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복성군 옥사사건이라고도 한다. 작서의 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 사건에 동원된 게 불에 태운 쥐였기 때문(...)
2 배경
중종의 2번째 왕비였던 장경왕후 윤씨가 낳은 원자가 세자(뒷날의 인종)로 책봉되자,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는 자신의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3 전개
1527년 2월 29일. 세자의 생일에 동궁 북쪽 뜰의 은행나무에서 끔찍한 것이 발견되었다. 쥐를 잡아다가 입, 눈, 귀를 불로 지져서 나무에 매달아 둔 것이었는데 이는 세자의 간지가 쥐띠였으므로 쥐를 잡아 입, 눈, 귀를 지져 기괴한 형상으로 만들어 세자를 저주하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생나무 조각에 세자의 생년월일과 세자를 저주하는 내용의 방서까지 발견되었다.
왕이나 세자, 왕비 등을 저주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는 중대한 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조정은 발칵 뒤집힐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3월 1일에는 왕이 머무는 대전 침실의 책장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평소 세자를 호시탐탐 노리던 경빈 박씨와 복성군에게 혐의가 두어졌고 경빈 처소의 나인들과 경빈 박씨의 사위 홍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끝에 사건의 배후가 경빈 박씨와 복성군임이 드러나 조정 중신들은 두 사람을 처벌하라 주청했다. 명백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폐서인되었고 이후 사약이 내려져 사사되었다.
또한 경빈 박씨의 사위 홍려는 곤장을 맞아 죽었고, 경빈 박씨 편의 유력한 대신이었던 좌의정 심정 등도 사사되었다.
4 사건 이후
그런데 1533년, 경빈과 복성군이 죽은 이후 또다시 같은 필체의 방서가 발견되어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대사간 상진은 이 방서와 1527년의 방서의 글씨체가 같다고 주장한 반면, 김안로는 1527년의 방서와는 다른 글씨체라고 맞섰다[1]. 상진은 새로 발견한 방서의 글씨체가 지난번에 발견된 방서와 같으면서, 홍려의 글씨체와는 맞지 않음을 증명하여 경빈과 복성군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김안로가 권력을 틀어쥔 탓에 중종은 방서를 태워 없애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켰다.
이후, 김안로가 몰락하고 1541년에 작서의 변에 쓰였던 방서의 글씨체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2]의 글씨체와 같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이 회복되었고 오늘날 작서의 변은 귀양지에 있던 김안로가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한 일로 결론이 나게 되었다.
5 매체에서
고전소설 윤지경전이 이 사건과 기묘사화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고전소설에서 드물게 국내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여인천하에서는 정난정이 작서의 변의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김안로가 귀양간 곳에 몰래 잠입하여 김안로와 손을 잡고 김희의 도움을 받아 직접 동궁전 은행나무에 작서를 걸어둔 걸로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