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국왕 | ||||||
10대 연산군 이융 | ← | 11대 중종 이역 | → | 12대 인종 이호 |
묘호 | 중종(中宗) | |
시호 | 조선 |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
명 | 공희(恭僖) | |
본관 | 전주(全州) | |
능묘 | 정릉(靖陵) | |
성 | 이(李) | |
휘 | 역(懌) | |
자 | 낙천(樂天) | |
출생지 | ||
사망장소 | 한성 창경궁 환경전 | |
배우자 | 단경왕후(端敬王后) / 장경왕후(章敬王后) / 문정왕후(文定王后) | |
아버지 | 조선 성종 | |
어머니 | 정현왕후(貞顯王后) | |
생몰 기간 | 음력 | 1488년 3월 5일 ~ 1544년 11월 15일 |
양력 | 1488년 4월 16일 ~ 1544년 11월 29일 (56년 7개월 13일, 2만 680일.) | |
재위 기간 | 음력 | 1506년 9월 2일 ~ 1544년 11월 15일 |
양력 | 1506년 9월 18일 ~ 1544년 11월 29일 (38년 2개월 11일, 1만 3952일.) |
목차
1 성장과 즉위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이전에는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불렸다. 연산군과는 이복형제 지간이다. 중전의 소생인 대군이었던 탓에 권력투쟁에서 희생양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이런 탓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 신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여서 연산군 치세 내내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1506년, 박원종 등이 주도한 반정에서 왕으로 추대되어 연산군을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연산군 시절의 온갖 폐단들을 수습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당초 정통적인 왕위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에서 추대된 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중종의 치세는 우유부단과 뒷걸음질로 점철되고 만다.[2]
연산군의 친동생이 아닌 이복동생으로 즉위했지만 어머니가 왕후였기 때문에 방계 출신은 아니고, 선조가 조선의 첫 방계 임금이다.
2 조광조의 개혁
중종의 초기엔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을 우대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첫 아내인 신씨를 폐비시켜야 했다. 반정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해치려 할 경우 중종까지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쳤던 경우도 있어, 홍경주의 경우는 병조판서를 지내면서 중종에게 대놓고 쿠데타 협박으로 기묘사화를 주도했다는 설이 있는데... 근거는 그다지 없다.[3]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중종 초년 일찍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고, 후년은 안 그랬다. 중종 4년 박원종, 중종 6년 유순정, 마지막으로 중종 7년 성희안이 죽으면서 반정공신 세력은 병사로 줄줄이 퇴장했다.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515년, 중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치세를 열어보고자 했다. 그런 중종에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조광조. 도학정치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조광조는 바로 신씨 복위권과 관련해 처벌을 주장하는 노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종과 뜻이 맞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위 신진사류라 불리는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한 신진사류의 왕도정치적 개혁에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침해될까 우려했고,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가짜 공신의 공신명단 삭제)[4]로 결국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중종 자신도 처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는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의 권력도 제한되었다고 여겼다. 결국 중종은 1519년 기묘사화로 신진사류들을 숙청한다. 위훈 삭제 직후의 친위 쿠데타였다.[5]
이 사건과 관련해, 야사에서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말을 써 개미들이 파먹게 한 뒤 그 잎을 왕에게 바쳐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했다고 한다..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이 역사스페셜에서 드러났다. 실상은 중종이 주도하고 훈구 대신이나 남곤과 같은 온건 사림이 거든 사태에 가깝다.
3 권신들의 시대
이후 중종의 치세는 도로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1521년에는 조정에 남아있던 소수의 친 신진사류 계열의 정승 안당 등을 제거하고자 송사련의 무고로 일어난 신사무옥은 전형적인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중종의 시대는 옥사와 피바람이 지속되었다.
