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루카 비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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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지안루카 비알리
(Gianluca Vialli)
생년월일1964년 7월 9일
국적이탈리아 (Italy)
출신지크레모나
신장180cm
포지션스트라이커
유소년 경력피치게토네 (1973–1978)
U.S. 크레모네세 (1978–1980)
소속 클럽U.S. 크레모네세 (1980–1984)
삼프도리아 (1984–1992)
유벤투스 FC (1992–1996)
첼시 FC (1996–1999)
국가 대표: 이탈리아
(1985–1992)
59경기 16골
스태프첼시 선수 겸 감독 (1998-2000)
왓포드 (2001-2002)
첼시 FC 역대 감독
루드 굴리트
(1996~1998)
지안루카 비알리
(1998~2000)
그레이엄 릭스(임시)
(2000 잔여 1경기)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2000~2004)

1 소개

삼프도리아유벤투스, 그리고 첼시의 레전드

첼시가 낙후된 구단을 넘어 국제적인 인지도를 확보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

지안루카 비알리는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이탈리아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골 결정력이 탁월했고 윙 포워드나 트레콰르티스타와 같은 타 포지션에서도 얼마든지 활약할 정도로 축구 지능도 뛰어났다. 특히 골 냄새를 맡는 능력은 발군이라 할 수 있다.
90년대 초중반은 그의 축구 커리어에 있어서 전성기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유벤투스로 이적할 당시 기록했던 1,250만 유로는 당시 월드 레코드 이적료였다.
그의 경력 중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바로 첼시에서의 업적이다. 그가 오기 전의 첼시로만 아브라모비치 회장이 구단을 인수하기 7년 전이었고 아스날이나 토트넘에 비해 소외된 런던 외곽의 군소 클럽에 불과했다.
그러나 96-97시즌 첼시에 입성하여 4년간 활약한 비알리의 활약에 힘입어 첼시는 약소팀에서 벗어나게 됬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2000년대에 들어 중상위권 팀으로 치고 나가게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래서 첼시 측은 클럽에 불과 4시즌만 몸담았던 그를 레전드로 인정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크레모네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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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엔 머리가 풍성했다.

비알리는 1973년 9살에 지역의 유스팀인 피치게토네에 입단하면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5년간 피치게토네에서 기량을 갈고 닦은 후 1978년 14살의 나이로 U.S. 크레모네세 유스팀에 입단했다. 유스팀에서 2년간 활동한 비알리는 1980년 16살의 나이로 1군에 데뷔했다. 당시 크레모네세는 세리에 C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그 팀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여 소속팀을 세리에B로 승격시켰다. 이후 비알리는 꾸준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1983-84 시즌에 10골을 기록한 후 삼프도리아로 이적했다.

2.2 삼프도리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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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점점 빠지고 있다.

비알리는 삼프도리아에서 삼프도리아의 레전드 로베르토 만치니와 함께 환상적인 듀오를 결성했다. 두 사람을 가리켜 'The Goal Twins'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두 사람은 골을 수없이 양산하며 삼프도리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비알리는 1990-91 시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며 이 시기에 19골을 넣으며 개인 통산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했다. 특히 1990년 유로파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안더레흐트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일궈내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의 삼프도리아에서의 최고의 활약상이었다. 이후 비알리는 삼프도리아에서 리그 우승 1회, 유로파 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3회, 수퍼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를 기록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1992년에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바르셀로나에게 1:0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199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끝난 뒤, 비알리는 1,250만 유로, 당시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기록하며 유벤투스로 이적한다.

2.3 유벤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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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다.

세계 최고액 이적료를 갈아치우며 유벤투스에 입성한 비알리는 새 소속팀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인다. 그는 첫 시즌인 1992-93 시즌에 UEFA컵 우승을 차지한다. 비알리는 유벤투스에서 로베르토 바지오와 함께 훌륭한 파트너십을 맺었고 1995년에 16골을 몰아치며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다만 UEFA컵 결승전에서 비알리가 팀의 두번째 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파르마에게 패해 트레블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그는 1995년엔 팀의 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파브리치오 라바넬리와 함께 이탈리안 쓰리톱을 구성하여 마르첼로 리피 감독이 추구하는 공격 축구의 중심에 섰다. 95-96 시즌 시즌 개막과 함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달성했으며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아약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염원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것이 유벤투스 역사상 두번째 빅이어다. 그는 유벤투스에서 4년간 활동하며 102경기에 출전하여 38골을 기록했다.

