경하게 나갈 수 있게 된 것이였다. 그리고 이는 결국 양자간 충돌로 나타난다.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타협을 거부하고 그에게 지휘권을 반납한 뒤 민간인 신분으로 집정관에 입후보하라는 명령을 함으로써 카이사르는 내전을 치르기로 결정한다. 카이사르의 군사행동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그것도 8개 군단이 휘하에 있으면서 순순히 자기 목숨(실제 생명은 물론 정치 생명도)을 적대 세력 손에 내어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다.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는 말은 이 강을 건널 때 했다고 전해진다.

3.4 카이사르의 내전

주사위는 던져졌다!

엄밀하게 따지면 원로원이 최종권고를 통해 카이사르를 역적으로 지정한 것이 먼저이며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측으로 부터 카이사르와 맞설 군대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를 역이용해 도리어 원로원 최종권고의 법적 불합리성을 주장[37]하면서 로마로의 진군을 결정하였다. 이 때 카이사르의 주장의 요지는, 갈리아를 제패하여 지금 로마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 바로 카이사르인데 이렇게 국가의 영웅인 자신을 (애초에 불법인) 최종권고를 날려서 죽이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갈리아 전쟁에서 전격전과 기동전에 익숙해진 카이사르 군단은 원로원의 예상보다 빠르게 로마 본토로 강행군해 들어왔고, 맞설 병력의 소집이 미처 끝나지 않은 원로원과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보고 함께 그리스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군단을 편성한다.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는 모습은 결국 이들에게 정치적 불리함을 안겨주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집정관이 된다. 그 뒤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 곳의 원로원 측을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와 대결하기 위해 그리스로 건너간다. 그리스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를 숫적 열세의 상황에서 포위를 하다 맹렬한 반격을 받아 패배하고 만다. 폼페이우스는 군량 보급과 숫적 우위 그리고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전보다는 지구전을 펼치는게 유리한 게 명백했다. 그리하여 폼페이우스는 시종일관 지키는 전법으로 나갔는데 폼페이우스와 동행하던 원로원 의원들은 장기간의 군대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게다가 디라키움 직후에 논공행상하느라 서로 싸우는 촌극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조속히 결판을 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폼페이우스는 결국 파르살루스에서 회전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파르살루스에서는 폼페이우스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뻔한 전술을 썼는데 즉 카이사르 군과 자기 쪽 보병이 붙으면 자신의 기병으로 카이사르 군의 우익을 공격하겠다는 것이였다. 카이사르는 이것을 예측하여 폼페이우스 기병의 예상 이동로에 장창병을 잔뜩 포진시켜 이 기병을 격파하고 거꾸로 폼페이우스 보병의 좌익을 공격한다. 로마군이 장창을 썼다하니 뭔가 이상한데, 플루타르코스는 비교열전 카이사르전에서 원래 로마군이 돌격 직전에 날려댔던 필룸을 이 날 전투에서만큼은 날리지말고 집어서 폼페이우스의 기병대원들의 얼굴에 겨냥하도록 카이사르가 그의 좌익 병사들에게 명령했고, 필룸은 던지는 걸로 알고있던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는 자신들의 얼굴에 상처가 날까봐 면상을 가리고 도망쳤고 이게 기병대의 패주로 이어졌다고 서술해놓았다. 이들이 도망친 이유에 관해선 매우 수상하기는 하지만[38] 플루타르코스가 전투 당시에 생존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와전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39] 허나 앞서나온 장창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그의 서술에서 나온 필룸으로 변경되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어찌됐든, 여기서 폼페이우스군은 대패하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카이사르에게 붙기로 결심한 이집트 왕실에 살해당한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들어온다. 여기서 폼페이우스의 목을 건네받은 카이사르는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저서인 내전기에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죽음을 알았다'라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때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인지, 아니면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자의 죽음을 보고 슬퍼한 눈물인지는 해석이 분분하다. 이는 이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로마의 영웅'으로 추대하고 그를 기념하는 조각들을 대거 남긴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보통은 의도적으로 카이사르가 프로파간다를 위해 폼페이우스를 띄워주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나 하고 추정한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의 권력 싸움에 개입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상당히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데 여기서 프톨레마이오스 측의 반감을 사게 된다. 결국 이들은 카이사르를 공격하게 되었고 적지에서 소수 병력밖에 없었던 카이사르는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의 고생을 하지만 결국 원군이 들어오면서 승리한다.[40] 그 뒤 소아시아에서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말을 남긴 승리를 거두어 이 지역을 평정한 뒤 로마로 귀국하여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다. 그 뒤 북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원로원파 잔당을 소탕하러가 이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아와 유일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갈리아와 이집트 사건을 묶어 처음이자 마지막 개선식을 치렀다.

3.5 카이사르의 개혁

카이사르는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스키피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 잔당을 격파하고 로마로 귀환한다. 카이사르는 이때 방대한 개혁을 실시한다.

카이사르는 기존에 사용하는 구 로마력의 오차를 간파하여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에 한번씩 윤년을 두어 실질적으로 1년을 365.25일로 정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겨우 1년에 11분 14초였으며, 16세기에 그레고리력이 만들어질 때까지 1500년이 넘게 사용되었다. 다만, 율리우스력을 도입하면서 기존 달력의 오차를 수정하느라 기원전 46년은 445일이 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포룸을 건설하였으며,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쿠리아 율리아를 세웠다. 또 바실리카 율리아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파괴하여 도시를 확장했다. 교사와 의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다. 또한, 갈리아 키살피나의 속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주었고, 프로빈키아와 트리나크리아(시칠리아)의 속주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3.6 종신 독재관 시절

카이사르는 로마에 돌아오고 난 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되어 자신을 프린켑스 (로마 제 1 시민)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면서[41]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권력을 누리게 되고, 이 때부터 사실상 제정이 시작되었다.

그는 파르타아 원정을 추진하였는데 그가 원정을 떠나기 전 불과 사흘 전에 그는 원로원에서 암살당한다. 암살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 휘하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장교들이 대다수였었는데 암살의 주된 동기는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제정으로 가는 행보에 대해 심한 실망감으로 보여진다.

내전이 끝난 후에는 카이사르는 대놓고 왕처럼 행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조각상을 로마 왕들의 조각상 옆에 만들어 놓고 자기 얼굴을 새긴 주화를 발행한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문화 충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42] 그 외에도 사람들 앞에서 왕관을 쓰기까지 했다.[43] 외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왕관을 바쳤을 뿐이고 카이사르는 로마에는 왕이 필요없다면서 왕관을 되돌려주었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이벤트가 카이사르의 지시 혹은 묵인 없이 지지자들만의 독단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점은 바보가 아닌 이상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고, 카이사르가 왕정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를 경계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건은 불안감에 기름을 붓는 듯한 효과를 가져왔다. 브루투스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을 각오하고 카이사르를 암살한 것도 이런 점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이런 말년의 행보에 의문을 표하는 역사가들도 있는데 이러한 왕 행세는 암살이라는 결과가 보여주듯이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반면 실익은 전혀 없는 기분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이때까지는 항상 자기 절제가 철저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카이사르도 나이가 들었고 또 모든 정적을 물리친 후라 긴장이 풀렸을 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정권은 차지하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것은 권력을 한번이라도 잡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 중의 상식인데 카이사르 같은 인물이 몰랐을 턱이 없다. 당장 그 이전에 비슷한 독재를 했던 진정한 보수주의자 술라의 체제가 어떻게 붕괴되는가를 두 눈으로 본 카이사르다.[44] 물론, 그냥 안토니우스가 과잉 충성에 카이사르가 시키지도 생각하지도 않은 바보짓을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훗날 안토니우스가 한 뻘짓들을 생각해봐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정으로 가는 듯한 이러한 행보는 많은 사람들, 특히 그가 가장 신뢰하는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로마는 당시 원로원의 부패가 극에 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을 타도하는 것에 대해 지도층의 젊은 자제들의 지지는 대단했었다. 실제로 카이사르 밑에서 싸운 원로원급 젊은이 대다수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패한 원로원을 타도하자 나타난 게 왕정이나 다름없는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였고 젊은이들이 이것에 대한 실망감은 대단한 것이였다. 여기에 파르티아 원정 승리까지 더해지면? 카이사르 왕조의 출현이 머지 않았다고 여길 만도 했다.

