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일본군의 편제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국의 방위를 담당하는 자위대의 편제를 알고 싶으면 자위대/편성을 참고하라.
2 일본군 육군
2.1 총군
부대명 | 부대통칭 | 창설일 | 해체일 | 편성지역 | 소재지 | 상급부대 | 부대별칭 |
만주군[1] | - | 1904.06.20 | 1905.12.20 | 펑톈 | 전시대본영 | ||
관동군 | 徳 | 1919.04.12 | 종전 | 신징 | 대본영 | ||
지나파견군 | 栄 | 1939.09.12 | 종전 | 난징 | 대본영 | ||
남방군 | 威 | 1941.11.06 | 종전 | 달랏 | 대본영 | ||
제1총군 | 東方 | 1945.04.07 | 종전 | 도쿄 | 대본영 | 1GA | |
제2총군 | 西方 | 1945.04.07 | 종전 | 히로시마 | 대본영 | 2GA | |
항공총군 | 帥 | 1945.04.07 | 종전 | 도쿄 | 대본영 | ||
방위총사령부 | 1941.07.07 | 1945.04.07 | 도쿄 | 대본영 |
2.2 방면군
부대명 | 부대통칭 | 창설일 | 해체일 | 편성지역 | 소재지 | 상급부대 | 부대별칭 |
북지나방면군 | 甲 | 1937.08.26 | 종전 | 베이징 | 지나파견군 | NCHA | |
중지나방면군 | 1937.10.30 | 1938.02.14 | 난징 | 대본영 | |||
남지나방면군 | 波 | 1940.02.10 | 1941.06.24 | 광둥 | 지나파견군 | ||
제1방면군 | 鋭 | 1942.07.01 | 종전 | 둔화 | 관동군 | 1HA | |
제2방면군 | 輝 | 1942.07.01 | 1945.06.22 | 아이퐁 | 남방군 | 2HA | |
제3방면군 | 強 | 1943.10.29 | 종전 | 펑톈 | 관동군 | 3HA | |
제5방면군 | 達 | 1944.03.10 | 종전 | 삿포로 | 대본영 | 5HA | |
제6방면군 | 統 | 1944.08.25 | 종전 | 한커우 | 지나파견군 | 6HA | |
제7방면군 | 岡 | 1944.03.22 | 종전 | 싱가포르 | 남방군 | 7HA | |
제8방면군 | 剛 | 1942.11.09 | 종전 | 라바울 | 대본영 | 8HA | |
제10방면군 | 湾 | 1945.02.01 | 종전 | 타이베이 | 대본영 | 10HA | |
제11방면군 | 俊 | 1945.02.01 | 종전 | 센다이 | 제1총군 | 11HA | |
제12방면군 | 幡 | 1945.02.01 | 종전 | 도쿄 | 제1총군 | 12HA | |
제13방면군 | 秀 | 1945.02.01 | 종전 | 나고야 | 제1총군 | 13HA | |
제14방면군 | 尚武 | 1944.07.18 | 종전 | 루손 섬 | 남방군 | 14HA | |
제15방면군 | 楠 | 1945.02.01 | 종전 | 오사카 | 제2총군 | 15HA | |
제16방면군 | 睦 | 1945.02.01 | 종전 | 후쿠오카 | 제2총군 | 16HA | |
제17방면군 | 築 | 1945.02.01 | 종전 | 서울 | 관동군 | 17HA | |
제18방면군 | 義 | 1945.07.14 | 종전 | 방콕 | 남방군 | 18HA | |
미얀마방면군 | 森 | 1943.03.18 | 종전 | 모르멘 | 남방군 |
2.3 사단 편제
2.3.1 진대 편제
초창기에는 보병연대 중심으로 편제하였다. 1870년 프랑스군을 본보기로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71년에는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번에서 번병을 차출시켜 중앙군인 어친병을 만드는 한편, 지방의 치안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하여 도쿄, 오사카, 친제이(구마모토), 도호쿠(센다이)의 4개 진대를 설치 하였다. 72년에는 어친병을 근위병으로 개칭하고, 73년에는 나고야와 히로시마에 진대가 설치되어 6개 진대 체제를 만들었다. 4월부터 징병제가 시작되어 평민출신이 각 진대에 입대하였고 74년에는 최초의 보병연대 9개가 처음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천황의 군대를 상징하는 군기(연대기)를 천황으로 부터 수여 받았다.(자세한 것은 일본군/역사 참조)
진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1873년 1월 도쿄 진대의 예)
보병연대(도쿄 소재, 각 보병대대 2개)
보병연대(사쿠라 소재)
보병연대(니가타 소재)
기병대대 2개
포병소대 2개
공병소대
치중대
예비포병소대 4개
해안포대(시나가와, 요코하마, 니가타 소재)
보병연대의 수는 78년에는 15개였지만, 84년에 3개 증설, 85년에 4개 증설, 86년에 5개 증설, 87년 1개 증설로 총 28개 연대가 된다.