권신들이 권력을 잡게되자 이번엔 권신들 안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경빈 세력이 세자의 후견세력이었던 김안로 일파를 몰아내고, 이후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이용하여 경빈과 복성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가 하면, 김안로가 몰락한 후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는 등 중종은 조광조의 도학정치 개혁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
...지만, 사실 중종시대의 권신들은 결이 다르다. 예컨데 전기(조광조 이전)의 반정공신들과 달리, 중기(조광주 이후)의 남곤이나 김안로는 온건 사림이나 소장사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6], 후기(김안로 이후)에는 대윤의 윤임, 소윤의 윤원로, 윤원형 등이 득세했다.
4 치세와 치적
설상가상으로 외부에서는 이민족들의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세종과 세조 때에 평정된 여진족들이 북방에서 다시 힘을 회복하여 조선의 북방을 괴롭혔고, 남방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잇달았다. 그 왜구의 침략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삼포 왜란이다. 비변사[7]가 생겨난 것도 이 때. 한마디로 안습한 시절을 지낸 왕이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다. 조광조를 등용한 시기에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권장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기도 했고, 다양한 책들을 발간했으며 군적을 개편하고 전국적으로 전라도, 평안도, 강원도의 양전사업을 시행했으며 북방의 진들을 보수하고 여진족들을 격퇴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중종 역시 묘호를 중조(中祖)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이유가 반정으로 연산군을 쫓아내고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다고 후임 왕인 인종이 신하들에게 제기했던 것. 그러나 신하들은 '중종대왕은 성종대왕의 적통을 이은 왕이기 때문에 조로 바꾸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고 반대하였고 더군다나 중종이란 묘호 자체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망한 국가를 다시 세운 왕'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중종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적통이 아닌 선종은 선조가 되고 열조는 인조가 되니...
5 의외의 다크사이드
일반적으로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끌려다니는 나약한 군주의 인상이 강하지만, 사실 우유부단한 모습은 살아남기 위한 계책이었고 실상은 의외로 막후 정치의 달인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조광조, 그 이후 권신이 된 남곤, 심정, 이행, 이들을 몰아낸 김안로까지...중종은 이들을 마치 신하들의 공론에 따라 몰아내는 것처럼 했지만, 조광조와 김안로의 경우엔 스스로 밀지를 내리는 등 직접 관여했다. 조광조의 경우엔 남곤마저 삭탈관직에서 그치자고 주장했지만 중종은 홀로 사약을 계속 주장하여 결국 이뤄내고 만다.[8]
남곤은 단지 현실론자였을 뿐, 뇌물을 멀리하고 검소하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직계 제자이기도 했고.. 결국 남곤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을 때까지 조광조에게 저지른 짓을 후회하였으며,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그간 쓴 글은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자식들에게 유언했다. 이런 반성 때문인지 그는 심정, 이행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 대국적으로 보자면 사장詞章(문장+시가)을 중시한 조선 초기 도학파의 마지막 걸물로 불린다.
김안로의 경우엔 자식 김시의 혼인 날을 노려 틈을 주지 않고 단박에 박살 내버린다. 이때 김시는 아버지가 잡혀가자 우왕좌왕했는데 김안로는 "오늘 네가 장가들지 않으면 이후로 우리 집에 장가들고자 하는 집안이 없을 것"이라고 말렸다고.[9] 참고로 포악한 왕이라고 손꼽는 형 연산군보다도 숙청한 선비들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흠좀무.[10]
그 외에는 쫀쫀한 면도 있고 변덕이 심해서 자질구레한 일에도 참견이 심했다고 한다. 열병을 할 때에도 병사들로 하여금 여기 모이라고 했다가 저기 모이라고 했다가 "아니, 아니. 다시 저쪽에 서 봐라"라면서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기도 했고, 오래 재위하면서 궁궐 행사나 의례 등의 규칙, 절차에 대해 도통하게 되면서 행사 접전 중에 조그마한 실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뭐가 틀렸다고 꼬치꼬치 따지며 아랫사람들을 마구 갈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사가 있으면 현장에까지 가서 확인해가며 잔소리를 해 댔고, 바깥 행차를 할 때면 내구마(왕이 타는 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쉴새 없이 바꿔 타곤 했다. 그러다가 탄 말이 마음에 안들면 괜히 잔소리를 해대고 담당자를 처벌했을 정도.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는 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아랫사람들 갈구는 피곤한 상사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상당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상사 타입.