  • 하지만 카이사르가 그간 보인 행보로 볼 때 과연 그가 암살되지 않고 살았다면 자식이나 친지에게 물려주는 전형적인 제정을 할 것인가는 모를 일이다. 일단 후계자로 지명했던 옥타비우스는 그의 친척이지만.

암살 뒤 소위 '공화파'와 1차로, 다음엔 카이사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안토니우스와 벌인 2차 내전의 최종 승리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로마의 제정은 그야말로 편법과 제도의 모순의 극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거듭해 맡아오던 집정관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호민관 특권[45]과 군단 지휘권만 원로원에게 얻어낸 다음 이것만을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주는 희한한 계승방식을 썼으며 대외적인 호칭으로는 프린켑스[46]라는 칭호를 썼다. 이는 공화정에 익숙하고 왕정에 불안감과 혐오감을 갖고 있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암살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나 직위는 없이 권리만을 애매하게 짜맞추는 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불안정한 자리였고, 이 때문에 혈연에 집착하면서 왕정과 다름없는 체제로 나아가게 된다.

결국 유일하게 남은 창시자의 계보(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정확히는 이미 몇 번이고 비틀린 상태의 마지막인 네로가 암살당하면서 이 제도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내전기를 맞게 된다. 최초의 제정 내전기에서 그 1년 사이에 죽은 황제만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세 명. 그 뒤로도 황제의 계보가 끊어질 때마다 내전의 위험이 항상 도사렸고 원로원의 주도력과 후임의 센스가 발휘되었던 5현제(네르바~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외에는 내전으로 번졌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된 이후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일개 대대장이었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황제가 되면서 결국 군인 황제 시대가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점차 문제가 쌓여가던 제국에서 정국의 극심한 변화는 로마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이는 로마 황제라는 직위가 다른 왕국들의 왕과는 달리 공식적인 지위가 아니었고,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일반 시민이었기 때문에 직위 자체가 매우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황제를 암살한 뒤 그 직위를 자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고 여차하면 군단 지휘권만 가지고 다른 권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할 수도 있었다. 내전기 때도 그런 식이었고, 3세기의 군인 황제 시대 때는 군단이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기네 사령관을 황제로 추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황제라는 직위가 존재하는 공직이었다면 이토록 쉽게 주장될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가 역임했던 독재관이라는 자리와 비교할 때 이 차이점은 명백하다. 독재관이라는 직위는 분명한 공직이며 이를 위해서는 집정관 선출처럼 켄투리아(민회)에서 선출되어야 했다. 독재관을 맡으려면 좋든 싫든 수도 로마로 가서 켄투리아에 참석해 투표를 해야 했다. 이것 자체로 정국 불안정은 많이 견제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형태였다면 훗날 로마에서 많이 보여지는 외지에 있는 군단이 제멋대로 자신의 군 사령관을 로마 전체의 최고 권력자로 추대하는 일은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즉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아우구수투스의 프린켑스의 형태가 아닌 카이사르의 종신 독재관의 형태였다면 황제를 추대하고 싶은 군대는 우선 로마를 손에 넣고 나서 켄투리아 민회를 장악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이러한 수순만으로도 황제의 난립은 예방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황제는 단지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을 가진 일반 시민의 신분이었으므로 군대가 제멋대로 이러한 특권을 주장하고 자신의 사령관을 추대하는 일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같이 희한한 형태의 독재를 고려하지 않은 채 죽어라 독재관, 집정관, 독재관 등등을 역임했던 것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엇이 로마의 새로운 정부 형태가 될 것인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채 죽어버렸고 이것은 위에서처럼 아주 모호한 형태의 아우구스투스식 원수정으로 귀결된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때 그는 사후의 대비를 거의 하지 않은 상태였다. 건강도 꽤 양호했기 때문에 아마 70까지는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양자로 옥타비우스를 지정하기는 하였으나 이것이 그의 권력을 물려줄 후계자로 지정한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는 어떠한 공직도 준 바 없으며, 만약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틀림없이 다른 왕들처럼 왕세자 교육이랍시고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공직을 맡겼을 테지만 그 공직은 모두 카이사르의 혈연과는 무관하며 능력 있는 청년들에게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왕관을 받은 다음 카이사르는 '왕관을 받았으나 거부하였다'는 비문을 새겨놓았는데 이를 본다면 '내 씨앗이 대대손손 로마를 통치해야 한다'라는 식의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애시당초 오랜 세월에 걸쳐 원정을 벌이면서 수많은 왕들이 나타나고 실패하는 것을 눈으로 본 인물이니 혈통의 한계 역시 정확하게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은 상당한 기량의 소유자였지만 희한할 정도로 '내 씨앗'에 집착[47]하였다. 물론 이는 인지상정이지만 나라를 통치하는 데 있어 혈통은 결코 100% 보장되는 능력이 아닌 데다 끊어지면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48]했고, 그나마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유능한 후계자인 티베리우스를 황제에 앉히는 등 최소한의 합리성이 있었지만[49] 그 이후의 황제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혈통이 끊어질 때마다 일어난 내전기와 3세기의 막장 군인황제 시대를 초래한 원수정이었다.

3.7 3월 15일

암살이 결행된 날짜인 3월 15일은 유명하다. 그가 파르티아 정복을 원로원에 공표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지만, 훗날의 문학적 창작력으로 여러 가지 의미[50]가 덧붙여졌다. 하지만 카이사르 한명이 없어진다고 수백년전의 공화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고, [51] 복고주의 세력(소위 공화파)은 이런 현실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낙관적으로 행동하다가 자멸했다. 훗날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을 세우면서 그들의 암살은 그 의미가 사라진다.

고대 로마에서는 날짜를 매달 초하루(Kalendae)와 이두스(Idus_를 기준으로, "무슨 달 초하루 며칠 뒤", "무슨 달 이두스 며칠 전" 하는 식으로 표시했다. 이 중 이두스(Idus)는 3, 5, 7, 10월에는 15일, 그 외의 달에는 13일을 말하며 카이사르가 살해된 3월 15일은 라틴어로 Idus Martii(3월의 이두스)가 된다. 영어로도 이를 번역하여 Ides of March(3월의 이데스)라는 표현이 존재하며, 이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3월 15일 아침,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파르티아 정복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원로원에 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고 그의 아내 역시 원로원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원로원으로 향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 들어가자 의원들은 모두 존경의 표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이 그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슬쩍 그의 뒤로 갔다. 곧 일당 중 한 명인 킴베르가 카이사르의 옷을 양 손으로 잡아당겼는데, 이것이 공격의 신호였다.

카스카가 맨 먼저 목을 찔렀으나 상처가 깊지 않았으므로 카이사르는 칼을 빼들어 저항할 수 있었다. 원래 있던 호위병력은 불과 며칠 전 해산시켰기 때문에 그는 혼자였고, 주변 사람들은 하도 놀란 나머지 카이사르를 돕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암살자들은 그에게서 칼을 빼앗은 후 카이사르를 빙 둘러싸고 마구 찔러댔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사타구니를 찔렀다.