2.3.2 청일전쟁 당시 사단 편제
사실 진대 편제 중에서도 초창기부터 프랑스 군제를 따라야 하나, 프로이센 군제를 따라야 하나 다소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71년)에서 프랑스가 프러시아에게 패하면서 대세는 프로이센 군제를 따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에 일본육사의 교관도 최초의 프랑스 교관에서 프로이센 교관이자 일본군사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멕켈 소령으로 교체하였고, 1886년에는 모범병제를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바뀌게 된다. 다만 이와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의 특징인 백병 돌격전과 기병 중시 전술은(프로이센은 신속한 기동으로 화력 집중 전술) 일본군의 스타일이 딱 맞았는지, 일본군 멸망 때 까지 이어지게 된다.(단 러일전쟁시기는 화력주의 채택, 러시아군은 백병주의)
1888년에는 기존에 설치된 6개 진대를 폐지하고 1사단~6사단을 새로 편성하였고, 91년에는 근위병을 근위(고노에)사단으로 편성한다. 이때 단순히 명칭을 사단으로 변경 한 것이 아니라 부대의 군사적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진대란 일정 담당 지역을 방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사단은 전략 단위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었다. 이는 명백히 대륙에서 전투를 염두에 둔 조직이였다.
청일전쟁 한 해 전인 1893년경 사단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8,000명, 말 약 5,500마리
└사단사령부(175명, 95필)
보병여단(5,806명, 752필)-보병연대(2,896명, 188필) 2개-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여단사령부((14명, 9필)
기병대대(509명, 488필)-기병중대 3개
야포병연대(1,267명, 944필)-야포병대대 2개, 산포병대대 1개–각 2개중대
공병대대(525명, 239필)-공병중대2개
대가교종열(大架橋縱列, 336명, 239필)
소가교종열(120명, 78필)
탄약대대(1,505명, 1,287필)
치중병대대(輜重兵, 1,328명, 1,345필)
위생대(416명, 51필)
야전병원(116명, 44필) 6개
대소가교종열은 이름 그대로 가교(다리) 설치 부대이며, 치중병은 보급부대를 뜻한다. 야포병연대는 70밀리 야포로 무장했으며, 이외에도 경량화 되어 분해 운반이 가능한 산포로 무장한 산포병연대도 존재한다. 경중포병 연대는 1차대전기인 1918년에서야 6개 연대가 등장한다.
사단장은 중장, 여단장은 소장, 연대장은 대좌가 임명되어있다.현대 한국군 사단사령부의 인원보다 사단 병력이 두배 많은 일본군 사단사령부 인원이 적다. 참고로 한국군은 대대급이하에서는 확실히 미군/유럽군에 비해 행정병력이 적은편이다. 대신 보병에서 차출해 쓰는 비인가 행정병이 많지
보병연대는 사단내에서도 핵심이라 천황이 내리는 군기(연대기라고도 함)가 수여되었고, 1896년부터 기병대대가 기병연대로 확장되자 역시 연대기가 수여 되었다. 그런데 기병연대가 말대신 차량을 이용하게 되자, 이건 천황의 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군기가 반납(...)되었다. 물론 신편되는 기갑연대 같은 곳에도 군기는 수여되지 않았다.
