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텍사스의 도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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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stin. 전화걸 때 미국내 지역번호는 512. 미국 중남부 텍사스의 주도. 시내 인구는 약 93만명이고, 광역권 인구 200만 정도. 물론 자체 인구가 200만이 넘는 휴스턴이나 광역권 인구로 텍사스 최대도시인 댈러스-포트워스에 비하면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광역권 인구 200만 명이면 미국에서는 꽤 큰 도시로 간주된다. 텍사스의 3대 도시인 휴스턴, 샌안토니오, 댈러스에 밀려 작아보이지만 텍사스가 아닌 남부의 다른 주에 있었다면 최대도시가 될 수도 있었던 규모.
오스틴보다 더 큰 대도시로 가장 가까운 곳은 샌안토니오로 남서쪽으로 약 80마일(약 130km) 떨어져 있으며, 휴스턴과 댈러스-포트워스는 각각 남동쪽과 동북쪽으로 비슷하게 약 190마일(약 310km)씩 떨어져 있다.
구호는 "Keep Austin Weird"(오스틴을 계속 이상하게)인데, 이게 포틀랜드의 도시 구호와 겹치는지라 이상한 데서 비교되고 있다(...). 한편 이걸 비꼬아서 "Austin, Not Weird, Just Mediocre"(오스틴은 이상하지는 않고, 그냥 보통이다)[1]라는 말도 생겼다.
자연발생적인 도시가 아니고, 처음부터 텍사스 공화국의 수도로 삼을 목적으로 건설된 계획도시이다. 텍사스 공화국은 이 곳에 수도를 정해놓고 도시 건설을 시작했으며, 1839년 완전히 이 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텍사스 독립전쟁의 영웅인 스티븐 오스틴을 추모하여 오스틴으로 도시 이름을 정했다. 그리고 1845년 텍사스 주가 미국 연방에 편입되면서, 그대로 주도가 되었다. 텍사스 주가 미국 정식주가 되면서 현재와 같은 경계가 설정되면서, 결과적으로 이 도시는 주에서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1883년 주립인 텍사스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오스틴은 주도인 행정중심지이자 텍사스대학교의 메인 캠퍼스가 위치해있는 학원도시가 되었다. 오랫동안 행정수도 겸 학원도시의 성격이 강해서 휴스턴이나 댈러스, 샌안토니오 같은 대도시에 비해 밀리는 편이었으나,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산업의 발달로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주도+대학도시라는 점과 최근 급성장한 도시라는 점은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와 비슷하다.다만 날씨는 훨씬 덥다. 인구는 1990년 당시 47만명으로 이때만해도 이 도시보다 인구가 많은 주도가 여러 개 있었으나, 2010년 센서스에서는 79만명에 달했고, 2012년 추계에서는 84만명을 넘기면서 인디애나의 인디애나폴리스를 제치고 미국 50개 주의 주도 중에서 애리조나의 피닉스에 이어 인구가 많아졌다. 텍사스 주에서는 4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고, 미국 전체에서는 11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급성장했다. 아직 위성도시와 교외 인구는 많은 편이 아니어서, 도시권 인구는 이보다 순위가 더 떨어져 30위권 정도이다.
80년대~90년대를 거치면서 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 중 한 곳으로 떠올라 이 지역을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 빗대어 실리콘힐스(Silicon Hills)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델컴퓨터의 본거지이며[2], 많은 정보통신업체들이 들어서 있다. 대한민국의 삼성전자가 오스틴에 대규모 사업장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90년대에 조지 워커 부시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시절, 좋은 조건을 제시하여 오스틴에 삼성 공장을 유치하였고, 이후 삼성은 계속 공장 규모를 키웠다. 오스틴 시에서는 삼성전자를 기념하여 삼성 공장 주변 도로 이름을 Samsung Boulevard로 고쳤다.#[3]. 그리고 Samsung Austin 인접하여 long day drive라는 도로도 있다. (삼성에서 일을 늦게까지 시켜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음.
도시 자체는 1830년대에 건설되어 미국에서는 오래된 편이라고 볼 수 있는 도시지만, 이와같이 행정중심지이자 대학도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잠자는듯한 조용한 도시였으나, 최근 급성장하면서 신흥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덕에 광역도시권 인구는 아직 늘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로스포츠 시장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편이어서 샌안토니오, 댈러스, 휴스턴과 달리 4대 프로스포츠 팀은 자리잡지 않고 있다. 대신 텍사스대학교의 스포츠가 가장 인기를 모으고 있다. 특히 풋볼은 미국 남부를 대표하는 명문이자 옆동네 오클라호마의 오클라호마대학과 레드리버 슛아웃이라는 미국에서 가장 치열한 더비매치가 유명하다.
