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쉐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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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學良(장학량)[1]

파일:Attachment/장학량.jpg
머리 위에 !가 있다.
이우 닮았다. 약간 올빽 버전 이수혁 삘도 난다.
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406/01/htm_20140601044132665.jpg장제스와의 연합 후 쑨원 묘소에서 장쉐량(좌)와 장제스(우)
htm_2008102709280640004300-001.JPG 1953년 징상진상 온천에 연금된 장학량.40년 남았다 김성근?

1 생애

1898.06.04 ~2001.10.14

중국어 위키(오늘날 중국에서는 그에 대해 엄청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만은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인물)

중국군벌.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의 최대공신 중 하나

만주 군벌 장쭤린의 장남으로, 원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반중화민국, 친일파 성향이었다. 그러나 1928년, 부친 장쭤린이 의문의 기차 사고로 사망했고, 당시 국제연맹 사건 조사로 일본이 이 사고에 관여(중국 침략 및 여러 가지 명분으로 써먹고자)했다는 게 드러나자 일본과 갈등을 맺는다. 이후로는 중국 국민당에 입당하였고 동북역치를 통해 난징 국민정부에 복속한다, 이후 반장전쟁에서 막판에 장제스의 편을 들어줘서 국민당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국민당의 2인자까지 꿰차게 된다.

그러나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이시와라 간지의 주도로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사정은 급변한다. 그간 장제스가 군사 지원을 빌미로 만주까지 먹어버릴까봐 한사코 이를 거부해 온 장쉐량은 뒤늦게나마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초공작전과 양광사변으로 정신 없던 장제스에겐 그럴 여럭은 없었고 장쉐량 본인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다가 주요 도시를 다 날리고 러허까지 밀리고 나서야 뒤늦게 항전을 명령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유인 즉슨, 사변 초기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던) 장쉐랑이 일본군이 어떤 공격을 해와도 적대해서 저항하지 마라라는 사실상 비폭력 엄명을 내리는 바람에 쉽사리 밀리게 된 거고, 그 결과 얻게 된 '부저항'(不抵抗)이란 꼬리표는 장쉐량 생전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따라다니게 된다.

그 후 자신의 16만 병력을 수습해 최후의 영지인 러허를 통치했으나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다 러허 사변에서도 패하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 사실상 낭인 신세로 전락한 채 서쪽의 산시 성 부근에 주둔한다. 하지만 여기는 이미 군벌 양호성(양후청)[2]이 거느리는 서북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더 서쪽인 옌안에는 막 대장정을 끝낸 마오쩌둥의 공산군 약 4만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때문에 장제스는 여기 주둔한 장쉐량을 초비군[3] 부사령관으로 임명 후 공산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이후 공산군의 게릴라 전술에 번번히 참패한 장쉐랑은 점차 이렇다 할 지원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장제스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공산군과 강화를 맺고 결국 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과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이후 이 일에 앙심을 품은 장제스는 가택연금을 내림으로서 중일전쟁 내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1946년 타이완으로 이동된다. 이후 2.28 사건때 외부와 연락이 차단되면서 최종적으로 신주 현으로 이동한다. 이후 1954년에 바깥 외출 허용 등 조치가 완화되지만 여전히 외부와의 접촉은 차단되었고, 가택연금은 이등휘(리덩후이) 총통 시대인 1993년에야 끝난다.# 장쉐량의 대만에서의 유폐생활

타이완에서 연금생활을 할 때 하나의 일화가 있었는데 장제스의 생일날 장쉐량은 시계를 선물했다. 장개석은 답례로 낚싯대를 보냈다. 장학량의 ‘시계선물’은 많은 시간이 흘러간 만큼 이제 연금을 해제해 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장제스의 답변은 아직 멀었으니 세월이나 낚고 있으라는 뜻으로 낚싯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4년 뒤 2006년 그의 유품들이 고향인 요녕성(랴오닝 성)에서 전시되었는데, 개중엔 미키 마우스 인형과 용자 시리즈 장난감도 있었다(…). 가택 연금이 낳은 비극인가, 아니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가? 것도 그럴것이 가택연금 기간에 할 일이 하도 없으니까[4], 역사 연구에 몰두해서 명청조 시대의 굉장한 권위자가 되었다고 하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젊었을 적엔 잘생긴 외모로 민국 4공자 중 하나로 꼽혔다.[5] 이로 인해 숱한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쑹메이링과의 관계도 인구에 회자된다. 특히 그가 남긴 여러 로맨스 중 죽을 때까지 해로한 2번째 부인 조일적(자오이디, 趙一荻)과의 이야기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연애사다. 조일절은 16세 때 무도회에서 유부남인 장학량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의 비서로 일했는데, 이후 장학량이 연금되자 그를 따라가 함께 생활했으며, 그 정성에 감동하여 본처인 우봉지(위펑즈, 于鳳至)는 기꺼이 이혼하고 정식 결혼을 허락했다. 본처가 대인배. 아니 이정도면 대인(사람 인)배가 아니라 대신(우리가 말하는 절대자, 창조주 의미)배라고 해도 된다. 남편이 수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엄청 많아 중국 4대 미남으로 꼽힐 정도로 잘생겼고 제정적인 면에서도 가난한 것도 아닌데다 위펑즈 전처 본인도 남편을 그만큼 사랑했을 텐데 그래서 더 무섭다. 대체 얼마나 후처가 정성스럽게 봉양했으면... ㅎㄷㄷ 다른 사랑의 라이벌 여자에게 기꺼이 양보하고 쿨하게 떠났다는건 정말 인간 특히 남자도 이렇게 하기 힘든데 여자로서 인간계를 넘어 신계급 이상되는 멘탈갑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 보통 여자 같으면 당연히 남편 두고 서로 싸우지 # 중국 모 사이트가 선정한 5대 얼짱 정치인으로 라이벌 주은래, 장개석과 함께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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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장학량.