이러한 보병 2개여단, 4개연대로 구성되는 4각편제는 1차대전 당시만 해도 유럽군은 물론 미군의 일반적인 편제였다. 그러나 이후 세계적인 기조가 각종 전투지원부대의 강화와 전투부대 지휘부담을 덜기 위해 3각 편제로 바뀐다. 일본군의 경우는 그보다는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신편 사단을 만들기 위해 저절로 3각편제가 되어 중일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있는 사단들은 가능하면 4각 편제를 유지할려 했기 때문에 3각편제와 4각편제가 혼재되었다.
어느 군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전시편제와 평시편제가 있었는데, 평시에는 수송∙위생 관계 부대 대부분과 전투부대 일부를 결원으로 남겨 두고, 전시에만 동원령을 발동해 정원에 맞게 보충하는 것이다.
청일 전쟁 중인 94년에 1개 사단이 증설되는데, 연대는 진대시절 편성된 그대로인 28개 체제로 진대가 사단으로 변환된 88년 이후 추가된 연대는 없었다.
2.3.3 러일전쟁 당시 사단 편제
기존의 8개 사단(근위, 1~7사단)에 더하여, 러일전쟁 직전인 1898년 5개 사단(8사단~12사단) 20개 연대를 추가로 증설한다.[2]
러일전쟁 당시인 1899년 기준으로 사단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8,360명~18,400명, 5020~5490필
└사단사령부(230병, 120필)
보병여단(5,817명, 443필) 2개–보병연대(2919명, 216필) 2개–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여단사령부(19명, 11필)
갑종 기병연대(724명, 679필)-기병중대 4개
※을종 기병연대(519명, 484필)-기병중대 3개
야포병연대(1,190명, 1,047필)-포병대대 3개-포병중대2개
※산포병연대(1,369명, 782명)
공병대대(788명, 110필)
가교종렬(345명, 216필)
갑종 탄약대대(741명, 562필)
갑종 치중병대대(1,530명, 1,186필)
위생대(487명, 60필)
야전병원(104명, 28필) 6개
기병의 경우 4개 중대 체제인 갑종 연대와 3개 중대 체제인 을종 연대가 있다. 포병은 청일전쟁 당시는 1개 연대 안에 2개 야포병 대대, 1개 산포병 대대가 있었는데, 러일전쟁 편제에서는 야포병 연대와 산포병 연대중 택1 하도록 변경되었다. 탄약대대와 치중병 대대는 갑종과 을종이 있었는지, 또는 일부 갑종 사단에만 편제 되어 있었는지 불명.
1886년에 도입된 프로이센 군제로 화력주의를 채택한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참관한 유럽열강은 기존의 백병주의를 화력주의로 변경하게 되었고, 특히 중기관총과 중포(150밀리 이상의 유탄포 혹은 100밀리 이상의 캐논포)를 개발하여 집중 배치 하였다.
그런데 정작 승리한 일본군은 화력주의 노노! 백병주의 OKOK! 라는 희한한 결론을 내려 다시 프랑스식 백병주의로 회기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종료한 1905년에는 4개 사단 16개 보병연대 5개 포병연대, 3개 기병연대가 창설되어 총 17개 사단 68개 연대, 24개 야산포병연대, 20개 기병연대 체제가 되었다.
이후 <제국국방방침>에서 ‘제국궁방에 필요한 병력’으로 1907년에는 평시 25개 사단, 전시 50개 사단을 규정하고, 18년에는 전시 40개 사단, 23년에는 작전초동병력 40개 사단, 36년에는 작전초동 병력 50개 사단에 항공 140개 중대를 목표로 하게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07년에는 2개사단, 1개 포병연대, 대만보병 1,2연대(독립 연대), 08년에는 8개 보병연대가 창설되었다.
16년에는 조선에 7개 보병연대를 창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나남(청진)에 주둔하는 19사단을 창설하고, 19년에는 서울 용산에 20사단을 창설한다(부족분 1개 연대는 20년 창설). 앞서 18년에는 1차세계대전에서의 대포병전에 자극을 받아 야전중포병 연대 6개를 창설한다.
