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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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창기 일본군

근대 일본군의 사상적 배경은 조슈 번의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에서 나왔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하여 근대적 체제를 공부한 그는 신분의 차이에 상관없이 장교를 양성하는 체제와, 프랑스를 본뜬 육군, 영국을 본뜬 해군을 기초로 한 국민개병제를 일본군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조슈번의 장교로 취임하면서 그가 지휘한 군대가 무진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오오무라의 구상이 옳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조슈 번군의 주력은 여전히 아시가루, 장교는 상급무사들이 차지했다. 농민들은 구식의 머스킷을 가지고 향토방위군 정도의 임무만 맡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편성된 기병대(奇兵隊)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무사와 농민은 전투능력에 있어서 천지차이라는 인식을 가진 때에 이런 결과를 보인 것 자체가 혁신이었다. 덕분에 오오무라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박탈하고 전국민을 무장시키는 사상에 반감을 가진 초슈번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지만 그의 동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기도 다카요시 등은 그의 구상을 받아들여 일본군을 창설하는 데 힘을 바친다.

에도 막부가 쓰러진 1868년 말, 덴노의 도쿄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1870년에 상설편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각 번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상비군을 해체하고 덴노 직속의 무력을 조직하려는 정책이었고 총 병력은 8,000명에 달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소수지만 당시 일본의 번들은 독자적으로 이만한 병력을 원정에 내보낼 능력이 없었다.

서양식의 군복을 입고 막부에게 넘겨받은 최신형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였던 어친병의 무력을 기반으로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 봉건제의 잔재였던 번을 해산시켜 현으로 만들어 중앙집권화시켰으며, 각 번들이 보유하던 소총대포들이 중앙 정부로 넘어온다.

내전이 막 끝난 상태에서 다수의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력이 각 번의 손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폐번치현이 이루어진 데에는 어친병의 존재 말고도 각 번들의 재정 상태가 전쟁과 흉작으로 크게 나빠진 점도 컸다. 특히 구 오우에쓰열번동맹 소속 번들은 신정부에 막대한 배상금을 바쳐야 했으므로 번정부의 운영이 힘들었다. 그래서 폐번치현 이전에 이미 신정부에 권한을 양도하는 번도 소수 있었다. 다만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츠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츠만큼은 이 폐번치현에 크게 반발했으며 매일 불꽃놀이를 하는 형태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끝내 굴복한다.

1871년에는 진대병(鎭臺兵)을 창설한다. 진대병은 이름 그대로 국내의 내란에 대비한 군대로 요새를 기반으로 주둔하며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프랑스식 사단 편제를 가졌으며 구 무사들이 생활고로 점차 여론이 나빠지던 시점에서 국체 수호를 위한 진압무력의 성격이 컸다. 초창기에는 동경, 오사카, 히로시마, 센다이의 4개 진대를 편제했고 징병령 발효 이후로는 병력이 늘어나게 된다. 진대병 창설에 따라 1872년 5월에 어친병은 폐지하고 근위사단으로 개편한다.

1872년 11월에는 1927년부터 병역법으로 바뀐 징병령을 발효하면서 무사 위주로 돌아가던 국군이 평민 병사로 충원되고, 서구 유럽의 전례를 따라 덴노를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육군대장에 임명하여 근대적 군대의 체제를 갖춘다. 뒤이어 1873년에는 각 번에서 생활하던 무사들에게 신정부에서 주던 월급을 정지하는 질록 처분을 단행, 동원의무에서 해제시킨다.

당시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무사들이 평민보다 전투력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 무사들 중심으로 군대를 꾸려나가는 이른바 강병(强兵)체제를 주장했지만 메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츠마번 출신이 대거 공직을 사퇴, 낙향하면서 국민개병제가 정착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초슈번과 달리 사츠마번은 전군이 사무라이였고 이들이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평민의 자질을 무시하던 정서를 가졌던 것이 있었다.

이후 분노한 무사들때문에 사족반란이 빈발했다. 진대병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여 대부분의 반란은 진압당했지만 최대의 반란인 서남전쟁에서는 고전했다. 사츠마군의 발도 돌격에 정부군이 도주하는 추태를 여러 번 보였지만 결국 화력에서 앞서는 정부군이 승리하여 근대식 일본 국군의 체제가 비로소 완전히 정착한다.

초창기에는 프랑스식 육군을 지향했지만 1870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면서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교관으로 맥켈을 초청하고 프로이센으로 수뇌부가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육군은 1886년에는 완전히 독일식 체제로 개편한다. 청일전쟁에 즈음해서는 내란의 우려가 사라지고 대외원정의 필요성이 늘면서 구 진대병을 독일식 사단편제로 바꾼다.