사실 카이사르는 자신을 잘 방어하고 있었지만 브루투스가 단검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 체념한 듯 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지고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있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으로 밀어붙였다. 때문에 흉상은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많은 칼이 난무한 탓에 암살자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멋대로 구성한 카이사르 암살 직후의 이야기가 또 유명하다. 그의 작품 'Tragedy of Julius Caesar'에서는 암살파의 대표인 브루투스가 카이사르 암살의 당위성과 지지를 얻기 위해 시민들 앞에 나서서 긴 연설을 한다. 하지만 그의 이상은 카이사르에게 익숙해진 시민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했다(심지어 한 시민은 브루투스를 왕으로 만들자고 한다.).

이후 브루투스가 떠나자 원래 암살파들이 별 영향을 못 줄 것이라고 생각한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안토니우스가 나선다. 그는 브루투스의 연설에 동감을 표하는 듯 하다가 결국 카이사르를 찬양하는 충격적인 반전을 구사하며 시민들의 암살자들에 대한 분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안토니우스는 계속해서 카이사르에 대한 사람들의 추억과 감성을 자극하는 연설을 계속하여, 마침내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기에 이르른다.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 일당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성을 잃은 시민들은 '브루투스와 일당들을 끌어내 죽여라!'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브루투스와 암살자들은 급변한 상황에 놀라 버로우하고, 안토니우스는 권력을 잡는다(물론 훗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발린다.).

이 사건은 감정에 대한 호소가 논리적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사람에게 강하게 다가온다는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야말로 픽션이라는 사실과 셰익스피어는 왕권 사회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하도록 하자. 실제로는 안토니우스의 설은 그 존재가 불확실하며 카이사르의 죽음 직후 그는 집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장례식에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한 것은 사실이다.

4 사후의 카이사르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카이사르의 암살은 로마의 정국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일이 다르게 풀렸다면, 카이사르는 일개 반역자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살해한 암살파들은 정작 암살에 성공한 뒤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고, 오랫동안 카이사르와 싸워왔던 원로원의 파트리아키 그룹은 폼페이우스의 패배 이후로 거의 와해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아직 살아 있었던 키케로조차도 별다른 일은 하지 못했다.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범들과 그와 관련된 이들(키케로 포함)을 모조리 숙청하면서 로마의 정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들이 장악하게 된다.

그 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만들어내 로마 제정을 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신격화하였으며, 이로서 기독교를 도입할 때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대대로 신격화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로 황제들은 대대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았으며, 제정 말기에 이르게 되면 '카이사르'는 하나의 칭호가 되었다.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신격이 된 이후 그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한 조각상이 대량으로 만들어 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제정기반 확립을 위한 프로파간다였다.

로마에서는 신격화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카이사르 포룸이 세워졌는데, 카이사르 포룸은 왠지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5 그에 대한 평가

5.1 정치적 업적

사실상 내전기 이후로 황금에 질식당하던 공화정 로마를 종결시키고 제정으로의 길을 연 인물이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뉘는데, "공화정에 한니발과 피로스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모범으로 삼았던 독재자의 전형"이라는 평가와 "민중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현명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스스로 로마로 진군한 로마군을 이끌었던 것은 어찌보면 권력을 갈망하는 가장 로마인다운 행동이었던 셈. 다만 우리나라에선 로마인 이야기의 영향으로 무슨 엄청난, 이순신급 영웅으로만 통하는데 정작 서양에서는 그렇지 않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카이사르'라고 까면 '독재적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의미로도 통한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 시리즈의 팰퍼틴 황제는 카이사르를 모델로 묘사되었다고 조지 루카스가 인증했을 정도.

그러나, 당시의 광활한 로마 영토를 볼 때 당시의 포로 로마노에 모여 정치를 논하는 식의 민주정은 한계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지만, 결국 황제는 탄생한 점을 들 수 있다. 더군다나, 이미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등을 통해 평민계급과 원로원 계급의 골은 깊어져있었다. 즉, 강대한 카리스마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 점은 사라질 수 없고 장기적으로 로마를 잠식했을 것이다. 이 같은 점으로 볼 때, 개인의 야욕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시스템적인 한계점과 그 해결법 역시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5.2 군사적 업적: 기적의 역전 전술가

군사적 영웅으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업적은 상당히 특이하다. 역사상 대부분의 명장들은 알고 보면 전투 이전에 이미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승리를 거뒀는데, 카이사르는 오히려 정상적인 전투에서는 패배하고 곤경에 처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상황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예상 외로 승리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대표적으로 다음 전투들이 있다.

  • 파르살루스 전투 : 정석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펼친 폼페이우스 군을 상대로 하여, 기병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보조병으로 기병을 맞받아치는 변칙 전술로 승리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의 변칙 기술을 사용했었다는 것이 특기할만한 점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이 불후의 전술임에도 이를 그대로 답습했던 폼페이우스가 이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을 생각하면 카이사르의 변칙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의 열세(1:7의 비율)를 만회하기 위해서 기병을 뒤에 투석병을 매달고 뛰면서 잠시 정차후 투석, 다시 질주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견제하게 한 후 정예 중보병을 이용하여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섬멸한 것은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52] 이는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과 같은 선배와 달리 기병의 전력이 열세인 점에서 '정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긴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유효하며 훌륭한 변칙이었다.

주요 전투를 살펴보면 그는 정석적인 길을 가는 지휘관이 아니라 재치가 뛰어난 지휘관의 타입이었다. 바꿔 말하면 개인의 자질에 의존하는 천재적이며, 배우기 어려운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니발과는 달리 정석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는 타고난 장군이라기보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 타입에 가깝다.

다만 카이사르가 이렇게 독특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전장에 대한 통찰력과 병사들에 대한 장악력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를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그 휘하에서 종군했던 로마 군단병들 역시 그 수준이 상당했다. (물론 카이사르의 군단병의 수준은 수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을 치르면서 다져진 것이지 처음부터 뛰어난 병사들을 통솔했던 것은 아니다.) 이는 항상 수적으로 열세였던 카이사르가 연전 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그의 지휘관의 자질이 훌륭했음을 나타내준다. 예컨대 파로살로스 회전에서 그와 그의 병사들이 보여준 전략은 독창적이다 못해 잘 단련된 병사가 훌륭한 지휘관을 만나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때 당시 반대파의 지휘관이었던 폼페이우스는 수 년간 갈리아에서 생존한 카이사르의 베테랑 부대를 맞아 약 양 진영 간의 거리를 정석의 두 배쯤으로 늘린 후 휘하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즉 카이사르 측 병사가 싸우기도 전에 뛰다 지치라고). 그러자 카이사르의 병사는 절반쯤 뛰다가 상대편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는 그 술책을 알아채서는 중간에 잠깐 숨을 고른 후 다시 뛰었다...

카이사르가 전략가로서는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략가로서는 뛰어나지 않지만 돌발상황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고 보는 것이 그것이다.[53]

사례를 보아도 위의 두 전투도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있는데 일부러 찾아 들어간 것이다. 카이사르가 워낙에 전술가로써 능력이 뛰어나고 기회를 찾아내는데 탁월하다보니까 순간적인 판단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카이사르만 아니고 전술가로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경향인데 기회를 포착하고 밀어붙이는 성향상 위험한 작전을 선택하는 모험주의에 전술가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한방에 모든 것을 거는 대결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베르킨게토릭스폼페이우스를 상대해서 카이사르가 패배한 두 전투, 게르고비아 공격, 디라키움 포위전을 볼 때, 카이사르는 너무 공세적인 작전을 선택했고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전략적인 열세에서 강대한 적을 공격하는데, 상대방은 전략적 우세를 이용해서 카이사르의 병참을 끊으면서 자신은 병참선을 확보한 뒤에 요새화한 진지에 틀어박혀서 소모전을 펼친다. 당연히 결전을 벌이려는 카이사르는 군량 부족과 포위의 위협 때문에 장기전에서 불리해진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회전 이외의 전투 경험도 풍부하다지만 로마군의 장점은 조직력에서 나오고 방어전에서는 조직력과 전투력을 상쇄할 수 있다. 거기다 수적으로 밀리면서 꼭 일부 병력을 떼어놓아서 다른 쪽을 견제한다는 식의 작전을 구사한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에 자신을 가지니까 하는 것이지만 직접 전투를 회피하고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에 스스로 걸려들어가는 식의 전투를 벌임으로서 쓸데없이 패배하고 만다는 면도 있다.