2.3.4 군축과 상설사단 일람
1차세계대전 종결후 채결된 워싱턴조약으로 해군예산이 줄어들었다. 이에 세수대비 재정압박이 심한 육군 예산 역시 삼각하라는 요구가 높아서 1922년 8월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에 의한 군축이 일어난다.
19년 기준으로 육군은 260,753명(해군 77,626명), 21년 기준으로 21개 사단 86개 보병연대, 30개 야산포병연대, 6개 중포병연대, 29개 기병연대로 구성되었다.[3]
야마나시 1차 군축으로 육군 정원을 장교 2,268명, 준사관 이하 5만 7,296명, 말 1만 3천필을 삭감하고, 각종 단위부대에서 대대까지는 건드리지 않고 보병 252개, 기병 29개, 공병 7개, 치중대 9개 등 중대급에 한해서 폐지하여 감축하는등 육군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 정도의 온건한 방식이였다. 단 육군 전반에 만연한 포병 경시 풍조 때문인지 야산포병 만은 9개 연대급이 감축되고 대신 독립 야산포병연대 2개, 중포병 연대 2개가 증설되었다.
다음해인 23년 4월의 야마나시 2차 군축에서는 요새·학교·관청을 대상으로한 감축이 있어 1·2차 합계 4,033만 엔의 경비가 절약 되었다.
그러나 25년에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의 주도로 대규모 군축이 이루어졌는데, 우가키 군축은 기존의 야마나시 군축처럼 온건한 방식이 아니라, 4개 사단 16개 연대, 기병/야포병 각 4개연대, 공병/치중병 각 4대대 등, 총 4개 사단을 일거에 삭감하여 병력 총 감축은 3만3,900명, 말 6,000필에 그쳤다.[4] 여기에 27년부터는 기존의 현역 복무기간을 2년 6개월에서 2년으로 단축 시켰다.
이러한 3차에 걸친 군축으로 절약된 인원과 예산 중 일부로 전차부대·항공대·고사포 부대 창설을 포함하여 장비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26년에 전차 독립 1개중대(10대), 28년에 6개 비행대대를 창설하였다.
군축이 끝난 25년 기준으로 육군 사단 목록은 다음과 같다.
사단 | 사령부소재지 | 편성연원일 | 예하보병연대 |
근위사단 | 도쿄 | 1891.12.14 | 근위보병 1~4연대 |
제1사단 | 도쿄 | 1888.05.14 | 1,3,49,57연대 |
제2사단 | 센다이 | 1888.05.14 | 4,19,29,30연대 |
제3사단 | 나고야 | 1888.05.14 | 6,18,34,68연대 |
제4사단 | 오사카 | 1888.05.14 | 8,37,61,70연대 |
제5사단 | 히로시마 | 1888.05.14 | 11,21,41,42연대 |
제6사단 | 구마모토 | 1888.05.14 | 13,23,4547연대 |
제7사단 | 아사히카와 | 1894.10.19 | 25,26,27,28연대 |
제8사단 | 히로사키 | 1898.10.01 | 5,17,31,32연대 |
제9사단 | 가나자와 | 1898.10.01 | 7,19,35,36연대 |
제10사단 | 히메지 | 1898.10.01 | 10,39,40,63연대 |
제11사단 | 젠쓰지 | 1898.10.01 | 12,22,43,44연대 |
제12사단 | 구루메 | 1898.10.01 | 14,24,46,48연대 |
제13사단 | 다카다 | 1905.02.07 | 폐지 |
제14사단 | 우쓰노미야 | 1905.07.06. | 2,15,50,59연대 |
제15사단 | 도요하시 | 1905.07.17 | 폐지 |
제16사단 | 교토 | 1905.07.18. | 9,20,33,38연대 |
제17사단 | 오카야마 | 1907.11.30 | 폐지 |
제18사단 | 구루메 | 1907.11.13 | 폐지 |
제19사단 | 나남 | 1916.04.01 | 73(나남),74(함흥),75(회령),76(나남) |
제20사단 | 용산 | 1916.04.01. | 77(평양),78(용산),79(용산),80(대구) |
이상 17개 사단이 상설 사단이라 하여 명문 대접을 받았고, 향후 전선이 확장되면서 대부분 관동군에 배치된다(상대적으로 중국전선과 남방전선은 대부분 신설사단 배치됨). 폐지된 4개 사단은 25년 5월 1일 우가키 군축으로 일시에 감축되었다. 위의 표에는 없지만 22년에 창설된 대만 1,2 보병 연대도 있어 총 보병 연대는 70개 연대였다.
