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시게루

역대 일본 총리
44대45대46대
시데하라 기주로요시다 시게루가타야마 데츠
47대48대 ~ 51대52대 ~ 54대
아시다 히토시요시다 시게루하토야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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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02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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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0월 27일 영국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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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0월.

吉田茂 1878년 9월 22일 ~ 1967년 10월 20일

재임기간 : 1946년 5월 22일 ~ 1947년 5월 24일 (45대)

1948년 10월 15일 ~ 1949년 2월 16일(48대)
1949년 2월 16일 ~ 1952년 10월 30일(49대[2])
1952년 10월 30일 ~ 1953년 5월 21일(50대)
195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10일(51대)

1 개요

일본총리로 전후(戰後) 일본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권력을 누렸던 정치인. 넘버 원 맨(No.1 Man)이라 불렸는데 사실 넘버 원 맨보다는 자기 혼자만 안다는 의미로의 원 맨으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회자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성향의 원 맨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참고로 정당이 55년이후에 생긴 자민당이 아니라 자유당이다.

2 생애

도쿄 출생.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상인 요시다에게 입양되었다.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외무성에 들어갔는데, 전 총리이자 전범으로 사형당한 히로타 고키와는 같은 해에 외무성에 들어간 동기 사이라고 한다.

이탈리아, 영국 등에서 대사로 근무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길렀다. 당시 일본에서 적성국가로 꼽혔던 영국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그쪽에 상대적으로 호의적인태도를 취한 것 그리고 시게루 본인의 유달리 튀는 성품때문에 직업외교관의 정년이 다되도록 지도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1939년 퇴직하였다. 이즈음부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야쿠자 오야붕이나 마피아 보스 같은 모습이다. 세력을 키운 이후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6년 동안 은밀히 반전 운동을 했는데, 이게 덜미가 잡혀 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장인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장인이 백작 마키노 노부아키인데, 오쿠보 도시미치의 차남. 빵빵한 처가를 둔 덕에 빨리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빵빵한 가계는 아소 다로(요시다의 외손자)까지 이어진다니 흠좀무. 어쨌든 이 반전 경력으로 전후 미군정으로부터 까임방지권을 획득했다.

전후 첫 내각인 히가시쿠니 내각의 외무상이었던 시게미츠 마모루GHQ의 눈 밖에 나서 사임에 몰리자, 고노에 후미마로의 후원을 등에 업은 요시다가 후임으로 임명되어 히가시쿠니 내각의 사퇴 이후에도 계속 유임했다. 이때 천조국 쇼군 더글러스 맥아더의 눈에 들어 총리직을 수행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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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상 시절 앙드레 김 스타일이다.

하토야마 이치로와의 관계에 대해선 애매한 부분이 많다. 자유당 총재로 있던 하토야마가 과거 전력으로 연합군에 의해 추방당하자 후임을 맡겼던 사람이 요시다인데, 이때 요시다는 하토야마와 세 가지 약속[3]을 했다고 하고, 하토야마는 세 가지 약속에서 하나가 늘어난 네 가지 약속[4]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1946년에 발족된 그의 첫 내각은 노조의 잇따른 파업으로 상당히 무능력한 내각으로 존재했다. 연합군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다가 맞은 1947년의 총선에서 그가 속한 자유당이 제2당으로 내려앉으면서 결국 사퇴했다. 일본 위키에서는 이에 대해서 그가 헌정의 상도(총리는 다수당에서 내야 한다는 원칙)를 지켰다고 추켜세우지만, 아시다 히토시와 별로 매끄럽지 못한 관계가 보수연립을 무산시킨데다 자유당의 애매한 의석 수로 얼마 가지 못할 정권을 유지시키느니 요시다는 차라리 사퇴하고 기회를 노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확실하게 들어 맞았다. 이후 가타야마 데츠의 집권 시기에는 와신상담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집권하자 언플지속적인 태클과 클레임을 걸어서 다시 집권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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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현역 시절.

1948년 다시 집권하자마자 의원 수 불리기의 목적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른 결과, 이전 다수당이었던 일본사회당과 민주당[5]을 완전히 격파, 절대적인 과반수를 차지하며 권력을 무난히 획득했다. 이후 나는 전설이다를 시전하며 일본의 재건 과정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과시했고, 그가 발탁한 관료들은 훗날 총리가 되었다.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등이 이때 활약한 그의 수족들.

이후 대장대신으로 있던 이케다 하야토개드립이 대폭발했는데, 망할 기업은 망해야 하고, 돈이 없으면 보리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빵이 없으면 고기도 먹지말고 그냥 굶어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해당 발언은 이것과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걸 신문들이 거두 절미하고 큰 제목으로 써갈기는 바람에...이 외에도 여러 악재가 겹쳐 지지도가 곤두박질 쳤으나,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반등.

이때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유명한 개드립 말이 "이제 일본은 살았다!"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これぞ天佑!コレを足掛かりにして日本経済を立て直せる!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다! 이것(한국전쟁)을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6]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요시다를 얍삽한 기회주의자로 보는 등 상당히 좋지 않게 보는 계기가 된다.