가택연금 해제 직후 2001년 10월 14일, 미국 하와이에서 104세로 사망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농담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술과 담배를 멀리한 임표(린 뱌오)는 60대에 죽었고,[6] 담배를 멀리하고 술만 즐긴 주은래(저우언라이)는 70대에 죽었고, 술은 멀리하고 담배만 즐긴 모택동(마오쩌둥)은 80대에 죽었으며, 술과 담배를 모두 즐긴 등소평(덩 샤오핑)은 90대에 죽었다. 하지만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마약에다가 여자까지 즐긴 장학량은 104세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 게다가 장학량은 마약도 오래 했다. 1930년대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15세부터 했다는데#, 해외 웹에서는 1924년부터 한 것으로 나온다.# 비록 1933년에 끊기는 했지만 무려 10년 가까이를 약쟁이로 보낸 것이다.장수의 비결이 마약? 왠지 이 짤방이 생각난다

2 역사적 평가

특히 시안 사건으로 중국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중화인민공화국측에서는 시안 사건을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하여 그를 제 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내 항일전쟁에 공헌한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시안 사건이 아니었다면 장개석의 공격에 의해 중국 공산당이 소멸되었을지도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한 평가일 것이다. 반면 중국 국민당에서는 그야말로 역적 취급. 장제스은 "8년간 들인 공(공산당 토벌작전)이 불과 2주일 만에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라는 평가를 내렸다.

장쉐량 본인은 육성 회고록에서 '군인으로서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양심에 있어서 떳떳하다. 1936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서안사건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하여 이 사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육성 회고록은 장학량이 아직 연금 상태였던 1990년대 초에 녹음된 것이며 본인이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 양안관계에 있어 이 자료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에서 장쉐량은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풀어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조너선 펜비 저 장제스 평전 프롤로그 내용에 따르면, 장제스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한 까닭은 그를 공산당과 합작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과 싸우라고 건의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고 구전된 바가 있다고 한다. 다만 이건 현실성 없는 말 그대로 구전에 지나지 않는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요컨대 중화인민공화국 측 인사로부터 생겼을)

일본 요미우리 신문사의 중국 특파원 출신 아라이 도시아키는 자신의 저서 '반역자'에서 중국 역사의 위대한 반역자 중 한 사람으로 그를 꼽았다. 그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일본의 거대 언론사 언론인이 인정했다니 아이러니하다. #

여담이지만, 국내에서도 96~7년 경 KBS 2TV에서 방영해준 '견자단정무문'에서 단역으로 잠깐 등장한 적 있다. 물론 실제 장학량 본인이 등장한 건 아니고(..),그때도 살아있긴 했다 일본의 장작림 폭살음모 에피소드에서 등장해 진진과 잠시 권법 한 수를 겨루기도 했다. 장작림 살해 후, 진진에게 원수같은 일본놈들을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는 항일 정신을 배우는 것으로 그려진다.

  1. 아명은 장샤오량(張孝良)이다.
  2. 이후 그와 함께 서안 사건을 일으킨다.
  3. 剿匪(초비), 공비를 무찌르다.
  4. 생각해 보라, 가택연금 기간이 무려 50년이 넘는다!
  5. 민국 4공자로 누굴 꼽는 지에는 여러 의견이 있다. 위안커윈(위안스카이의 아들), 돤훙강(군벌 돤루차이의 아들), 장샤오뤄(기업인이자 쑨원의 조력자 장젠의 아들), 우바오추(청의 군인 우장칭의 아들), 루사오쟈(군벌 루융샹의 아들), 장보쥐(군벌 장전팡의 아들) 등이 4공자로 꼽힌다. 그러나 어느 조합이든 장쉐량은 꼭 들어간다.
  6. 다만 임표의 경우는 비행기 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