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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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이스북 그 유명하고 탈도 많은 트위터

대한민국소설가이자 한국트통령에서 레프트롤러까지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뉜다. 음력 1946년 8월 15일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방송 출연등을 기점으로 인터넷 등에서의 세속적인, 특히 정치적인 행보가 잦아지고 자연스럽게 수많은 논란을 일으킨 인물.퍼거슨 경 연승중...
생긴건 산속에 박혀 세속적인것과 떨어진 도사같은데.
이매탈 닮았다

책으로는 바른 삶을 지향하지만 사실 상 자신이 추악한 위선자.

2 이력

1946년 음력 8월 15일경남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에서 출생했다.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바깥 외(外)자와 항렬자인 빼어날 수(秀)를 합해서 이름이 이외수가 되었다.[1]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그가 3살때 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었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화랑무공훈장까지 받은 분이었다. .[2]

아버지는 여러 곳에서 군복무를 하였고 이외수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학교를 전학다녔는데 고향인 경남 함양군 상내백초등학교, 대구광역시 삼덕초등학교, 강원도 화천군 신풍초등학교, 강원도 양구군 양구초등학교,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 등을 거쳤다. 6학년 때는 아버지가 제대를 하고 교사가 되었는데 이외수의 담임을 맡기도 했다.

강원도 인제군 기린초등학교와 인제중학교를 거쳐 인제고등학교[3]를 졸업하고 1964년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했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한 뒤 71년 제대하고 72년 춘천교육대학교를 중퇴했다.

어릴 적 꿈은 화가로 춘천교대 시절 미전에 입상한 경력도 있었지만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절망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참고 이 해에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견습어린이들>이 당선되었으며 73년엔 인제남초등학교 곗골(인제읍 남북리 일대)분교 소사로 잠시 근무하였다.[4]

그에게 있어서 1970년대(특히 70년대 초)는 가난으로 찌든 절망의 세월이었다. 춘천에 살면서 구걸한 경험도 있고 하숙집 방세가 밀려서 쫓겨난 적도 있으며 크림빵으로 하루를 때운다거나 생라면 한 봉지로 며칠을 때운 경험도 있다. 심지어는 빈 쓰레기통이나 개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새기도 했다고 한다.[5] 교육대학교 재학시절에서는 당시 학장이 이외수의 생활사정을 참작해서 조금이나마 이외수의 생활을 도와줄 정도이기도 하였다.[6]

75년 <세대>지에 중편 <훈장>이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정식 등단해서 생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였고 강원일보에 잠시 근무하였다. 76년 11월 전영자와 결혼하고 춘천 세종학원과 원주 원일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장편 <꿈꾸는 식물>을 발표. 몇편의 단편을 발표하고 창작에만 전념키 위해 79년 모든 직장을 포기하고 이후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 창작 활동에서는 가난한 시절 가끔씩 사창가에 빌붙기도 였는데[7] 이 때의 경험이 <꿈꾸는 식물>을 집필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이후 창작집 <겨울나기>, 장편 <들개>, <칼>, <산목>, <벽오금학도> 등을 비롯해 에세이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꿈꾸는 식물>과 <장수하늘소> 등은 섬세한 감수성과 환상적 수법이 돋보이는 유미주의적 소설로 신비체험과 초현실세계를 즐겨 다루는 이후의 작품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중요작품으로 평가된다.

화가지망생이기도 했던 작가는 90년 나우 갤러리에서 '4인의 에로틱 아트전' 과 94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선화(仙畵)개인전을 열었다.

2014년 10월, 위출열로 인해 진단을 받았더니 위암 2기 판정을 받아 일시적으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1달 가까이 투병생활을 하였다. ## 위 절제 수술까지 수반해야 할 정도의 병세였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쳐서 고비는 넘겼지만 항암치료는 지속적으로 받았고, 2015년 6월에 항암치료를 마쳤다. [8]

3 작품과 평가

김동리, 백낙청[9]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공모전에서 입상했고 김현[10]에게서는 '이외수는 김승옥, 이청준, 조세희, 윤흥길, 황석영[11] 같은 작가들이 그렇듯이 언어를 통해 세상과 투쟁하려고 하는 치열한 감수성의 흔적이 보인다' 는 평을 얻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에도 여러 차례 올라간 적이 있다.

