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에르네스토 카를로스(Ernesto Carlos) |
한국명 | 이원국(李源國 / Won-Kuk Lee) |
생년월일 | 1948년 5월 10일 |
국적 | 멕시코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중앙중-중앙고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67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소속팀 | 도쿄 오리온스(1966~1967) 프레즈노 자이언츠(1968~1969) 잭슨빌 선즈(1970)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1972~1973) 사라페로스 데 살티요(1973) 미네로스 데 코아우일라(1974~1979) 아세레로스 데 몬클로바(1980) 페트롤레로스 데 포사 리카(1980~1982) MBC 청룡(1983) |
1 소개
한국인 최초의 미국진출 야구 선수. 메이저리거로 불리지 못하는것은 그가 마이너리그에서만 뛰었기 때문이다.
2 커리어
2.1 학창시절
중앙중학교 3학년 때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가 중학교 3학년 말 10월에 중앙고등학교 입학 예정자 자격으로 서울시 고교야구 추계연맹전에 선을 보였는데 고교 선수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는 186cm의 큰 키에 80kg이 넘는 덩치로 당시 성인야구 선수들보다 커 타자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1964년 중앙고에 진학한 이원국은 1학년 때부터 주전 투수로 활약하고 2학년 때는 제 19회 전국지구별초청고교야구대회(황금사자기)에서 우승, 팀이 그 대회에서 처음으로 패권을 잡는데 공헌했다. 결승에서 그는 부산고를 만나 단 1안타만 내주고 동료인 유격수 이광환, 3루수 정동건 등의 호타호수비에 힘입어 7-0, 완봉승을 거두었다.
당시는 스피드건이 없어 구속을 측정할 수는 없었으나 150km/h 내외의 패스트볼로 성인 투수보다 빨랐다. 이원국과 비슷한 최고의 강속구 투수는 이후 재일동포 김호중과 선동열, 박찬호 정도로 기억된다.
이광환은 “내가 대구에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로 오니 아주 순둥이 친구가 있더군요. 생기기도 어린애같아 덩치가 너무 커 무슨 야구를 할까 했는데 던지는 것을 보니까 놀랄 만큼 강속구였고 재주도 뛰어났어요. 잠깐 반짝했지만 계속했으면 아마도 대표팀 투수로 이름을 날렸을 텐데 갑자기 일본으로 가 또 한 번 놀랐죠”며 그를 기억했다.
2.2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3학년에 올라간 다음 해 봄 그는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일본의 다이에이 영화사의 회장 겸 일본프로야구 팀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 회장이 그를 찾은 것이다. 그 전 해 지구별초청대회 우승 때 나가타 회장이 서울에 왔다가 경기를 보고 이원국에게 반해 스카우트에 나섰다.
도쿄 오리온즈 입단식에서의 이원국. 오른쪽은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
재학 중이었던 그 해 6월, 이원국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졸업을 한 다음 해 봄 정식으로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4년 전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 선수가 된 것이다. 오리온즈 2군에서 훈련하면서 경기에 나갔던 이원국은 새로 제정된 외국인선수 규정에 걸리고 일본선수들의 심한 견제로 1군 승격은 하지 못하고 1967년 12월에 귀국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일본 리그에서는 양손 투수로 데뷔를 시도하였으나 일본 방출 이후에는 우완으로 전향했다.
그리고 다시 1968년 초 미국 연수 길을 택했다. 시카고 컵스 스프링 캠프와 마이너리그에 참가한 그는 1968년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마이너리거 자격으로 입단하고 시범경기에도 출전했다. 5게임에 등판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메이저리그 진입은 실패했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와 신생팀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을 전전하며 트리플 A와 더블A팀에서 3년 간 던졌다.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시절.
1972년 5월 멕시코 야구 리그[1]로 건너가 에르네스토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사비나스 파이레츠, 포사리카팀에서 11년 간 150승 85패의 대기록을 올리며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 멕시코에서는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79년 기록을 보면 37게임 35선발 24완봉 277이닝 19승 14패 174삼진 70볼넷 ERA 2.53.
2.3 국내 복귀, 은퇴
텍사스에 거주하면서 일본계 2세 미국인 간호사 제인 리와 결혼한 이원국은 1982년 조국에 프로가 출범하자 다음 해 3월 MBC 청룡의 초청으로 17년 만에 귀국했다. 35살의 최고령 멤버로 청룡에 합류한 이원국은 새로 팀을 지휘하게 된 김동엽 감독과 훈련 방식의 차이로 갈등을 느꼈다.
김 감독이 모든 선수들에게 새벽 5시부터 훈련을 요구하자 그는 “야간경기가 많은 프로선수들에게 이런 훈련은 무리이고 효과가 적습니다.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 같은 연습을 하지 않습니다”며 시정을 요청했다. 이종도, 이해창, 이광은, 김재박 등 몇 몇 고참 선수들을 제외하곤 혹독하게 기합을 주었던 김 감독은 이원국을 훈련과 경기에서 철저히 ‘왕따’를 시켰다. 불규칙한 일정 때문인지 이원국은 오른쪽 팔꿈치 부상까지 당해 고생하면서 빠른 공보다는 컨트롤 위주의 투구를 했다.
3 은퇴후
결국 이원국은 청룡에서 1983년 한 시즌 동안 8경기에 등판해 1승1패, 방어율 4.42를 기록하고 다시 가정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그는 멕시코의 사비나스 팀 단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손재주가 좋은 장점을 살려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와 오스틴에서 건축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삼성의 오스틴 전자공장 건물 중 일부가 그의 회사에서 건설한 것이다.- ↑ 멕시코 태평양 리그와는 별개의 리그로 멕시코 태평양 리그는 멕시코의 프로리그인 반면 멕시코 야구리그는 마이너리그로 트리플 A리그다. 현재는 그 명성이 쇠락했으나 이원국이 뛰던 당시에는 AAA급에 가까웠던 상태. 단 겨울, 봄에 열리는 다른 윈터리그들과 달리 여름에 열린다는게 차이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