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그룹 역대 회장
이병철이건희

img_hoam_lee_02.jpg [1]

이름이병철(李秉喆)
출생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사망1987년 11월 19일
본관경주 이씨
가족아버지 이찬우, 어머니 권재림의 2남 2녀 중 넷째
배우자 박두을, 슬하 3남 4녀

1 개요

21세기 한국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을 만든 창업주
그러나 밀수 및 부정한 경영 등 한국 경제사에 부끄러운 행적을 남기기도 한 자

경상남도 의령군 출신으로 호는 호암(湖巖)[2]이며, 본관은 경주다. 생전에 많이 불렸던 별명은 "병철"이었다. 지금도 나이 지긋한 세대는 옛날 얘기할 때 "돈병철 그 양반은 말이지..." 같은 식으로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할머니들은 자기 손자 부를때 손자의 본명 대신 "철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돈 잘 벌길 소망하는 바람인가 한국의 재벌인 삼성그룹, 신세계, CJ그룹, 한솔, 중앙일보, 새한그룹이 다 이병철에게서 나왔고 이 기업은 범 삼성가라 불리며 재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2 삼성을 만들고 키우다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글공부에는 소질과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신학문과 장사에서 수완을 보였다. 도쿄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진학했지만, 건강문제와 더불어 신학문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알게 되었기에 중퇴하고 귀국한다.

이후 부친에게 지원받은 쌀 300석분의 토지를 기반으로 사업을 일으켜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 창업을 시작으로 운수업에도 진출하였으며, 1938년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 1939년에는 조선양조를 인수하였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삼성물산을 설립한 뒤, 1953년 제일제당(현 CJ그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그룹 규모의 사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부친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친분이 있었고, 이를 이용해 이승만 정권과의 연고를 만들 수 있었다. 이후 정권의 여러 지원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이미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무시못할 재벌로 성장한다. 그래서 한때 군사정권은 이병철 창업주 등을 부패 혐의로 몰았으나 경제 운용과 성장을 위해 이들과 타협하였고, 이 회장도 군사정권과 협력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박정희 치하에서 성장한 정주영 회장 등과 달리 이미 기틀이 잡혀 있었고, 출신도 지방 양반가 출신으로 상류층의 품행과 교양을 갖추고 귀족적 사고가 강하던 이 회장은 초기 반 기득권적 성향에 교양 교육을 별로 갖추지 못한 박정희와 사적으로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화폐개혁 당시 박정희를 은근히 디스 훈수한 일화도 있고.

일찍이 한일은행·상업은행·조흥은행 등과 안국화재·동방생명 등을 인수하였고, 1961년 초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 대한암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고려병원을 설립하였다. 또한 1965년에는 중앙일보사를 설립하였다. 삼성장학회 설립, 대구대학[3]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지냈다. 삼성전자·삼성전기 등을 통해 첨단전자통신 및 반도체기술 발전에 영향을 끼쳤으며, 삼성종합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삼성그룹을 성장시켰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 사건 등의 흑역사가 있다. 이때 박정희 정권과 사적 감정이 악화되었다고 하고, 이후 한때 정계 진출을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경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으나 1968년 삼성그룹에 다시 복귀했다. 이후 장남 이맹희와 차남 이창희를 밀어내고 막내아들(삼남) 이건희삼성그룹의 후계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다만 건방지게 반역을 기도한 차남과 달리 장남 이맹희 회장에 대해서는 사석에서 안타까움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군부독재정권과 이 회장의 악연은 묘하게 신군부에서도 지속되어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동양방송이 강제적으로 통폐합되었을 때 당시 방송계에선 이 회장이 분해서 눈물까지 흘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4]

젊은 시절 이미 일제의 패망을 경제적 흐름 등을 통해 짐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망할 뻔한 상황에서 충직한 심복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도 있다. 시대 통찰이나 사람 관리 등에서 재능을 일찌감치 보였던 모양이다. 후에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하마터면 사형당할 뻔했던 홍진기 전 법무부 장관을 포섭해서 중앙일보를 창간해 일찌감치 자사에 우호적인 언론을 만든 것도 그렇고...다만 아랫사람에게 상당히 고압적이고, 선을 넘으면 가차없는 냉혹한 면이 있던 이병철도 뛰어난 수재로 이름났던 홍진기는 어려워했다고 한다. 자신이 고용한 월급사장이었지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나중에 사돈 관계까지 맺게 된다. 홍진기의 딸이 이건희의 아내인 홍라희다. 이후 이건희 회장 후계 체제 과정에서 장인인 홍진기가 이병철 회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6]

또 말년엔 반도체 산업의 전망을 예견하여, 당시에는 도박이나 다름없었던 반도체 산업에 삼성전자가 진출하도록 했다.[7][8] 이후 이 반도체 산업은 삼성이 TV와 휴대폰, 특히 스마트폰을 통해 21세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준다.