하지만 일부 팬들의 과도한 고평가는 기성문인뿐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폭넓은 독서를 하지 않고 작가의 트위터나 작품만을 접하고는 마치 그것만이 통념, 상식인 것처럼 인용하거나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이문열 등의 유명 문인과 비교하는 것이 그 예이다.

작가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행보를 하면서 이에 대한 호불호도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평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분분한 상태. 다만 부족한 필력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다.

장외인간을 펴낸 이후로 6년간 에세이나 아포리즘집만 펴내다가 2011년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방송을 통해 신작을 집필중, 그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써낼 5권의 장편소설 역시 기획중이라고 시사했다.

덧붙이자면 일종의 문학만능주의적 사상을 가진듯 하다. 이외수의 소설을 보면 항상 현대의 삭막함을 비판할때 문학을 치유책으로 내세우며 주인공이나 주요 조연들 중 긍정적 역할을 하는 캐릭터들은 항상 명문대 문학과를 가는 것으로 나온다. 근작인 완전변태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대지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있다.

3.1 소설

  • 훈장(소설) - 1975년
  • 꿈꾸는 식물 - 1978년 / 실사영화화와 TV 문학관으로 실사극화된 바가 있음. 꽤나 현시창인 내용이지만 TV문학관판은 당시 방송매체의 심의문제로 인해 꽤나 순화되었다고 함.
  • 겨울나기 - 1980년
  • 장수하늘소 (소설) - 1981년 / TV 문학관으로 실사극화된 바가 있음.
  • 들개 - 1981년
  • - 1982년
  • 사부님싸부님 - 1983년. 우화소설이자 만화병맛의 형식을 빌린 만화소설이라는 특징이 있다. 'ILLHYHL' 라는 단어가 나오고 온갖 사회 모순점을 풍자하는 등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내용의 소설이었다.
  • 산목(상) - 1987년
  • 벽오금학도 - 1992년 / 자신의 방에 철창을 치고 쓴 걸로 유명한 책이다.
  • 황금비늘 - 1997년
  • 괴물 - 2002년
  • 장외인간 - 2005년
  • 완전변태 外(중단편소설집) - 2014년
  • (제목 미정) - TBA [12]

3.2 시집

  • 풀꽃 술잔 나비 - 1987년
  •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 2000년
  •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 때까지 - 2006년

3.3 에세이

  •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 1985년
  • 말더듬이의 겨울수첩 - 1986년
  • 감성사전 - 1994년
  •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 1998년
  • 날다 타조 - 2003년
  • 하악하악 - 2008년
  • 청춘불패 - 2009년[13]
  • 아불류시불류 - 2010년
  • 절대강자 - 2012년
  • 사랑외전 - 2012년
  •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면 그만 - 2014년 [14]
  • 뚝 - 2015년 [15]
  • 자뻑은 나의 힘 - 2015년
  • 먼지에서 우주까지 - 2016년

3.4 기타

  • 감성사전 - 1994년
  • 흐린세상 건너기 - 2002년
  • 외뿔 - 2001년
  •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 2003년
  • 뼈 - 2003년
  • 글쓰기의 공중부양 - 2006년
  •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 2007년
  • 마음에서 마음으로 - 2013년 [16]

4 활동

인터넷 서브컬처에서 이외수가 가지는 입지와 위상에 대한 부분을 설명한다.

4.1 방송가

이외수는 오래 전부터 방송에서 일회성 출연을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그 양적, 질적 비중이 커진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좀더 자세히는 「장외인간」 출판을 전후로)의 일이다. 이 시기부터 TV 광고도 찍고 시트콤에서 고정 배역도 맡아보고 심지어 자기 이름을 딴 라디오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등 활발한 행보를 보였고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인지도도 대폭 상승했다.

4.2 인터넷

이외수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컴퓨터로 작품을 써왔는데 독수리 타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원래 바닥에 엎드린 채 배게 하나 껴안고서 펜으로 글을 쓰다가 보니까 자세가 허리에 안 좋아서 대안으로 컴퓨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타자에 적응하지 못해서 작품이 뜻대로 써지지를 않으니까 굉장히 우울했다고. 이때문에 타자에 적응하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 바로 채팅.