청일전쟁때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드러냈다. 이미 청나라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엄청난 양의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군은 지지부진한 개혁과 지리멸렬한 전술로 무장한 청군에 압승을 거두고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뒤이은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규모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한편 쓰시마 해전에서는 T자의 ─선에 아군 함대를, │선에 적 함대를 위치시키는 전술로 화력을 집중시키며 러시아 발트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위 일본군의 전술은, 보통 군함의 화력을 가장 많이 집중할 수 있는 방향이 측면이므로, 아군은 적 함대 선두에 전함대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지만, 적함은 선도함 한 척의 그나마도 절반의 화력만이 유효하게 만든다. 이 전술은 전열함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필살 전술이지만 각 함간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유효사거리가 짧았던 근대에는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어려운 전술이라 성공사례가 적었다.

이 쓰시마 해전은 함포 사거리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전이었으며 이 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결과로 자잘한 중소구경의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드레드노트전함이 등장하면서 거함거포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일본군의 상승세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었다.

2 전성기

일본 제국의 성장세에 세계 각국은 일본군의 높은 사기와 신사적인 태도, 절도 있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고 러일전쟁 중 조선인들은 청군, 러시아군과 달리 민간에 피해를 안 주며 꼬박꼬박 대가를 내 식량을 사고 노역을 부리는 일본군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승기가 굳어진 러일전쟁 말기부터 나타난 강제적인 식량 공출과 무임금 노역 강제동원은 이들이 결코 신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높게 평가하던 세계 각국은 정작 203고지 전투에서 나타난, 근성론에 의해 경직되어 있고 융통성 없는 사고 방식에 찌든, 일본군의 실상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청일전쟁 이전 1873년의 대만 원정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때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육군사령관이 독단으로 파병을 했고 청일전쟁 중 평양전투 때에는 이틀치 소총 탄약만 남은 상황인데도 추가 보급을 안 기다리고 닥치고 총검 돌격(!)을 해댔다. 문제는 그렇게 멍청하고 위험한 짓을 했는 데도 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근성론 드립이 그렇게 뒤떨어졌다 보기는 어렵다. 먼 훗날 1차대전 당시만 해도 당시 육군 최선진국 중 하나인 프랑스군이나 다른 나라 군대도 엘랑 바탈 등 비슷한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2.1 러일전쟁

이런 일본의 승승장구는 할힌골 전투 혹은 시베리아 출병에서 소련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개별 전투로 따지면 203고지 전투가 일본군의 최초 삽질이긴 하지만, 러일전쟁은 이긴 전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승리는 결국 일본군이 실패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러시아 견제를 위한 영국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몰라도 러시아와 싸우기란 무리였다. 러일전쟁은 영국과 미국 양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 일본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1] 실제로 종전 당시 러시아는 육군이든 해군이든 추가적인 병력충원이 가능했던 반면 일본은 겉으로는 크게 이겼지만 그 사이의 피해로 전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종전 협상 당시 러시아 쪽은 피의 일요일로 더 전쟁을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일본 정부는 이겼다고 생각해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의 상태를 알고는 서둘러 전쟁배상금을 포기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당시 전비에 따른 부채는 한동안 식민지인 조선에도 돈이 없어 투자를 못할 정도로 확실히 큰 문제였지만 이른바 아시안 게임 들어서야 다 갚을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1차대전으로 대박이 터진 덕에 일본은 1차대전 전 순채무국에서 순채권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의 일본은 이제 갓 열강으로 등극할락 말락한 상태였고, 러시아는 다소 나사빠진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건 영국과도 전세계적인 팽창경쟁을 벌일 정도 강국 대접을 받는 나라기는 했다. 오히려 그런 나라를 상대로 웬 동아시아의 듣보잡 국가가 나름대로 외교적, 정치적 머리를 굴려가면서 이긴 것은 어쨋건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우리에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2.2 칭다오의 교훈