2.3.5 관동군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탄생하였다. 이에 만주에 상시로 1개 사단, 33년 이후에는 3개 사단이 교대로 파견되었다. 다만 만주사변이라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단 단위로 증설은 일어나지 않았고, 33년에야 야전중포병 연대 1개가 창설되고 기존의 2개 전차대대가 2개 전차연대로 증편 되었다. 34년에 이르러야 군축후 처음으로 1개 보병연대 창설, 35년과 36년에 각각 보병 2개 연대가 창설 되었다. 이러한 증편 보병 연대는 사단 소속이 아닌 독립연대들로 그중에서 36년에 창설된 연대는 지나주둔군 소속 지나주둔보병 1,2연대였다. 또한 같은해에 보병연대 외에도 야산포연대 3개, 중포병연대 1개, 고사포연대 2개, 기구연대 1개가 창설된다. 여기에 기존에 사단에 편입되어 있던 공병대대와 치중병대대가 연대급으로 증편되었다. 전반적으로 대소련 작전을 염두해둔 증편이였다. 질적으론 별 쓸모가 없지만 중국 군벌군(친일성향 군벌군 및 장학량에게서 강탈한 동북군 세력)을 끌어들였으므로 수적인 면에선 대대적 증편까진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끌어들인 중국 군벌군은 훗날 만주국 군대인 만주군의 인적 토대가 된다.
그런데 만주사변 당시 6개 사단 뿐이였던 극동 소련군이 자신들의 턱밑까지 진출한 일본군에 자극 받아 37년 기준으로 20개 사단 37만명으로 대폭 증강된다. 이에 일본군 역시 자극 받아 관동군을 두배로 대폭 늘려 6개 사단을 배치 한다. 이후 상호간에 상대방을 보고 점점 병력을 늘리는 병림픽을 벌여 극동 소련군은 1940년에는 30개사단까지 늘렸다가 독일의 기습공격으로 병력을 대폭 전용해 동부전선으로 돌려 2선급 부대들만 남아 있다가, 45년에 45개 사단 150만명으로 일본을 압살할 준비를 한다. 반대로 일본은 만주에 주둔하여 대소전을 목적으로 한 관동군을 40년에 상설사단을 중심으로 12개 사단 40만명까지 편재하여 절정에 달했다가, 중일전쟁 전선이 확장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남방전선이 생기면서 일부 병력을 전용함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이 병력 늘려달라는 징징거림에 점점 사단과 병력을 늘리다가 45년에는 24개 사단 66만명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주력 부대는 대부분 43년~44년경 남방전선으로 전용되어 소모되었거나 막판에는 본토결전에 대비한답시고 본국에 돌아가서 부실한 2선급 부대만 남았다. 그동안 2선급 부대들을 배치했지만 동부전선이 정리돼 감에 따라 주력 부대들은 동부전선에서 극동전선으로 옮겨온 소련군과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
전반적으로 관동군은 중국전선이 확대 되거나, 태평양 전쟁이 터져 남방전선이 생기면서 대거 사단들이 필요 할 때, 오히려 관동군이 점점 늘어나는 요술을 보여준다. 그때마다 이유는 소련이 공격해 올 것 같아 병력을 증설해야 한다고...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38년에는 신편사단 1개를 중일전선으로 보내주고 대신 지나군에서 상설사단 2개를 관동군으로 받게 된다.
관동군의 징징댐은 심각할 정도여서, 중일전쟁에 의해 중국 전선이 끝도 없이 확장되었지만, 일본 본토내에 있는 정예부대인 상설 사단은 한가하여 할 일이 없는 관동군으로 보내주고, 급조한 특설사단만을 전쟁터인 중일전선으로 보낸다. 특히 38년에는 관동군 8개사단중 무려 7개 사단이 제1,2,4,7,8,11,12사단등 상설 사단으로 구성된 정예였으니 대본영에서 얼마나 관동군을 편애하며 신경썼는지 알만 하다. 특히 38년부터는 비정규전이라 할 수 있는 비적토벌 임무[5]를 만주국의 군대로 창설된 만주군이 떠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사단들은 정규전을 대비하여 소만국경에 전진 배치되었으니 더욱 할 일이 없었다.
