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1 한국의 영문학자

李仁秀. 황무지(T.S. 엘리엇)를 최초로 번역한 인물. 일제 연간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이 낳은 불세출의 영문학자였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자손들도 영문학자. 장택상 계열이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서울탈출에 실패해서 북한 점령 당국에 의해서 체포, 포로 통역및 미국과 이승만 비판 삐라 작성등에 종사하다가 서울 수복후 친북 부역혐의로 처형되었다.

문제는 그가 뚜렷한 신념이 있어서 북한에 협조한 것이 아니라는 점. 서울 수복후 잡힌 것도 월북하다 잡힌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북한군 진영을 목숨을 걸고 기적적으로 탈출해서 서울에 진입한 미 해병대에 귀순했는데. 국군에서 인수 인계를 강력하게 요청해서 국군에 인계된 후 대한민국 특무대에 의해서 처형되었다(...)

재미있는건 당시 우익인사였다가 생존과 남편의 안위를 위해서 북에 협조한 작가 최정희는 특무대에 체포되었으나 훈방조치(...) 이승만 정권 비방 격문을 돌렸던 시인 노천명은 징역 10년형을 받았으나 석달만에 석방되었던 것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것. 많은 지인들은 그가 처형된 것을 믿지 않았고 50년 12월 당시 문예 잡지에는 천연덕스럽게 지금 국군에 체포돼서 수감중인 문인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영문 위키나 한국전쟁을 다룬 미국측 기록에는 이인(...)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인은 일제 강점기 인권변호사 출신의 장관이다.

2 이승만의 양아들

李仁秀. 1931년 9월 1일 경기도 의정부 출생으로 이승만의 자식(?)중에서 유일하게 장수했다. 친아들 이봉수는 10살때 사망했고 첫 번째 양아들 이은수[1]는 1949년에 파양, 두 번째 양아들 이강석[2]은 사망했고, 이승만의 하야 후 1961년 11월 13일 이승만의 측근들과 전주 이씨 종친회의 소개로 만 30세의 나이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3][4] 이강석이 어른의 사정으로 효령대군파임에도 양녕대군파인 이승만에게 입적되었다고 말이 많아서[5] 아예 양녕대군파에서 명망있는 청년으로 입적시켰다. 항렬도 맞는데다[6] 영어에 능통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는 것도 한 몫을 했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수료한 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정치학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과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명지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이승만 관련 단체를 맡아서 이승만 미화에 앞장선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이승만의 여러 병크를 인정하고 사죄하는 편이었으나[7] 2000년대부터 흑화에 들어갔다. 이를테면 서울 1945에서 여운형 암살 배후가 이승만인 것처럼 묘사되어있어서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했다(…). 그리고 4.19 혁명 단체에 사과하면서 오히려 제주 4.3 사건은 정당화시키려는 등 문제가 많았다. 이승만을 국부로 받아들이며 동상을 세우고 재평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조선일보한국논단 같은 곳과 끼리끼리 통하다보니 친하다고 한다.
  1. 단. 호적 상으로만 이승만의 양아들이었지 사실상은 아니었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난 뒤 이승만의 첫번째 부인 박승선이 고아원에서 아이를 한 명 데려와 '은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입양한 것.
  2. 1960년 4월 28일 친부모인 이기붕일가를 살해하고 자살. 여기까지 보면 책임감이 있어보이지만, 이강석은 제1공화국 시절 깽판을 쳐도 누가 뭐라 못했기 때문에 알아서 기어야했다. 오죽하면 이런 사건까지 일어났을까.
  3. 이전 항목에는 이승만 사망 후 프란체스카에게 입적시켰다고 기술되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의 사망은 1965년.
  4. 참고로 당시 이인수의 친아버지는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인 이승용(李承用)이었다.
  5. 옛날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고려 사항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강석이 양녕대군파였다해도 대수(代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조부와 손자뻘...
  6.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17대손 秀자 항렬이다. 같은 항렬의 유명인 중 한 명이 바로 화천 사시는 취미가 트위터인 어느 시인.
  7. 하지만 1994년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 표현물이라며 작가 조정래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던 적이 있다. 참고로 조정래는 긴 공방 끝에 2005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 외에도 같은 해 초에 KBS1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극장 - 대통령에 도전한다 최능진> 편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걸었으나 2002년에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