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육군

'현대 일본'의 방위를 담당하는 육상 병력에 대해서는 육상자위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일본군
일본군 육군일본군 해군

일본어 : 大日本帝國陸軍だいにほんていこくりくぐん - 일본 제국 육군
영어 : Imperial Japan Army, IJA

1867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 제국육군. 현재 일본에선 구 육군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1871년(메이지 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나 영어권에서는 메이지 유신 당시에 덴노를 호위했던 사무라이 근위대를 시작점으로 본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장 보태서 육군 직할령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해군보다 육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있었던듯 하다. [1]

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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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프랑스식 훈련을 받고 있는 쇼군 소속의 부대(막부육군).

막부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일본군에 흡수된다. 공식적으로 대일본제국육군이란 거창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1877년(메이지 10년) 이후의 일이다. 1889년 일본 헌법이 제정되면서 군사 권한은 내각이 아닌 덴노의 통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은 대원수로 덴노를 뒀고 육군은 육군대신(육군장관), 참모총장, 교육총감의 세 장관이 관리했다. 웃긴 것은 이들은 대장이 아니라 중장이 한다. 최고 보직과 최고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런 일본군의 괴상한 특징은 병과계급을 씹어먹는 문제를 나중에 일으키기도 한다. 육군대신은 육군성(한국으로 치면 육군청), 참모총장은 참모본부(육군본부), 교육총감은 교육총감부[2]를 지휘했다.1938년(쇼와 13년)에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육군항공총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도 세웠고 여기 출신들은 나중에 항공자위대의 초기 인원이 된다. 나중에 참모본부는 대본영에게 권한을 많이 이임하게 되나 군정권의 상당수는 유지된다.

기원은 1871년 조슈와 사쓰마, 토사 등에서 징집된 덴노 직속의 어친병(御親兵)이다. 폐번치현이 이뤄지자 이들 어친병은 근위대가 되었다. 처음엔 사무라이 출신들로 군을 유지했지만 곧 국민개병제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1874년에 징병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징병제가 '사무라이를 모독한다'고 생각한 기존의 사족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면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대량으로 사직했다. 이후 서남전쟁이 일어난다. 서남전쟁은 하야한 군인들과 남은 군인들이 벌인 것으로 칼을 들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신식군대끼리 총들고 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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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경의 일본 육군 장교들.

1874년 대만을 침략했다. 일본에선 이를 외정(外征)이라고 한다. 1885년엔 프로이센의 소령을 교수로 초빙했고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1894년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이자 최강이라 생각됐던 청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아시아에선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 소유인 칭따오와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한다. 전쟁으로 일본은 경기 붐이 일고 경제 규모가 팽창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백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을 시베리아로 파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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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의 일본군 육군 복장.

1920년대에는 다소 군축한다. 그러나 현역만을 줄였을 뿐 교련 제도를 창설하고 예비 장교를 계속 확보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규모는 평시 편제의 1/3 수준인 10만명을 군축해 20만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확장된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데 그 동안 해군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다. 1941년 일본 육군은 51개 사단 규모였다. 숫자는 약 170만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소련이 1945년에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일본 육군은 패배한다. 관동군 중 상당수는 소련에 포로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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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바뀐 전투복.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옷이다. 1945년 무렵이면 이거마저 만들 돈 아낀답시고, 국민복에 부착물만 바꿔 육군복으로 쓸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신병 등에게 군복을 지급 안 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답이 없다. 해군이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규모로 볼 때 1870년에는 1만2천명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에는 12개 사단으로 38만명이 현역으로 근무했다. 1941년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명이 현역으로 일했는데 2개 사단이 한반도와 일본에 주둔했고 12개 사단은 만주, 27개 사단은 만주를 제외한 중국에 주둔했다.

1945년에는 145개 사단에 5백만 명 규모였다. 최대로 컸을 때는 609만 명이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150만 6천 명이 전사했으며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56만 6천 명 수준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67만 2천 명이며 상당수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81만 명이 실종됐으며 7천5백 명이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 대만 침공 때는 543명이 사망[3]했고 청일전쟁 때 13,823명, 러일전쟁 때 8만 명[4] 가량이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칭따오에서 영국군과 연합을 맺어 독일-오스트리아 군과 싸워 1,455명이 전사했다.