반면에 정작 전선이 끝도 없이 늘어나 현기증 나는 중일 전쟁에서는 신편사단 위주였다. 우가키 군축으로 감축된 17개 상설사단 체재에서 37년까지 7개 사단이 신편 되었다. 그런데 37년 기준으로 상설사단 5개와 신설사단 1개가 관동군에 배치되고, 상설사단 10개와 신설사단 나머지 전부가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6]
지역별 사단 배치는 다음과 같다.
연월 | 본토 | 조선 | 대만등 | 만주 | 중국 | 남방 | 합계 |
1937.12 | 1 | 1 | 0 | 6 | 16 | - | 24 |
1938.12 | 1 | 1 | 0 | 8 | 24 | - | 34 |
1939.12 | 5 | 1 | 0 | 9 | 27 | - | 42 |
1940.12 | 9 | 2 | 0 | 11 | 27 | - | 49 |
1941.12 | 4 | 2 | 0 | 13 | 22 | 10 | 51 |
1943.12 | 6 | 2 | 0 | 15 | 24 | 23 | 70 |
1944.03 | 3 | 3 | 0 | 12 | 24 | 30 | 72 |
1944.12 | 14 | 0 | 8 | 9 | 25 | 43 | 99 |
1945.08 | 58 | 7 | 9 | 25 | 26 | 44 | 169 |
위의 사단 배치는 다소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본토는 지시마와 가라후토에 배치된 제5방면군을 포함하고, 대만은 오키나와와 오가사하라를 포함한다. 남방은 동남아에 배치된 남방군과 태평양지역의 제8방명군을 포함한다. 물론 조선은 조선군, 만주는 관동군, 중국은 지나군을 뜻한다.
이와 같은 사단 증설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는 중일전선을 위해 추가로 10개 사단이 필요 하였다.(도합 34개 사단 131개 연대, 115만명) 이에 새로 창설된 사단중 9개는 중국 전선으로 가고 1개 사단은 관동군으로 갔다.
이런 중일전선의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에서는 계속 병력을 늘려달라고 징징되어 관동군에서 중일전선으로 37년에 신설된 26사단을 보내주고, 대신 중일전선에서 정예 부대인 상설 사단 7사단과 11사단을 보내주는 부대 이동이 있었다. 참고로 이때 10개 사단 증설 때문에 본국에서는 기존의 현역인 갑종 외에도 보충역인 제1을종과 제2을종까지 징병된다. 또한 현역이 끝나고 예비역 5년 4개월이 있는데 이들도 징집된다.
1939년에는 중국전선의 제9, 10, 14, 16사단이 일본으로 귀환하고 37년에 임시 편성된 101, 109, 114사단이 폐지되었다. 대신 11개 사단, 32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그중 한 개만 관동군으로 가고 나머지는 전부 중국 전선으로 간다. 중국 전선의 상설 사단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으면 눈의 착각이 아니다. 이에 육군은 총 42개 사단 124만명이 된다.
이런 급속한 병력 확대로 인해 기존에 보충병역 기간이 총 12년 4개월이였지만(현역+예비역+후비역 기간 합계) 17년 4개월로 5년 연장되고 최고 38세까지 소집가능 하게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 진다.
1940년에는 2개 사단이 폐지되고 새로 9개 사단 11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49개사단 135만명이 된다.
1941년에는 2개 사단 10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51개 사단 210만명으로 늘어난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중일전쟁 이전의 17개 사단 체제에서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사단의 수가 정확히 3배 늘어 난다. 보병 연대는 75개에서 184개로 2.45배 늘어나고, 야산포병연대는 23개에서 59개로 2.57배, 중포병 연대는 12개에서 47개로 3.92배, 기병(수색) 연대는 25개에서 46개로 1.84배, 전차연대는 2개에서 16개로 8배(...), 공병연대는 18개에서 61개로 3.39배, 치중병연대는 17개에서 69개로 4.06배가 되었다.