2.4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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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여름, 비알리는 스코틀랜드의 명문 구단인 레인저스의 제의를 거절하고 루드 굴리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6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첼시에 입단했다. 그는 첫 시즌에 FA컵 4라운드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2골을 기록하며 4:2 승리를 이끄는 등 맹활약하여 끝내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정작 FA컵 결승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교체로 출전하여 고작 5분만 뛰었다. 1997-98 시즌, 비알리는 바슬리를 상대로 4골을 기록했고 유로파 위너스컵에서 노르웨이의 구단 트롬쇠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1998년 굴리트 감독이 경질되자, 비알리는 선수 겸 감독으로 부임하여 1998년 유로파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리그 컵도 우승했다. 또한 1998년 UEFA 슈퍼컵에서는 레알을 상대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고 또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그는 첼시 감독으로서 직무를 집중하기 위해 선수 생활을 정리했다.

2.5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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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알리는 1984년에 이탈리아 U-21팀에 차출되었고 1986년에 UEFA 유로피언 U-21 축구 챔피언쉽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3위를 기록했다. 비알리는 이 대회에서 4골을 기록하며 대회 최다골 기록자로 선정되었다. 비알리는 U-21 팀에서 20경기에 출장하여 11골을 기록했다.

1985년, 비알리는 폴란드와의 A매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의 첫 경기를 뛰었다. 이후 1986년 월드컵에서, 비알리는 대표팀 스쿼드에 합류하여 교체 멤버로 활동햇다. 그는 이 시기 교체로 4경기를 뛰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대표팀에서의 첫 골은 1986년 몰타와의 유로 1988 지역 예선 경기였다. 이후 비알리는 유로 1988 대표팀 스쿼드에 포함되었고 조별 예선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결승골을 기록했다. 비록 이탈리아는 소련을 상대로 4강전에서 2:0으로 패하고 말았지만, 비알리는 UEFA가 선정한 이 대회 베스트 11에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비알리는 1990 월드컵에서 강력한 활약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대회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오스트리아와의 첫번째 경기에서는 골을 기록하지 못해쏙 미국과의 예선 2차전 경기에서는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로베르토 바지오에게 밀려 벤치에 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4강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간신히 출전한 그는 이탈리아가 선제골을 넣는데 기여했다. 그의 슛이 아르헨티나 골키퍼에게 막혔지만 그것을 살바토레 스킬라치가 받아먹은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승부차기까지 간 끝에 결국 졌고 월드컵을 3위로 마감했다.

비알리는 1992 유로에서도 차출되어 이탈리아의 공격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헝가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고 뒤이어 사이프러스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해 2: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불행히도 소련에게 밀려 유로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비알리는 1992년 12월 알제리와의 A매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사실 그는 더 뛸 수 있었지만 당시 이탈리아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키가 그를 싫어하여 더 이상 차출하기를 기피했다는 루머가 돌았다. 아무튼 비알리는 대표팀에서 59경기에 출장하여 16골을 기록했다.

3 감독 경력

3.1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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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알리는 1998년 루드 굴리트의 경질 이후 33세의 나이로 선수 겸 감독으로서 첼시에 부임했다. 그는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이탈리아 출신 감독이었다. 그는 첫 시즌에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리그 컵 우승도 이끌었다. 그 다음 시즌엔 유로피언 슈퍼컵에서 레알을 1:0으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리그에서도 순항한 끝에 1위 맨유와 4점차인 3위를 기록했다. 이 3위는 첼시 구단 역사상 1970년 이래 가장 높은 순위였다. 비알리는 1998-99 시즌 마지막 경기인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에서 출장했는데, 이것이 그의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는 첼시에서 83경기에 출전하여 40골을 기록했다.

1999-00 시즌, 첼시는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했다. 첼시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매우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들은 조별 예선을 무사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하여 바르셀로나와의 홈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었다. 비록 캄푸 누에서의 원정 경기에선 5:1로 패하긴 했지만, 챔피언스리그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 치곤 매우 훌륭한 활약이었다. 하지만 리그에선 고전을 면치 못했고 5위라는 실망스런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도 FA컵 결승전에서는 아스톤 빌라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우승을 차지해 무관은 면할 수 있었다.

2000-01 시즌, 첼시는 커뮤니티 실드에서 지난 시즌 우승 팀인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비알리는 3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5개의 트로피를 획득하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그런데 불과 리그 5경기를 치른 직후, 그는 돌연 경질되고 말았다. 비록 5경기에서 1승만 거두어 10위에 그치긴 했지만 그가 그동안 첼시에서 거둔 업적을 생각하면 좀더 기다려줄 만 했지만, 보드진은 그를 경질하기로 결정했다.

