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이 노부유키

역대 소니 CEO
타몬 마에다(1946~1951)이부카 마사루(1951~1976)모리타 아키오(1976~1994)오가 노리오(1982~1995)
이데이 노부유키(1995~2005)하워드 스트링거(2005~2012)히라이 카즈오(2012~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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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井伸之(1937, 11. 22 ~ )

"디지털 시대에 성장하고 디지털 기술에 눈을 반짝이는 디지털 드림 키즈가 미래의 우리의 고객이다. 그들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눈을 빛내 디지털 드림 키즈가 되어야 한다."(1995년 소니 제 2 제너레이션 창업 연설에서)

휼륭한 아이디어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으나 이것을 제대로 실천시키지 못해 소니의 추락을 가져온 비운의 CEO

일본의 기업인이자 전 소니 CEO이자 삼성전자 임원. 소니의 공동창업자인 이부카 마사루의 사위이기도 하다.

1 개요


2005년 소니의 이사진하고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데이 CEO며 가운데는 당시 새롭게 취임하는 스트링거 CEO다.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추바치 료지 사장.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아버지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였으며 이데이 노부유키도 1960년 3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다. 후에 와세다대학에서 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1950년대 소니의 초창기 시절부터 인턴으로 활동했으며 6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니에 입사한다. 제네바국제연구대학원에서 유학을 하면서 소니 유럽에서 9년동안 근무하여 세계적인 감각을 익히고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하게 된다. 국제적인 감각과 탁월한 영업능력이 인정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하며, 소니 오디오 사업부문 부장 및 홈비디오 사업부문 부사장직을 거친 후 1989년 소니의 이사로 선정된다. 이후 전무 이사, 이후 1990년대부터 광고 선전분야 본부장도 추가로 역임하여 소니의 이미지에도 크게 기여한다. 1994년에는 소니의 상무이사가 되었으며 1995년 14명의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소니의 사장으로 선정된다. 원래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는 회사 경영에 물러나면서 엔지니어 출신에 이공계쪽 사람을 채용하라고 말했고 회사 내부에서도 엔지니어 출신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이공계 차기 사장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스캔들에 휩싸이고 전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가 이데이가 제출한 3개의 보고서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이데이는 영업분야(인문)출신이지만 기술에 밝다" 라고 추천해서 이데이가 사장이 되었다. 사장으로 선임된후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을 발표하며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디지털 드림키즈 전략은 전세게 IT비즈니스 맨에게 귀감이 되어서 1997년 비즈니스 위크지에서 세계 최고의 사업가로도 선정되기도 한다. 1995년 부채로 허덕이던 소니를 여러 혁신을 통해 1998년에 역대 최고의 매출을 올리며 일본 산업계에 놀라움을 주었으며 동일 전자업계에 자극을 주었다. 2000년 정식으로 소니의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2001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디지털 드림 키즈의 핵심인 Ubiquitous Value Network (유비쿼터스 밸류 네트워크)를 발표했는데 이전략은 다가오는 브로드밴드 네트워킹을 맞아 소니의 기기와 컨텐츠를 네트워크에 연결하여 언제 어디서든 연결한다는 뜻이다. 이는 애플스티브 잡스의 디지털 허브 전략과 함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전략으로 평가받으나 애플과 다르게 소니의 이데이 CEO는 그 계획을 정확히 실행하지는 못한다. 금융사업을 확대하고 인터넷 사업과 같은 미래 네트워크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으나 소니가 가지고 있었던 장점인 IT기술을 접목시키지는 못했고, 또한 각 사업부들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연결시키려고 했으나 구체성이 결여되면서 각 사업부가 따로 노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사일로 현상을 초래하여 소니의 사업부끼리 팀킬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이데이 CEO를 옹호하는 다른 시각에서는 이전에 오가 노리오 CEO때 무리한 투자로 인한 부채로 인하여 이데이의 그림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스티브 잡스도 애플에 복귀했을때 많은 부채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변명에 불과하다.
이데이는 다가오는 모바일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01년 에릭슨과 합작으로 모바일 사업을 진행하지만 여기서도 에릭슨과의 의견차이와 계획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에릭슨의 지분을 인수한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않아서 모바일 사업이 소니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결국 이데이 CEO는 미래를 내다보는 좋은 전략과 아이디어가 있었으나 가지고 있는 역량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여기 저기 문어발 식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소니의 추락의 원인을 가져온 CEO로 평가받고 있다. 이데이는 2005년 부진의 책임을 지고 최고 경영자의 자리를 하워드 스트링거에게 물려주게 된다. 하워드 스트링거는 더욱 소니의 몰락을 가속화 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이데이는 2007년 소니의 최고 고문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소니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며 2012년에는 최고 자문위원회 의장에서도 퇴임하여 이제 소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현재 2006년 자신이 설립한 퀀텀 리프 코퍼레이션의 대표로 있으면서 IT분야 차세대 젊은 지도자를 육성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레노버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일본 대전환"과 "일본 진화론"등이 있다.

2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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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이 CEO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큐리오 로봇.

이데이 노부유키 CEO의 경력과 성과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소개한 영상.