이외수가 컴퓨터를 시작한건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인 90년 초였기 때문에 PC통신 하이텔의 대화방 등을 통해 채팅을 했었다. PC통신은 고사하고 PC조차도 보급이 많이 되지 않았던 당시 기성 작가가 이러한 첨단 매체를 이용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마이컴과 같은 PC 전문 잡지에서 이외수를 인터뷰하는 일도 종종 있었고 여기서 이외수는 자기가 직접 창안한 각종 이모티콘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과거가 있었기에 오늘날 그가 문단 소설가 중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외수는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갓 보급되는 여명기부터 개인 홈페이지 OISOO를 개설하고 방문객과 활발하게 소통했다. 싸이월드가 뜨니까 미니홈피 또한 개설했으며 트위터가 뜨니까 과연 트위터 역시도 재깍 만들어서 단박에 수많은 팔로워를 보유한 인기 트위터리언이 되었다.[18]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인터넷의 각종 변화와 새로이 보급되는 문물에 대한 적응이 대단히 빠르다.

디시인사이드와는 이래저래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행보나 이미지가 아햏햏과 상당히 잘 맞을 것 같은데 아햏햏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인지도가 부족했는지 해당 문화적 코드와 엮여서 주목받는 일은 없었다.

양자 사이의 최초의 본격적인 접촉은 아마도 과거 디씨를 주름잡던 초특급 악플러런던귀공자가 이외수에게 악플을 달기 시작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런던귀공자의 악플에 시달리던 이외수는 그를 고소하고 실제로 재판소까지 갔다. 훗날 이외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재판에서 검사에게 처벌이 아니라 치료가 됐으면 좋겠으며 이 일로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외수와 디씨의 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바로 2007년 7월 디씨뉴스와의 인터뷰. 바로 위에서 밝힌 런던귀공자와의 일화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거의 모든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눈팅한다고 밝히는 등 디씨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보이면서 폐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

양자의 훈훈한 관계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이외수 갤러리를 개설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었으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재조명된 대표적인 서브컬처 코드로 어둠에다크에서 죽음의데스를 느끼며, 유리코 오메가 등이 있다.
한편으로 2008년작 에세이인 하악하악 역시도 그가 디씨에서 활동하면서 얻은 영감의 산물.
여담이지만 이외수는 애플(Mac) PC를 쓴다!! 블루스크린 때문에 쓰던 글이 날아가는 끔찍한 경험을 몇번 한 뒤로 맥으로 갈아탔다고. 땡스 빌~ 그런데 커널 패닉은 어쩌려고?

2015년 이후로는 트위터보다는 페이스북 위주로 SNS활동을 하는듯하다.

5 논란과 비판

이외수는 오래 전부터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각종 시사적, 정치적 발언을 남겼는데 대중적 인지도가 오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일종의 논객이 되었다. 전체적인 성향은 민족주의에 가깝고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회적 논란과 물의를 빚어왔기 때문에 그런 그의 모습을 탐탁찮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한다.