그 까닭은 비알리와 선수들간의 불화에 있었다. 비알리는 선수들의 사생활에 일일이 간섭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가 끝난 뒤 훈련에 집중하는 것보다 나이트에 가서 노는 것을 선호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편 선수들도 자신들이 프로답게 몸관리를 하고 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데도 마치 교감 선생님 마냥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그를 싫어했다. 결국 그는 대부분의 선수들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팀을 떠나고 만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 본다면, 감독과 선수들 간에 불화가 발생하면 무조건 선수들의 손을 들어주는 악습은 이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당시 첼시의 구단주였던 켄 베이츠는 팀 해체 직전까지 갔던 첼시를 단돈 1파운드에 인수한 후 첼시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을 바쳐 팀을 프리미어리그에 안착시키고 유럽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감독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았다. 비알리 이전의 첼시 감독이었던 뤼트 휠릿은 감독으로서의 급료 외에도 선수로서의 급료를 더 받기를 희망했지만 베이츠는 선수 생활은 그만 정리하고 감독으로서의 급료만 받을 것을 강요하고 휠릿이 말을 듣지 않자 바로 경질한 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 지 않았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고 디스했다. 그 외에도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숱한 감독들이 부임 이후 4년을 못 넘기고 경질되기를 반복했다. 그나마 글렌 호들만이 재임 도중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중도 경질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첼시는 베이츠 구단주 이래로 감독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못하게 아는 악습이 행해지고 있었다. 첼시 보드진은 이전엔 선수들과 감독 간에 불화가 발생해도 대체로 감독 손을 들어주고 성적이 부진하여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에야 경질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지 그레이엄 항목의 '첼시 시절' 문단을 참조) 하지만 베이츠가 구단을 인수한 후 첼시 감독들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워졌다. 이러한 풍조는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새 구단주로 취임한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선수들은 구단주와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팀 내 입지를 탄탄하게 다진 반면, 감독들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얼마 안가 경질되기 일쑤였다. 그 결과, 첼시는 선수들과 감독 간에 불화가 발생하면 감독을 경질하고 선수들을 지키는 악습을 계속 이어갔고 결국 첼시는 2015-16 시즌에 이러한 악습의 대가를 치르고 말았다.

3.2 왓포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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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알리는 첼시에서 경질된 뒤 2001-02 시즌에 왓포드에서 전임 감독인 그레이엄 테일러가 경질되자 부임되었다. 그는 왓포드에서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고 코치 스탭들도 대거 교체했다. 그러나 왓포드는 불과 14위에 그치고 말았고 비알리는 단 한 시즌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이후 왓포드는 그에게 잔여 계약기간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길 거부했고 비알리는 왓포드를 고소하여 수년 간 법정 싸움을 치뤄야 했다.

4 은퇴 이후의 삶

2006년, 비알리는 "이탈리아인의 직업 : 두 개의 위대한 축구 문화의 심장으로의 여행"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잉글랜드와 이탈리아 축구의 차이점을 다뤘고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에서 선수로 활동했을 때의 이야기를 덤덤한 어조로 서술했다. 그는 이 책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암과 루게릭병에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재단에 기부했다.

왓포드에서 경질된 뒤, 그는 스카이 이탈리아 방송국의 축구 해설가로 활동했다. 2007년, 그는 QPR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루머에 휩싸였지만 그는 이를 부인했다. 유로 2012가 열리던 시기, 그는 BBC의 페널로서 각 경기들을 분석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도 방송계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5 수상

5.1 선수 시절

1. 삼프도리아

코파 이탈리아 우승 : 1984-85 시즌, 1987-88 시즌, 1988-89 시즌

UEFA 위너스 컵 우승 : 1989-90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 우승 : 1990-91 시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 1991년

2. 유벤투스

UEFA 컵 우승 : 1992-93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 우승 : 1994-95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 : 1994-95 시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 1995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 1995-96 시즌

3. 첼시

FA 컵 우승 : 1996-97 시즌

리그 컵 우승 : 1997-98 시즌

UEFA 위너스 컵 우승 : 1997-98 시즌

UEFA 슈퍼 컵 우승 : 1998년

4. 개인 수상

UEFA 유로피언 U-21 챔피언십 득점왕 : 1986년

UEFA 유로피언 챔피언십 대회 베스트 11 : 1988년

UEFA 위너스 컵 득점왕 : 1989-90 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 : 1988-89 시즌

세리에 A 득점왕 : 1990-91 시즌

올해의 축구 선수 : 1995년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 2015년

5.2 선수 겸 감독 시절

1. 첼시

FA 컵 우승 : 1999-2000 시즌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 20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