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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 로메오 리피 (Marcello Romeo Lippi) | |
생년월일 | 1948년 4월 12일 |
국적 | 이탈리아 |
출신지 | 비아레조 |
신체 | 183cm |
포지션 | 미드필더 |
소속팀 | UC 삼프도리아 (1968/69) 사보나 1907(임대) (1969/70) UC 삼프도리아 (1970/71 - 1977/78) AC 피스토이에세 (1978/79 - 1981/82) |
스태프 | UC 삼프도리아 (1982/83 - 1984/85, 유스팀 감독) US 폰테데라 (1985/86) 로부르 시에나 SSD (1986/87) AC 피스토이에세 (1987/88) 카라레세 칼치오 (1988/89) AC 체세나 (1989/90 - 1990/91) AS 루체세 (1991/92) 아탈란타 BC (1992/93) SSC 나폴리 (1993/94) 유벤투스 FC (1994/95 - 1998/99)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9/00 - 2000) 유벤투스 FC (2001/02 - 2003/04)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2004 - 2006, 2008 - 2010)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2012 - 2014)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2014 - 2015, 기술고문)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6~) |
유벤투스 FC 역대 감독 | ||||
조반니 트라파토니 (1991~1994) | → | 마르첼로 리피 (1994~1999) | → | 카를로 안첼로티 (1999~2001) |
카를로 안첼로티 (1999~2001) | → | 마르첼로 리피 (2001~2004) | → | 파비오 카펠로 (2004~2006)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역대 감독 | ||||
로이 호지슨 (1999) | → | 마르첼로 리피 (1999~2000) | → | 마르코 타르델리 (2000~2001)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조반니 트라파토니 (2000~2004) | → | 마르첼로 리피 (2004~2006) | → | 로베르토 도나도니 (2006~2008) | |||||||
로베르토 도나도니 (2006~2008) | → | 마르첼로 리피 (2008~2010) | → | 체사레 프란델리 (2010~2014) |
목차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이자 골초[1]
UEFA 챔피언스 리그와 FIFA 월드컵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2]
리누스 미헬스, 비센테 델 보스케, 거스 히딩크와 함께 몇 안되는 클럽과 국가대표에서 모두 성공을 이룬 감독
1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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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도리아 출신이지만 프로 데뷔는 1969-1970 시즌 사보나 1907에서 했으며 이 때의 임대 생활을 제외하곤 선수시절 대부분을 UC 삼프도리아에서 보냈다. 1977-78 시즌 이후 AC 피스토이에세로 이적, 3시즌 동안 활약한 후 34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리피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장인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파비오 카펠로, 카를로 안첼로티가 감독 커리어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에도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우승, 대표팀 승선 등 활약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리피는 평범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높은 레벨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삼프도리아에서 얻은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1.1 경력
1969 | Sampdoria | 0 | (0) |
1969–1970 | Savona | 21 | (2) |
1970–1978 | Sampdoria | 274 | (5) |
1979–1982 | Pistoiese | 59 | (1) |
2 감독 시절
2.1 감독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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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탈란타 감독 부임 시절>
은퇴 직후 1982년 친정팀인 삼프도리아에서 유스 팀 감독으로 지도자 데뷔를 한다. 3시즌 동안 유스 팀 감독을 한 리피는 85년부터 US 폰테데라, AC 시에나, AC 피스토이에세, 카라레세 칼치오 등 하위 디비전 팀의 감독을 하며 경험을 쌓다가 1989년 드디어 AC 체세나에서 세리에 A 감독으로 데뷔한다. AS 루체세와 아탈란타를 거쳐 93-94 시즌 나폴리 감독을 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팀을 UEFA 컵에 진출시켰다.
2.2 유벤투스 1기
유벤투스, 리피와 함께 유럽 최강의 클럽으로 군림하다.