이데이 CEO가 취임할 당시 소니는 아날로그 시대의 최고의 전자 업체였다. 소니의 트리니트론과 워크맨은 세계 시장을 재패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이데이 CEO는 다가오는 시대에 디지털 기술이 가전과 오락 산업을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1995년 2000여명 소니의 간부들이 모인 앞에서 이데이 CEO는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발표한다. 디지털 드림 키즈는 디지털 시대에서 자라고 디지털 기술에 친숙한 신세대를 뜻하며 그들의 꿈을 만족시킬 독창적이고 재치있는 상품을 만들어 나가자고 이데이 CEO는 주장했다. 이데이 CEO는 3단계 전략을 통해 디지털 드림 키즈를 구체화했는데 바로 1단계 Connect 2단계 Synergy 3단계 Hub였다. 1단계 Connect는 콘텐츠, 유통, 기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소비자들을 쉽고 편리하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1995년 이데이 CEO는 소니의 영화산업과 음반산업의 방대한 콘텐츠를 디지털로 변환시켜 인터넷과 케이블 tv로 연결하였고 별도의 인터넷 접속회사인 소네트도 설립하였다. 또한 위성 TV인 스카이 퍼펙트 서비스도 실시하고 애플아이튠즈 스토어 보다 먼저 프레스 플레이라는 온라인 음악 상점도 개설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에버퀘스트등을 개발하고 온라인으로 다운받을수 있도록 했다. 1996년 이데이 CEO는 1단계 계획이 어느정도 성과를 보이자 디지털 콘텐츠를 더욱 원할하게 연결하는데 컴퓨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VAIO 브랜드로 유명한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였고 i, LINK를 개발하여 제품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2단계와 3단계 계획도 준비한다. 2단계의 Synergy 계획은 소니의 제품이 서로 연결되면 소비자가 소니의 제품을 사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소니의 제품들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이고 3단계의 Hub 계획은 전세계 각 가정을 소니 제품으로 하나의 디지털 허브로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까지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이데이 CEO는 TV, 각종 전자기기, 컴퓨터 등을 소니의 콘텐츠와 연결하여 하나의 홈네트워크가 되어 다양한 수익 모델이 창출될 것으로 보았고 이렇게 소니 왕국이 건설되면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를 재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2.1 계획의 실패

하지만 이 계획은 1단계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데이 CEO는 소니 제품을 서로 연결하면 소비자들이 인기있는 소니의 제품을 구매하면 자연스럽게 판매가 취약한 제품의 점유율도 끌어올릴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이와 달랐다. 소니는 제품들을 서로 연결할때 하나의 소니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하여 독자적인 포맷을 고집하였다. 예를 들어 소니 TV는 소니의 멀티미디어 기기만 연결할 수 있었고 소니 멀티미디어기기는 소니 제품만 연결될 수 있었다. 독자적인 포맷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니의 콘텐츠를 이용하려면 소니의 제품을 사야만 했다. 당시 소니는 기술적으로 일등 기업이었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소니는 혁신적이었던 제품과 다양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니의 둘레 안에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메모리스틱, UMD 등이 있다. 한때 애플과 함께 이끌던 IEEE1394 또한 이러한 갈라파고스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소니의 태도는 전자시장에서 소니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소비자들은 소니 제품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는 애플과 반대되는 결과인데, 애플은 전용 규격을 유지함으로써 소비자들을 애플빠 노예 묶을 수 있었지만 소니는 그러지 못 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비싸고, 연동될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나 부족했고, 불필요한 부분까지 갈라파고스화를 실현한 것이 원인이다. 애플은 규모의 경제로 써드파티 제조사들도 많이 자라났고 액세서리가 저렴해질 수 있었으며, IEEE1394같은 전용 규격들 또한 필요하면 버렸다. 일례로 iPod 클래식은 3세대까지만 해도 반드시 매킨토시 컴퓨터에 IEEE1394(Firewire)로 연결해야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USB와 윈도우도 이용 가능하게 했다. 또한 애플은 저장장치로 장난을 치지는 않았다. IEEE1394 메모리도 나온 적이 거의 없고 CD도 그냥 CD를 이용했다. 결국 소니는 무너졌다.

한편으로는 고참 엔지니어나 기술부서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여파로 소니 제품의 품질 저하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소니타이머 얘기가 증폭되어 나온 것도 이데이 시절부터다.

2.2 앞서간 판단

이데이 CEO는 1996년 한 연설에서 "앞으로 TV 한대에 10엔이 되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말은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에서는 각회사마다 기술력과 제품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에서는 기술이 평이해져 더이상 하드웨어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존의 전자사업은 부품이 모듈화되고 각 회사마다의 기술 수준이 비슷해져 생산에 필요한 부품은 다양한 회사에서 공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술은 개발하였지만 TV 부품은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LCD와 PDP모듈을 다른회사에서 공급받는 대신에 소프트웨어 사업인 콘텐츠에 투자하고 차세대 기술인 OLED나 FED에 투자해서 기술력 수준도 높이고 디지털 콘텐츠를 강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데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부품이 모듈화되는 속도는 현저히 느렸고 LCD TV는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여 자체적으로 LCD모듈을 생산하지 않던 소니는 TV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잃게되었고 투자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사업은 기술력의 벽으로 실용화하는데 실패한다. 결과적으로 미래 기술 변화를 예측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한데도 이데이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가면서 미리 대비하려고 했고 너무 미래를 앞서 나가서 오히려 다가오는 기술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것이 이데이 CEO가 실패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