다만 공세일변도 전술 때문에 위기를 자초하는 면이 강한만큼 상대방이 판짜기를 잘하고 방어를 잘해내면 휘둘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카이사르의 전략적 식견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정략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갈리아 전쟁 때는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게르만족과 대결상황에서 충분히 갈리아에 동맹군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도 갈리아가 통일되지 않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러다가 베르킨게토릭스라는 걸물이 나타나서 갈리아 전체의 동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고립되었다. 내전에서도 원래대로라면 북아프리카부터 차분하게 공략하려는 당초 계획이 무너지자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한 뒤에 가한 공세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전략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었고 항상 적지에서 혼자 싸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환경적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갈리아 전쟁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에 대군을 조직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니었고, 내전도 예상치 못한 싸움에 동족과 전쟁이라는 면에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불운이라면 카이사르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하고 소모전을 벌이려는 우수한 지휘관을 두 번이나 연달아 상대한 것이고 가장 큰 행운이라면 둘 다 소모전에서 승기를 타고 전투를 걸었다가 카이사르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리델 하트의 경우에는 파르살루스만 좀 봐줄만 하지 실제로는 잘 쳐봐야 부관형 지휘관이라며 카이사르를 매우 혹평한 바가 있으나 그건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빠심이 너무 폭주한 결과라서 객관적인 평가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김태권은 카이사르를 사악한 제국주의자, 도살자로 마구 폄하하고 물어뜯는데 역시나 김태권의 편협한 옥시덴탈리즘 관점이 폭주한 결과로 역덕들에겐 코웃음만 듣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카이사르의 완벽한 군공인 갈리아 전쟁을 이라크 전쟁에 빗대며 갈리아를 점령하는데 8년이 걸렸으니 실패한 것 운운을 하는데 그 뒤 수백년간 갈리아가 로마땅이었던 것은 잊은 모양이다. 게다가 길게 걸린 전쟁=실패한 전쟁이라니... 무슨 소릴까.

5.3 플레이보이

외모는 의외로 그다지 뛰어나진 않아서 나이가 먹어선 머리가 빠지자 대머리란 소리에 좀 민감했다고 한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카이사르가 개선식을 벌일때 에피소드로 당시 로마에서는 개선식에서 병사들이 희극적인 구호를 외치는 게 전통이는데 이런 전통은 개선장군이 너무 교만해지면 신들의 질투와 미움을 사게 될까 우려해서 일부러 신들 들으라고 개선장군의 체면을 깎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당당하게 대중 앞에 선 개선장군을 신나게 놀려먹음으로서 개선식 행사의 분위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부수 효과. 이는 개선식의 전통처럼 받아들였는데 카이사르의 개선식때 병사들이 선택한 구호는 밑에서 언급하는 동성애 스캔들 구호와 아래의 구호였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기시오.
대머리 난봉꾼이 지나간다오.
그대 마누라들이 카이사르에게 바친 돈은,
전부 갈리아 창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오.

이 말을 들은 카이사르는 동성애 구호는 전통대로 웃고 넘겼지만 이 대머리 구호는 "좀 심하지 않느냐" 나를 보고 난봉꾼이라고 했지? 그건 좋아. 사실이니까. 하지만 날 대머리라고 부르는 건 참을 수 없다!며 투덜댔다고. 야 거기 너, 너, 너 사형 군단병놈들 인성보소

하지만 로마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늘 어떻게 하면 멋지게 옷주름을 잡을 수 있을까를 연구했다. 심지어 암살당했을 때조차도 흉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죽지 않으려고 토가의 옷깃을 몸에 꽉 둘러쳐서 토가가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반듯이 누운 모습으로 단정하게 죽었다. 폼생폼사

갈리아 전기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장력도 대단하고 언변도 뛰어나서 아마도 말빨로 여자들을 후리고 다닌 듯하다는 평이 있다.

그는 대체적으로 인처모에정숙한 유부녀 취향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63년 카틸리나의 탄핵[54] 당시 원로원에서 있던 카이사르에게 왠 편지 한 통이 전해졌는데 카이사르가 편지를 읽자 카이사르 반대파인 소 카토가 갑자기 일어나 카이사르가 읽고있는 편지가 카틸리나 일파와 상호 모종 관계에 있다는 증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자신이 읽고 있던 편지는 연애 편지라면서 내용을 소 카토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편지는 소 카토의 배다른 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보낸 진짜 연애편지였다. 결국 헛고발+ 가족 연애사 공개로 소 카토는 체면을 두배로 구기게 되었다. 그리고 소 카토는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돌려주며 바람둥이 자식이라고 평했다. 그럼 소 카토는 시스콤? 참고로 그녀의 자식은 그 유명한 마르쿠스 브루투스다. 연애 편지와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이 때 카틸리나에 대한 여론이 지독히도 나빠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에 대해 '일단 재판을 하고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군대로 감시하자'라는 발언을 했다가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심지어 그의 자금 스폰서인 크라수스의 아내마저 넘어갔지만 크라수스는 계속 군자금 융통을 해주었다. 단순히 채권뿐 아니라 크라수스 본인이 카이사르의 매력에 빠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크라수스는 자기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를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시작했을 때 맡기기도 했는데 카이사르도 그를 '젊은 크라수스'라 부르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정치적 협력자에 대한 배려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유능한 청년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에 이은 제2 상속자로 지명했을 정도로 아꼈으나 암살범 중 하나였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도 갈리아 전쟁 당시 '젊은 브루투스'라고 불렀던 걸 미뤄보면 이 '젊은 크라수스'가 아버지가 시도한 파르티아 원정 때 죽지 않았다면 카이사르의 암살범 또는 상속자가 되었을지도.

이 외에도 장가를 여러 번 갔는데, 주로 정치적인 목적.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사실 당시 로마의 절대 다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연애 결혼은 단적으로 말해 19~20세기에 영미권에서 발생한 개념으로 봐도 좋다. 하긴,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오로지 사랑만으로 결혼을 했다. 상대가 유부녀라서 문제였지. 조강지처가 좋더라

카이사르가 여성들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들은 사후 신격화가 되면서 엄격하고 냉정한 성격인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싸그리 사라졌다. 사실 카이사르가 남긴 편지들은 '신적인 인물'이 작성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감정이 녹아들어 왕조의 실질적이고 정신적인 시조가 수많은 여자들과 그렇고 그런 관계였다는 기록이 남으면 얼마나 곤란하겠는가. 후손들에겐 대단히 아쉬운 일이다 카이사르가 남긴 예술을 볼 수가 없다니

한가지 특기할 점은, 크라수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카이사르는 바람둥이 노릇을 하면서도 여자 문제 때문에 중요한 인간관계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에서도 드러나는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연애를 즐기면서도 로마에서건 이집트에서건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고, 그러면서도 클레오파트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서 이집트에서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은 묵인했다. 즉 카이사르는 이집트의 여왕과의 관계를 이집트를 관리하는데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로마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적절하게 줄타기를 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서 아내와 이혼하고 로마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것과 대조적이다.

