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鑴,
1617.10.14 ~ 1680.05.20
파일:1jht1wC.jpg
1 소개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인가?"[1]
"백골이나 아약(兒弱)[2]의 (군포를 거두어) 살가죽을 벗겨내고 골수를 부수는 가혹한 정치에 얼굴을 찡그리고 가슴을 치는 근심과 괴로움, 놀고 먹는(游食)하는 선비나 운좋은 백성처럼 부역을 피하고 스스로 편하게 지내려는 자의 원망, 이 둘 중에 누가 더 크겠사옵니까? 집이 있고 몸이 있는 자에게 용과 조로 포를 거두는 것과 이미 죽은 자나 어린 아이가 군역을 지는 것 중 어느쪽이 더 낫겠사옵니까? 진실로 어느 쪽이 더 백성의 원망이 되겠사옵니까?"숙종실록 6권, 숙종 3년(1677 정사년) 음력 12월 19일(신유일) 1번째기사
조선후기의 문신, 성리학자이자 유학자로 원시 유학에도 정통하였다. 송시열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형당하는 인물로 그려졌으나 실제적인 갈등은 예송논쟁 때 부터다. 갑인년 예송으로 집권하였으나 5년 뒤인 경신환국으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누구 덕분에 사문난적이 되었다 하더라
송시열과 함께 대표적인 논객(...)으로 불꽃남자. 죽기 전의 말이 대표적이다.
동료이자 생각의 차이로 아웅다웅하면서도 친하게 지냈던 허목과 함께 사이좋게 사문난적 1호와 2호로 낙인찍히고 만다.[3]
사후 1688년 기사환국으로 복권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그뒤 1694년의 갑술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추탈. 정조 때 다시 복권되었지만 1801년 정조 사후 추탈당했다가 1907년 이완용에 의해 최종 복권된다. 마지막엔 하필 저런 놈에 의해…
2 생애
아버지 윤효전은 북인 출신 정치인이었지만 1619년에 죽고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북인이 몰락하면서 북인 집안 사람이던 윤휴 역시 출세길에 제한을 받는다. 그는 각지를 유람하며 송시열, 송준길, 윤선도, 윤선거, 윤원거, 윤문거, 권시 등을 만나 친분을 다진다. 특히 인조반정공신들에게 찍혔던 송시열과 가까이 지냈다. 윤휴와 송시열 둘다 병자호란 이후 한때 벼슬길을 기피했던 것과 학문의 경지가 깊었다는 점, 그리고 북벌로 청에 대한 복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뜻이 잘 맞았고 아주 좋은 친구 사이가 됐는데 둘의 사이가 나이와 당파를 떠나서 하도 절친하여 이유태 등은 마치 율곡이나 제갈량의 환생과도 같다고 할 정도였다. 이때는 윤휴도 서인들과 두루 절친했다.
그러다가 둘이 원수지간이 된 것은 1653년(효종 4년), 윤휴가 주자의 중용장구가 틀렸다고 다시 쓰게 되면서인데 주자에 목숨을 걸었던 송시열은 "주자의 서술에서 일자 일획을 더하고 빼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아예 틀렸다고 다시 짓는 윤휴를 찾아가서 극렬히 화를 냈다. 한참동안의 논쟁 끝에 윤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송시열은 빡돌아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선포했다.
얼마 뒤 화가 좀 풀렸는지 아님 사문난적이라고 까지 한 것은 너무했는가 싶었는지 송시열은 윤휴를 다시 찾아가서 아직도 주자의 해석이 그르다고 생각하냐고 물었으나 윤휴는 "공은 어째서 주자만 공자의 뜻을 알고 나는 공자의 뜻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하면서 완고하게 뜻을 고수했고 그 뒤로 송시열은 다신 윤휴를 찾지 않았다.[4] 그러나 의외로 송시열이 그 뒤에도 윤휴를 다른 자리도 아니고 세자시강원 자리에 극구 천거한 적은 있다. 사문난적 항목 참조. 윤휴가 주자의 주장이 틀리다고 하여 주자모독죄로 처형당했다면서 조선을 유교 탈레반이니 어쩌니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윤휴는 역모에 휘말려 죽은 것이고 그런 황당한 죄로 죽은 적이 없으니[5] 잘못 알고 있는 위키러들은 유념해두자. 송시열의 사문난적 드립이 나오자 서인 민정중, 원두표, 안방준 등은 "어쩌라고?"란 반응을 보였다. 해석이 주자랑 좀 다르면 어떻습니까? 좋은 선비면 그만이지가 당시 조정의 반응이었다.