텍사스 주의 주요 도시 중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도 유명한데, 히스패닉 비율은 35% 정도로 샌안토니오, 휴스턴, 댈러스에 비해 오히려 낮은 편이라 히스패닉의 인구 비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닌 듯 하고, 그보다는 주민들의 학력수준이 높은 편이고 학생이나 공무원, 정보통신업계 종사자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주 전체적으로는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데도 이 도시는 민주당 지지율이 상당히 높은 편. 특히 최근 유입된 주민들도 주로 정보통신산업에 종사하는 고학력 젊은층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는 듯(...) 때문에 선거 결과 지도에서는 주변이 다 빨간데 혼자 파란색으로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 그런데 정작 이 도시에 자리잡은, 텍사스 주의 가장 높으신 분은 1994년 그분이 당선되신 후 20년 가까이 계속 빨간색이 상징인 당 소속이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으로 보인다(...) --[4]
도시 외부 교통은 역시나 항공기가 중심으로, 오스틴 버그스트롬 국제공항이 다운타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샌안토니오에서도 크게 멀지 않고, 미국 전국구급 공항인 공항들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있어 주로 지역연결편 위주의 노선이 많지만, 최근 급성장하면서 미국 각지의 주요 도시와의 노선도 늘어나고 있으며, 멕시코 멕시코시티와 영국 런던 노선까지 신설된다고 한다. 한편, 서부의 인구가 두 배 이상 많은 주도에도 없는 암트랙 노선도 존재한다. 덕분에 이 도시는 현재 미국 주도 중 암트랙이 연결되는 가장 인구가 많은 주도. 시카고와 샌안토니오를 연결하는 Texas Eagle이 하루에 한차례씩 다닌다. 대중교통은 Capital Metropolitan Transportation Authority라는 기관에서 운영하는데, 시내버스가 있고, 새로운 경전철 시스템이 2010년 개통하였다. 경전철은 기존 철도노선을 활용하여 교외지역과 도심을 연결하며, 도심은 노면전차처럼 도로 위에 선로가 나 있다. 텍사스대학교 캠퍼스와 연결되는 모든 버스노선들이 붐비지만, 경전철의 경우 텍사스대학교 학생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텍사스의 다른 지역들보다는 대중교통이 편리하다.
텍사스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특히 특색있는 음악의 중심지로 알려져 있어서 공연장이 많고, 음악 축제도 열린다.[5] 린든 존슨과 조지 워커 부시, 두 명의 미국 대통령과 연고가 있는 도시이다. 린든 존슨은 오스틴 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 출신으로, 이 도시와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린든 존슨 대통령 기념관과 박물관이 이 도시에 들어서 있고, 그 외에도 그와 부인 레이디 버드를 기념하는 시설물이 많다. 위 사진에 나온 호수도 레이디 버드 존슨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아들 부시로 유명한 조지 워커 부시는 텍사스 주지사로 재직하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덕분에 부시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한 곳도, 대통령 당선 후 대통령직 인수를 준비한 곳도 이 도시이다.
오스틴 파워와는 아무련 관련이 없는 도시이다.
오스틴 애리즈와도 상관없다. 애리즈는 위스콘신주의 밀워키 출신이다.
스티브 오스틴과는 텍사스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다.
2 영국의 대중차 브랜드
(사진은 오스틴의 옛 로고 중 하나인 "플라잉 A" 엠블럼. 경우에 따라서는 폰트 대신에 창립자의 서명이 같이 쓰이기도 했다.)