이런 성격은 중종이 정계에서 가진 입지때문에 형성된 측면도 있겠지만, 중종의 건강 상태도 큰 비중을 차지한 모양이다. 실록 중종 14년인 1519년 6월 16일 기사엔 중종의 잇병, 즉 치통에 관해서 처음 언급된다. 이때부터 치통은 중종이 생을 마감하는 중종 39년까지 무려 25년이나 그를 괴롭힌다. 중종이 죽기 4개월 전인 중종 39년 6월 29일에는 아픈 이가 빠지고 다른 이도 아프며 진물이 흐른다고 적혀있는데, 통증의 원인을 긁어내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상 중종은 최소 25년을 끔찍한 고통을 계속해서 겪었을 것[11]이다. 중종의 성격이 까탈스럽고 변덕을 심하게 부린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임용한 교수의 <조선국왕 이야기>에서는 중종을 늑대 같은 사나이로 표현하고 있으며(중종편의 부제부터가 '곰의 인내와 늑대의 지혜'), 이를 참고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약한 척, 안되는 척 하면서 결국 숙청하고 싶은 사람을 끝내 숙청해 내고, 하고 싶은 건 결국 자기 뜻대로 해내고 마는 이런 면모를 두고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풍자하고 그려내기도 했다.
6 고변과 익명서의 시대
중종 시기에는 역모 고변이나 익명서 사건이 많았는데 대게는 무고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김공저 박경의 사건','이과의 옥사'등 실체가 있는 일도 있었지만 '정막개의 고변'등 허황된것도 많았고 '정막개의 고변' 이후에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가 목날아가는 사람도 많았고 심지어 도박장을 운영하던 건달 형제가 먼저 역모성 발언을 하고 이에 그곳에 있던 친구들이 동조하자 이걸 가지고 고변했다. 물론 그 대가로 그 형제는 참수당했다. 익명서 또한 많았는데 문제는 익명서 때문에 연산군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만큼 보면 즉각 없애버리는게 당연한게 그걸 가지고 정치적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고변과 익명서 사건등으로 죽은 사람이 연산군때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7 팔불출
그러나 본인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워 자식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중종이 자상한(?) 아버지임을 알리는 사례가 효정옹주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조선판 막장 드라마. 특히 그 중에서도 불륜치정극.
효정옹주[12]는 숙원 이씨 소생이었는데 조의정에게 시집가게 된다. 효정옹주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맘에 들어하지 않던 조의정은 효정옹주를 소박놓고, 그녀가 궁에서 데려온 몸종 풍가이를 더 사랑해서 첩으로 삼는다. 부마는 첩을 들이지 못하는 법을 어긴 것이다.
이에 중종은 조의정을 여러번 불러 꾸짖었으나 조의정은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중종은 풍가이를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효정옹주는 중종에게 2번이나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 비단결 같은 마음씨를 보인다.
그런데 조의정은 이런 왕명에 불복하여 다른 몸종으로 바꿔치기 하고 풍가이는 자신의 고향집에 숨겨두고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났다. 이는 명백히 왕명에 항명한 것이나 효정옹주가 함구하였으므로 조의정은 중종 몰래 이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효정옹주가 아이를 낳을 때 난산으로 위독해졌고 출산 뒤 15일 후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옹주가 난산한 이후 15일 동안 조의정이 왕에게 보고하지 않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또 중종이 옹주를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문을 제때 열어주지 않아서 옹주가 사망하면서 논란이 된다. 게다가 일전에 귀양을 보낸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더 난리가 났다. 왕명을 어기고 왕을 기만했으니 이것은 역적죄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중종은 격노하여 조의정과 풍가이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했으나, 조의정은 한때 부마를 지낸 바 있었으므로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보내는 처벌을 내린다.