물론 일본군도 이런 병신짓을 고치려는 노력을 하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1차 세계대전 때 칭다오 전투를 들 수 있다. 1914년 9월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철저히 포병 위주의 전투를 벌인다. 즉, 당대의 최신 전술을 시험하는 공간으로 칭다오를 쓴 것이다.[2] 28센티 유탄포, 45년식 24센티 유탄포 같은 대구경의 포를 통한 전투를 철저히 준비했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시했다. 일본군은 만족했고, 적이었던 독일군도 "일본의 장점은 대포 사격이고 단점은 보병 소총 사격이다"라고 평가했다. 칭다오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미래전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현대전은 물량전, 과학전, 소모전이기 때문에 가진 국가가 무조건 이긴다! 문제는 일본은 아무리 봐도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를 놓고 일본군은 두 개의 큰 계파로 나뉘어진다. 오바타 도시로로 대표되는 황도파는 정신력으로 물질의 부족함을 극복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전제로 약한 놈들 상대로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교리에 쓰면 쪽팔리니(...) 교리에는 정신력으로 포위 섬멸하면 된다!만 적었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를 보고 뽕을 맞은 일본군은 모든 전투를 탄넨베르크처럼 싸우면 된다고 생각했다.[3]

통제파는 나라 힘을 길러서 일본 자체가 가진 국가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럴 경우 나머지 국가들은 더더욱 가진 국가가 되기 때문에 결국 쓸모가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시와라 간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통제파의 해답은 미국을 공격한다! 였다. 물론 미친놈 소리 들었지만, 1966년까지 "미국과 싸울 힘을 기르자"가 이시와라 간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군부가 폭주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주장은 어그러진다. 즉, 황도파의 교리의 바탕이던 강한 놈과는 싸우지 않는다를 깡그리 무시하고 미국을 공격한다!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통제파 제안대로 미국과 싸울만큼 힘을 기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방법론은 황도파가 면피용으로 적어놓은 대로 정신력으로 극복이 되었다.

3 일본군의 전쟁목적

일본군의 전쟁목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창한 주권선이익선 개념에 따른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되는 주권영역, 즉 국경과 같은 개념이고, 이익선은 일본국의 이익을 위해 경제·군사적 동맹 또는 우방으로써 일본의 이익을 위해 유지할 권역이다.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제2의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큰 청나라에 대항해 주권선으로 일본 본토를,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설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운운을 대외적 프로파간다용으로 활용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일제 식민지 시기만 상기해도 선의가 아니라 볼 수 있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주권선은 한반도와 대만, 이익선은 만주 및 중국으로 확장했다. 주권선의 수호는 이익선의 유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익선의 유지를 위해서는 주변 강국을 외교 및 전쟁으로 굴복시켜 이익선의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라 만주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통치했고, 중국을 침공했으며 종국에는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진바 끝내 1945년까지의 일본의 표면적인 전쟁행동은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의 유지 및 확장에 따랐다. 청나라나 러시아와 같은 일본 입장에서의 외세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에 의거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비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이 비대해져 군이 정부를 위협할 수준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4 군부의 폭주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일본 정계가 민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군부는 수 없이 정치테러를 벌였다. 당장 이 당시 일본은 한국과 대만 이외에 식민지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한국 역시 그들에게 나긋나긋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게되니 저지른 짓이었다.

이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군인도 예외는 아니라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테러로 올 암살 우려 때문에 그를 아낀 상부에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피신시켰을 정도. 시망의 징조가 보이지않는가

이것도 모자라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정권 장악의도를 드러내 갔고 끝내 5.15 사건2.26 사건이 벌어졌다.

2.26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덴노 추종자 황도파의 전 현직 청년장교들이 1,400여 명의 사병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일으킨 쿠데타다. 그들은 내각을 습격해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상과 사이토 마코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총리관저와 국회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으나, 사흘 뒤의 진압으로 미수에 그쳤다. 끝내 황도파는 박살나고 내각 총리를 지지하는 통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잡았다. 참고로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조선 총독을 지냈고, 무단 통치를 무늬만 문화 통치로 바꾸기도 했다.강우규 의사에 의해 폭탄공격을 당했던 그 사이토 맞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몇몇 민간인 정치인, 관료들과 짜고서 군부 독재에 돌입했다. 그리고선 그 때까지도 어렵던 경제사정을 "식민지를 늘려 수탈하자!"라는 방침으로 풀려 한다. 처음에는 중국 침공으로 풀려고 했으나, 미국이 석유 등의 금수조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재를 가하자 당시 이들 품목 소모량의 80~90%를 미국 수입에 기대던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4] 문제는 이걸 타파한답시고 진주만 공습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필리핀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갔다는 점이고 [5] 이로 인해 일본은 남방 작전, 진주만 공습 등을 통해 영국과 미국 등을 적으로 돌리는 정치적 무리수를 범하게 되었다.