여담이지만 삼성이 대우그룹보다 작은 때가 있긴 했어도 삼성이 작은건 아니었다. 1980년대에 한국에서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는 단 3명이었는데, 정주영, 신격호[9], 그리고 이병철이었다. 김우중이 없는건 무시하자. 시작부터 건설사이고 중공업 위주로 나아간 현대와 달리 별 사업을 다 했다. 그리고 돈을 잘 벌었다.(...)

1987년 폐암으로 타계했다. 여담으로 폐암은 유전될 수 있는데, 큰 아들인 이맹희 전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으며, 삼남인 이건희 회장도 폐질환 때문에 말년이 영 편치않다. 또 이병철의 대를 잇는 범삼성가에는 일반인보다 약한 폐와 샤르코-마리-투스 질환[10]이 유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돈이냐 유전질환이냐 그래서 이재용 부회장 집의 공기상태는 하와이 급으로 맑게 해놓는다고 한다

3 사업철학

사람 욕심이 많아서 '삼성의 최고 자산은 인재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재 양성에 많은 투자를 했다. 월급 빵빵하게 줄테니 노조는 안 만드는 걸로 또 사업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사업보국의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이러한 경영이념을 집대성한 호암자전에서는 '무한탐구'와 '무한정진'의 태도를 기업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세라고 언급했다.

또 호암자전에서 "올바른 정치를 권장하고 나쁜 정치를 못하도록 하며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를 생각한 끝에 종합 매스컴의 창설을 결심했다"며 동양방송중앙일보의 설립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4 수집덕후

사적으로 고미술품에 조예가 깊고 욕심도 많았다고 한다.[11][12] 호암미술관에 있거나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진 어마어마한 국보급 문화재들은 이병철 회장이 주도적으로 모은 것들. 다만 이들 중에는 도굴품으로 여겨지는 것을 사들인 것도 상당수라는 소문이 고고학계에 퍼져 있다. 심지어 신라 불교 사리유물이나 금림왕 같은 가야금관 유물 도굴과 연결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13]이 장물 취득 혐의로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고. 이에 대해 미술계 일부에서는 한국 고미술품들이 해외로 흘러가느니 차라리 삼성가에 있는게 낫지 않냐는 소리도 있지만, 애초에 도굴범들을 후원하고 사주했다는 얘기도 있어서(...) 군사정권 시절 고고학계가 자금난에 허덕일 때 일부 도굴꾼들이 고급 장비를 갖췄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잭을 동원한 도굴꾼과 나무 전신주를 사용하던 교수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여튼 사실여부를 떠나 그만큼 삼성가에서 열을 올리며 모은 미술품이 엄청나다는 소리.

심지어는 그 수집벽을 셋째 며느리인 홍라희 여사에게 계승시켰는데, 박물관 설립 전부터 3달 동안 인사동에 나가서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것. 당시 돈으로 10만 원 상한으로 매일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5만 원이었다니 지금 돈으로 치면 매일 대략 500만원 어치의 골동품을 사오라고 시킨 셈.(...)

재벌로는 이례적으로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발굴단에게 단지 터의 크기만을 물어보고는 당시 돈 3만원을 선물하고 떠났다고 한다.

5 생가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이 회장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 달성공원 건너편에 있는 옛 삼성상회 터에는 삼성상회 실물을 1:250으로 축소한 청동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CJ의 역사관에는 홀로그램으로 이 회장의 흉상을 구현해 놓았다. 그런데 정작 노년에 살던 생가는 지금 방치중이다.(...) 삼성그룹에서 옛 제일모직 공장 부지에 기부채납한 대구오페라하우스에는 이 회장의 동상을 설치해 놓았으며, 근처 도로의 명칭도 호암로로 변경하였다.[14] 이 회장이 건설자금을 지원했다는 혜화동 경주이씨중앙화수회회관 앞에도 이 회장 흉상이 있다. 또한 삼성그룹이 운영하는 성균관대학교에는 이 회장의 호를 딴 호암관이 있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MBC드라마 영웅시대에서 전광렬이 청년 역, 정욱이 장년 역을 연기했다. 정욱의 경우, 제3공화국에서도 이병철 역을 맡은 경험이 있어 작중 라이벌격인 정주영 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렬함이 부족한 이병철 회장의 캐릭터 구성에도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은 듯하다. 다만 정욱은 아들의 다단계 사기행위에 이 회장 연기경험을 이용, 이 회장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등 협조하는 바람에 구속당하였던 흑역사를 표출하였다.(...) 그리고 정욱은 현재 출연금지 연예인이 되었다.

