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에이사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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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03일(...) 으허허 부럽지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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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26일 기자회견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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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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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닮았다는 말이 많다.

佐藤栄作 1901.03.27~1975.06.03

역대 일본 총리
58, 59, 60대 이케다 하야토61, 62, 63대 사토 에이사쿠64, 65대 다나카 가쿠에이
<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1973 - 헨리 키신저, 레 둑 토사토 에이사쿠1975 - 안드레이 사하로프

일본정치인, 총리. 형이 전 총리기시 노부스케이며[1] 고노에 내각 밑에서 일했던 막장외상 마쓰오카 요스케는 그의 백부뻘 되는 사람이다. 부인은 외사촌지간이다.[2] 후덜덜한 집안 배경을 가진 정치인.

집권 기간이 7년 8개월. 일본의 모든 내각 총리 중에서 집권기간 2등. 후덜덜. 요시다 시게루보다 길다!

이케다 하야토와는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나 친구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난투극으로 얼룩졌다.

전후 일본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영광을 누렸지만, 완벽주의자에 공무원 시절 생긴 깐깐한 성격까지 더해서 대중의 인기를 크게 받진 못한 케이스였다. 사토 사임회견 당시 이야기다. 깐깐한 성격 덕분에 언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토는 사임회견에 신문사 기자들은 오지 않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놨는데, 이게 싸인이 맞지 않아서(…) 결국 신문사 기자들이 우루루 몰려와 뭐 뜯어먹을 것이 없는지 회견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자들을 본 사토의 반응은 매우 냉담했고, 급기야 "TV는 어디 있어! 언플하는 신문사들 앞에서 이야기하기 싫어! 기자들은 나가! 난 국민과 직접 대화하겠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신문사 기자들은 보란듯이 모두 빠져나갔고, 덕분에 총리 사임회견이라는 빅 이벤트 장소에 남은 건 사토와 그의 보좌관 몇, 그리고 그를 촬영하는 TV 카메라맨 뿐이었다(…)는 매우 훈훈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당시 일본 국민들도 총리 사임에 별 관심 없었다. 안습.

[1]

여기서 총리사임 기자회견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약 25분쯤 부터). 우루루 빠져나가는 신문기자들과 텅 빈 회의실에서 혼자 기자회견하는 모습이 일품 안습 이를 반증하듯이 사토에이사쿠 집권시기에 자민당의 득표율이 50%대 중반에서 40%대 후반으로 떨어졌지만 사회당의 득표율도 20% 후반에서 20% 초반으로 떨어졌고, 공산당과 공명당, 민사당이 그 과실을 따는 바람에 오래 집권할수 있었다. 말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62석을 확보하는 부진한 성적표를 보였으면서도...

그런데도 총리, 총재가 되고 대파벌의 장으로 성공한 데는 다나카 가쿠에이라는 부하의 존재가 있었다. 사토는 다나카를 부려서 당내의 정보를 철저히 긁어모았고, 그것을 토대로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대에 사토에게 붙은 별명인 "귀밝은 사토"는 다나카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붙여지지도 않았다.

50년대 자민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이누카이 다케루[3] 전 법무 대신을 가리켜서 얼굴만 희멀건 쭉정이라고 무시하고 다녔는데, 이누카이의 은혜를 입은 사토가 이누카이에게 안부인사 한번 다녀오지 않은 것을 친우인 오키 신지로 과기청 장관을 통해 알고는 격노하면서 이누카이를 자파로 초빙하였다. 이후 오노는 사토가 이누카이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대놓고 반 사토를 외치고 다녔는데, 정작 사토는 장례식이 끝나고 반년 후에 이목을 숨겨가며 은인인 이누카이의 집으로 와 문상을 했다고.

위처럼 오노 반보쿠와는 견원지간이었다. 오노 반보쿠의 추모회에서는 서민적인 이미지의 오노 반보쿠가 반짱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자신도 에이짱이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따로 칭찬할 거리가 없잖나." 라고 했다고.(…) 실제로 후에 개그맨 출신 정치인인 요코야마 노크가 '에이짱'이라 불렀더니 무지하게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고….

젊은 시절에는 주로 철도국이나 운수통신성 등 교통 부문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머리는 도쿄대학을 졸업한 것을 봐도 그렇고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승진이 늦었다. 오죽했으면 마쓰오카까지 나서서 승진을 청탁(…)했다가 사토에게 욕먹은 일화가 있다.승진 해도 난리, 안 해도 난리 그러나 이런 승진에 관심없는 듯한 행동은 나중에 꽤 현명한 것으로 치부받게 되는데, 만약 동기들처럼 철도국 중앙이나 운수통신성 중앙에서 일을 했었다면 패전 후 연합군의 눈밖에 나 형처럼 공직 추방을 당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인 기시 노부스케만주국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있고, 도조 내각에 입각한 경력으로 인해 몇 년 간 공직 추방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본다면 상당히 운이 좋았거나 아니면 머리가 비상한 사람. 그렇지만 전후 최초 선거에서 친우들이 많았던 사회당으로 출마할려고 했다가 형의 일갈에 일본 자유당으로 출마했다고.