1994년 여름, 이탈리아 최고 명문 구단인 유벤투스가 리피에게 러브콜을 보낸다. 리피는 유베에 부임하여 본인의 감독 커리어의 최전성기를 보내게 되고 유벤투스 또한 90년대 중후반 유럽 최강의 클럽으로 군림하게 된다. 유벤투스에서는 5년 동안 팀을 이끌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치로 페라라[3], 디디에 데샹, 지네딘 지단, 필리포 인자기, 에드가 다비즈 등 화려한 멤버들을 앞세워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유럽을 호령하기에 이른다.
부임 첫시즌인 94-95 시즌, 트라파토니 감독에게 물려 받은 기존 스쿼드에 추가적으로 유럽 정상급 수비수 치로 페라라, 프랑스의 전설적인 미드필더인 디디에 데샹, 포르투갈의 홀딩 미드필더 파울로 소사를 영입한다. 또한 이 시기부터 세계적인 스타 선수인 로베르토 바지오가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저물기 시작하고 델 피에로가 리피 감독의 지도 하에 본격적으로 중용받기 시작한다. 리피는 무려 9년만에 유벤투스의 리그 우승을 이끌며 기나긴 밀란 제너레이션 시대의 종식을 선언하고 코파 이탈리아 우승까지 달성하며 유벤투스 부임 첫시즌에 더블이라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세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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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죠와 함께>
2년차인 95-96 시즌에는 스쿠데토를 다시 AC 밀란에게 내주게 되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약스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며 팀을 11년만에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끈다. 유벤투스 역사상 두번째 빅 이어이자 리피의 처음이자 마지막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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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96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
3년차 96-97 시즌, 델 피에로와 함께 유벤투스의 이탈리안 쓰리톱을 구성했던 잔루카 비알리, 파브리치오 라바넬리가 팀을 떠난다. 공격진 대체가 불가피했는데 아탈란타의 신성 크리스티안 비에리, 라치오의 알렌 복시치를 영입하고 프랑스의 SM 캉으로부터 지네딘 지단을 단돈 320만 유로에 영입한다. 거기다 팀을 떠난 노장 수비수 피에트로 비에르코우드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파이팅 수비로 정평이 나있는 파올로 몬테로, 마크 율리아노를 영입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새 시즌을 앞두고 대대적인 팀 개편을 하게 되고 이후 유베는 본격적인 유럽 최정상급 클럽 궤도에 오르게 된다. 사실 그 이전 시즌까지는 리피가 영입한 선수들도 있지만 트라파토니 감독의 색채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96-97 시즌 대대적인 선수 개편을 통해 본격적인 리피의 색채를 갖춘 유벤투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시즌 개막과 함께 UEFA 슈퍼컵 우승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보인 유벤투스는 세리에 A 전반기를 1위로 마치고 연말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도요타 컵까지 우승하며 승승장구한다. 시즌 말미, 2년만에 다시 스쿠데토를 되찾아 오게 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이 이끄는 도르트문트에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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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지네딘 지단과 함께>
리피의 4년차인 97-98시즌, 비에리와 복시치가 한시즌만에 유베를 떠나자, 전 시즌 세리에 A 득점왕 필리포 인자기를 영입하며 공격진 강화를 한다. 시즌 중반에는 AC 밀란으로부터 네덜란드 출신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를 850만 유로에 영입했다. 97-98 시즌 리피의 유벤투스는 전 시즌의 페이스를 웃돌며 거침없이 질주했는데 그 위상은 가히 전 유럽에서도 적수가 없어 보였다. 이탈리아 내에서 그나마 대항마로 꼽을 수 있던 건 호나우두를 영입한 인터 밀란 정도였다. 이 시즌에는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의 활약 또한 눈부셨는데 세리에 A에서만 21골을 득점하였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0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르는 등 본인의 선수 인생 최고의 시즌을 보낸다. 호나우두와의 라이벌 구도 또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결국 리피의 유벤투스는 인테르와의 치열한 우승 다툼 끝에 스쿠데토 2연패를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94-95, 95-96 시즌에 이어 무려 3년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한다.