  • 1988년 4월 제기동 경동시장과 종로 5가 한약방 등에서 대마초를 구입, 흡연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하였다(1988년 4월 14일자 경향신문 보도). 보도내용에 따르면 이외수를 찾아온 소녀들(소설수업을 받겠다고)과 여관방을 전전하며 대마초를 피웠다는 내용과 함께 여관에서 연행된 참고인 31세 여성을 상대로 수사중이라는 내용이 실려있었다. 이 기사가 너무 충격적이라 이외수 비판에 단골주제로 등장하는데 처음에 이외수 본인이 트위터로 해명하기를 31세 여성은 여관청소부로 참고인 신분일 뿐이다 라고 일갈했으나 그 트윗 이후 조선일보가 추적보도를 한 결과 31세 여인은 다름아닌 잡지사 기자로 유부녀였고 여관에서 검거될 당시 이외수 역시 현재 부인이 따로 있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으로 불륜이었다.
  • 2005년 황우석 사건 당시 이외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황우석 박사에 관련 글을 올리면서 "지금 대한민국 국민은 MBC라는 언론에 의해 장님이 되어가고 있는게 아닐까..." 라며 MBC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PD수첩의 계속된 추가보도로 인해 황우석 논문에 대한 논란은 결국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 2008년 12월 자신의 홈페이지에다가 올린 수정된 교과서-애국애족 대신 매국매족을?이라는 글에서 뉴라이트의 수정된 근현대사 교과서 내용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올리며 "김구선생을 테러분자라고 가르치는 세상이 왔으니 머지않아 이순신 장군을 살인마라고 가르치는 세상도 오겠네" 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로 김구=테러리스트 논란은 물론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 여부를 놓고 네티즌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후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입장을 올렸다.
  • 2009년 12월 29일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구로다 가쓰히로비빔밥에 관련된 망언에 "음식문화를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회나 스시가 원시상태음식" 이라고 발언했다.
  • 2011년 셧다운제도를 신랄하게 깠다. 트위터에서 몇번 의견을 피력하였고 온게임넷 켠김에 왕까지의 출연 에피소드에서는 초기 취재진과의 대담에서도 역시 셧다운제를 신랄하게 깠다.
  • 2012년에는 닭볶음탕/닭도리탕 표기법에 관한 논란이 트위터를 시작으로 점화되었다. 발단은 그가 자주 다니는 식당의 '외도리탕' 메뉴를 홍보한 것.
  • 2012년 초 제주 해군 기지 건설 관련 구럼비 바위 발파 소식에 트위터에서 '돌에도 생명이 있습니다'라며 해군을 비난했다. 찬성자들에게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럼 감성마을 앞에다 커다란 돌 위에 시를 음각한 건 뭐냐"면서 까였다.
  • 최시중이명박 정권의 실세들의 비리가 연이어 터지자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이라며 자화자찬한 이명박 대통령의 말을 비꼬아 "도적으로 완벽한 정권임을 증명하시는 분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라며 이명박 정권에 독설을 날렸다.
  • 진보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으나 정작 2012년 총선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개인적으로 몇 번 만난 새누리당 후보를 지지하였다. 이에 일부 네티즌들은 이외수를 가열차게 비난하였으며 그가 지지했던 새누리당 의원이 '천주교 신앙모독' 발언에 이어 육사사열 논란에 휩싸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5. 16 군사정변을 비호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
  • 2012년 9월 경찰의 불심검문 강화를 두고 비난글을 올렸는데 현직 경찰관이 이 불심검문 비판 떡밥을 물고 반박하였으며 심지어 트위터상의 경찰청 대변인 트위터까지 키배에 동참하는 등 불판이 확산되었다.
  • 2012년 9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를 만난 사진이 공개됐다. 아주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사진에 박근혜의 친필싸인까지 올라왔다. 그간 정부여당에 비판을 하던 사람이니만큼 의외라면 의외? # 이외수 작가 본인이 문학관 앞에서 다른 대선후보와 같이 찍은 사진과 비교해서 박근혜와 같이 찍은 사진은 표정을 뚱하게 하고 있었다는 이견도 제기되었으나, 해당 사진이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2012년 12월 3일. 한 트위터리안이 쓴 '문제를 제기하기엔 작가 이외수는 너무 늙어 현대를 쫓아오지 못한다' 라는 트윗을 발견한 이외수는 수동RT하여 '트친들께 이분의 판단이 옳은지 묻고 싶습니다^^' 라고 팔로워들에게 물었고 그로 인해 150만이 넘는 광신적인 이외수빠들에게 집중 공격을 받은 해당 트위터리안은 독자가 작가를 비평하는 것이 뭐가 문제냐며 수동RT로 벌어질 사태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냐면서 사과를 요구했지만 이외수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듯한 트윗[19]으로 답변했다. 이는 실질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빠와 군중심리를 이용해 적대적인 트위터리안을 매장시킨 행위다.