오스틴 모터 컴퍼니(Austin Motor Company)는 1905년에 허버트 오스틴(Herbert Austin)에 의해 설립된 영국의 자동차 회사로, 1952년에 모리스와 합병했으며 오스틴 브랜드 자체는 1987년까지 사용되었다. 본래는 모리스에 비해서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합병 후에는 모리스보다 우위를 두다시피했으며, 브리티시 레일랜드 합병 후에는 오히려 모리스의 "진보적인" 이미지를 꿰차갔다. 상표권은 현제 SAIC가 소유하고 있으며, 2015년에 John Stubbs라는 사람이 동명의 자동차 회사를 다시 세우고 2016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할 계획이 있다고 한다. 나머지 내용은 추가바람. 관련 정보 링크
2.1 역사
허버트 오스틴은 1887년에 양털깎이 기기 사업을 하던 중 아일랜드 출신의 프레드릭 울즐리(Fredrick Wolsely)를 만났고, 1984년에 합작으로 시제품 자동차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동차 회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울즐리와 따로 자동차 회사를 꾸리고 싶었던 오스틴은 1905년 9월에 영국 버밍엄의 롱브릿지(Longbridge)에 있는 폐업한 인쇄소 건물을 거점으로 삼고, 은행 융자와 투자 설명회를 통해 필요한 자원을 마련한 후에 그해 12월에 "오스틴 자동차 회사(Austin Motor Company)"를 설립했다. 1906년 4월에 최초의 오스틴 차가 출고되었고, 그해 말까지 50명의 노동자들이 26대의 차를 생산했다.
노리치, 맨체스터, 런던에 전시장을 차린 오스틴은 "대중에게 자동차를 공급할 것이며, 일관 작업 방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자동차를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을 조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오스틴 자동차 회사에서는 일부 부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들을 한 공장에서 생산해 사용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전차, 항공기, 군수품을 제작하고 납품하는 과정을 통해 급속히 성장했으며, 전쟁이 끝난 1918년에는 오스틴 사에 체용된 직원들이 약 2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전쟁 직후의 피폐한 경제 상황 때문에 오스틴에서 판매하던 대형차들의 수요가 크게 감소했고, 오스틴이 직원들에게 1달간의 급여를 포기해달라는 요청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때 직원들이 오스틴의 요청에 따른 덕분에, 회사는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22년에는 그동안 오스틴이 창업자로서 꿈꾸어 왔던 "제대로 된 대중차"인 오스틴 세븐을 출시할 수 있었다. 오스틴 세븐은 1차 세계대전이 갓 끝난 시기였던 그 당시의 영국에 잘 부합한 덕분에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1939년까지 총 29만 924대나 되는 수를 판매했으며, 일본의 닷선과 독일의 BMW, 미국의 아메리칸 밴텀 등이 라이센스를 따 가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아브로 랭커스터 폭격기를 비롯한 여러 군수용 운송수단들을 생산했고, 오스틴이 세상을 떠났던 1941년에는 누적 생산대수가 86만 5천대까지 이르렀다. 1947년에는 100만번째 오스틴 자동차가 생산되었으며, 1952년에 200만번째 차가 생산되었다. 또한 이때는 오스틴 A90 아틀란틱이나 오스틴 메트로폴리탄과 같은 차들을 미국으로 수출하는 등, 나름대로의 수출 중심 업체로 번성하기도 했다.
1952년에는 경쟁사인 모리스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면서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British Motor Corporation. 이하 BMC)"를 결성했고, 또한 자동차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였던 도널드 힐리(Donald Healey)와의 합작이 성사되어 오스틴-힐리 브랜드가 설립되었다. 1956년에 수에즈 위기로 인해 유럽의 석유 공급이 부진해졌을 때, 모리스 출신의 엔지니어 겸 디자이너인 알렉 이시고니스(Alec Issigonis)가 설계한 클래식 미니를 오스틴과 모리스 브랜드로 출시했으며, 이것 역시 "제대로 된 대중차"였던 오스틴 세븐과 마찬가지로 영국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1965년에는 롱브릿지 공장이 약 37만 7천대의 차를 생산하면서 최대 연간 생산대수를 기록했고, 미니와 BMC ADO16을 비롯한 베스트셀러 소형차들이 성과를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BMC는 제정 부족으로 정부로부터 수 차레 지원을 받아야만 했으'며 결국 1968년에 이르러 영국 정부의 제안으로 로버와 트라이엄프 고급차 및 상용차를 생산하던 레일랜드와 합병하면서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이하 BL)"가 설립되었다. 