그중에서 기병연대는 39년경부터 말이 자동차로 개편된 결과 본래의 연대중 3개가 폐지되고 12개가 수색연대로 개편되었다. 여기에 새로 수색연대 18개가 편성되고 1개가 폐지되었고, 기마로 구성된 기병연대도 새로 7개가 편성되었다.
위의 수치를 보면 사단은 3배로 늘었지만 보병연대는 2.45배 밖에 안늘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기존의 사단내 4개 연대 체제가 3개 연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편 사단은 거의 3단위 사단이 된다. 또한 차량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존의 4단위 사단의 말은 5천필에 차량 40대 정도 였지만, 신편 3단위 사단의 경우 말 2천500필에 차량 500대가 된다. 다만 4단위 사단과 3단위 사단은 섞여서 존재 하였다.
1941년 12월 기준으로 4단위 사단인 제18 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21,710명, 말 5550필, 자동차 50대
└사단 사령부(330명, 165필, 4대)
보병여단(7,103명, 874필)
└보병여단 사령부(65명, 16필)
보병연대(3525명,429필) 2개-연대본부, 기관총중대, 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기관총중대)
산포병연대(2407명,1402필,34대)-연대본부, 연대단열, 산포대대 3개-산포병중대3개, 대대단열
기병대대(451명, 431필)-기병중대 2개, 기관총중대
공병연대(672명, 99필)-공병중대 2개
치중병연대(1898명, 1451필, 2대) - 만마(輓馬)중대 4개, 마창(馬廠)
사단통신대(245명, 45필)
사단병기근무대(121명, 11대)
사단위생대(1095명, 128필)
사단야전병원(236명, 75필) 3개
사단병마창(病馬廠, 48명, 5마리)
위는 한가지 예 일뿐으로 기병대대 대신 기병연대가 소속되어 있다면 사단 총병력이 25,000명 까지 가는 편제도 있다. 단열은 보급대를 뜻하며, ‘만마’는 수레를 끄는 말, ‘병마창’ 병든 말을 치료하는 곳이다. 사단내에 있는 차량은 대부분 산포병 연대에 배속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위와 동년동월의 3단위 사단인 제 16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4,640명, 말 2,470필, 차량 490대
└사단 사령부(304명, 40대)
보병단(8732명, 1227필, 41대)-보병연대(2881명, 409필, 11대) 3개
└보병단 사령부(89명, 8대) - └연대본부(107명, 17필, 11대)
-보병대대(810명,98필) 3개, 보병포중대(132명,62필,4문), 속사포중대(72명,13필,4문), 통신중대(133명, 23필)
-대대본부(103명,59필), 보병중대(180명) 3개, 기관총중대(122명, 29필, 중기8정), 보병포소대(25명,10필,대대포2문)
수색연대(439명,35대,경장갑차16대)-연대본부, 승차중대2개, 경장갑차중대 2개, 통신소대 1개
야포병연대(1,766명, 896필, 80대)-연대본부, 대대(75밀리 야포 12문) 2개, 대대(100밀리 유탄포 12문) 1개
-대대본부, 산포병중대 3개, 대대단열
공병연대(875명, 32필, 32대) - 연대본부, 공병중대 3개, 기재(器材)소대 1개
치중병연대(749명, 296필, 89대) - 연대본부, 만마중대, 자동차중대 2개
사단통신대(246명, 45필) - 유선소대, 무선소대 2개
사단병기근무대(123명, 13대)
사단위생대(491명, 36대) - 본부, 담하(擔荷)중대 3개, 차량소대 1개
사단야전병원(242명, 22대) 3개
사단병마창(52명, 10필, 4대)
사단방역급수부(196명, 24대)
사단위생대의 담하중대는 들것중대로 번역 할 수 있다.[7] 포병의 경우 보병과 함께 전진을 중요시 하여 사단 포병의 주력은 경량급의 75밀리 야포였고, 연대포는 분해해서 운송이 가능한 산포였다. 대대포의 경우 기관총좌 제압 역할을 맏는 등 전반적으로 경량포였다. 야전중포병으로 가야 150밀리 유탄포야 100밀리 캐논포, 고정 진지에서 발사하는 공성 중포, 대항공기용 고사포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사거리 보다는 기동성을 중시 하였다.
