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항목: 이순신
1 개요
정형모, 1978년. |
경상남도 통영시 제승당에 있는 구군복 차림의 영정.하지만 밑에서 언급하듯이 실제 얼굴은 아니며 상상해서 그린 영정. |
충청남도 아산시 신정호에 있는 동상. 1999년에 탄신 400주년 기념을 위해 세워졌다.[1]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서 세워진 동상. 활을 든 이순신의 동상으로서는 처음 세워진 동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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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사거리(광화문)에 있는 동상. 1968년에 세워졌다.[2][3] |
보통 이순신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모두 위에 올려진 동상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현재 널리 알려진 이순신의 영정은 모두 상상화로,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쓴 '용모가 단아하고 정갈하였다.(容貌雅飭)'는 묘사에 근거하여 그 이미지대로 그려져 정부에서 표준영정으로 지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증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글과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류성룡의 이순신 묘사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무골이었음이 분명한[4] 김덕령에게도 같은 묘사를 한 것으로 미루어 저 표현이 실제 용모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홍우원, 남파집, 백호집과 같이 1600년 경에 쓰인 서적에서 한결같이 이순신의 용모를 무인답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세기 이후에 그려진 영정들은 지나칠 정도로 선비처럼 그렸다고 비판받는다.
이순신과 같은 해에 무과에 합격한 고상안(高尙顔)이 1594년 3월에 한산도에서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는 남긴 평가가 그의 문집인 태촌집에 전하며, 이순신의 사위의 배다른 동생인 윤휴는 이순신의 가솔들로부터 그의 용모를 전해들었는데 모두 이순신의 용모를 남성적인 무인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보다 후대의 사람인 홍우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을 팔척 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턱과 용의 수염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2 사례
其言論術智 固是撥亂之才 而容不豐厚 相又褰唇 私心以爲非福將也그 언론과 지모는 실로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혀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복있는 장수가 아닌 듯했다.
─ 고상안의 태촌집
복이 없긴 없었다. 임금복이...
公長軀精勇 赤髭髥膽氣人也공은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며 붉은 수염에 담력 있는 사람이었다.
─ 윤휴의 백호전서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의 영정,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
고상안과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이순신의 얼굴은 지금의 표준 영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고, 오히려 무장에 더 적합한 얼굴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 위의 조선시대에 그려진 충무공 영정의 경우에는 제3공화국때 주로 그려진 영정과 달리 무장의 이미지가 강함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현충사 소장 영정에 나와 있는 관복의 흉배는 위에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파도무늬가 들어 있는데, 이건 문헌에도 없고 유물도 없다. 당시 이순신은 무관 2품으로서 호랑이 한 마리와 구름무늬로 된 흉배가 달린 관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고증이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순신의 품계는 단순히 '무관 2품'이 아니라, 정2품 상계 정헌대부였다. 정2품은 문·무관 구별 없이 주는 품계였고, 벼슬로 치면 6조 판서에 버금가는 자리다. 또한 이순신은 사후 최종적으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이자, 의정부 영의정에 봉해졌으므로, 단순히 무관 2품에 해당하는 관복으로 그리는 것이 오히려 고증에 맞지 않다. 어차피 이순신은 생전에 영정에 나온 것과 같은 관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영정의 관복은 어디까지나 이순신 사후 추증된 의정부 영의정의 벼슬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이다.
