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李洋球
1916년 10월 14일 ~ 1989년 10월 18일
1 소개
2 생애
1916년 10월 14일,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함주군의 작은 농가에서 부친 이교흠 모친 김성자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서남. 하지만 부친이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어린 시절은 홀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10대 중반인 늦은 나이에 보통학교(현 초등학교)졸업장을 받은 이양구는 상급학교 진학 대신 ‘함흥 물산’이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료품 도매상에 무작정 취직했다.
사업수완이 뛰어났는지 1938년 식품도매상인 ‘대양공사’를 시작으로 역사의 큰 사건 전에 이미 큰 성공을 거뒀다.
1947년 단신 월남하여 서울에서 과자판매업을 시작,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수입설탕·밀가루·제과용 원료판매로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납치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향인 함주군에 있던 수십만평의 토지와 1억원[1]을 잃어 큰 충격을 얻었다.
이양구는 이 일을 금방 잊고 1951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설탕, 소맥분을 수입 판매하는 삼양물산 공사를 설립해 재기에 성공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 경기와 생필품 부족이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이다
1952년 국제시장 화재로 재산이 전소되었으나 이후 사업이 번창하여 ‘설탕왕’이라는 별칭을 받았다.
1953년 환도하여 풍국제과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54년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일제당 설탕을 독점판매하는 한편, 같은 해 삼양제당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54년 제일 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56년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과 풍국제과[2]의 배동환 3명의 공동 출자로 동양제과공업주식회사[3]를 설립하였으며, 같은 해 삼척시멘트주식회사를 인수 해 시멘트 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 노후시설 교환 등을 통해 한때 시멘트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1960년 동양산업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62년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여 창립위원 및 이사로 취임하였다.
1963년 한국양회공업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64년 한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한국 양회공판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6년 동양건설진흥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크리스찬아카데미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7년 동양제과주식회사·동양산업개발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양종합공업주식회사와 동양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69년 동양도로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율곡이이의 동상을 사직공원에 건립해 기증하였다.
1970년 한국원자력위원회 부회장에 피임되고, 같은 해 동양내화연화주식회사도 설립하였다.
1971년 동양시멘트공업주식회사의 법정관리로 사장직을 사임했으나 같은 해 12월 법정관리 해제로 다시 회장에 취임하였고, 1972년 동양판매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75년 동양산업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 동양상선주식회사의 회장에 취임하였다.
1977년 동양종합공업주식회사 회장에 취임하였고, 동양광공주식회사와 동양상운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85년 국일증권주식회사를 동양증권주식회사로 개명했다. [4]
- 1987년 동양경제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저서로는 1969년 동양철학과 경영론을 담은 『문제와 사색』이 있으며, 1973년 세계여행의 견문과 감회, 세계관 등을 담은 『제헌(濟憲)의 세계』 등이 있다.
수상 경력으로 1966년 모범상공인으로 경제기획원장관상과 5·16민족상을 받았고, 1981년 제22회 3·1문화상과 1985년 성실납세유공자로 산업포장을 받았으며, 1987년 제14회 상공의 날에 유공상공인으로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3 가족
이양구회장 사후 가족들과 함께.
이양구는 34세의 매우 늦은 나이에[5]함흥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이관희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장녀 이혜경과 차녀 이화경씨 등 2녀를 두었으며 첫째사위는 현재현, 둘째사위는 담철곤이다.
이양구 사후 첫째사위 현재현이 동양그룹을 둘째사위 담철곤이 오리온그룹을 승계했다.
슬하에 딸만 둘이었던 이양구는 평소 다른 재벌가와 같이 화려한 혼인을 고집하기보다는 정직, 신용, 의리에 중심을 뒀다. 정, 재계에서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단촐한 가족이다.[6]
작은사위 담철곤이 화교출신이라서 처음에는 반대 했으나 작은 딸의 사랑에 감복 해 결국 사위로 받아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