池田勇人
생애 : 1899년 12월 3일 ~ 1965년 8월 13일(65세)
총리 재임기간 : 1960년 7월 19일 ~ 1960년 12월 8일(58대)
임기가 일본 총리 치고는 너무 순조롭다
역대 일본 총리 | |||||
56, 57대 기시 노부스케 | → | 58, 59, 60대 이케다 하야토 | → | 61, 62, 63대 사토 에이사쿠 |
일본의 정치인, 58~60대 총리. 히로시마 현 타케하라 시 출신.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지금의 재무성)의 관료를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이후 곧 정계에 입문하여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주로 요시다 내각의 경제 정책에 관여하였다.
1950년에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대장성 대신으로 재직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개드립을 날린바 있다.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 빵이 없으면 고기도 먹지말고 그냥 굶어.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해당 발언은 이것과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는데 일조한 바 있다.
사토 에이사쿠와는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나 친구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1960년 안보투쟁의 격화로 기시 내각이 물러나게 되면서 자민당의 당수가 되어 1960년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안보투쟁을 수그러 들게한 소득배증계획의 수립으로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완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일본의 수상 가운데 19세기에 태어난 마지막 수상이었다. (1899년생)
1961년에는 한국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에 11월 방일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회담을 한 바 있다. 이케다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OECD 가입 (1963년)과 도쿄 올림픽 개최 (1964년)가 일어났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64년 10월 25일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명하여 의외로 차기 자민당 총재로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하고 그대로 입원하였다. 1965년 8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향년 65세. 원수 사토에게 총리 직을 스스로 넘겨준 걸 보면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여담으로, 1963년에 일본 공산당의 노사카 산조의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참고로 그와 관련된 서적중에 이케다 하야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라는 책이 있다. 이 사람의 정치 활동이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다.
참고로 저 발언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작품 생추어리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