다만 발언의 존재여부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오고간다. 존재측은 일본에서도 위 발언이 전해지고 있다를 증거로 하고 있고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 회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로,[7] 반대 측에서는 "요시다 시게루는 전쟁기간 내내 한반도가 공산화될 경우 그 영향으로 가뜩이나 당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들이 비등했던 일본이 공산화될 가능성을 걱정했으며 또한 한반도가 무너지면 일본이 동북아시아 대 공산주의 최전선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우려했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는 이것이 전면전인지, 국지전인지 어떤 규모로 어느 정도의 기간동안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 정보가 거의 없었고 미국이나 한국정부 당국도 정확한 사태파악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하여 미국 개입도 대단히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일본경제 회복을 예측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를 내세우고 있다.

더불어 한국전쟁이 휴전될 분위기가 되자 이걸 안타까워 했다는 말 또한 진위논쟁이 상당하다. 존재 측은 '일설'에 따르면 "전쟁을 더 이끌 수 없는지 관료들과 회의도 가졌던 적도 있었다, 이유는 휴전이 자신의 인기 하락에 원인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로, 반대 측에서는 "일본의 당시 상황상 패전국으로서 일본이 한국에서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던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당장 군대도 없는데."를 내세운다.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에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군비를 갖춘 뒤 한국에 파병하라'는, 한마디로 '너희도 좀 싸워'(…)라는 요구를 해오는데, 요시다 시게루는 그랬다가는 일본 경제가 파탄난다며 끝까지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한마디로 이 때 이 인간에게 그럴 맘만 있었다면 지금쯤 일본은 자위대가 아닌 번듯한 군대를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소리.

어쨌거나 과연 전쟁이 끝나자 요시다의 운도 다해가기 시작했다. 대(對)일본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이후 요시다는 찌질하게 놀면서 계속 총리 자리를 요구하는 하토야마의 세력을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해 계속 의회를 해산했다.[8]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유당의 의석이 쪽박 모드로 향해 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조선 업계에 유리하도록 업계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고 중의원에서 법안을 처리해준, 이른바 조선의옥 스캔들로 붙잡힌 사토 에이사쿠 간사장을 위해 법무상을 통한 지휘권 발동이라는 병크를 저지르자 요시다를 향한 정계의 반응은 완전히 식어버렸다. 결국 버티지 못한 요시다는 내각불신임안이 가결되기 직전에 사임했다. 그래도 집권 기간 '7년 2개월(86개월)'으로 장수했다. 전후 일본에서 재임 기간이 사토 에이사쿠 다음으로 긴 최장수 총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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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세상을 떠났다.

3 트리비아

전술한 "아, 이제 일본은 살았다!" 개드립 때문이었는지 한동안 한국에선 간교한 기회주의자 취급을 받으며 이미지도 영 좋지 않았다. 하기사 일본이 다시 부활한게 요시다가 총리로 재임할 시절에 한국전쟁을 바탕으로 살아났고, 45년간 한국을 못살게 굴어놓고 또 한국의 위기를 바탕으로 일본이 등쳐먹은 거나 마찬가지인 꼴이라 더더욱 요시다에 대해선 이미지가 "기회주의의 끝판왕" "얍삽함" 으로 대표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일본은 살았다 개드립이 실제 한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과거와 같은 얍실함의 이미지는 많이 사라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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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웃는 것으로 유명했다.

노회한 정치가답게 유머 감각도 뛰어났는데, 한 번은 선거 유세 중에 외투를 입고 유세에 나섰다. 한 시민이 요시다에게 "그 외투(外套,がいとう 가이토-)를 당장 벗으시오!"라고 외치자 요시다는 "여러분! 이게 바로 가두(街頭, がいとう 가이토-)연설입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전형적인 일본식 말장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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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인 요시다 가즈코(和子)와[10]. 가정에서는 좋은 아버지, 주위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아소 다로에게도 좋은 외할아버지였다나... 그리고 외증손녀 2명이 여왕[11]이다.(...) 외손녀 아소 노부코가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남인 토모히토 친왕과 결혼했기 때문. 토모히토 친왕과 노부코 비는 두 딸 아키코 여왕(1981)과 요코 여왕(1983)을 낳았다. 참고로 아키코 여왕은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이기도 하다.

총리가 되기 전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I'm sorry'를 심할 정도로 자주 사용했다고 하는데, 한 외국 외교관이 요시다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Sorry(쏘리)'를 연발하고 다니냐"고 묻자 요시다는 "나는 장래에 총리대신(総理大臣, そうりだいじん 소-리다이진)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고(…).

영국 대사로 있을 때의 이야기 또 하나. 어느 일본 장관이 영국을 방문해서 요시다를 만나려고 하는데, 요시다가 그를 만나기 싫어해서, 장관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 때마다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하라고 직원들에게 명했다. 보다못한 장관이 일본 대사관을 직접 찾아갔고 거기서 한 사람을 마주치는데 그 사람도 대사가 외출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바로 요시다였다. 결국 장관에게 들켰다. 이 일화는 2016년 발매된 수능완성 17수능 영어에 나왔다.