  • 상기된 사건에서 해당 트위터리안을 공격하던 한 이외수 극성빠가 그를 ㅂㅅ라고 초성체로 욕(?)을 하고 '병신 같은 욕을 하면 되냐'고 화를 내니 '병신이 아니라 보수' 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ㅂㅅ에 대한 초성체가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에 대해 해석이 난립했으며 까들은 이런 초성체 장난질을 불러일으킨 빠들을 까댔다. 그 전에 이외수 까면 보수라니... 여기에 '덕후새끼들 사람과 소통 좀 해라'[20]는 원색적인 오타쿠 비난까지 했다는 루머가 퍼져 오타쿠들의 어그로까지 끌어모았다. 이건 이외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발언이다. 원문 어찌보면 빠가 까의 어그로를 불러일으키는 사례라 하겠다.
  • 2013년 1월, 일명 십알단이라고 구설수에 오른 윤모목사[21]가 이외수에 대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는 아예 트위터 이름도 '이외수감성마을퇴거' 로 바꾸었다. 보수 네티즌들의 지지를 얻고 보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외수를 주제로 한 극딜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주된 의혹제기는 이외수 감성마을 만드는데 돈을 얼마나 썼는지, 혹은 그 돈이 투명하게 쓰였는지에 대해서였다. 그외에도 지역에 복무한 군필자를 대상으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서 '일개 민간인 경호를 경찰이 아닌 5분대기조가 하느냐'는 문제제기도 있다. 이에 대해 이외수는 범죄예방을 위해 군경합동이 설정한 일종의 비상 연락망 개념에 가까운 것을 안티들이 이외수 개인 전용 경호한것인마냥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것을 또 대한민국 육군 공식 트위터 쪽에서 재반박하였다. 제27보병사단 기타 항목 참조. 마침 화천 산천어 축제를 코앞에 둔 타이밍이라 그런지 더욱 혼란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이미 몇몇 일간지에도 이 분쟁이 보도된 이상 이건 이미 단순한 인터넷상의 갈등을 넘어섰다. 이러다 이외수 온라인으로 비화될 기세 또한 이 일로 인해 화천군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난장판이 되었고 페이지가 제대로 넘어가지 않고 있다. 이에 화천군수는 산천어 축제 인터뷰 중 이외수와 감성마을을 옹호하며 특혜를 부인하고 오히려 이외수가 화천군에 옴으로써 화천군이 유무형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 그리고 마침 산천어축제 개막식을 하기 위해 중화민국에서 급히 귀국한 김장훈도 이외수에 대한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반대로 마광수처럼 이외수를 비판하는 공인도 있다.[22] 이외수는 이번 일로 인해 정초부터 소설집필에 전념할 계획이었는데 차질이 생겼다고 트위터에서 밝혔다.
  • 2013년 3월 말, 이외수와의 혼외관계로 인해 아들을 낳은뒤 그 아이를 키운 경북거주의 오모씨(56세,여)이외수에게 양육비 미지급으로 소송을 걸었다. 기사 4월 16일 이 스캔들에 대한 첫 공판이 춘천지법에서 열렸다. 그리고 29일 양측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다만 양측이 본인이 아니라 양측 변호사로 대리공방을 치렀다는거나 대략적인 소식 외에 공판 및 상세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소송 건과 관련한 그의 행보와 사건과 관련하여 드러난 과거의 언행(오모씨와 혼외아들을 '저쪽'이라고 표현한다든가, 오모씨를 구타하고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서약서 작성을 강요한다든가)이 평소에 그가 남긴 글들과는 이중인격 수준으로 너무 달라서 논란이 되었다. 이 충격적인 폭로로 인해 지지자들에게 탈속한 신선으로 취급되었던 이외수의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그 여파는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진정한 사랑에는 이별이 따르지 않는다며