풍가이의 경우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귀양형[13]을 내렸다. 사실 그녀 자신의 의도야 어쨌든 왕명을 어긴 데다 '조의정이 효정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정처로 앉히려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분노는 대단했다. 때문에 중종은 풍가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나 풍가이가 과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인 일로 신하들의 동정을 샀고[14] 때문에 그들이 왕에게 간청했기 때문에 감형된 것이었다. 그러나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은 직후 상궁 은대[15]에게 납치 당한 뒤 10여일간 갇힌다. 이는 장 100대를 맞을 경우 즉시 치료를 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못받게 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10여일간 놔두어도 생존하자 자신의 하인을 시켜 장 맞은 곳을 또 때리게 한다. 풍가이는 그로부터 20일 뒤 숨을 거둔다.
이에 신하들은 범행의 잔혹함과 풍가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은대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나[16] 중종은 은대의 벌을 미적미적 처리했고 겨우 '잔인한 죄인을 방치하느냐!'는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못해 은대를 유배 보냈지만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방면된다.[17]
참고로 왕이 조의정을 처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에 이미 조의정과 효정옹주 사이에 낳은 5살 난 아들이 있었고[18] 조의정의 아버지인 조침은 홍문관 제학, 경주 병마절도사, 이조참판, 호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가 세자궁에 불이 나서 타 죽을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세자빈이 세자에게 빨리 나가자고 청했으나 세자 본인은 이 화재가 자신을 미워한 계모 문정왕후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살아나가도 어차피 문정왕후의 심기를 건드려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겨서 나가지 않고 세자빈과 함께 그대로 타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세자궁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중종이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잠옷바람으로 세자궁으로 뛰쳐나가서 "애비를 두고 먼저 죽는 자식이 어디 있느냐"면서 통곡하는 소리를 듣고 세자가 마음을 바꾸어 세자궁을 탈출했다는 일화도 있다.[19]
그 외에 작서의 변으로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던 경빈 박씨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하자는 상소가 꾸준히 올라왔으나 18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20] 여러 모로 자기 가족들에게는 꽤나 애살스러운 사람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왕 중에서 친아들을 죽인 2명 (유력 용의자 인조까지 포함하면 3명) 중 1명이기도 하다. 서자이긴 했지만 장남이었던 복성군을 결국에는 사사했으니...[21] 나머지 1명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영조.
8 기타
실제로는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왕 중에 하나인 중종이지만 그가 백성에게 보여준 모습은 따뜻하고 인자한 왕이었다.
중종 28년, 한성부에서 6살의 어린 노비아이가 괴한에게 발목이 절단되어 버려진 일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스스로 국문을 주도하며[22], 범인을 찾아내려한 동시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정사중에 가장 먼저할 일로, 이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며 6살 노비아이의 보호에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데[23] 자세한 내용은 다음링크를참조하자(PGR21)
여성인 장금을 어의로 임명하는 등 호방한 면모도 있고, 서프라이즈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노비 출신의 반석평을 판서에 임명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갖춘 군주인 듯 하다.
9 가계
- 왕비 : 단경왕후 신씨
- 왕비 : 장경왕후 윤씨
- 왕비 : 문정왕후 윤씨
- 의혜공주
- 경현공주
- 명종
- 인순공주
- 후궁 : 경빈 박씨
- 복성군
- 혜순옹주
- 혜정옹주
- 후궁 : 희빈 홍씨
- 후궁 : 창빈 안씨
- 후궁 : 숙의 나씨
- 후궁 : 숙원 이씨
- 정순옹주
- 효정옹주
10 사극에서
사극에서는 워낙 우유부단하고 안습스런 탓으로 주인공이기 보다는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오히려 당대 치세의 중종 주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탓에 사극에서도 안습한 임금.