많은 여인들과 연애설을 뿌리고 다녔지만 정작 본인은 간절히 원하던 적자를 얻지 못했다. 유일하게 언급된 분명한 혈육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얻은 카이사리온뿐이지만 그는 절대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상 남남 취급이었고 그외에 여러 여인들에게 아들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카이사르 정도의 유쾌한 남자라면 이집트 여왕같이 특별한 예외사항이 아닌 이상에 서자라도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당당히 공개하고 다녔을 것인데 장년에 이르는 순간까지 끝내 아들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유일하게 얻은 딸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와 결혼 하여 아이를 낳던 중 일찍 요절해 버렸다. 이러니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 상심이 컸을 것이다. 명색이 로마 남자중에 최고라고 자부하는데 자식을 얻지 못하는 그 비통한 심정이 차마 말 못할 것이다.

비록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었지만 본인의 피를 이은 적자를 얻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오시와 비슷한 경우로 많은 부인을 맞이했지만 정작 본인의 남성적 기능의 부실함으로 인하여 자식을 얻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유일한 아들인 카이사리온은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참살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적통은 대가 끊겼다. 드라마 ROME에서는 카이사리온이 죽지 않고 무사히 탈출했다는 대체역사로 흘러가고 정작 해당 작품에서 카이사리온은 클레오파트라가 티투스 풀로를 이용해 임신한 걸로 암시된건 무시하자 PS2 게임 '아르고스의 전사'에서는 카이사리온의 죽음에 보복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가 악의 여왕으로 부활한다는 설정이다...

이래나 저래나 카이사르는 끝내 자식복이 없었고 그렇기에 미련없이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정통성을 다 몰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적으로 솔직한 심정이야 이집트의 카이사리온에게 뭔가 한몫 떼어주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랬다가는 자신이 구상한 로마 제국의 계획을 망칠 수 있기에 씁쓸한 심정으로 넘어갔을지도...

아무튼 플레이보이라는 것 때문인지, 사후에 신격화되어 세워진 '카이사르 신전'은 왠지 로마에서 연인들의 밀회 장소로 자주 쓰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사랑의 여신의 후손은 밀회의 수호신이 되었다.

5.3.1 플레이보이의 흑역사(?)

젊은 시절에, 동방의 소국 비티니아의 왕 니코메데스 4세와 '그쪽'으로 스캔들이 난 적이 있다. 이때의 일은 평생을 따라다녀서 "비티니아 왕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으며, 후에 갈리아로 부임하는 카이사르에게 반대파들이 "여자한텐 힘들거요"라며 디스를 걸기도 했다. 물론, 말빨쩌는 카이사르는 바로 "소아시아를 제패한 아마조네스도 여자였다오"라고 일축. "난 그냥 여자가 아니라 아마조네스요." 라고 받아쳤다는 얘기도 있다.고대 로마에서 동성애는 금기가 아니었지만, 로마 사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성인은 정복자의 역할을 자임했으므로, 시민권자가 동성 간의 성관계에서 '삽입당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으며 성인 남성이 동성에게 '먹히는' 것은 '정복당한 것'으로 인식되어 몹시 창피한 행위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런 역할의 동성애자임을 대놓고 드러냈다가 사람들의 경멸을 사고 결국에는 죽임을 당한 엘라가발루스같은 황제도 있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도 아프리카 나라 등에는 많이 남아 있다. 마침 당시 니코메데스 4세와 카이사르의 나이를 계산해 볼 때 카이사르가 '당하는' 입장일 가능성이 매우 커서 더더욱 놀림을 당했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니코메데스 4세는 죽은 뒤에 자신의 왕국을 로마에 유증하는 형태로 통째로 넘겨줬다. 마누라 친정에 전 재산 물려주는 통큰 남편. 이런 지경이라 후에 개선식 당시 군단병들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는 구호를 외쳐 카이사르가 부랴부랴 니코메데스와 아무 일도 없었노라고 공개 선언을 해야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걸 믿는 로마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니코메데스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
보라, 저 위풍당당한 카이사르의 개선식을.
그런데, 왜 니코메데스의 개선식은 하지 않는 거지? 너라면 할 수 있겠냐?

좀 더 설명하자면, 니코메데스 4세 시절에 비티니아에는 로마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그 이유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가 영토를 확장하며 비티니아를 위협하기도 했고 실제 전쟁을 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니코메데스 4세는 폰토스를 막기 위해 로마의 힘을 여러번 빌렸고, 이는 로마에 사실상 굴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어쨌든 폰토스의 미트라다테스는 영토 확장중 로마와 여러차례 충돌했고, 이를 '미트라다테스 전쟁' 이라고 한다. 미트라다테스 전쟁은 술라 , 루쿨루스, 폼페이우스를 참고하자.

이처럼 플레이보이와 동성애 수비자의 이미지가 합쳐져서 모든 여자의 남자, 모든 남자의 여자 라는 별명도 있었다. ('만인의 남편이자 만인의 아내'라는 식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참 뒤 '수' 속성을 강조한 전혀 상관없는 동네의 드라마에서 당해버렸다...

5.4 문화적인 업적

많은 문학작품(?)들이 사라지긴 했어도[55] 후세까지 전해지는 갈리아 전기[56]의 담백한 문체는 키케로의 화려한 문체와 함께 라틴어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다.[57] 일반적으로 라틴어 초급에서 배우는 주어+목적어+동사의 간결한 문구(라틴어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문장 내에서의 품사의 순서가 자유롭다.)는 갈리아 전기에서의 카이사르의 문체이다. 일단은 이탈리아에서는 초등, 중학생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에 익숙해진뒤, 키케로의 문체를 자유자재로 해석할 수 있게 되면 라틴어를 그럭저럭 한다고 자부해도 좋다.실제로 갈리아 전기 원문을 보면 단순하고 담백하다는 문체도 해석하기 어려울 때가 많지만.[58]

뛰어난 지성인이기도 해서[59] 로마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키케로와도 절친한 사이었고 내전이 일어났을 당시 그를 만나서 협력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집트를 방문해서 책력과 천문학등에 관심을 가졌고 나일강의 수원을 탐색하기도 했었다고(물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후 이런 관심은 당시 태음력을 사용하던 로마에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게 해서 오늘날의 달력체계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책들의 제책 방식 또한 카이사르가 고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로마인들은 팔랑팔랑 책장 넘기는 게 그 전까지 쓰던 두루마리를 펼치는 것에 비해 위엄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패션은 실용을 앞선다?)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고, 파피루스 대신 뻣뻣한 양피지를 쓰던 중세 수도사들이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제책 방식으로 이어져오게 된다.

5.5 기타

유럽의 위대한 사나이같은 투표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알렉산더)한테 밀리는 경향을 보인다.

"위대한 결정은 다만 수행될 뿐이다. 심사숙고하는 게 아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 등등 굴지의 명대사들도 다 이 사람의 명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유명한 대사로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60]도 있는데,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그렇다면 카이사르, 몰락하라!(then fall, Caesar!)라는 부분이 덧붙여진다.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중에 이때 "내 아들아 너마저도냐"라고 쓴 것에서 영감을 받은듯하다. 다만 많은 명언의 경우 후대의 창작이란 설이 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암살자들에게 포위당한 채로 몸을 20군데가 넘게 찔려 순식간에 '윽윽윽...' 하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는 게 정사에 가까우며, 드라마 ROME에서도 그쪽에 가깝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20군데가 넘는 상처 중 실제로 치명타를 입힌 건 네 곳에 불과하다고 하니 암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도 짐작할 수 있으며, 암살자들은 동료들을 찌르기도 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실제로 다가올 로마 제국 혼돈의 전조이기도 한데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면 저절로 카이사르파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해 애초에 암살 이후의 정국 장악계획은 거의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정말 멍청한 일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곳은 폼페이우스가 생전 건축했던 폼페이우스 포룸이었다. 그날은 그곳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렸기 때문. 죽은 폼페이우스가 산 카이사르를 잡았다

그밖에도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라는 곱씹어 볼 만한 말도 남겼다.