  • 2013년 11월 16일 진짜 사나이 촬영으로 대한민국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그런데 이 강연소식에 울컥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 "천안함 장병 모독하는 이외수에게 강연을 허가하다니 국방부 제정신인가. 이외수 강연 허가해준건 독립기념관에서 아베 신조가 강연하는 꼴"이라면서 불만을 제기했고, 여당 지지자 및 "네이티즌"[23]들과 이외수 팬보이들간의 싸움이 며칠간 이어졌다. 그리고 11월 22일 MBC측에서 이외수의 강연 분량을 통편집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이외수는 트위터로 "대한민국은 정부의 발표에 반하는 의견을 제시하면 TV 출연을 금지하는 민주(헐) 공화국입니다. 사살당하는 기분입니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네티즌들은 천안함 피격사건을 소설로 치부하고 트위터나 사생활로 여러 구설수를 일으킨 사람이 군 장병에게 강연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일이라며 하의원의 손을 들어주는 편과 이외수가 해당 부대입장에서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것은 사실이나 하의원의 말은 정치적인 공세가 아니냐는 쪽이 대립하고 있다. 한편 MBC측은 "이외수의 초청 강연 촬영분을 편집하기로 최종결정했다"며 "논란의 소지가 있는 만큼 논의를 거쳐 방송에 내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공식 입장을 전했다. 링크
  • 2014년 6월 홍명보호가 가나에 4:0으로 지자 '한국 축구 4 대 0으로 가나에 침몰. 축구계의 세월호를 지켜보는 듯한 경기였습니다.'라는 트윗으로 아무리 그래도 참사에 비유하는게 올바른 표현이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외수는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난독증 환자들 많네라는 식으로 비꼬아서 논란에 불을 지폈다. # '이외수가 축구 국대팬이라 국대에 쏟아지는 비난을 모두 본인이 흡수하시겠다며 분연히 나섰다'라는 소리마저 나올 지경이다. 이후 엄청나게 욕을 먹자 원문만 싹 지우고 반성한다며 글을 올렸다. # 결국 네이버 실시간 검색과 기사##로도 떠서 위대한 트인낭의 법칙을 또 다시 증명하였다.
  • 2015년 8월 '여자들 초유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랑 뿐입니다. 그것을 등한시 했을 때, 남자들은 절대로 맛있는 식사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트윗을 올려 전근대적이며 마초이즘적인 사고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 이후 피드백은 커녕 '독서량이 부족해서 독해력이 부족하고 그래서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 못하고 꼬투리잡게 된다'라는 비꼬는 트윗을 올려 더욱 논란이 되었다.
  • 2015년 8월 '핸드 드립 커피에 반발심을 갖고 있어서 직원이 주문을 받으려 하면 어깃장을 부리는 마음으로 다방 미스김이 배달하는 믹스커피라고 퉁명스레 답한다. 요즘 커피 가격이 책 한권과 맞먹지만[24] 책보다 커피가 사랑받는다. 물론 커피향만도 못한 책이 많으니 커피 매니아들의 잘못이 아니고 분발해야겠다.'라는 트윗으로 또다시 논란이 되었다.
주로 '누가 억지로 보내는것도 아닌데 카페 드립 커피가 싫으면 다방을 찾던가 자판기 커피라도 마셔라', '주문 받는 직원한테 민폐[25]인걸 왜 당당히 말하냐', '당시 다방 커피도 비싼 편이였다'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김남훈(2번 항목)은 과거 미스김을 스쿠터로 태워다주는 알바를 했는데 그 미스김의 '추가 업무'를 생각하면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고 간접 디스 하기도.
그리고 이외수에게 비판적인 멘션을 보내면 이외수에겐 차단 당한다는 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심하면 추종자들에게 극딜 당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몇 시간째 이외수의 이름이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올라간채로 논란이 되자 해당 트윗 7시간 후 새로운 트윗을 올렸는데 그 전문은 이렇다. '자신이 한글을 읽을 줄 안다고 독해력까지 있는 줄 아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군요. 믹스커피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명할게요.' 같은 달 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근본적인 사상의 불쾌함은 생각 않고 상대방의 독해력만 탓하고 유감이라며 비꼬는 꼰대 마인드의 전형을 보인다.
  • 2015년 12월 민중총궐기 관련 한상균이 도피해있는 조계종 사찰의 승려를 비판하는 글이 이외수의 글로 둔갑해서 SNS상에 돌아다니는데,# 자세히 보면 어투도 이외수 평소의 글과 미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결국 이외수 본인이 명의도용에 관해 고발도 불사할것이라는 트윗을 올려서 확인사살. #
  • 2016년 5월 20일, 환... 성향의 페북 글을 올려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관련링크