[4] 그러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배하며 전시즌에 이어 또다시 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리피의 유벤투스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98-99 시즌, 측면 수비수 모레노 토리첼리가 팀을 떠나고 그의 대체자로 이고르 투도르가 영입된 것을 제외하면 지난 시즌의 선수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5년차에 접어든 리피의 유벤투스는 1998 월드컵의 후유증으로 인해 경기력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며 순위도 추락했다. 팀의 에이스 델 피에로의 부상 악재에 이어 겨울 이적시장에서 새로 영입한 유망주 앙리는 팀 적응에 실패하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유벤투스는 우승권 밖으로 밀려난다. 결국 리피는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후임 감독으로는 카를로 안첼로티가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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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첼시의 지휘봉을 잡고 있는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현역 시절 유벤투스에서 뛰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감독이 리피이다. 콘테는 리피를 비롯한 명장들의 지도는 최고의 감독 수업이었다고 언급했다. 당시 콘테는 전술이나 시스템 등과 관련된 사항에 있어서 리피 감독에게 가장 많은 의견을 내며 소통을 하는 선수였고 리피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유벤투스에서 주장으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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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조세 무리뉴가 등장하기 이전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가장 처음으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감독이 리피이다. 90년대 후반, 리피가 이끌던 유벤투스는 유럽 무대에서 맨유와 많이 부딪쳤다. 퍼거슨 감독은 당시 맨유 선수들에게 유럽 최강이던 유벤투스의 플레이 영상을 보여주며 승리를 위한 갈망을 주입시켰다고 한다.
2.3 인터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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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모라티 회장 및 구단 수뇌부들과 함께>
5시즌 동안 유벤투스에서 화려한 성과를 거두고 세계적인 명장 반열에 든 리피는 이후, 인터 밀란으로 감독직을 옮기지만 유벤투스 시절과는 달리 99-00 시즌에 리그 4위를 기록, 간신히 챔피언스리그 예선 티켓을 따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00-01 시즌 챔피언스리그 예선에서 스웨덴의 헬싱브르그에게 패배하며 탈락하게 된다. 세리에 A 개막전에서는 레지나 전에서 1:2로 패배하고 난 뒤 "내가 구단주라면 코치진이든 선수진이든 모두 걷어차버리겠다" 라는 격한 인터뷰를 하고 난 뒤 경질 당한다.
2.4 유벤투스 2기
리피의 화려한 복귀, 다시 한번 유럽 왕좌에 도전하게 되지만...
인터 밀란에서 경질당한 후 1년 가까이 휴식기를 갖는다.
2001년 여름 리피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그가 황금기를 보냈던 클럽인 유벤투스였는데, 당시 유벤투스는 2년 연속 준우승에 머문 카를로 안첼로티를 해임하고 새 감독을 궁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 리피와 함께 했던 90년대 영광을 되돌리고자 유벤투스의 대대적인 팀 개혁이 시작된다.
여름 이적시장이 열리기도 이전에 파르마의 릴리앙 튀랑이 영입된다. 튀랑의 이적료는 당시 수비수 월드 레코드였는데 이는 유베의 그 역대급 이적시장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사실 당시 2001년 여름 이적시장의 가장 큰 화두는 지네딘 지단이었다. 작년에 갈락티코 정책의 일환으로 루이스 피구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와의 이적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유벤투스는 지난 시즌 다비드 트레제게와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필리포 인자기를 AC 밀란에 3,700만 유로에 매각하고, 이와 동시에 파르마로부터 5,280만 유로에 잔루이지 부폰 영입을 발표한다. 그리고 마침내, 7,350만 유로라는 레알 마드리드의 메가 오퍼를 받아들여 지네딘 지단을 떠나 보낸다.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과 골키퍼인 튀랑과 부폰을 영입하긴 했지만 지단을 잃은 채로 만약 끝이 났다면 성공적인 이적시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베는 이적료 수익을 아껴두지 않고 그대로 투자에 감행하는데 당시 재정난에 허덕이던 SS 라치오의 파벨 네드베드를 4,120만 유로에 영입한다.