이때도 오스틴 브랜드는 계속 살아있었지만 BL이라는 거대 기업이 겪어야만 했던 회사 임원들의 끊임없는 불화와 갈등, 파업이 유난히 심각했던 1970년대 영국에서도 더욱 두드러지는 수준의 파업사태, 끝없이 떨어지는 품질과 생산대수로 인해 엄청난 수난을 겪었고, 이때 출시된 오스틴 알레그로 등의 차들은 심각한 디자인과 품질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1974년 말에 회사 전체가 파산했으며, "라이더 리포트"라는 제안에 따라 BL은 국유화되기에 이른다. 물론 국유화 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하지만 오스틴에게도 한 줄기 빛이 있었는데, 1980년에 출시된 슈퍼미니급 소형 해치백은 오스틴 메트로가 크게 히트하면서 한동안 오스틴과 BL의 돈줄이 되어 준 덕분이였다. 새 경영자인 마이클 에드워즈(Michael Edwards)의 경영 하에서, BL은 불필요한 살을 걷어낸 뒤 "오스틴 로버 그룹(Austin Rover Group)"으로 재정리되었고, 모리스와 트라이엄프, 재규어 브랜드를 정리한 뒤 오스틴과 로버, MG, 랜드로버, 그리고 레일랜드 브랜드로 차기 라인업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1983년에는 알레그로의 후속으로 오스틴 마에스트로 준중형 해치백이 생산되었고 잠시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했지만 파업과 품질 문제에 또다시 휘말렸고, 이듬해에 출시된 중형 세단 오스틴 몬테고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1988년에는 마거릿 대처 정부의 민영화 정책에 따라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ritish Aerospace. 이하 BAe)로 매각되었다. 1986년에 "로버 그룹(Rover Group)"으로 개명한 것과 어울리도록 하고 제품을 고급화하고자 로버 브랜드와 혼다와의 기술제휴 관계에 집중하기로 한 BAe의 정책에 따라 1987년에 오스틴 브랜드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기존에 오스틴 브랜드로 생산했던 메트로와 마에스트로, 몬테고는 저가 라인업의 수요를 보충하기 위해 모델명으로만 죽 생산되었고 마에스트로와 몬테고는 1994년에 이름 그대로, 메트로는 "로버 100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1997년에 최종 단종되었다.
현재 상표권은 로버 그룹의 본체를 인수한 SAIC[6]가 소유하고 있으며, 2012년에 오스틴 자동차 회사가 영국 법인에 등록되었다가 얼마 안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15년에 John Stubbs라는 사람이 동명의 자동차 회사를 다시 세웠으며, 창립자는 2016년부터 오스틴 이름으로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밝혔다.
2.2 생산 차종들
- 오스틴 세븐
- 오스틴 에잇
- 오스틴 트웰브
- 오스틴 A30과 A35[7]
- 오스틴 A40
- 오스틴 A50
- 오스틴 A60
- 오스틴 A90 아틀란틱
- 오스틴 메트로폴리탄[8]
- 오스틴 FX4[9]
- 오스틴 웨스트민스터
- 오스틴 캠브릿지
- 오스틴 프린세스와 엠배서더
- 오스틴 스프라이트
- 미니 (오스틴 세븐/오스틴 미니/오스틴 미니 쿠퍼/오스틴 미니 컨트리맨)
- BMC ADO16 (오스틴 1100/1300)
- BMC ADO17 (오스틴 1800/2200/3-Litre)
- 오스틴 맥시
- 오스틴 알레그로
- 오스틴 메트로
- 오스틴 마에스트로
- 오스틴 몬테고
3 영어권 남자 이름
- ↑ Mediocre라는 말의 뜻은 보통이라는 의미이지만, 주로 썩 좋지 않고 보통이라는, 나쁜 의미의 보통이라고 할 수 있다. 어중간하다가 어감까지 포함하면 가장 가까운 뜻이다.
- ↑ 오스틴 시내에서 창립되었고, 현재는 교외의 라운드록에 본사가 있다.
- ↑ 정식 도로명으로 등록된 명칭으로 주소 이름에도 들어간다. 구글 지도에는 한글로 샘성 대로로 나온다(...) 한편 인근에는 Taebaek Drive라는 한국적인 이름을 가진 도로명도 있는데, 이 도로명의 유래에 대해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 ↑ 미국의 청원 사이트에서 오바마 재선 이후 텍사스의 연방(미국) 탈퇴 청원이 최소 인원을 모으자, 오스틴은 텍사스에서 탈퇴하여 연방에 남겠다는 청원도 최소 인원을 모았다
- ↑ 대표적으로 South by Southwest SXSW
- ↑ 처음에는 산하 기업인 난징자동차가 사들였으나 곧 모회사로 넘어갔다.
- ↑ 월래스와 그로밋 시리즈에서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차가 오스틴 A35 밴이다.
- ↑ 미국에서는 "내쉬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 ↑ 영국 런던에 많이 돌아다니는 블랙캡 택시의 대표차종으로, 현제 영국에서 현역으로 운행되는 LTI TX 시리즈가 이 차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