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왕후

조선의 역대 왕비
중종
단경왕후 
중종
장경왕후
중종
문정왕후
호칭장경왕후(章敬王后)
시호숙신명혜선소의숙장경왕후(淑愼明惠宣昭懿淑章敬王后)
출생지호현방(好賢坊) 사저
사망지경복궁 동궁 별전
본관파평(坡平)
배우자중종(中宗)
아버지파원부원군 윤여필
어머니순천부부인 순천박씨
생몰
기간
음력1491년 7월 6일 ~ 1515년 3월 2일
양력1491년 8월 10일 ~ 1515년 3월 16일
재위
기간
1507년 ~ 1515년

1 소개

조선 중종의 계비(繼妃).

본관은 파평. 파원부원군 윤여필이다. 어린 시절 월산대군의 아내인 승평부부인 박씨의 집에서 자랐고, 중종이 즉위한 해에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로 책봉, 중종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의 첫 왕비 신씨어떤 민감한 문제로 폐출이 되었다. 중종의 후궁이기도 한 반정공신들의 들이 "새 왕비 자리는 내 거야!" 했으나[1] 그녀가 왕비가 된 것이다. 박원종은 외숙부, 월산대군의 처조카였으니 왕비 자리에 가장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1511년에는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를, 1515년에는 적통 대군인 원자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튿날 새벽 병세가 매우 중해지자 일어나 앉아 손수 글을 써서 상께 아뢰기를 ‘어제 첩의 마음이 혼미하여 잊고 깨닫지 못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지난해 여름 꿈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억명(億命)이라 하라 하므로 써서 벽상에 붙였었습니다.’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중종 21권, 4번째 기사

죽기 전에 당시 원자였던 인종의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이렇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인종은 피휘하기 위해서 호(峼)로 이름을 고친다. 그래서 인종이 오래 살지 못 했다나 어쨌다나

대윤과 소윤을 나눌 때, 대윤의 우두머리가 되는 윤임이 그녀의 오빠이다. 효혜공주김안로의 아들 김희와 혼인하면서 사돈 관계가 된다. 그녀의 사후 왕비로 책봉된 셋째 왕비는 삼종질(9촌 조카)이 된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희릉(禧陵)이다.[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9년 동안 중궁에 있으면서 스스로는 엄격하면서 아랫사람에게 후덕해 칭송이 많았다고 했다.

2 매체에서의 등장

대중매체에서는 몸이 약해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 역할로 등장하고, 주인공 격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 애니메이션 장금이의 꿈에도 나왔다. 성우는 윤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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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황상 중종의 후궁중에서 장경왕후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친정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할 만큼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 가문이며, 결정적으로 그녀의 외삼촌이 반정 1등 공신인 박원종이었다.
  2. 이 능은 사연이 참 많은데 처름에 묻힐때 무덤을 조성하던 과정에 그 자리에 돌이 20수레나 나왔다고 하는데 그래서 몇 자 아래에 묻히게 되었는데, 자그마치 20년 뒤에 김안로가 언급해서 천장하고 그 때 있던 사람들 벌주는데 말이 왜 국모를 그딴곳에 묻냐는 것이지, 사실 정광필을 벌주기 위함이었다. 또 나중에 중종이 죽으면서 같이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옮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