SBS드라마 야인시대 1화, 최종화, MBC드라마 영웅시대 56화, 제3공화국 23화에는 국회의사당에서 김두한사카린 밀수 사건에 의해 삼성그룹한테 협조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인사들[15]한테 오물을 투척하였던 장면 연기만을 내보였다.

한국 영화 중으로의 <또 하나의 약속>에서 삼성전자의 회사원으로 활동하였던 황유미를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는 삼성전자가 그녀의 아버지이던 황상기(극중 상구)의 소송 상대 회사로 등장하였고 <죽이고 싶은>, <투혼>(롯데엔터테인먼트 배급) 에도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가 반드시 이겨야 할 중요 상대 구단으로 등장하여 장면 연출하였다.

굽시니스트본격 시사인 만화의 삼성 후계자 대립 에피소드에선 샤를 지 브리타니아(...)로 등장했다.[16]

7 루머

  • 라이벌로 흔히 언급하는 모 왕회장보다 여자 관계는 점잖았다지만, 일본인 소실은 그 존재가 분명하다. 적자들도 도쿄 유학시절 소실의 집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근데 가만히 보면 어째 집안 자체가 콩가루다. 이미 본인부터 두 아들(이맹희와 이창희)과 살아생전에 사이가 비틀렸다. 거기다 이창희의 둘째 아들은 나중에 자살했다. LG가로 시집을 간 둘째 딸 이숙희도 양사간 사업문제로 멀어졌고[17], 일본인 소실이 있었으니 부인과도 뭔가 서먹했을테고. 사업을 물려받은 셋째 아들인, 이건희도 자녀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아들인 이재용은 이미 이혼했고, 큰 딸 이부진은 이혼 소송 중이고, 막내 딸 이윤형은 유학 중 자살했다. 거기다 21세기 와서 이맹희와 이건희는, 생전에 본인이 남긴 유산 때문에 형제간 법정 다툼까지 벌이며 또 싸웠다.
  • 호남 사람들을 배척했다는 루머가 있으나, 오히려 군사정권 시절에도 호남의 지역 수재들이 삼성에서 임원이 된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들 역시 "세간의 루머와 다르게 의외로 지역색이 옅었다."며 놀라워했다는 후문. 걍 능력있음 쓰는거지 사실 회사에서 사내정치가 중요하다지만 지역에서부터 갈라버리면 회사 분열은 순식간이기에 지역색을 줄이는 것이 좋다.
  • 젊은 날에는 맑시즘에 관심이 있었다는 루머도 있는데, 사실이 아닌지 어째 경영 이후에는 오히려 무노조로 일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원래 전향한 사람이 더하다 그리고 이러한 삼성의 노동 관리는 신세계 등 일족 계열사에까지 전수(?)되었다고 한다. 좋은건가
  • 가끔 인터넷에 이병철이 이완용 후손이라는 그림이 떠돌기도 하는데(디시인사이드 정보전사 글이라든지), 물론 이완용 후손 중에 이병철이라는 사람이 있지만, 그 이병철과 기업가 이병철은 동명이인일 뿐이다. 일단 이완용은 우봉 이씨, 이쪽은 경주 이씨라서 본관부터 다르다. 그러니 괜히 헛소문 내다가는 인실좆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하자.

8 가계도

가계도를 보면 알듯이 삼성을 비롯 한국의 내로라 하는 재벌들이 그의 후손이다. 이들은 경제적 영향력에서 범 현대 일가와 더불어 한국 굴지의 재벌가를 이룬다.