윤휴는 예송논쟁이라는 폭탄에 심지를 달아 송시열의 의견을 정면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심지어 이때까지만 해도 둘의 사이는 의견이 대립했을 뿐이지 죽일만큼 안 좋았던건 아니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상소 사건 이후 이 논쟁이 격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이때 송시열은 윤휴를 두둔하는 윤선거와도 절교를 선언했는데, 역시 한번 끊고는 화가 풀어지자 물었다. 이에 윤선거가 "굳이 따지면 주자는 양이고 윤휴는 음, 주자는 백이고 윤휴는 흑"이라고 말하여 송시열이 풀어졌으나, 결국 예송논쟁을 기하여 윤선거가 윤휴 편을 들면서 관계는 영원히 단절되었다. 얼마 뒤 윤선거가 죽고(1669년) 윤선거의 아들이자 소론의 거두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으나 시덥잖게 지어주었던 사건 이후 노론 소론의 갈등이 시작된다.[6]
1674년 2차 예송에서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 등이 끝까지 효종은 왕통은 계승했지만 장남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자 현종의 진노를 사면서 서인 정권이 엎어지고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7] 이후 등용되어 이조참판, 대사헌, 성균관좨주, 이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등을 지내고 좌찬성까지 승진했다.[8] 여기에 허목과 함께 북인계 인사들을 적극 등용했다.
그러나 김우명이 숙종의 당숙 복평군, 복선군, 복창군 3형제를 제거하려고 그들이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했다가 혐의없음이 드러나자 처벌받게 됐다. 이때 김우명의 딸이자 대비인 명성왕후[9]가 나타나 통곡을 하는데, 왕에게 대비를 조관하라는 한마디를 했다가 숙종에게 찍히고 만다. 그 외에도 체찰부의 체찰사로 윤휴가 거론된 적이 있었는데 숙종은 김석주를 체찰사로 임명했고 윤휴가 김석주가 이미 권한이 많은데 체찰사까지 겸임하게 하면 한 사람에게 지나친 권력이 주어진다고 반대했다가 니가 체찰사 되려는 거지? 하고 욕이나 한바가지 먹었다.
1680년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으면서 나라에서 학자를 쓰기 싫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고 항변했는데 이때 그의 발언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송시열은 윤휴와 허목 사후에도 두고두고 미워하면서 윤휴, 허목 등의 제일 큰 죄는 국가 모역죄가 아니라 주자 모욕죄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과연 조선제일 주자빠...이후 그의 사상과 주장은 사문난적으로 몰렸고, 후손들은 1907년 까지만 해도 그에 대한 것을 언급을 꺼렸다.
3 제도개혁에 대한 복잡한(?) 입장
"이것이 명분없는 것입니까, 저것이 명분없는 것입니까? 이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저것이 백성의 원망이 되는 것입니까? 민심의 향배와 천명의 거취(去就)가 장차 백성들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아니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운좋은 백성이나 세력가(효우/豪右)의 편안하고 불편함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삼대(三代) 이래로 세(稅)·(중략)·조(租)·용(庸)·조(調)라고 하는 모든 이러한 제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전세(토지세)를 거두어 백관에게 녹을 주고 전포(錢布)를 거두어 군사(武備)들을 풍족하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또 토지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으며,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아아! 이미 죽은 자와 이도 갈지 않은 어린아이의 군포를 독촉하여, 고아와 과부, 이웃과 친척들이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면서 가혹한 정사가 없어지지 않음을 원망하니, 이것이 어찌 옛날 일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세를 균등하게 하고 요역을 공평하게 해서 각기 그 힘을 관가에 내어주고, 백성의 불공평한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 선왕의 정치에 어긋나고 오늘날의 민심에 어긋나는 것이 되겠습니까? 국사(시무/時務)에 경제(경술/經術)를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경제는 쓸데 없는 것으로 내버리게 되니, 이는 더욱이 신하가 임금을 인도하면서 도리를 지키는 말이 아닙니다.”