"조광조"에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를 지지하다가 조광조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결국 죽이는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나온다. 이 드라마는 정사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데, 중종이 평생 단경왕후 신씨만을 사랑했다는 야사를 채택해 중종이 왕권을 세우고 도학정치를 펴려던 시도 역시 단경왕후를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24]했다. 이 과정에서 '단경왕후 복위'라는 안건에 동의하지 않는 조광조와 끝까지 맞서 그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결국 죽여버린다. 드라마 내내 사춘기 소년 같은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여주는데, 의외로 누르고 참았다가 결국 자기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중종의 다크사이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치행위보다는 반은 눈물과 애원, 나머지 반은 분노와 저주... 극중에 묘사되는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랑이 애절하긴 하다.
최종환[* 최종환은 사극에는 자주 출연하지만 왕 역을 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이게 첫 왕 배역인 셈. 그후에 <제중원>에서 고종, <연개소문>에서 영류왕,<[계백>에서 무왕을 연기했다.]이 분한 여인천하에서는 문정왕후, 경빈 등의 여인들과 조정 권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임금으로 그려진다. 그나마 제일 좋게 나온 경우가 임호[25]가 배역을 맡은 대장금으로 미식가 임금이자 사상 최초의 여성어의를 임명하는 대범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초기에는 '맛있구나, 이 XX 음식은 XXXX하고…' 하는 식의 대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저놈은 대체 뭐냐는 평을 듣기도 했다. 심지어 대장금 총집편에서 '정사는 멀리하고 미식만 즐겼는지' 운운하기도 했다. 다만 중종의 이름만 따온 사람이고 중종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는 내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ㅠ
'왕과 비'에선 '가을동화'에서 송승헌의 아역을 분했던 최우혁이 연기했다. 단, '왕과 비'가 끝나기 채 몇 회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데다 비중 또한 적다는 것이 함정.
여인천하에서의 명대사는 "그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
10.1 역대 중종 배우
10.1.1 드라마
- 《풍란》 (MBC, 1985년~1985년, 최상훈)
- 《조광조》 (KBS, 1996년~1996년, 이진우)
- 《임꺽정》 (SBS, 1996년, 최상훈)
- 《홍길동》 (SBS, 1998년~1998년, 김규철)
- 《왕과 비》 (KBS 1TV, 1998년~2000년, 최우혁)
- 《여인천하》 (SBS, 2001년~2002년, 최종환)
- 《대장금》 (MBC, 2003년~2004년, 임호)
- 《황진이》 (KBS, 2006년~2006년, 박찬환)
- 《왕과 나》 (SBS, 2007년~2008년, 노영학)
- 《인수대비》 (JTBC, 2011년~2012년, 백승도, 전준혁)
- 《천명》 (KBS, 2013년~2013년, 최일화)
10.1.2 영화
11 중종의 능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의 정릉(靖陵).[26]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 원래는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에 합장했는데, 문정왕후가 경기도 고양에서 중종의 능을 천장시켜 지금의 강남으로 옮겼다. 그런데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 다닐 정도로 침수 문제가 심각했다.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려던 문정왕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태릉에 매장됐다. 게다가 정릉은 임진왜란통에 왜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불태워졌다 안습.