  • 이병철
  • 아내 박두을[18]
    • 1남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妻 손복남[19]
    • 2남 이창희새한미디어 회장, 妻 나카네 히로미(귀화 後 이영자)[23] 새한그룹 회장
      • 1남 이재관 前 새한미디어 부회장, 妻 김희정 동방그룹 회장의 1녀
      • 2남 이재찬 前 새한미디어 사장 (2010년 자살), 妻 최선희 동아그룹 최원석 前 회장의 딸
      • 3남 이재원 前 새한정보시스템 대표, 妻 김지연 (주)서영주정 회장의 2녀
      • 1녀 이혜진, 夫 조명희 前 라이프그룹 회장의 1남
    • 3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妻 홍라희[24]
    • 1녀 이인희[29] 夫 조운해[30] 前 강북삼성병원 명예이사장
      • 1남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 妻 이정남
        • 1녀 조연주 한솔케미칼 부사장
        • 2녀 조희주
        • 1남 조현준
      • 2남 조동만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妻 이미성
        • 1녀 조은정
        • 2녀 조성진
        • 1남 조현승
      • 3남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妻 안영주
        • 1녀 조나영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夫 한경록[31]
        • 1남 조성민
      • 1녀 조옥형, 夫 권대규 HS창업투자 부사장
        • 1녀 권애영
        • 1녀 권이주
      • 2녀 조자형, 夫 빈센트 추[32]
    • 2녀 이숙희 LG家로 출가[33], 夫 구자학[34] 아워홈 회장
      • 1남 구본성 아워홈 대표이사 부회장, 妻 심윤보
      • 1녀 구미현, 夫 이영렬 한양대의대 교수
      • 2녀 구명진, 夫 조정호[35]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 3녀 구지은 캘리스코 대표이사
    • 3녀 이순희, 夫 김규 서강대 영상대학원장
      • 1남 김상용
    • 4녀 이덕희, 夫 이종기 前 삼성화재 회장
      • 1녀 이유정
    • 5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夫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
      • 1남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前妻 고현정(배우, 2003년 이혼), 妻 한지희[36]
        • 1남 정해찬
        • 1녀 정해인
        • 2013년 한지희가 1남1녀 쌍둥이 출산함
      • 1녀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夫 문성욱 신세계I&C 부사장
        • 1녀 문서윤
        • 2녀 문서진
    • 이외에 일본인 처에서 얻은 이태휘[37], 이혜자가 있다.
  1. 자세히 보면 아들 이건희보단 손자 이재용과 훨씬 더 닮았다.
  2. '호암미술관'의 그 호암이다.
  3. 지금의 대구대학교와 다른 대학이며, 영남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이다.(현재의 영남대학교는 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통합한 학교다.) 유명한 경주 최씨 일가와 협력하였다. 여기서도 박정희와는 악연...더불어 최씨 일가 지못미...
  4. 하지만 이맹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병철은 한국비료 헌납 때도, 언론통폐합 때도 한 치의 기복도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날에도 바로 회사로 나가 집무실에서 일을 봤다고 하니 흠좀무. 근데 언론통폐합 때면 이미 아버지랑 사이가...
  5. 이 때문에 이창희가 그룹 내 중진들을 움직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미국으로 쫓겨났다.
  6. 그렇지만, 홍진기는 어디까지나 이병철의 바지사장이었다.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자기 사위였던 이건희에게 경영수업을 해준건데 법률, 사회문화, 역사, 문학, 사례 등을 현재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케이스 스터디식의 교육을 해줬다고 하니 흠좀무.
  7. 사실, 이건희 회장이 후계자 시절, 반도체 산업 진출을 위해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가 경영 위기를 맞자 이병철이 삼성전자로 하여금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회생시켰다. 그리고 이건희는 자기 아들 이재용이 IT버블로 인해 커리어에 상처를 입게 되자 자신의 부친처럼 이재용의 회사들을 계열사들로 하여금 인수하게 했다.
  8. 사실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병철 회장이 일본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일본산업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그였기에 반도체 산업의 미래도 빨리 캐치할 수 있었던 것. 이건 와세다 대학 졸업하고 수시로 일본 들락거린 이건희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아들은 중국에 관심이 많다. 슬슬 인도에도 관심이 많은듯. 손주 쯤 되면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등.