2.3.6 태평양 전쟁
1941년말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영국 등과의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자 남방작전을 위해 또다시 엄청난 병력이 필요 하였다. 기존의 51개 사단 184개 연대 210만명에 더하고 1942년에는 7개 사단 보병 4개 연대, 43년에는 12개 사단 보병 3개 연대를 증설했다. 보병 연대가 늘지 않는 이유는 이시기에 기존의 4단위 사단을 3단위 사단으로 개편하고 남는 1개 연대를 모와 신편 사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단은 아예 연대가 없고 독립보병대대 8개만 모와서 사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 본토방위태세가 조금 정비되어, 1941년부터 일본 각지에 중포병연대 20개가 설치되고, 방공연대와 고사포연대가 26개 편성되었다.
1942년 6월에는 드디어 전차사단 3개와 전차 6개 연대가 편성 되었다. 다만 야전 화력의 핵심인 야전중포병연대의 경우 41년에는 2개, 42년에는 겨우 1개, 43년에는 아예 편성조차 안되어 여전히 화력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등에서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대패하면서 여전히 백병주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화력과 기동력보다 보병의 수를 중요시 하는 중일전쟁 적인 마인드로 천조국과 싸우는 패기를 보였던 것이다.
사실 일본은 그동안 연합군과의 일련의 패배는 고립된 섬과 정글에서 패퇴가 보급의 두절과 보병부대의 기동 제한 등 예상치 못한 전장에서의 전투 때문이라고 해석해 왔다. 즉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각 부대가 종횡으로 움직일 수 있는 광대한 전장에서 대소작전을 응용해서 싸운다면 육군의 정예가 질 리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44년 6월 마리아나 제도 전투에서 상당히 넓은 사이판 섬에서의 패배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육군 내부에서 항공전력과 포병화력 증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졌다.
결국 44년에는 육군 29개 사단, 51개 연대를 편성함과 동시에 포병연대 15개, 중포병연대 13개, 전차연대 10개라는 전에 없던 규모의 편성을 하였다.(도합 99개사단 191개 보병연대 420만명) 이를 위해 징병 연한이 20세에서 19세로 낮춰 졌고, 전에는 잘 징집 안하던 20세도 실시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45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무려 70개 사단 190개 연대가 추가되었고, 최전선에서 싸워야할 정예 상설 사단들은 본토 결전을 대비한답시고 본국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신편 사단을이 매우게 된다.
3 일본군 해군
- ↑ 만주군은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로, 관동군을 보조하는 2선급 전력이었다.
- ↑ 포병연대는 두해전인 96년에 5개 연대 추가로 총 12개연대. 1개 사단분의 보병연대와 포병이 없는데 근위 사단으로 추정. 99년에 포병연대 7개 추가, 다음해에 보병연대 4개 추가 되어 완편됨
- ↑ 21개 사단이면 42만명은 되어야 정상이겠지만, 평시는 전시에 비해 정원이 절반 가량이기 때문에 독립 부대를 합쳐도 총병력이 적다.
- ↑ 폐지된 부대의 현역장교 2,000명은 남자 중학교 이상에 배치되어 학교교련을 실시 하였다.
- ↑ 만주에 횡행하던 마적떼는 물론, 항일 무장세력 역시 비적으로 지칭했다. 단, 중화민국 정부의 정규군인 국부군을 비적으로 칭하진 않았다.
- ↑ 총 24개 사단중, 관동군에 6개, 지나군에 16개가 배치되었으면 2개 사단이 남는다. 원래 조선에 19,20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용산의 20사단을 관동군이 대본영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만주사변에 동원하여 데려가버려 조선에는 19 사단만 남았고, 40년 이후에야 충원되어 다시 조선은 2개 사단 체제로 환원된다. 본토에는 근위사단 딱 1개만 남아 있었다.
- ↑ 아직도 일부 부대에서 ‘당가’ 또는 ‘당까’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일본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