대사헌으로 있을때 사치를 금하겠다고 죽은 관까지 다 열어보는 깐깐한 일처리로 구설수에 올랐고 이때 적이 제법 생겼다고 한다. 곡하는데 들어와서 부장품 비싼 거 안썼냐고 관뚜껑 열어보는 남자
북벌론을 강력히 주장했는데 만과 실시, 승병조직, 오가작통법 등 그의 제안 중 받아들여진 것도 상당하였으나 과거제 폐지, 독륜거 제작[11] 등 현실성이 없는 제안들은 유혁연, 권대운, 김석주, 허적 등 당시의 실세 대신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남인 병권의 상징이었던 유혁연은 윤휴의 주장이 너무도 관념적이고 황당한 것이 많다고 윤휴의 주장들을 대부분 비웃으면서 반대했다. 그가 윤휴에 대해 단적으로 한 말이 있으니 "윤휴 그 양반은 실제 병권의 일을 맡아본 적이 없어 말만 잘한다."였다. 도널드 럼즈펠드나 딕 체니가 떠오르면 지는거다 결국 권대운, 유혁연 등의 탁남계 대신들은 윤휴랑 거의 원수처럼 지냈다.
심지어 허적마저 "당신 혼자만 안다고 맨날 나대는 게 당신의 병통이다!"라고 꾸짖기도 했다. 허적은 당시 조정 실세들 중에서 윤휴의 말을 제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승병, 만과, 독륜거 등에 찬성) 윤휴를 그래도 이상은 바른 사람이라고 높이 산 사람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12]
윤휴는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많자 그는 종이 호패(지패)를 만들어서 반드시 지니고 다니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오군영 위에 도체찰사부를 설치하여 병력 지휘체계를 하나로 통합, 북벌에 용이하게 대비할 수 있는 군사체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윤휴의 체찰사부 설치 주장에 대해서는 "북벌 대비" 와 "병권 장악"이라는 두 측면의 목표를 모두 내포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또한 그는 북방에 성곽을 쌓아 청나라를 칠 때를 대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오삼계의 반란 등으로 청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이었으므로,북벌이라는 대의를 위해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강화시켜 북벌을 이루자는 논지를 주도한 셈이다.
3.1 호포법 지지
윤휴는 호포법 실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호포법은 간단히 말해 양반-상민의 신분 구별 없이 가호 단위로 군역 포를 거두어 군사비용에 충당하자는 주장이다. 조선 중기 잘못된 문화로 자리매김한 양반의 군역면제혜택을 폐지, 양반들에게 군역은 아니더라도 최소 군포라도 납부하게 하여 일반 양인들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국방과 북벌을 위한 재정을 증가하기 위한 법이었다.