이 사건 때문에 종전 후 한때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에서 조선과의 수교를 트기 위해 범인들과 중종 유골이란 시신을 돌려보냈는데 심문해봤더니 범인들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유골이 중종의 것이라 믿을 증거도 전혀 없었다. 조정은 한 때 크게 들끓었으나 결국 현실적인 필요에 의하여 "왜놈들이 그렇죠 뭐. 걍 없던 일로 치고 계속 수교 논의하시져"라는 온건론이 우세를 점하면서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조선은 수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중종은 키와 덩치가 크고, 마른 체형에 얼굴이 갸름하나 천연두로 인해 좀 얽고, 코가 높되 수염은 살짝 노랗다고 전해진다. 덤으로 미간 사이에 큰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훼손된 탓에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훼손되었거나, 시신이 없는 빈 묘일 가능성이 크다. 중전은 셋을 두었지만 어떤 중전과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능 역시 빈 묘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죽어서는 상당히 안습한 대우를 받는 임금.[27]
한국전쟁 종전 이후의 혼란기 속에 어진들이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태조 · 영조 · 철종을 제외한 조선 임금들의 얼굴을 알 길이 요원해졌으나,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이를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 바로 무덤을 열어 보는 것. 영국 왕 리처드 3세의 사례도 있듯이 두개골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전 모습을 거의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게다가 석회로 두껍게 밀봉되어 있는 왕릉 특성상 내부의 시신이 미라화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이 경우 용안 복원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 그나마 이론적으로도 그 얼굴이 어떤지 알 길이 영영 없어진 조선 임금이 바로 성종과 중종이다.
12 관련 항목
- ↑ 원래 간택후궁 출신이다. 조선에서 몇 안되는 후궁 출신 왕비중 하나. 사실 바로 전의 왕비인 폐비 윤씨도 간택후궁 출신.
- ↑ 반정이라고 해도 원칙적으로 말하면 반란으로 기존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것이다. 반정으로 인해 신권이 강해진 상황이고 신하들이 힘을 모아 반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상황에서 중종이 기를 펼 수 있을리가 없다. 아무리 맘에 안드는 왕이라 한들 두번이나 갈아치우는 행동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한번 땅에 떨어진 왕권이 연달아 능멸당하는 일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바로 전조 고려가 무신정변 이후 임금 취급이 어땠는지, 아니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과정이 어떠하였는지만 살펴봐도 답이 나온다. 우왕-창왕-공양왕을 줄줄이 올리고 폐위시켰다가 결국 나라를 갈아치우지 않았는가. 오늘날에야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이 고려보다 왕권 집중에 유리했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일단 몸 사리는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
- ↑ 조광조가 군사작전에 관여하고 병조판서 등이 데꿀멍하긴 했다. 이장곤(병조참판) 등은 사실 사림 출신이기도 했고, 실제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의 처벌을 반대하기도 했다. 애초에 조선시대가 사병 집단 자체가 될 법도 아니었고, 뒤에 보듯 조광조 때는 공신들도 다 죽어버렸기에...
- ↑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등은 반정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이끌기위해 임사홍,신수근형제 등 일부를 척살한 것을 제외하고는 연산군 치하에서 호의호식하던 대부분의 대신들도 끌어들여 반정공신의 명단에 포함시켜줬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주요공신들의 자식및 형제도 공신의 명단에 포함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는 신진사류 세력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 ↑ 신진사류의 과격화는 땡깡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위훈삭제의 경우에는 "쟤는 공이 있는 건 맞는데 인품이 별로니까 공신삭제 ㄱㄱ"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애초에 중종이 원하는 그림은 신진사류에 힘을 실어줘 공신세력을 견제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공신세력이 너무 힘없이 무너지니까 중종 주도 하에 골치아파진 신진사류를 제거하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 ↑ 홍경주는 기묘사화 직후 일찍 죽었다.
- ↑ 비변사는 이후 명종 대에 일어난 을묘왜변이 지난 시기에 상설기구화되며, 많은 폐단을 낳게 된다.
- ↑ 실제 염증을 떠나서 숙청 직전의 조광조는 이미 중종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의 견제로 훈구가 무너져 가고, 필연적으로 사림은 성장하는데 그 수장의 역할이 조광조였다. 게다가 조광조는 훈구에 대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대했으며, 이는 중종에게 위기 의식을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종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옹립된 왕이다.
- ↑ 이 충격적인 경험에 김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김안로는 권세를 배경으로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그 영향도 있었을 듯.