그래도 침략행위를 나름대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일본은 "서양 열강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이 과거에 외쳐댔던 탈아입구 등에 비추어 볼 때 그걸 곧이 곧대로 믿는 이가 얼마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의 번드르르한 포장 뒤에서 뭘 꾸몄는지에 대한 증거로 쇼와사라는 책에 의하면, 쇼와 18년 (1943년) 5월 31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대동아정략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이 있다. 당시에는 군부와 정부에서 꼭꼭 숨겨서 전후에야 드러난 이 계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셀레베스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하고 민심을 파악하는 데 주목한다. (중략)... 이들 지역을 제국 영토로 삼는 방침은 당분간 공표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아시아 해방 그런 거 없고 죄다 식민지로 삼겠다는 소리다.

심지어 이것은 어전회의, 그러니까 덴노의 면전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이것은 "흑흑 우리 덴노께서는 나쁜 군부놈들 거짓말에 속으셨스므니다. 징징징" 같은 변명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그리고 쇼와 18년은 1943년인데, 이는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에 이어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도 탈탈 털리고도 두 달된 시점에서 저런 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했는지 쇼와사의 저자는 이러한 계획을 너무나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고 엄청난 비판을 했을 정도다

그렇다고 식민지를 착취해서 자국민을 살찌우는데 썼냐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운좋게 식민지로 이주해서 대박친 사람들이야 있겠지만 대다수 자국민도 그다지 대접이 썩 좋은 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일본군한테 있어서 식민지는 전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보더라도 일본의 1인당 GDP는 중국, 소련보다야 나았지만 이탈리아만도 못한 상황이었다. 사회적으로 볼 경우 당장 징병검사에 떨어져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비황국신민' 즉 "너는 일본국민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만 봐도 군국주의의 폐해가 심했다.

이건 굳이 도조를 들지 않더라도 20세기 초, 못해도 30년대부터 나타나거나 심각해진 병폐다. 사실 GDP대비 국방비 지출, 역대 총리대신 중 군 출신 인사, 헌법에 따른 부실한 문민통제 등만 보더라도 일본은 이미 이 시기부터 그냥 군국주의 국가였다. 이들이 보기에는 지적장애가 있어 징병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화가인 야마시타 기요시도 비황국신민이라는 것이다. 물론, 식민지인과 달리 자국민들이 이렇게 시달리는 건 동정의 여지가 없다. 5.15사건에서 나타나듯 일본 국민들은 대체로 그 침략전쟁에 환호하거나 그 주도 집단인 우익세력에 그 정도 차이는 제하더라도 어쨋건 동조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은 종전 때까지 계속되는데 (조선을 떠나며)란 책을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이 북한에 입성하자 당장 군인 가족들 외에는 모두 북한땅에 남겨둔 것이라든지[6], 귀향민들에 대한 재산압류라든지, 잉여집단으로 취급한 것이라든지..하여간 말이 많다. 심지어 한 귀향 일본인은 인터뷰에서 본국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식민지에서 그렇게 착취해먹고 살았으니 당연히 받는 인과응보지 뭐."라고 하는 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

그렇게 일본 제국은 도조 히데키가 수상일 때 쯤에는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도조 이전에는 군대와 정부가 어느정도의 균형과 견제를 이루었지만 도조가 총리가 된 이후 말 그대로 정부가 군대에 먹혀버린 것으로 군대가 모든 것을 관리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도조 히데키는 일본군을 이웃나라들을 침략하여 물자를 빼앗겠다는 강도짓을 하겠다는데 아용허겠다고 나섰고, 이는 태평양의 아시아 국가들에게 커다란 재앙이 되었다.

5 전후의 일본군

5.1 패전 이후

관동군의 상당수는 남자들이 사망해 여초이던 소련의 재건을 위해 수십 만이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군 패잔병을 참고할 것. 그 밖에 일본 열도에 남은 좌관(영관)급 이하의 장교들은 1952년 이후 자위대에 입대가 가능해지면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되었다.

5.2 일본군 잔당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태평양 전선에 갔던 일본군들의 일부는 일본의 항복을 부정하거나 통신 두절로 일본의 패망을 통지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까닭에 종전 뒤에도 계속 무장한 상태로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이쯤이면 이게 군대인지 산적떼인지 구분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물론 현지 군대나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많은 수가 죽거나 항복하였고, 일부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답시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다.

김형배의 만화 황색탄환에서도 짤막하게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전술이 구 일본군 전술과 비슷하다. 베트콩들을 훈련시키는 일본군 중령이 있다는 등 일본인 기자의 입을 빌어서 언급한다. 다만 이 때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참전하기 시작한 시기라... 또한 일본에서 하리마오라는 일반 마인어 명사를 널리 알린 데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받는 옛 일본 드라마 쾌걸 하리마오도 전후 동남아 독립투쟁에 숟가락 얹으려는 일본군 잔당들에서 딴 듯하다.