사실 이 법은 윤휴 이전에도 좀 다르긴 했어도 인조 대의 정경세 , 효종 대의 유계 등에 의해 미리 제기되었던 법이다. 하지만 사족들의 반발과 이를 염려한 왕과 관료들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 윤휴는 이에 대해서 시종일관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를 개혁가로 보는 시각의 가장 큰 근거가 된다.[13][14]
그런데 윤휴의 이런 정책을 강하게 반대한 것은 예상 외로 서인계열의 송시열이나 조선의 길성준김석주가 아니라 같은 남인 (청남) 계열의 영수 허목이었다이것이야말로 유학자의 팀킬!!!(...). 도리어 송시열은 여기에 찬성했다. 사실 윤휴의 정책과 구상은 윤휴만의 것이었지, 남인들의 뜻과 동일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3.2 대동법 반대
그러나 충격적인 반전이 남아있는데... 윤휴는 당시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이던 대동법에 반대했다.OME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윤휴(尹鑴)가 한 결(結)에 13두(斗)를 바치게 되어 있는 대동(大同)의 법을 폐지하고, 영남 지방의 대동은 각 관사에 위임시켜 출납을 주관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전에 하지 않은 것을 이제 갑자기 변경하기는 어렵다고 전교하였다. 임금이 이조에 내년 가을까지 재해가 있는 고을의 수령(守令)을 옮기지 말라고 명하였다.(숙종 8권, 5년(1679 기미 / 청 강희(康熙) 18년) 10월 6일(정묘) 4번째 기사) |
문제는 윤휴가 이런 견해를 개진한 시점이 숙종 초년으로, 이미 경기-호서-호남 일대에서 대동법이 무난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던 시점이라는 것이다어쩐지 효종, 현종 대 대동법 논의에 일언반구 이야기 하나 안 꺼내고 있는 게 좀 수상하긴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면세전 폐지 주장과 연계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 시기쯤 되면 당론에 관계없이 대동법 실시에 대부분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때문에[15] 역시 이해하기 힘든 주장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윤휴 본인이 호포제를 적극 주장한 것을 감안한다면 허목처럼 양반층의 신분적인 권위 옹호 문제로 볼 수만은 없는 것 같지만.
비슷한 남인측, 정확히 말하자면 탁남의 영수인 허적 또한 대동법에 반대하는 편이였다. 근데 이 사람은 반대는 하는데 정작 시키면 대동법을 가장 잘 시행해내던 인물이였다.(...) 이는 그가 학자라기보단 관료적 성격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으로 평가된다.시키면 제일 잘하는데 시키지 않으면 안하려 드는 복지부동 공무원?(...)
또 재미있는 것은 허목은 윤휴와는 정반대로 호포제를 반대하면서도 대동법에 대해서는-그 실시를 적극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일견 긍정적인 입장을 표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김육이나 김육 사후의 송시열처럼 당시의 대동법 논의를 이끌었던 정도는 아니고, 대동법 실시에 힘쓴 남인계 인사들 -이원익같은- 의 묘갈명 등을 써주면서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적은 것 정도이지만... 어쨌든 호포론을 반대한 허목이 대동법 실시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는 것은 묘하게 여겨진다.
여담으로 허목은 송시열에 의해 제기된 일련의 사회경제정책에 대해서는 북송대 왕안석의 신법에 비유하기까지 하면서 이를 반대하기도 했는데, 더 흥미로운 건 송시열이 실제로 본래 송대 이래로 유가에서는 주욱 부정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던 왕안석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 즉 -"재주도 좋았고 능력도 있었지만 어찌어찌하다보니 소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 자신 또한 그렇게 되어 일을 망쳤다"-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여러 정황들은 단순히 주자성리학으로부터의 사상적 자유로움이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인물의 퇴행성과 진보성을 판단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처럼 당시 학자들이 내세웠던 일련의 사상적-경세론적 입장들이 진보-보수의 단선화된 도식으로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있다는 데 있다.
4 이야기거리
일단 예송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와 허목의 주장을 이견으로 접수는 했다. 그러나 윤선도가 자신을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적으로 규탄한 뒤, 윤휴가 이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허목은 아예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라는 여론을 조성한뒤 허목 자신도 송시열을 사형에 처하자는 상소를 여러번 올리게 되면서 송시열의 태도와 행동은 경직되고 만다.[16]
이후 송시열은 윤선도보다도 윤휴와 허목을 이상하리만큼 노골적으로 증오감을 드러냈고, 허목, 윤휴를 악마와 동급으로 취급하게 된다. 송시열과 그 제자들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 불렀고[17], 허목은 독물(毒物), 독극물, 연인(漣人), 또는 연한(漣漢), 지비공(紙鼻公) 또는 지비옹(紙鼻翁)이라 불렀다.[18]
5 기타
연애결혼을 반대했고 중매결혼 옹호자였다... 물론 당시의 연애결혼은 보쌈질과 같은 신분제의 혼란으로 인한 일종의 사회현상이었으므로 감안해야 할 부분은 있을 것이다.