참고로, 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본인을 칭할 때 '카이사르는 XXX 했다'라는 식으로 썼다. 모에 캐릭터?? 그랬기 때문에 후반, 그러니까 암살 이후에 쓰여진 부분에서는 카이사르 본인이 아니라 부관(심지어 그 전장에 있지도 않았다)이 쓴 것이라서 원문을 보면 사실상 다른 문장으로 보일 정도이다.

카이사르는 최초로 제왕 절개로 태어났다는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수술을 제왕 절개(帝王切開, Caesarean section)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물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실은 '절개'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의 철자가 카이사르의 이름과 비슷해 영어로 번역될 때 와전된 것이 유래다.[61]

유럽 역사상 최초의 황제였으나 그는 단 한번도 황제로 불린적도 없고 황제로 추대되거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 또한 없었다. 상술했듯 로마의 근간 그 자체인 공화정을 흔듦으로서 로마 시민들의 반감을 사는 불안한 통치를 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그랬던 것.[62] 따라서 그는 자신의 원래 군인으로서의 직위였던 '임페라토르(Imperator - 라틴어로 최고사령관)'라고 불리웠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Emperor, 즉 황제를 일컫는 단어가 되었다.

이 외에도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황제라는 단어 대신 그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네로 카이사르', 즉 '카이사르의 자리를 물려받은자 네로'라는 식이다. 이 문화가 이후 후대 유럽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는데, 서로마제국의 가톨릭을 이어받은 신성 로마 제국이 위치한 독일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독일어로 읽어 '카이저'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고, 동로마제국의 정교회를 이어받은 제정 러시아가 위치한 러시아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러시아어로 읽어 '차르'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폴란드 지방에서는 카이사르를 폴란드어로 읽어 '체사르쉬(cesarz)'로 만들어 황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했다.

유럽권의 역사상 첫 황제답게 여러모로 서구권의 '황제'의 대명사가 된 셈.

그의 생일이 포함된 달인 7월(July)의 명칭은 원래 Quintilis 였는데,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율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변경되었다. 더불어 8월(August)은 Sextilis 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서 바꾸었다. [63] 참고로, 이 때문에, 달력이 두달씩 밀렸다고 잘못 알려 지기도 하였다. 율리우스력 이전에는 10개월짜리 달력 밖에 없었는데, 겨울에 해당하는 2개달이 달력에 추가되고, 카이사르가 율리우스력을 확정하면서 이미 2달씩 밀린 것이다. 태양력#s-1.2 참조.

종종 카이사르를 '서양의 조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선식하면서 병사들이 외친 구호로 보아, 카이사르가 대머리 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어느정도 수준의 탈모 였을까?
1980년대 미국의 학술단체에서 연구한 적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카이사르의 탈모는 심각한 수준 이었다고 한다. 귀밑머리 조금있는 정도... 실제로 카이사르는 탈모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있었을때는 이집트의 비법이랍시고 악어똥을 발랐다고 한다. 그런데 이집트의 비법이라는게 통할리가... 당대의 멋쟁이라 불렸던 카이사르는 대머리란 사실 때문에 늘 마음 고생했다. 그래서 양 귀밑머리를 길게 길러 정수리 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본인의 대머리를 가렸다. 양 귀밑머리를 정수리에서 크로스 시키면 마치 닭벼슬 처럼 붕 뜨게 된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제관이 된 후 월계관을 쓰고 다녔는데, 이 머리스타일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서양에서는 이런 머리스타일을 카이사르컷 혹은 시저컷이라 부른다.

6 카이사르가 치른 전투들

7 대중매체

'일개 장군이었지만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승승장구하였고, 결국엔 부패한 지도층을 몰아내고 여러 비극적인 일을 거쳐가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제국의 유일한 지도자 자격에 올랐다'는 역사적 사건들 때문인지 로마 제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사실 이렇게 부분들만 떼어 놓고 보면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 설정이다. 때문에 카이사르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많다.