  9. 포브스는 일본인으로 분류한다. 시게미츠 타케오. 참고로 1980년대 버블경제 버프로 세계 부자 순위 4위였다고. 그러나 버블이 꺼지며 내려갔다. 2010년대 현재는 국내 40위 안에 들어가는듯.
  10. 약어로는 CMT, 부인 박두을 여사 집안 유전질환으로 알려졌다.
  11. '이건희 스토리'라는 책을 보면 이병철 회장은 양복도 일반 브랜드 양복이 아니라 도쿄의 한 골목에 있는 어느 개인 양복점에서 맞춤식으로 지은 양복만을 입었고, 만년필은 항상 워터맨을 썼는데 수십 개를 사서 쓰다가 그 중에서도 가장 필기감이 좋은 것들만 찾아서 썼을 정도로 일류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이 있었다. 그러한 이념은 현재의 삼성그룹을 비롯한 범 삼성그룹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엘리베이터만 해도 탑승감이 좋은 독일제 티센크루프엘리베이터만 쓰는 걸 보면 말 다한 셈.
  12. 성문영어 시리즈의 저자 송성문도 대표적인 수집덕후였다고 한다. 자신의 성문영어책 인세를 모아 고미술품을 수집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을 정도라고 한다.
  13. 현재 롯데푸드의 모체가 되는 일동산업의 창업주.
  14. 323(-1)번이 다니는 남침산네거리와 홈플러스 대구점 사이의 도로.
  15. 정일권 총리, 장기영 부총리,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 등
  16. 그 외에도 장남 이맹희는 오듀세우스 우 브리타니아, 차남 이창희는 슈나이젤 엘 브리타니아, 3남 이건희는 를르슈 비 브리타니아로 각각 등장했다(...).
  17. LG 텃밭이던 전자사업에 삼성이 진출하자 시가에서 눈칫밥 먹는다고 딸이 이병철한테 호소했다가 도리어 욕만 먹었다고.(...)
  18.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이라고 한다.
  19. CJ그룹 고문, 손고문이 이병철 회장에게 상속 받은 안국화재 주식과 이건희 회장 소유 제일제당 주식을 맞교환 해 제일제당 분리 경영을 하게 되면서 CJ그룹이 삼성그룹에서 독립경영 하게 됐다.
  20. 고대 법대 졸업후 씨티은행 공채에 지원해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으나, 할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가 왜 남의 회사에서 근무하노 화를 내면서(...) 삼성의 주력계열사인 제일제당 경리부로 자리를 옮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남 이맹희 전 회장과는 서먹한 사이가 됐어도 장손자 이재현은 아꼈다고 한다.
  21. 이화여대 미대 출신. 대학 재학시 미팅으로 이재현 회장을 만났다고 알려져있다.
  22. 前 국회의원 민기식 딸
  23. 일본 아이치현 출신, 구 화족 명가 영애이나 이병철 회장은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결혼이 와전되어 이건희 회장이 일본인과 결혼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24. 홍진기중앙일보 회장 딸. 이건희 회장 처남이자, 홍라희 동생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대표이사다. 홍라희 집안은 현대家와 혼맥이 연결되어 있다.
  25. 임씨의 부친은 임창욱 대상그룹(조미료 '미원'으로 알려져 있다) 명예회장, 모친은 故 박인천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딸인 박현주 씨이며 장녀이다.
  26. 삼성그룹 평사원 출신으로 이부진 사장이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밀어붙여 신데렐라 스토리로 세간에 미화되기도 했으나, 결국 2014년 이혼소송에 돌입하며 빛이 바라고 말았다. 2015년 임우재씨가 가정을 지키겠다며 이혼에 반대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과연 어떻게 끝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
  27. 동아일보 故 김병관 전 회장의 차남. 인촌 김성수의 증손자다.
  28. 집안의 결혼반대와 외로운 유학생활 등이 원인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동기는 불명.
  29. 이병철의 자녀 중 맏이다. 장남 이맹희 부회장은 둘째다. 사업가적 기질이 뛰어나 이병철이 후계자 결정문제로 골치 아플 때 인희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노 한탄한 적 있다고 한다. 이병철 사후 전주제지를 물려 받아 한솔제지로 사명을 바꾸고 기업의 규모를 확장 해 한솔그룹으로 키웠다. 그룹에서의 공식직함은 '고문'이다.금융, 통신(018, 한솔PCS)사업까지 확장 했으나 IMF로 인해 사업을 정리 하게 된다. 대표이사 고문을 맡아 경영정상화를 진두지휘 했다. 세 아들도 어머니의 기업가 기질을 존경 해 어머니 대신 고문님이라 불린단다.
  30. 경북 의대 출신.
  31. 김앤장 소속 한상호 변호사의 장남.
  32. 타이완계 미국인.
  33. 혼인 이후 삼성이 당시 금성이 장악하고 있던 가전 제조로 진출하면서 양 가문 관계가 매우 나빠졌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돈 싸움 앞에서는 모두가 본능에만 의존할 뿐이다.
  34.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셋째아들. 특이하게 해군사관학교에 진학 해 해군장교로 복무 후 호텔신라 등 삼성그룹의 주요 계열사 임원을 지냈다. 삼성의 전자 사업 진출 이후 LG로 돌아가 LG의 주요 임원을 지내고 LG의 식품유통사업부문을 가지고 독립했다.
  35. 한진그룹 故 조중훈 전 회장의 막내아들.
  36. 플루티스트. 아버지 한상범 씨는 전 기업인으로, 대한항공 출신이다.
  37. 한때 이병철 회장이 후계자로 생각했었다는 소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