2 육군 항공대

일본군에서 육군 항공대는 육군비행전대(陸軍飛行戦隊)라고 불렸다. 미국의 육군 항공대가 미 육군의 인사나 군수와는 따로 놀던 사실상 거의 독립된 군종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육군 항공대는 육군에 철저히 귀속됐다. 1905년 러일전쟁 때부터 풍선 부대를 편성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편성된 항공부대를 만들었다. 1915년에 임시 항공대는 항공 대대로 확장됐고 1917년엔 6개 대대로 증가했다. 1919년엔 육군항공본부가 생겼고 1925년엔 항공 병과를 독립시켜 육군항공 사령부를 개설하였다. 일본 육사 내에 있던 항공 병과를 독립시켜 1935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육군 항공대의 인원 상당수는 항공전력의 공백이 있던 일본 자위대에 1954년 항공자위대가 나타나면서 상당수 흡수됐고, 대한민국 공군의 초기 인원에도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이 상당수 있었다.[5]

3 인원 선발

건군기에는 조슈[6] 출신들이 독점했으며 장교를 기존 일본사족 개념으로 파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생기면서 육균유년학교를 거친 뒤에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거나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을 거쳐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에 육군사관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1917년에는 준위후보자(후보생), 1920년엔 소위후보자(후보생) 제도를 설치해 준위나 병장, 선임부사관 등에서 우수한 인원을 뽑아 소위로 임관시켰다. 1938년에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1883년부턴 국립과 공립, 1889년부터는 사립을 불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1년현역제란 이름으로 예비 장교에 지원 가능했고 이 제도는 1927년(쇼와 2년)부터는 갑종간부후보생이란 이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갑종장교가 육사 출신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특별지원장교 제도가 생겼다. 까놓고 말해 인원 딸리니까 제도를 늘린 것이다. 나중엔 조선이랑 대만에서도 장교를 뽑았다.

1927년에 재정된 병역법에는 징병검사 결과로 만 20세 이상의 청년들을
갑종(현역)
제1을종(제1보충역)
제2을종(제2보충역)
병종(제2국민병역)
정종(병역면제)
무종(다음해 재검사)등 6단계로 나눴다. 어째 우리나라 현재 병역제도랑 비슷하다.

갑종과 을종은 제1국민병역에 해당하며, 그중 제1을종은 기초군사훈련까지는 받도록 하였다. 현역 복무기간은 1927년까지는 2년 6개월이였지만 우가키 군축으로 인해 2년으로 줄어 유지되었다. 현역 복무 후에는 예비역 5년 4개월과 후비역 10년이 있으며 이중에서 12년 4개월 까지를 보충역으로 계산하여 을종과 함께 동원 가능하도록 법으로 되어 있었다.

1933년 까지는 징병제라고 해도 현역 징집률이 겨우 20% 밖에 안되었다. 일본군의 기본 군사 전략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그 소수를 차량화/기계화/중무장화 시킬 장비가 없는 상태여서 더 이상 뽑아도 어짜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로 엄청난 병력 소모가 있자 과거에는 군대에 안 가던 제1을종, 나중에는 제2을종까지 징집하여 37년에는 징집률이 25%로 올라가고 40년에는 무려 50%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극심한 병력 부족 사태는 심각 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병역제도는 평시에 상설사단 17개 체제로 짜여져 있는데 1938년까지 정확히 두배인 총 34개 사단 115만명으로 늘어 난다. 여기에 일본군은 평시에 비해 전시에는 사단 병력이 2배로 늘어 난다. 결국 평시에 비해 딱 4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역 2년외에 예비역 5년 4개월을 전부 동원해서 복무해도 평시 병력은 3.67배 밖에 안되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을종까지 동원하여 전시 34개 사단 병력을 체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2을종의 경우 아예 군사교육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소집’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수 정예제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39년에는 8개 사단 증설, 40년에는 7개 사단, 41년에는 2개 사단이 증설되어 총 51개 사단 210만명이 되었다. 결국 1939년에 대량소집을 위한 법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보충병역 12년 4개월이 17년 4개월로 연장되었다. 이제 전역꿈도 희망도 없어. 그래도 전역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는 것에 만족하라고 최고 38세의 남성까지 소집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에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체격과 나이까지 소집되어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그래놓고 현역들이 예비역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개무시 하는 건 덤.[7]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이래도 부족하여 징병연한을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현역 징집률을 77.4%까지 올렸다. 육군 총병력은 99개 사단 42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이미 심각하게 상태가 안좋았던 41년과는 비교도 안되게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는 징병이 된 것이다. 옆에 있는 반도와 이제야 징집률이 비슷해 졌다.[8]

장교 부족도 심각하여 1939년의 경우 전체 장교 6만 700명에서 소좌 정원 7,366명중 4,231명(57.4%)만 채우고, 대위는 더 심각하여 정원 1만8,597명중에 7,191명(38.7%) 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채워진 인원들도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로 39년 기준으로 현역 비율은 36% 밖에 안되어 소좌가 83.1%, 대위가 77.7%, 중소위의 경우 겨우 21.2%였다. 그바람에 본래 소좌가 맡아야 할 대대장을 대위가, 대위가 맡아야 할 중대장을 중소위가 맡는 것이 보통이였다.

45년에는 육군 전체 장교가 25만명 까지 늘어났지만, 현역 장교 비율은 무려 19%까지 떨어 졌고, 정원 충족률도 74%까지 떨어진다. 대대장(소좌), 중대장(대위)의 경우 현역은 20~40% 정도였으며, 정원 충족률은 겨우 70% 정도였다.