  • 1999년작 프랭크 로덤 감독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선 제4대 제임스 본드였던 티모시 달튼이 카이사르 역을 맡아서 연기했다. 난봉꾼 카이사르가 나중에 영국인 난봉꾼 첩보원으로 환생한 셈...
  • 문명 시리즈에서는 전통적인 로마 제국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2014년 공개작인 문명 온라인에서도 여전히 로마의 지도자로 나오는데, 이마의 한 줄 주름과 쌍턱이 표시되고 갑빠 비율이 과장되게 데포르메되었다. 전형적인 양키 스타일의 마초남성 이미지.
시저의 군단의 지도자의 이름이 당연히 시저이다. 리즈 시절엔 나름 통솔력과 능력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는 짓은 죄다 악인에 가까운 인물. 사실 모티브라기보다는 작중 이 양반이 카이사르와 로마 군인들의 코스튬 플레이를 하는 것일 뿐이다.
제국군측 지도자인 툴리우스. 이 쪽은 카이사르가 캐릭터 모티브인 경우. 남쪽의 수도를 떠나 거친 북방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고, 얼핏 단순 무식해보이지만 나름대로 카리스마와 지도력도 있는 등[64] 위 항목에 비해 좀 더 제대로 된 카이사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 미국 드라마(정확히는 미, 영 합작) ROME에서 시즌 1의 주연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그야말로 간지폭풍 캐릭터이지만, 멋진 모습 만큼이나 사악하고 능구렁이 같은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드라마가 역사 고증을 따르면서 어느 정도 재창조를 하고 있기에 간질 증세나[65] [66] 최후의 순간에 실제 역사 고증대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는 처절한 죽음을 맞이하며, 이는 심지어 그를 죽인 브루투스에게도 트라우마가 된다. 배우는 섬 오브 올 피어스에서 카리스마 쩌는 러시아 대통령 역으로 나왔던 키어런 하인즈.
  • 미드 스파르타쿠스에서도 시즌 3부터 등장. 진짜 카이사르는 칠왕국의 장벽 너머 야만족들을 지휘하고 있고 뜬금포 없이 여기서는 어설프게 토르 비슷한 외모에 다소 마초적인 성격의 캐릭터다. 전쟁 후 재산이 바닥난 시저를 크라수스가 돈을 대주는 것을 조건으로 스파르타쿠스 정벌에 참전한다. 크라수스의 아들과 지휘권을 두고 갈등을 빚으며 작중에선 대부분 크라수스 부자에게 놀아나는 성향이 좀 강하다. 게다가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노예인척 위장 잠입(!)까지 했다. 이후 흑화된 크라수스의 아들과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8회에서는 강간까지 당했다. 덕분에 디시인사이드 기타 미국 드라마 갤러리는 시저X장으로 도배되다시피했고 시저의 이미지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작중 시저의 뚜렷한 캐릭터성이 없었다. 일단 스파르타쿠스 진영에서나 크라수스와의 갈등에서나 권모술수에 굉장히 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반대로 전략에 있어서는 다소 공격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런 시저를 크라수스가 지략으로 풀어나가고 폼페이우스가 어부지리로 공을 가로채가자 화가 난 시저에게 크라수스가 후의 삼두정치를 예상하고 시저를 달래는 등 애초에 크라수스의 부하로 참전한 것이라 무언가 크라수스보다 한 수 아래의 인물로 묘사되며 크라수스보다는 크라수스의 아들과 머리싸움을 하는 것이 특징.
  •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가끔 로마 군인 코스튬이나 로마인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쇼를 하는 걸 볼 수 있는데, 베가스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호텔 중 하나가 바로 '시저스 팰레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을 땄기 때문. 때문에 베가스가 배경인 영상물에서도 로마 관련이나 시저가 언급되곤 한다. 패미콤, 슈퍼패미콤, 메가드라이브로 caesars palace라는 게임이 있다. 타이틀 스크린을 보면 저 시저스 팰레스 호텔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게임 내용은... 카지노이다. 설명 끝.
  • 영국의 BBC에서 제작한 6부작 다큐멘터리 로마 제국의 탄생과 멸망에서도 등장한다. EBS 방영 기준으로는 2화이며, 국내판 성우는 홍시호. 자존심 세고 야심 만만하며 카리스마가 넘치는 카이사르의 모습이 제대로 묘사됐다. 원판 배우는 숀 퍼트위.[67] (영화 이퀼리브리엄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 감정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영상을 통해 얼굴이 나온다)
  1. 이후 르네상스시대의 인물인 체자레 보르지아의 이름이 여기서 나왔고, 스펠링도 똑같으나 각각 시저와 체자레로 다르게 불리운다.
  2. 고대 로마의 초기 알파벳 체계는 에트루리아에서 전해졌는데, 그 때문에 초기 로마 알파벳에는 G가 없다.(J와 U도 나중에 생긴 것) 추후에 G가 들어갔지만 인명을 표기할 때는 초기의 용법에 따라 CAIVS, CNAEUS 등으로 표기한다. 그래서 약칭식 카이사르의 이름은 C.I.CAESAR 이런 식으로 써져 있다.
  3. 카이사르의 생년이나 생일에 대한 논란이 있다. 생년에 대한 논란은 영문판 위키피디아를 참고바람.
  4. 4두정치 시기에는 정제(아우구스투스) 다음의 부제를 뜻하게 되었고, 동로마 제국 시기에는 차기 황제를 공동 황제의 지위로 올리면서 이 칭호를 부여하였다. 콤네노스 왕조 시기에 이르면 세바스토크라토르, 데스포테스 같은 다른 칭호들이 등장하면서 지위가 조금 격하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독일 제 2제국의 카이저, 제정 러시아의 차르정제의 칭호를 카이사르에서 따오게 된다.
  5. 여자들 사이의 평가가 좋았다는 점에서 카사노바는 마이너 카피...
  6.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결국 황제가 되지 못했다. 결국은 '황제'가 되었으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부분, 그의 사후의 내전에서 로마를 평정한 아우구스투스를 초대 황제로 본다. 심영과 똑같다.
  7. 당시 로마제국은 '레스 푸블리카 - 공화국'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많은 속주들을 거느리고 군사적으로 위압하는 '임페리움 - 제국'이기도 했다.
  8. 영화다크 나이트》에서 하비 덴트와 레이첼이 대화를 나눌 때, "영웅에서 악으로 추락하는 인물(다크 나이트)"로 곧장 지목된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다. 서양권의 평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
  9. 고전 라틴어 시기의 대표적인 저술가에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들어간다.
  10. 좀 더 정확하게는 까이싸르 비슷하게 발음한다.
  11. 라틴어는 외래어 표기법이 없고, 국립국어원에서 사용하는 관행적인 표기 원칙이 있긴 한데 정식으로 규정된 적은 없다. 관행적 표기는 고전 라틴어 발음에 가깝기는 하지만 고전 라틴어보다는 현재 가톨릭교에서 쓰는 교회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것도 있다. 예를 들면 V의 발음은 교회 라틴어 발음에 가깝게 ㅂ으로 적는데, 고전 라틴어 발음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12. 조금 더 읽어보면 알겠지만 반박도 있다. 단지 당시에 카이사르 어원이 카르타고어 카이사이라는 '썰'이 퍼져 있었던 것.
  13.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에서도, 시빌라 예언으로 등장하는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들의 운명에 대한 시에서 황제들을 은유해 '털북숭이'라고 부르고 있다.
  14. 즉 어느 가문에서 파란 눈을 가진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어느 가문의 파란 눈라고 부르다가 그 아이의 후손들 구분을 위해 어느 가문의 파란 눈 분파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15.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술라도 엄청난 인물이다. 또한 술라는 어린 나이의 카이사르를 알아봤다는 일화도 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카이사르를 살려달라는 탄원을 듣고서는 "그대들은 왜 모르는가... 이 젊은이의 마음 속에는 마리우스가 수백 명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말을 한다. 사실 카이사르를 띄우기 위해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16. 탄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로마에서 존경받는 신분이던 '여사제'들도 끼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외모와는 상관없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모양.
  17. 서방 세계 대부분을 지배하던 독재자에게 노!라고 외치고 튄 것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18.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사제직은 시민 생활을 하는 데에 아무 지장도 없다는 소리를 로마인 이야기에 늘어놓고 있지만 그건 정말 무지한 소리다.
  19. 참고로 이 시민관은 아무나 받는게 아니다. 전장에서 전우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 도움받은 전우가 직접 만들어 증정하는 관. 이걸 받는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의 자랑거리가 된다.
  20. 폰토스의 왕 미트라다테스 6세가 비티니아 증여에 태클을 걸며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었다. 미트라다테스 전쟁은 술라 , 루쿨루스, 폼페이우스를 참고하자.
  21. 콜린 매컬로의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카이사르가 이 소문을 종식시키기 위해 바람둥이가 되었다는 설을 펴고 있다두 마리 토끼(...)
  22. 시민들 이여! 마누라서방를 숨겨라! 대머리난봉꾼이 나가신다!
  23. 키케로도 이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적이 있다.
  24. 몸값이 비싸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획에서 그랬을 것이라는 해석이 뒤따른다.
  25.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서(?) 교수형에 먼저 처한 다음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만...십자가형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이 형벌은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다.
  26. 다만 사람들이 술라에게 그를 살려주라고 탄원했을 때, 술라는 결국 탄원을 수락하면서도 "그의 안에는 마리우스가 수백 명은 들어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술라가 그의 어떤 면을 보고 그런 평가를 했는지는 불명.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했던가
  27. 다만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을 자기 재산으로 처리해버려 빚이 엄청났다. 애초에 패션에 관심이 많고 수집욕도 있어서 돈을 펑펑 쓴 데다가 국가 단위의 행사를 개인 돈으로 치렀으니 빚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주 통치를 하러 떠날 때 빚쟁이들이 돈을 떼어먹힐까봐 못가게 막기까지 했다. 결국은 대부호 크라수스가 보증해서 겨우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최대 채권자가 바로 이 크라수스. 이 엄청난 빚도 카이사르가 탕아 정도로 취급되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28. 소규모 개선식. 나중에 갈리아 정벌과 이집트 정복(실은 카이사르의 내전의 종식)으로 대개선식의 숙원을 풀었다.
  29. 개선식은 개인에게 비할 데 없는 엄청난 영예였다.
  30. 보수파로서 술라에 협력한 후 반대파 자산 매입 등으로 엄청난 거부가 되었으나, 화재진화를 막아가며 건물을 인수하는 등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고위직 선출 선거에서 당선되지 못했다. 군공도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정도로 폼페이우스에 비교가 되지 않았다.