전후 공직 추방 없이 중의원에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후 요시다의 눈에 들어 관방상을 맡으면서 인생의 전성기가 열렸다. 자유당 간사장 임기 중 비리 스캔들로 잠시 태클이 걸린 것 빼고는 꽤 무난한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형인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 해먹을 적엔 대장상을 맡았고, 라이벌인 이케다 휘하에서도 통신산업상을 맡았다.

다른 것 보다도 그 유명한\ 지휘권 파동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조선산업 진흥을 위해서 조성한 기금의 정치자금 유용을 놓고서 진행된 수사에서 관례대로라면 임의소환을 받아야 할 처지였으나 요시다의 압력을 받은 이누가이 다케루(자유주의자로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최후 총리였던 이누가이 츠요시의 외아들이었다. 참고로 다케루는 1920년대 내내 소설가로 꽤 나갔던 경력이 있다.) 법무장관이 조문만 있고 사용된 일도 없었던 장관의 검찰지휘권을 발동하여 사토의 소환을 선거이후로 늦춰 버렸다. 그리고 발동한 이누가이는 바로 사임해 버렸다…. 이때 호되게 당한 일본 검찰은 나중에 록히드 사건 수사에서는 철저히 비밀유지를 해가며 다나카를 죄어들어가 기습적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성공시켰다.

사토가 총리 자리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이케다 하야토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일기에서도 날이 갈수록 이케다에 대한 표현이 냉소적으로 변하는 걸로 보아선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던 듯 싶다. 하기사 내 자리 뺏으려는 놈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러다가 이케다 하야토가 암 투병으로 결국 물러나자, 자파(自派) 소속 의원들과 함께 자민당 내에 있던 이케다 계파를 보라는 듯이 아작내고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올랐다. 자동적으로 총리 자리 획득.

총리에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행. 가서 논란거리가 남아있었던 오키나와를 돌려받기 위해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회담했지만 신통치 않자 오키나와로 달려갔다. 거기서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일본은 당신네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고 오키나와 전투의 악몽을 기억하라! 주장하고나서 다시 밀사를 통해 미국과 재협상 돌입. 그런 식으로 계속 밀어 붙이자 지친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일본에게 돌려줬다. 핵무기도 빼고 군대만 남기기로 합의한 척하고 사토는 비핵 3원칙을 대대적으로 선언했는데, 최근 알고보니 다 구라카더라 하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흠좀무.

오랜 기간 집권하고 나서 후계자를 정할 때 상당히 골머리를 앓았는데, 사토는 원래 후계자로 후쿠다 다케오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 실세로 급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를 막지 못했고 각복전쟁이 일어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힘을 보고 질려버린 사토는 총리 자리를 내던지듯이 사임했는데, 사임 이후에도 다나카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자주 보였지만, 다나카의 압력으로 실행하진 못했다.[4]

퇴임 후 1974년에 "핵무기를 만들지도, 갖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라는 비핵 3원칙을 내세운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총재선거에서 예전 보스의 심기를 거스른 다나카가 관계회복을 위해서 전방위로비를 편 끝에 노벨상을 안겨준 것이라는 소문이 꽤 돌아다녔다고.

여담으로 사토 에이사쿠 이후의 일본 총리들은 죄다 신임 미국 대통령을 가장 먼저 만난 총리는 단명한다라는 속설을 띄게 되었다. 대신 그가 만난 리처드 닉슨워터게이트 물론 총리들 자체가 2년이상 재직하지 못하는 일본 정치 자체의 특성 탓도 크다. 그 정점은 역시 자민당 38년 여당의 종지부를 찍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와 (빌 클린턴을 만났다. 조지 부시에게도 구토세레를 당했고..) 아소 다로(버락 오바마를 만났다.) 아닐까.

죽기 1년전에 자신이 임진왜란때 건너온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계의 후손이라고 인정했다...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도공 심수관의 14대 후손이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 소위 카더라 수준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기 때문에 신뢰하기는 어렵다.[5]
  1. 형인 기시 노부스케는 장남인지라(...) 부친의 원래 성인 기시를 이어받았고 사토 에이사쿠는 외조부의 성인 사토를 이어받아서 형제끼리 성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아버지가 원래 성이 기시였는데 데릴사위로 오면서 성을 사토로 바꾸었다.
  2. 수정 전에는 심지어라든가 (...)라든가 사촌혼에 대해 부정적인 서술이었다. 현대화된 일본도 젊은세대들에게서 조금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긴해도 사촌혼이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촌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사촌간의 혼인은 의외로 세계적으로 인정되며 법적으로 금지하는 국가는 없다.
  3. 5·15 사건으로 살해당한 이누카이 츠요시 전 총리의 아들이다. 도쿄 재판 당시 증인으로 출석.
  4. 형인 기시가 대놓고 다나카 혐오를 보인 탓에 겉으로만 그랬고 뒤로는 다나카를 은근히 지원했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5. 당사자인 사토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라 심수관 14대 후손의 주장이 사실인지 구라인지 확인할 방법도 없다. 덧붙여서 그의 주장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라 일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