장교 1인당 사병의 수는 39년에는 17.5명이었지만, 45년에는 24.6명에 달했다. 같은기간 미 육군은 39년에는 12.1명, 3년 11.1명, 45년 8.3명으로 오히려 장교 비율이 점점 올라갔다. 참가로 미군은 39년 총병력 10만명에서 45년 1,000만명까지 늘어났다. 즉 일본이 추구하는 ‘소수정예’는 오히려 미군에게 붙여줘야 할 명칭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다수정예’라고.

부사관 선발은 병 중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병 계급은 이병과 일병, 상병으로 구성됐으며 일병까진 대체로 그냥 올라갔지만 상병은 중대 당 1할의 인원 제한이 있었다. 진급은 검열로 이뤄졌다. 일본군 병의 특징은 계급이 무조건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이 높다고 꼭 선임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 육군 병의 복무 기간은 2년이었다.

3.1 병역 기피

창군 시절인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패전으로 해체된 2차 대전까지의 기간을 보면 병역기피자도 꽤 있었다.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해서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겨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9] 이공계 학교에도 병역 면제를 해줬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 이공계로 가 피한 사람이 많았다. 아니면 군무원이 돼서 일본에서 근무하든가. 오진으로 징병을 피한 경우도 있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대표적이다. 징병검사를 통과했지만 군의관이 기관지염을 결핵으로 본 탓에 귀가 조치됐다. 소수이긴 하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병역 거부를 하기도 했다.[10] 평화주의자나 좌파들도 병역거부를 했으나, 전자는 언론통제로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비국민 취급을 받았고, 후자는 코렁탕 취식후 감옥에 가거나 전향했다(...).

왜 이런고 하니, 사실 군국주의 국가였다 해도 당시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거치면서 서양 문물이 들어온 것도 있고, 일본식 군국주의의 특성상 "결정은 엘리트들이 하고 국민들은 끌려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1945년 패전 직전 입영율은 50%가 되지 않았다.[11] 당시의 행정체계의 허술함도 한 몫 했지만, 차일 피일 미루고 '다음에 가겠다'고 하다가 군수 공장이나 주요 기간산업 시설에 취직하는 식으로 징병을 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12] 물론 당시 징병제는 남자로서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징병을 피한 사람들은 다소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나약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리고 이런 풍조는 패전 후 반도에 전승된다

4 관련 항목

  1. 대륙과 이어진 반도라는 지형적 요소부터 시작해서 당장 조선총독만 봐도 해군 출신은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유일했다. 그외에는 전부 육군 장군들. 또한 정한론을 주장한 인사들은 상당수가 후술할 조슈번 출신이었다. 그리고 일본군 해군의 경우 조선에 있는 규모있는 해군기지는 진해 요항부정도만 두었다고 한다. 자세한것은 해당 문서 참조.
  2. 한국엔 마땅히 비교될 만한 규모가 없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육군교육사령부육군사관학교를 합친 느낌
  3. 전투로 사망한 자는 12명이고 531명은 질병으로 라는데
  4. 전사자는 4만 7천, 나머지는 질병
  5. 다만 조종사 훈련이나 장비 공급, 편제 등 전반에서 일본군보다 미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공군 창설 간부 7인이 미군식으로 재훈련을 받으면서까지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덕분이다.
  6.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7. 대충 따지자면 1등 군인 현역, 2등 군인 예비역, 3등 군인 조센징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오오에 오장(장항선 분)이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가 조센징이라고 각종 학대를 받는데, 옆에서 덤으로 구박 받으며 개무시당하던 중년 남성이 바로 후비역 구보다(박인환 분)이다.
  8. 군생활 해봤으면 알겠지만, 저정도 징집률 때문에 정신지체에 벼라별 환자, A급 관심대상자들 까지 다 군대에 오게 된다. 특히 육군 보병부대에는 이런 인간들이 득실득실 하다. 군복도 혼자 제대로 못입는 정신지체자랑 같은 분대에서 2년 군생활 해봤어? 둘이서 실탄 받고 외곽 경계근무 나갈 때의 그 짜릿함이란
  9.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는 것은 19세기까지 있던 일. 나쓰메 소세키가 대표적.
  10. 당시 "등대사 사건"을 비롯해서, 군부가 가장 골치아파 하는 집단으로 평가되었다.
  11. 군대를 오라고 영장을 보내면, 둘 중 한명은 안 왔다는 소리다.
  12. 일제시대 말기에 박헌영이 벽돌공장에서 가명으로 일하면서 숨어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김두한을 비롯한 폭력배들은 건설대를 비롯한 적극적인 부역 활동을 통해서 징병을 피했다.
  13.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잠수함이다!
  14. 위에 있는 삼식잠항수송정과 더불어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항공모함이다!
  15. 전부 육군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