  31. 후의 2차 삼두정치와 다르게 첫 삼두정치는 비밀리에 결성된 것이었다.
  32. 라틴어로 옛 스위스 지방 사람을 가리키는 말. 현재 스위스에는 독일어, 프랑스어권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어느 한쪽 언어만으로 국명을 지정할 수가 없어서 중립적으로 라틴어명을 사용하다 보니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단어이다.
  33. 실제로 카이사르는 그의 저서에서 살육했다라고 언급한다.
  34.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숫적으로 우위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카이사르의 전력을 앝잡아 본 것이었다면 애초에 왜 청야전술을 썼던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그가 카이사르를 게르고비아에서 패배시킨 것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군사적 재능이 상당히 높이 평가되는 게 일반적이나 이러한 판단 미스를 하는 것을 미루어 본다면 이는 과대평가일 가능성이 높다.
  35. 사실 로마 군단병의 무장 수준은 중세 시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물론 플레이트 갑주까지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완전무장은 주로 기사계급이나 할 수 있었고 일개 병졸들이 그 정도의 갑주를 갖추는 것은 드물었다.
  36. 애초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술라의 반란 때도 자비로 군사를 모아 함께 했던 보수파였다.
  37.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일원으로서 이전부터 꾸준히, 자문기관에 불과한 원로원이 자기네 정적을 처벌할 목적으로 발동하는 최종권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38. 파르살루스 전투 이전 디라키움에서의 포위상황에서 폼페이우스가 바다를 통해 식량은 공급받았지만, 말들이 먹을 건초를 보급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말들이 비실비실해서 패퇴했다는 설도 있다.
  39.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고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필두로 수많은 저서들도 이러한 오류들이 있다.
  40. 이때 기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실되었는데, 도서관은 이후 클레오파트라가 페르가몬 등에서 책을 가져오는 등의 노력과 강탈을 통해 다시 채워진다.
  41. 카이사르는 자신을 황제라고 부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물론, 그의 정치적인 위치는 사실상 절대권력을 지닌 황제나 다름없었다.
  42. 결국, 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 때문에 예수채찍을 들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는데, 너희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라고 일갈하면서 종교적으로 부패한 무리들을 쫒아내며 분노하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자세한 일은 예수의 성전 정화 항목을 참고하자.
  43. 대중 앞에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쳤는데 이에 대해 카이사르가 야심을 드러내고 여론을 살피려 했다는 견해와 왕관을 거부하는 제스처를 통해 대중의 의혹을 불식시키려 했다는 견해가 엇갈린다.
  44. 이 때문에 심지어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에 손상을 입었을거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기생충의 서식지로 가장 유력한 곳이 이집트이고 내전 막바지에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으므로 시기적으로는 대충 들어맞는다. 카이사르의 마지막 전투인,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과 싸운 문다 전투에서 과거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히 지지부진하며 고전한 모습을 보인 것도 뇌기능 손상설을 뒷받침한다.
  45. 신체불가침권(즉, 사형당하지 않을 권리)과 민회를 통한 법률 제정권, 그리고 원로원 의결 거부권.
  46. 제 1시민. 쉽게 말해 로마 시민 중 존잘러란 뜻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이렇게 불렸었다.
  47. 자기 대신 군사 활동을 전담하던 친구 아그리파에게 까지 줘가면서 혈통을 이으려고 했다.
  48. 그러나 위에 이미 서술되어 있다시피, 그 자신이 이미 불확실한 상태에서 권력 투쟁에 뛰어든 데다 모호하기 짝이 없는 최고권력자 지위를 설정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혈통보다 확실한 정통성 확립수단은 없었다. 어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49. 다만 티베리우스 의 뒤는 자신의 후손 과 혈연관계 가 있는 인물(게르마니쿠스)에게 돌아가도록 결국 꼬이게 되기는 했지만 조치를 했다.
  50. 어떤 노인이 나타나 3월 보름을 조심해라!라고 했다라든지, 그 전날 파티에서 누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선호하냐고 물었더니 갑작스러운 죽음(흠좀무)이라고 했다든지, 암살된 당일 아내가 예지몽을 꾸고 극구 말렸는데 갔다던지. 이 모든 것의 결정판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다. 물론, 그가 숙적인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서양에서는 3월15일은 불길한 날로 여겨진다.
  51. 오히려 왕정과 공화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구속구 역할을 하던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공화정의 몰락이 가속화됐다고 보는게 맞다. 실제로 원로원에게 돌아온 것은 마리우스 이후의 대숙청이었다.
  52.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전부 귀족출신이라 얼굴에 돌을 던지자 얼굴 안다치려고 피해서 와해되었다는 왜곡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53. 대표적인 예가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다. 하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롬멜과 자신의 대결로 미화하고, 패튼의 이름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마켓가든 작전마저도 억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신뢰도가 좀 떨어진다. 어쨌든 몽고메리는 철저한 계획이 아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전후 서술과정을 보면, 감히 브리튼을 침공한 괘씸죄로 카이사르를 깎아내리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든다.
  54. 집정관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원로원 의원들을 살해하고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가 있었다. 이 때 당시 집정관인 키케로가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를 탄핵하며 한 연설문인 '카틸리나 탄핵'은 라틴어를 공부할 때 꼭 읽어야 하는 명문이다. 이후 키케로는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처벌해야 한다며 재판없이 카틸리나를 처형했다.
  55. 아우구스투스가 신격화를 위해 갈리아 전기와 내전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을 소각했기 때문.
  56. 카이사르 본인은 7권까지 썼고 마무리는 그의 부관이 8년째 뒷마무리 과정을 쓰면서 완성시켰다.
  57. 사실 카이사르의 작품은 입문자가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무리 담백한 문체라고는 해도 카이사르가 저술활동을 한 고전 라틴 시기는 라틴어가 고도로 정형화되어 확실히 자리를 잡은 시기였기 때문에 문장의 구조 등이 매우 복잡하다.
  58. 갈리아 전기의 문체를 쉽다고 느낄 수 있을 정도면 정말로 라틴어 공력이 쌓인 것이다. 키케로 저작까지 갈 것도 없다. 키케로 저작을 쭉쭉 읽을 수 있다면 아마추어 레벨은 진작에 지났다.
  59. 귀족 가문이라고는 하나 태어났을 당시엔 평민과 별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 또한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여러 문학작품을 저술하는 등 의외로 학구파적인 면모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장년기에 대단한 행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릴적부터 쌓아온 학문적인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0. 영어로 하면 even you, Brutus이다. 이걸 피하기 위해 브로콜리 너마저는 영어 명칭을 brocoli, you too? 라고 했다는 후문
  61. 이 시기 제왕 절개 수술은 마취 따위 없이 말 그대로 생살을 가르는 수술이었으며 그에 따른 고통과 출혈량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산모의 죽음을 의미했으며, 산모가 가망이 없거나 사망했을 때 아이라도 살리고자 시행했던 말그대로 응급 수술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이 이후에도 역사상에 등장하므로, 이는 말 그대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아니면 맨정신으로 그 고통을 버텨냈거나
  62. 이는 그의 뒤를 이은 양자 아우구스티누스도 마찬가지라서 자신을 1등 시민(Princeps - 훗날 프린스의 어원이 된다), 즉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군대 등 로마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힘을 지녔으나 어쨌건 시민'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63. 후대의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의 이름을 넣어 월의 이름 바꾸려고 시도하였으나, 결국 끝까지 살아남은 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뿐이다.
  64. 사실 그놈의 알두인이 방해해서 물거품이 됐을뿐이지 울프릭을 진작에 잡아들여서 처형하기 일보직전까지 간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능력있는편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65. 이때 카이사르의 하인과 아우구스투스가 급히 그를 숨겨서 간질이 있다는 것을 숨기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간질이 있는 것이 알려지면 로마 시민들이 그의 리더쉽에 의문을 품을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어린 미청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방으로 사라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후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난다(!)
  66. 사실 카이사르의 간질설은 셰익스피어의 저술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실제 사료로 남아있는 것은 100년 이상 뒤인 오현제 시절에 쓰여진 플루타르코스의 저술이고 동시대의 사료는 없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플루타르코스의 저서가 옳다고 해도 그걸 바탕으로 의사들이 검토한 결과 카이사르의 간질을 부정한다. 대개는 가벼운 뇌졸증이나 저혈당증의 증세에 더 가깝다고 한다. 출처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간질설을 거의 부정하고 있다. 참고로, 고대 유럽에는 간질이 일종의 신성(神性)을 갖고 있는 자의 증상이라고 여겨져 사후에 신격화된 카이사르의 간질설이 퍼졌다는 말도 있다.
  67. 3대 닥터로 유명한 존 퍼트위의 손자이며 배우 겸 성우로써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