덤으로 윤휴의 배다른 형이 다름아닌 충무공 이순신의 사위이다.그 관계로 충무공 이순신을 모셨던 가솔들에게서 공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고 하며 관련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 배다른 형은 첩의 자식으로 서형이며, 그 부인인 충무공의 따님도 서녀. 다만 그 부분의 한문은 해석여하에 따라서 다른 친족관계로도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충무공과 가까운 인척지간인 것은 맞다.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에 북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의 손녀사위는 바로 이인좌란 양반인데 그는 훗날 영조 시기에(...) 여하간 여러모로 대대로 역적이 되어버린 가문이 되었다.- ↑ 물론 윤휴는 단순히 권력다툼에서 물러난 이유 정도로 죽은 게 아니라 숙종 심기 거스른 것 + 허견의 역모에 휘말려 죽은 것이다.
- ↑ 각각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을 말한다.
- ↑ 사문난적 제3호는 송시열을 비판한 윤증, 제4호는 이경석의 비석에 송시열을 불상인이라고 묘사했던 박세당이다.
- ↑ 다만 이것은 같은 서인들에게도 과하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래의 서술들을 참조.
- ↑ 위에도 있지만 그 뒤로도 송시열 본인을 포함해서 서인들은 윤휴의 재주를 높이 사서 그를 계속 천거했다.
- ↑ 송시열의 귀양지까지 윤증이 찾아 갔던걸 생각하면 이 갈등은 윤휴가 죽은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결국 윤휴로 시작된 악연이 노소론 분당까지로 이어진건 셈인건 분명하다.
- ↑ 인조 반정 이후 51년만의 정권 교체였다.
- ↑ 의정부의 종1품 벼슬로 정1품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아래의 종1품급 좌우찬성의 하나이다. 부총리급으로 이상, 이경으로 불렀다.
- ↑ 명성황후 민씨와는 다르다!!! 명성황후와는!!!
- ↑ 아마 기존의 사상적 경향들에 대한 "반성"의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 ↑ 산악이 많은 조선 지형에는 무용지물이란 이유로 유혁연, 권대운 등이 비웃었다.
- ↑ 탁남의 영수이면서도 청남인 윤휴도 존중하는 중립적인 모습에 숙종도 그를 상당히 신뢰했었으나 남인 정권이 공고화되고 그 영수인 허적의 세도화가 본격화됨과 동시에 그의 서자 허견의 행패에 안일하게 처신하면서 숙종의 눈밖에 났다. 거기에 허견이 역모까지 꾀하면서...
- ↑ 이 법은 사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200년 후, 흥선대원군의 섭정 때에 가서야 실시된다.
- ↑ 윤휴는 이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며 재산이 있고 몸이 있는 자와 재산이 없고 몸이 없는 자가 내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진실로 원망이 적겠냐며 열혈적인 모습을 보였다.
- ↑ 영남대동법이 거의 이 무렵 이원정 등의 남인계와 청풍김씨(김육의 가문이다) 계열에 의해 실시된다.
- ↑ 허목의 송시열 사형 여론에 윤휴가 적극 동의하면서 송시열은 이성을 잃고 만다.
- ↑ 참람한 적, 역적 윤휴, 검은 물이라는 뜻이다.
- ↑ "연인, 연한"은 허목의 고향 연천을 들어 "연천 사람, 연천 놈(…)"이란 뜻으로 한 말이었으며, "지비공, 지비옹"은 허목이 호흡기 관련 질환이 있어 코에 종이를 붙이고 다녔던 것을 두고 조롱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