다만 이순신이 활동한 16세기에는 관복의 목 부위가 깊게 파이지 않았고 소매가 현재의 영정처럼 지나치게 넓지도 않았다는 점은 지적할 만 하다. 또한 족대(발판)와 바닥 문양이 당대 양식과도 달랐다. 종합적으로 보면 현재 널리 알려진 영정 속의 이순신 복식은 3세기 뒤인 19세기 양식이며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 또한 17세기 후반부터 볼 수 있는 영정의 화법을 따르고 있다. 숙종 이전까지의 관복 초상화는 우측면으로 몸을 살짝 튼 구도로 그려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권오창 화백의 등 뒤로 미완의 역사적 사실에 보다 가깝게 그리는 충무공 영정이 보인다. |
현재 국가표준영정 7점을 그린 전통인물화가이자 복식전문가인 권오창 화백이 자료를 수집하면서 충무공 국가표준영정의 잘못된 점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며 개인적으로 충무공 영정 작업을 틈틈이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용모에 대해서는 그 역시 무장답지 않게 너무 선비처럼 그려졌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상 용모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넘어가기로 했다고 한다. 16세기 당시의 충무공 초상화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현충사를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모셔진 충무공 영정의 얼굴이 다 제각각인 상황에서 얼굴에 집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그 대신 권 화백은 영정 속에 나타난 복식(服飾), 즉 옷과 그 장식품에 주목한다. 얼굴이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복식은 시대별로 특징이 다르고, 충실하게 고증하면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증정 중등조선역자에 등장한 이순신 초상 |
2013년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자에서 이순신의 생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초상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잘 살펴보면 눈썹이나 눈매, 수염 등 전반적인 스타일이 완전한 무골로 묘사한 이 항목 위쪽의 영정과 꽤나 일치한다. 이 눈썹과 수염, 눈매는 좀 후에 그려진 영정들과도 상당히 비슷하다. 하긴 막강한 군법을 통해 병졸을 다스렸던 인물이 인자한 인상이면 좀 이상하다. (...) 깔끔하게 E를 시전할 독기가 있어야지 그래도 무골로 묘사한 영정들도 무인치곤 꽤나 선비와 같은 느낌이 들어가있는 걸 보면 류성룡의 묘사가 마냥 형식적인 건 아니었던 듯. 그러니까 현대에 그려진 모습을 좀더 무인답게 바꾸면 된다. 한눈에 E를 시전할 것 같은 느낌으로 #
왼쪽에 있는 것이 새로 교체된 이순신상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철거된 기존의 이순신상이다. |
국회 사무처는 2015년 11월 2일 의사당 본관 정문 안쪽에 설치돼 있던 기존의 이순신 장군 석상을 교체하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기존 석상은 김경승 작가의 작품으로 1973년 정부가 중앙청에 설치한 후 1990년 국회로 이전해온 것이다. 석상의 장검이 조선 시대 검보다 길어 일본 무사의 검에 더 가깝고, 갑옷도 중국 장수의 옷과 더 비슷하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되며 논란이 일어왔다. 이에 따라 국회는 용모, 조각, 무구, 복식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약 1년간의 고증을 거쳐 새 이순신상을 제작했다. 얼굴의 경우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 영정을 기준으로 제작했으며 투구도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복식도 임진왜란 당시에 충실하게 바꿨다. 이순신이 왼 손에 쥔 칼도 예전 석상은 ‘수양용 장검’을 ‘실전용 쌍룡검’으로 교체했다. 칼을 쥔 손가락의 모양도 ‘일본식’이었기 때문에 ‘조선식 파지’로 바꿨다. #
3 기타
위사진은 1958.8.15일 발행된 50환권으로 한 면은 독립문이고 한 면은 이순신 동상.[5]과 거북선이다.#
이순신은 우리나라 화폐에 나타난 유일한 무인이다. 시간적으로만 따진다면 이순신은 이승만을 제외한 역대 모델 중 데뷔가 가장 빨랐다. 분신인 거북선은 1953년 10환, 100환,1000환권에, 이순신 동상은 1958년 50환권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이순신과 거북선이 우리 화폐에 나온 것은 10차례(지폐·동전 포함)나 된다. 1970년 발행한 첫 기념주화에도 이순신(100원화)과 거북선(5000원화)이 각각 등장한다.
# 일반적으로 1973년에 나온 500원 지폐를 예로 들며 박정희 군부정권의 정치적 배경 하에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 첫 등장시기가 1958년 이승만 정권 때인지라 이전부터 많은 대중성을 확보해 자연스레 등장했다는 설도 있다. ##- ↑ 문화관광부로부터 표준 동상으로 인정받았으며, 높이 8.45m의 단일 동상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하지만 세종로사거리에 있는 것에 비하면 인지도가 적다 - ↑ 2008년경에 한 번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었다.
- ↑ 이영훈이 작사, 작곡하고 이문세가 부른 1989년 노래 <장군의 동상>은 바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다. 그리고 가상매체에서 이순신 동상이 나오는 장면에선 주로 이 동상을 모티브로 사용했다.
- ↑ 그의 초상을 본 가토 기요마사가 참으로 장군의 용모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 ↑ 1952년 진해 북원로타리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동상이다. 동상 제막에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 주요 인사도 참여하였다. 이 동상에 제를 드리는 것이 계기가 되어 진해군항제가 생겨났다고 한다. 또 이것과 더불어 1953년 통영 남망산 동상과 1955년 부산 용두산공원 동상이 이미 광화문 동상보다 10여년 일찍 만들어졌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