- ↑ 물론 숙청한 선비의 수로 폭군을 가릴 수는 없다. 일단 옹정제처럼 성군으로 분류되는 군주도 숙청을 했고, 자칫 잘못해서 신하쪽의 권력이 커지면 그게 더 막장상황이 되기 일쑤. 세도정치, 문벌귀족. 권문세족항목 참조. 거기에 중종의 치세는 연산군보다 몇배 더 길어 조선왕조에서도 손꼽히게 오랜기간 동안의 치세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 ↑ 중종과 그의 아버지 성종, 이복형 연산군 모두 치통으로 인해 재위기간 내내 괴로움을 호소했다. 성종은 치통때문에 음식마저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연산군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칫솔을 만들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기록된 최초의 칫솔 사용에 해당된다. 유전적인 요인이거나 혹은 세 사람의 식습관에 중요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중종이 더 아꼈다고도 한다.
- ↑ 단, 귀양은 여자라 하여 돈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
- ↑ 효성이 지극한 자가 자신의 상전에게 불민할 리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논리가 너무 비약되기는 했지만...
- ↑ 숙원 이씨의 자매, 즉 옹주의 이모라는 설과 그 이전에 또 다른 부마 여성위(효정옹주의 친언니인 정순옹주의 남편)의 첩과 아이를 때려죽인 일로 보아서 (왕의 밀명을 받은) 궁중 내의 해결사라는 설이 있다.
- ↑ 풍가이의 경우 조의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조의정의 첩이 되거나 효정옹주가 박해받는 것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고 때문에 조의정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신하들은 생각하였다.
- ↑ 문정왕후는 명령을 내리는 카리스마가 다른지, 중종 때 기를 쓰고 은대를 처벌하라던 신하들이 이때는 다들 지당하십니다고 합창. 심지어는 중종 때 자신은 은대를 처벌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소수의견으로 묻혀버려 안타까왔다는 말을 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 ↑ 효정옹주는 18세에 조천계라는 첫아들을 낳았고 저 난산은 23살 때의 일이었다.
- ↑ 이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의 행동이 가관이였다.(중종 100권, 38년(1543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월 7일(임자) 1번째기사) 승지와 사관등이 정신없이 세자궁에 달려갔으나 불을 꺼야할 군사는 게을러 모이지 않았으며 또한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영의정 윤은보가 "세자가 어느 곳에 피했는지 살펴보았는가?"라고 물어봤더니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마 피하여 대내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식으로 세자궁의 주인인 세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세자는 중종과 같이 있었다.요약하자면 세자는 중종이 직접 데려왔고 신하들은(심지어 중종의 옆을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해야 할 사관마저) 멀뚱멀뚱 화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 ↑ 그럼에도 계속 죽이라 하자 결국 죽이라고 하면서도 시신이나마 온전히 거두게 해달라고 했다고한다.
- ↑ 근데 이때 복성군을 죽이라고 강하게 청했던 게 조선 최강의 권신 중 하나인 김안로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죽인 면도 있다.
- ↑ 조선왕조에서는 역모사건이 아닌 한 왕이 국문을 명령할 수는 있어도 직접 국문을 주도할 수 없었다. 단 중종 외에 예외가 있다면 봉산옥사,계축옥사를 직접 주도한 광해군이 있다.
- ↑ 동상에 걸려 발이 절단된거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지만 절단면이 칼로 잘린게 확실해서 계속 수사했다. 하지만 끝내 범인은 안잡혔다.
- ↑ 극중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할 것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그를 데리고 간 곳이 폐비가 머무는 죽동궁이었다.
- ↑ 왕 배역 전문 배우이다.
- ↑ 서울 성북구의 신덕왕후 능이자 지명인 '정릉', '정릉동'과는 한자가 다르다. 이 능은 貞陵.
- ↑ 중종처럼 조선의 왕들 중 합장이든 동역이강 형태든간에 왕비와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혼자 묻힌 왕은 조선 태조와 단종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