패전 후 일본에 주둔하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이유로 식량 지원량을 늘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식량 지원량을 더 늘려서 더 많은 양의 곡물이 일본으로 들어왔는데 막상 맥아더가 통계를 보니 일본의 식량 사정은 지원량을 늘려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맥아더가 요시다에게 "일본의 통계는 참 엉터리요. 믿을 수가 없어."이라고 힐난하자 요시다 왈, "일본의 통계가 정확했으면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거나 이렇게까지 지지는 않았겠지요."

1953년 1월 방미를 위해 일본을 들린 이승만 대통령과 비공식 회담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한미일 삼자 회담의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미국에 오래 살았던 이승만이나 외교관 출신인 시게루나 둘 다 영어 실력이 출중해서 통역없이 영어로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당시 회담에 배석하였던 김용식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훗날 외무부 장관이 됨)는 이승만이 "Mr. 요시다. 나나 당신이나 앞으로 10년 이상 오랫동안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포나 일본국 국민이 오랫동안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일협정은 정확히 10년 뒤 1963년에 협상이 이루어져 1965년 체결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 요시다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 둘 모두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 한명은 쫓겨난거지만 여담으로 이 둘 간의 '호랑이 일화'라는 야사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요시다 시게루가 이승만에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이 "임진왜란가토 기요마사가 다 잡아가서 이젠 한마리도 없다!"라고 날카롭게 응수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내용으로 실제론 요시다 시게루가 "내가 중국에 근무할 때 조선에 호랑이가 많다는 말을 들었는데 요즘도 많은가?"라고 묻자 이승만은 "아들 하나가 호랑이에 물려갈 때를 대비해서 하나 쯤은 예비로 낳는다"며 농담조로 그 말을 긍정했다고 한다. 근데 그 많던 호랑이가 지금은...

김성한의 희곡 대본 <오분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와 신이 담판을 벌이는 사이 중간중간에 곁다리 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계 인물(?)들 중 하나로도 등장하는데, 하토야마를 저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일본인의 이름은 한국어 한자 독음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전무라고 나온다. 근데 하토야마 이치로는 학산일랑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하토야마라고 나온다. 응?

1963년 벤츠를 선물받기도 했다. 벤츠는 지금도 남아있다.

시가 애호가였다고 한다. 평상시 시가를 빼놓지 않았다. 1966년, 사망 1년 전. 헨리 클레이와 코히바를 즐겨 피웠다고 한다.
  1. 그의 신장은 155cm였다
  2. 약 3년 8개월로 일본 중의원 의원의 임기(4년)에 가깝다.
  3. 돈을 모으지 않고, 하토야마는 인사에 일절 상관하지 말고, 총리직이 부담되면 언제든지 관둔다.
  4. 하토야마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총리 자리를 하토야마에게 물려준다. 결과론적이지만 약속은 지킨 셈이다. 하토야마의 손자도 훗날 그 덕을 보았다.
  5. 일본사회당은 이미 가타야마 퇴진 직전 열린 총선거에서 완전히 쪽박크리를 먹은 상태였다. 게다가 당내에서 좌우파로 분열되어 결국 1950년에 사회당 우파들이 대거 탈당하면서 듣보잡 신세로 전락했다. 아시다의 민주당은 아시다 퇴진 이후 별일없이 비틀거리다가 하토야마 이치로에 의해 자민당으로 흡수되었다.
  6. 한국전쟁 이전에도 군정청의 경제 부흥책인 닷지플랜으로 일본 경제가 어느 정도 안정하에 있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물론 닷지플랜에 의거한 여러 정책으로 구 식민지였던 조선포함하여 상당한 사회문제가 벌어졌었고 이런 문제를 일시에 해결한 것이 전쟁이라는 점.
  7. 해당 발언이 어떤 증거를 토대로 나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전쟁 당시 일본측에서 천우시조다라고 말한 것은 요시다 시게루가 아닌 일본의 경단련經團聯의 회장이었던 石村一浪의 발언이고 우리 재계도 구원받았다라는 발언을 한 것은 당시 일은 총재였던 一万田尙登였다.
  8. 가장 유명한 게 바가야로 해산. 중의원 질의응답 중에 야당의원의 추궁자세에 질린 나머지 "바가야로"라고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야당의원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는데, 술수 꾸미기로 유명한 미키 부키치가 트집을 걸고 넘어지면서 해산으로 가게 되었다.
  9. 근데 정작 사토 에이사쿠 항목에는 사토 에이사쿠 집권기간이 역대 2번째라고 나온다. 1번째가 누군데?? 가쓰라 다로
  10. 2.26 사건 때 20대였던 그녀는 외할아버지인 마키노 노부아키를 황도파 장교들로부터 지키고 언덕으로 피신시켰다. 후일 결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아소 다로다.
  11. 일본 황실에서 덴노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부른다. 남자는 친왕/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