6 일화

그 특유의 장발 꽁지머리는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었다. 그가 장발 생활을 하게 된 계기는 특별한 거 없고, 20대 시절 워낙 가난하게 살아서 머리 관리할 여력도 없어서 봉두난발로 방치하다보니 어쩌다 그리 된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신의 수필에서 여러번 피력한 적이 있다. 군 복무 이후 그가 머리를 깎은 때는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일례로 2014년 투병할 때 그 장발을 잘랐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예삿일이 아니었다는것.

청년 시절 춘천의 다방 DJ 생활을 하며 밥을 벌었던 그는 글도 쓰고 잠도 잤던 자신의 구석진 테이블에 처음 본 여성이 앉자 '내 자리' 라고 말하다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그 여성과 연애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스 강원 출신의 이 여성은 지금의 부인 전영자 씨다.#참고

몽환적이고 도가적인 독특한 작품 세계와 맞물려 작가 스스로도 여러가지 기행을 하였다. 흔히들 말하는 출판계 은어인 통조림본인 스스로 하기도 하며 문학계의 기인으로 불렸다.

인사동에 있는 카페인 '귀천' 은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운영해 자연스럽게 문인들의 아지트가 되었으며 특히 중광 스님, 천상병, 이외수는 이곳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1990년대 그가 일약 입소문을 슬슬 타면서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을때 부산 등에서는 그의 사칭이 이미 등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칭이 활개칠 때 당시 그는 상술한 통조림 모드에 들어가면서 집필 중이었는데 이외수 사칭이 여자들과 끼고 술 먹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아내가 그에게 뭔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하였다. 2번째 사칭은 1번째 사칭보다 더 그럴싸했는데 서명까지 쓰면서 이외수를 사칭했지만 서명의 이름이 Lee WeSoo[26]라서 사칭이라는 게 뻔히 드러나고 말았다.[27]

춘천시에서 30여년을 살며 춘천 3수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참고 2006년에 이주, 현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감성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2012년 8월 12일에는 문학관이 개장했고 지자체 단위에서 생존 작가에 대한 문학관을 건립하는 것은 이번이 국내 최초라는 듯. 현재 화천군에 있는 군부대인 제7보병사단, 제2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병사들의 상담을 하고 있으며참고[28],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15사단의 명예홍보대사다.참고

춘천 지역 문화계에서 이외수의 영향력은 대단한 수준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춘천 지역 뮤지션들이 모여서 결성한 그룹인 철가방 프로젝트.

잡기로 '젓가락 던지기' 의 달인이기도 하다. 술집에서 막걸리 마시는데 주변에서 술꾼끼리 시비가 붙어 분위기 험악해지면 젓가락을 그쪽 벽에다 던져 꽂아서 상황 진압한 적도 있다고. 이런 점과 과거 '기인' 이미지 때문인지 영화 '아라한 장풍대작전' 에서도 작중 인물의 회상씬에 등장하는 '백풍'이라는 이름의 카메오로 로 나왔다.

과거에 담배를 하루에 8갑(...)씩 피웠다고 한다. 지금은 금연한다고 한다. 썰에 의하면, 금연 클리닉에 가서 "8갑쯤 피운다"고 했더니 의사가 "끊다가 죽을 수도 있으니 좀 줄이거나 단단히 각오를 하셔야 한다. 아니면 그냥 피우시라"고 했다고... 8갑이면 160개피이고, 하나 피우는데 5분만 잡아도 하루 13시간을 담배만 물고 있어야 된다.(...) 무릎팍도사 출연 당시에 의하면 죽는데 별로 비련은 없는데 대표작 1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고 생각해서 8갑 피던 것을 하루 아침에 단방에 금연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당연히 병원에 입원. 그 외 가난했던 시절에는 거의 알코올 중독자 수준으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한적한 두메산골 분교의 객원교사로 있으면서 손발이 오그라들 수준의 금단증세와 유명해지기 전까지 따라다녔던 곤궁함을 겪으면서 알콜 중독에서 벗어난 경험을 자신의 수필 등으로 피력한 바가 있다. 요새는 스트레스 푸는 수단을 술 대신에 노래로 한다고 한다. 가무. 저택에 아예 노래방 기계를 사서 하루에 두시간씩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한때 과거 소설 집필을 위해 요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완전변태에 수록된 <파로호> 집필 활동과 관련이 있는듯 하다. 소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호수 위에서 써야 소설이 술술 써질 것같다는 느낌 때문에 요트를 하나 장만한 거라고.

김세영허영만 원작 만화 사랑해에선 작품에서 쓰레기가 되는 느낌을 알고 싶어서 스스로 쓰레기통에 들어가 한참을 지낸 적도 있다고 한다. 식객에서 밝힌 일화에는 언 밥의 날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밥을 얼려먹기도 했다고 한다.

근년부터는 daw를 사용해서 자작곡 인스트루멘탈도 작곡하는 듯 하다. 단 작곡 같은 경우는 취미삼아서 하는 듯. 주로 쓰는 daw 프로그램은 리즌이라고 한다. 그가 작곡한 음원은 이외수 문학관 내의 BGM으로 나온다.