사실 통신 두절로 패망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핑계일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일본이 이미 패망했다는 사실을 몇 개월 정도라면 모를까, 몇 년씩이나 모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철저하게 세뇌당한 상태라 도저히 패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일본군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이미 끝나버린 전쟁에 낭비하는 얼간이 짓을 벌였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구 일본군 잔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9년 만인 1974년 필리핀에서 생환한 육군 소위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이다. 이 인간은 패전 소식을 들었는데도 패전을 부인하고 종전 뒤에도 계속 숨어 필리핀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일본 정부에 이끌려 온 전 직속 상관의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투항했다. 이 사람은 숨어 지내는 동안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을 여럿 살해했지만 일본의 극우들은 이를 사소한 문제라며 무시해 버리고 "충성스러운 일본군의 모습"이라고 미화만 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음식을 훔치다 들키면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목격자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7] 이는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저지른 짓이다. 필리핀의 일본차관 유입이 아니었으면 살인죄로 당연히 사형이나 최소 무기징역이 기다릴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었으니 그 관점에 동의한다면 필리핀군을 출동시켜서 그대로 사살해 버려도 무방하다. 실제로 필리핀군은 오노다 히로를 사살하기 위해 수 차례 토벌군을 파견했고, 처음에 3명이서 활동하던 오노다의 부대는 2명이 차례로 죽어 마지막에는 그만 남았다. 더구나 아무리 전쟁중이라도 민간인에 대한 약탈이나 살인이 범죄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전쟁중이니 상대국 민간인을 죽여도 괜찮다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군식 사고이다.

참고로 오노다 히로는 이후 전후 일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브라질로 건너갔다가 일본에 돌아왔고 이후에도 일본 극우 세력과 밀접히 교류했다. 물론 그와중에도 간간히 인터뷰나 매체등에서 자위대를 까거나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헛소리를 하다가, 2014년 1월 16일 결국 천수를 누리고 91세로 사망. 젊은 시절을 쓰레기같이 보냈고, 전후에도 끝까지 살인과 약탈이나 하면서 인생을 낭비한 것 치고는 상당히 잘 살다가 갔다.

물론 오노다 히로처럼 악질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세뇌된 상태라 차마 항복은 못하고 그저 숨어다니기만 한 일본군도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육군 오장 요코이 쇼이치(橫井庄一). 1972년 발견 당시 그는 무기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아 여기저기 녹슬어 있는 등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패전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채 항복을 거부했지만, 동굴에서 지내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형태로 숨는 등 오노다와 달리 최소한 사람으로써 지킬 선은 남겨서 그 때문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8] 그 뒤 일반인 신분으로 살아가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많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군 생존자들이 잊을 만하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상당수가 필리핀 반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대로 정착한 경우도 많으며 혼란할 때 그냥 귀화해버린 이들도 있는 듯 하다.
  1. 양측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학자 등에 따라 통계가 갈리므로 정확한 판단은 어렵다. 다만, 동원 병력은 러시아군이 더 많았다.
  2. 덕분에 전투기간이 한 달 이상 길어졌고 전투를 지휘한 가미오 중장은 신중장군, 즉 겁쟁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3. 물론 만만한 상대에게만! 오바타는 가진 국가와 싸우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4. 당시 기준에서 중국에서 쓸만한 자원은 철, 석탄 등 몇가지를 빼면 의외로 보이지 않았다. 그 자원 역시 충분히 공급되었다 보기는 어렵고.
  5. 별장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고 보면 된다.
  6. 이게 더 이를 갈게 만드는 이유는 이미 만주와 북한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뇌부들과 또 당시 북한에 지사를 두고있던 대기업 간부들은 이미 소련군이 북한으로 입성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첩보를 입수해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으로 들어올 것을 미리 알아낸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가족과 자신들만 야밤도주격 피난을 한 것.
  7. 약탈, 살인 뿐 아니라 재미로 강간살인, 방화 같은 온갖 쓰레기 짓을 했다. 그래서인지 오노다 히로에게 피해를 입은 필리핀 주민들은 오노다 히로라는 말만 들어도 이를 간다.
  8. 사실 이는 오노다 히로는 장교출신으로 군국주의 사상으로 똘똘 무장한 상태였던 데에 반해 요코이 쇼이치는 평범한 징집병 출신이었던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