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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인구(李寅求 / In-koo Lee) |
생년월일 | 1980년 11월 7일 |
출신지 | 서울특별시 |
학력 | 강덕초-잠신중-배재고-동아대 |
포지션 | 외야수(좌익수, 중견수) |
투타 | 우투좌타 |
프로입단 | 2003년 롯데 자이언츠 2차 8라운드 57순위 지명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2003~2013) |
1 선수 경력
2007년도에 빈번하게 주전 외야수로 등용되었지만 시즌 내내 1할에 머무르는 타격과 시각테러에 가까운 수비 중 에러로 응원보다는 야유를 많이 받는 선수였다. 강병철 감독이 그의 스윙 훈련을 보고 2007 시즌의 3번 타자감으로 지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2007 시즌에는 지나친 기대를 받아서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해 강병철의 양아들 취급을 받았고 전지훈련에도 가지 못했다.
1.1 2008년
2008년도엔 2군에 계속 머무르면서 본즈놀이(타율 3할 출루율 4할 장타율 5할)를 하며 무력시위를 벌였지만 1군에 한번도 콜업되지 못해 '롯데의 학연 영향으로 2군 선수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는 기사까지 나왔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무식할 정도로 많은 훈련량을 소화한다고 하며 악바리로 유명한 박정태마저 이인구의 훈련을 보고 지독하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8888577 이후 놀기 좋아하는 젊은 선수가 많아진 롯데에서 드문 노력파라 그런지 이 이야기 덕분에 롯빠들의 시선이 많이 관대해졌다.
그 노력의 보답인가, 2008년 7월경 정수근이 불미스러운 일로 출장정지를 당한 틈을 타 1군로스터에 다시 콜업된 후 침체된 롯데 타선에서 맹활약, 많은 롯빠들에게 칭찬을 받았다.[1] 시즌 중에는 테이블 세터로서 꾸준히 출루를 해줬고 결국 팀이 준플까지 진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외야수로서도 받기 어려운 타구를 몇번씩이나 잡아내는 호수비를 몇 번이나 보여 줬다. 롯데가 죽을 쑨 2008년 준 플레이오프에서는 김주찬과 함께 나란히 각성. 계속해서 출루를 해주었고 포스트시즌 한경기 최다안타 타이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3차전에서는 클린업 트리오에서 점수가 안 나오니까 아예 테이블 세터 둘이서 득점까지 올리는 맹활약을 했다. 준플에서 이인구의 타율은 무려 5할이였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 왈, 이인구 없이 롯데의 가을 야구도 없었다. 롯데의 전력의 명실상부한 핵으로 부상했다.
2008 시즌에는 타율 0.289삼못쓰, 홈런 2, 타점 14, 도루 11, OPS 0.724로 데뷔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1.2 2009년
2009 시즌 초창기에는 2008 시즌 보다 좀 더 부진했으며 사람들이 다시 이승화, 심지어 정수근을 찾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성환의 부상 이후 톱타자로 나서면서 각성 급격한 타율 상승을 이뤘다. 혹자는 정수근 복귀설이 불러온 해담로이드 효과에 주목한다. 그러나 본인이 상황에 따라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인지라 타순 변경만 있으면 다시 죽을 쓴다. 무엇보다도 김주찬과 뇌를 나눠쓴다는 말이 나올만큼 주루센스가 형편이 없어서 빠른 발을 생각보다 잘 살리지 못한다. 사실 허벅지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고 한다.
장점으로 평가되는 부분은 성실함과 수비[2]다. 2008 시즌 이후에는 수비가 많이 안정되어 롯데의 외야수 중에서는 이승화 선수 다음으로 중견수 수비가 좋고, 롯데의 외야수 중에서는 타격/수비/주루등 모든 면에서 가장 고른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2007 시즌에는 2007년 1할 7푼의 타율에도 불구하고 출루율은 3할이라는 좋은 선구안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2008 시즌 이후부터는 BB/KK가 08 시즌 0.56, 09시즌 0.43으로 평범한 선구안을 보여주고 있다. 버닝했던 2008 시즌도 7월 중순 이후에 1군 합류 후 보여 주었던 것이고, 09시즌도 시즌 초반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6월 이후로는 극심한 부진을 보여주어, 한 시즌을 끝까지 치룰 수 있는 체력 문제가 의문시된다.