2015년 후반기에 들어서는 동방 프로젝트 봇 계정들을 다수 팔로잉하고 있다고 한다.환상들이 준비하는건가
  1. 전주 이씨 양녕대군 17세손, 시조 41세손 秀자 항렬이다. 아버지 성함은 양녕대군 16세손 '승(承)' 자 항렬을 넣은 이승윤. 즉 이승만의 조카 뻘이자 이대수의 형 뻘(...)이며 이승기이준기, 그리고 이진기이홍기의 할아버지 뻘이 된다.
  2. 그래서 2007년 타계 후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 참고로 인천 인제고등학교랑은 이름만 같은 다른 학교다.
  4. 그가 담당하던 아이들은 그야말로 두메산골 아이들로 처음에는 소통하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아니 마을 사람들 전체가 까막눈(...)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경험은 그가 소설을 쓰는데 큰 영감을 받은 적이 있기도 하다.
  5. 이렇게 젊은 시절을 보낸 것에 본인도 한이 서리는지 가끔씩 들어오는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라는 질문에 "내가 미쳤냐?"라고 대답한다고.(...)
  6. 산문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의 내용을 기초로 보충함.
  7. 너무 굶고 살아서 미녀를 봐도 성욕이 돋궈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8. 아침마당 2015년 10월 12일자 방영분에서 암 투병 경험담을 술회했다. 이 쪽도 참고할것.
  9. 참여문학을 주장하며 <창작과 비평>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거목
  10. 순수문학을 주장하며 <문학과 지성>을 창간한 한국문학의 거목
  11. 모두 당대에는 문학사를 이끌던 젊은 작가들이었다.
  12. #
  13. 날다타조의 리메이크다.
  14. 이 책에는 5종의 숫자 이스터에그가 숨겨져있다. 공식적으로 밝힌 일례는 이런 날. #
  15. 시기와 표지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투병중에 써낸 책이다.
  16. 소설가 하창수와 이외수의 대담집 형식.
  17. 당시 양택조와 대결을 했었는데 이외수가 이겼다!!
  18. 2011년 11월 3일 오후 3시 42분에 트위터 팔로워가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외수가 직접 캡쳐한 인증샷.
  19. 전문:'때로 진심 어린 한 줄의 사과만으로도 상대편의 노여움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으련만 수십 줄의 자기변명으로 상대편의 노여움을 증폭시키는 위인들이 있습니다. 대개 남의 옷에 묻은 겨는 잘 보면서 자기 옷에 묻은 똥은 못 보는 청맹과니들이지요.'
  20. 전문:'덕후색히들 사람과 소통 좀 해라. 맨날 애니, 만화 주인공하고 소통하지말고... 대화가 되냐? 그것들이랑?? 사람하고 소통하는 법 좀 배우고 트위터 좀 했으면 좋겠네. 물론 내 희망사항이다.' 사람과 소통하라면서 그 수단이 하필 트위터?
  21. 십알단 사건으로 불리는 선관위 미신고 선거운동으로 적발된 사건의 그 사람이다.
  22. 공교롭게도 과거에 마광수는 상술한 '4인의 에로틱 아트전' 에 이외수와 공동으로 참여한 바가 있다.
  23. 조갑제닷컴에서 정의한 용어. 의미에 대해서는 조갑제 문서 참조.
  24. 브랜드 커피가 아무리 비싸도 보통 만원은 넘지 않는다. 오히려 정가제 때문에 할인도 안되는 책값이 더 비싸다.
  25. 실제로 카페에 와서 메뉴판도 안보고 무턱대고 커피를 달라는 꼰대 손님이 종종 있어서 카페 직원들이 빡침&난처하다고 한다. 이런 손님들은 믹스 커피를 찾는건데 당연히 일반적인 카페에서 믹스 커피는 안판다. 게다가 미스김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여자 직원의 경우 성적인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
  26. 아시다시피 이외수의 영문서명은 Lee Oisoo다.
  27. 출처는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28. 제27보병사단의 상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영생활 전문 상담관 제도가 도입되면서 민간인에게 문제 병사를 상담시키지 않는다. 다른 사단은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