2009 시즌은, 타율 0.269, 홈런 5, 타점 33, 도루 6, OPS 0.735를 기록했다.
1.3 2010년
롯데의 넘치는 외야 자원으로 인해, 2010 시즌은 출장할 기회가 없다시피했다. 1군 5경기 출장이라고 해도 실제 타석에 들어선 것은 2차례(안타 無)뿐.... 9월 24일 경기에 대주자로 출장해서 1득점한 것이 전부. 그래도 박정준(2경기 출장, 단 1차례 타석에 섰다)보다는 낫다고 해야하나...
1.4 2011년
시즌 초 주전 외야수인 김주찬이 부상을 당하면서 출전 기회를 받고 있다.
크게 뛰어나지도 않지만 크게 모자라지도 않은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김주찬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2011년 4월 23일 저녁에 어머니가 끝끝내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2011년 6월12일 사직 한화전에서 무려 6타수 5안타의 맹타를 휘두르며 팀의 17대2 압승을 이끌었다.
7월 23일 기준 타율 0.275 홈런 1 타점 11, OPS 0.729[3]
9월 30일 최동원 데이 때 투런홈런을 쳐서 대선배 가는 길에 승리를 거두는 데 수훈선수가 되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대타로 출장하여 1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나머지 경기는 모두 결장했다.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1.5 2013년
2013년에는 1군 2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고 안타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시즌 후 정보명, 권영준, 박건우, 변용선과 함께 방출되었다.
12월 26일날 기사에 따르면 1달이 지나도록 어느 구단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자 현재 지도자 자리를 찾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계형이라 그런지 안타깝기만 하다. #
2014년 1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고양 원더스 입단을 추진중이라고 한다. #
그리고 23일 훈련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고질적인 손목 통증 때문에 결국 훈련을 포기했다.#
2 지도자 경력
2014년 박정태가 운영중인 사회인 야구 레슨 클럽#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같은 해 9월부터 대구고에서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
2016년 현재 부산공고 코치로 있으며 사회인야구에도 뛸 예정이라고 한다.
3 야구 외
중딩시절 선배가 이인구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인구 선수가 잘못 알아듣고 바나나와 우유를 사 왔다는 이성득 해설위원의 폭로 때문에 '인구사와라'라는 별명으로 야갤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또 프로데뷔 첫 홈런을 치고도 눈치를 보여 음료수를 먹거나 경기 도중 코피를 흘리는 등의 안습 에피소드가 꽤 있다.
- 동아대학교 시절 바나나 우유를 사오라고 선배가 시켰는데 바나나랑, 우유랑 따로 사왔다.
- 선배가 새우깡 사오면서 남는 돈으로는 사오고 싶은 거 사오라고 시키니 새우깡이랑, 먹물 새우깡, 매운 새우깡을 사왔다.
- 베스킨라빈스 31 에서 점원이 '세 가지 고르고 이름을 말해주세요'라 하자 '이거, 이거, 이거 주세요 그리고 이인구 입니다.' 라 대답했다.
- 범타로 물러나면 눈치를 보면서 물 먹고, 안타나, 홈런을 처야지 이온 음료수를 마신다.
4 별명
왜구를 닮은듯한 외모로 왜구인구사와라 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인구와 일본의 오가사와라 선수의 이름을 합쳐 인구사와라라는 별명이 생긴거라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선수는 뭐 하나 똑같은 점이 전혀 없으므로(수비 포지션도 이인구는 외야수, 오가사와라는 3루수로 완전 다르다) 그 가설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4]
사실 종갓집 자손이라는게 밝혀졌으며 9대조 병조판서 이사명 등 말 그대로 양반집안 출신.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 하는 소심한 성격을 바꾸기 위해서 야구를 시작했다고 하며 처음에는 문인집안이라 사학자인 조부의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참 교육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을 하기로 했고 이후 조부의 의견처럼 집안 전통교육을 병행하면서 야구를 계속 해왔지만 우여곡절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잉선비, 잉대감 등의 별명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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