이적 시장 말미에는 최고라 칭하기에는 모자랐던 반 데 사르도 방출한다. 그리고 트레제게의 백업 공격수로 마르셀로 살라스를 2,500만 유로에 영입하며 이적시장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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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여름, 새로 영입된 선수들과 함께>
시즌이 시작되고 복귀한 리피 감독 지도 하에 새로 영입한 선수들이 빠르게 팀에 녹아들기 시작하고 영혼의 투톱, 알레제게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며 인터 밀란과의 치열한 우승 다툼 끝에 다시 한번 스쿠데토를 가져온다. 리피 감독이 복귀 했음을 알리는 우승이자 클럽으로써도 4년 만에 들어올린 트로피였기에 더욱 값진 스쿠데토 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유벤투스는 다음 시즌 다시 한번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02-03 시즌, 유벤투스는 더욱 탄탄한 스쿼드 구축을 위해 마우로 카모라네시, 마르코 디 바이오 등을 영입했지만, 트레제게의 부상과 몬테로, 율리아노 등 핵심 수비수들의 컨디션 난조, 잔부상 등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게 된다. 결국 당시 36살의 노장이었던 페라라를 중용하기에 이른다. 새로 영입된 카모라네시가 시즌 초반부터 좋은 활약을 보여주자 리피 감독은 기존의 측면 미드필더였더 잠브로타와의 공존을 고안해 낸다. 잠브로타를 왼쪽 풀백으로 포지션을 변경시키며 기존의 잔루카 페소토가 담당했던 왼쪽 측면을 더욱 활로있는 공격 루트로 탈바꿈시킨다. 팀 2년차에 접어든 파벨 네드베드가 시즌 내내 최고의 활약을 선보이며 지단의 공백을 완벽히 메우고 있었고, 97-98 시즌 이후 긴 시간 동안 부진했던 델 피에로 또한, 리피 감독 밑에서 다시금 부활하며 스쿠데토 2연패에 성공한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FC 바르셀로나와의 8강 2차전, 살라예타의 극적인 골든골로 4강 진출에 성공한다.[5] 4강에서 만난 상대는 또 다른 스페인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였는데 그 당시 레알은 익히 알려진대로 갈락티코 정책을 앞세워 전유럽의 스타들을 끌어모으며 화려한 멤버를 자랑하고 있었다. 1차전 원정에서는 1:2로 패배하지만 델레 알피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레알을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3골을 득점, 지단이 후반 추가 시간에 한골을 만회하기에 그친 레알을 3:1로 격파하며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팀의 핵심이던 네드베드가 81분경 스티브 맥마나만에게 불필요한 파울을 범해 결국 경고 누적으로 결승전에 출장할 수 없게 된다. AC 밀란과의 결승전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클럽들간의 대결이었다. 90분도 모자라 연장 120분에 걸친 공격 작업에도 양팀은 1골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0:0으로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유벤투스의 부폰이 상대 키커를 2번 막아내며 제몫을 다했지만 AC 밀란의 디다는 무려 3개를 막아내며 결국 리피의 유벤투스는 96-97, 97-98 시즌에 이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3번 연속 패배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이어나간다.[6] 14-15 시즌 4연벙이된다
03-04 시즌 페루자에 임대보냈던 파브리치오 미콜리를 복귀시키고, 다비즈의 대체자로 당시 가나 대표팀의 유망주였던 스테판 아피아를 영입, 또 노쇠화된 수비진을 보강하기 위해 키에보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던 니콜라 레그로타글리에를 AS 로마와의 영입 경쟁에서 이기고 영입하며 스쿠데토 3연패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렸다.[7] 하지만 03-04 시즌 선수들의 잔부상으로 베스트 11을 제대로 가동한 적이 없었고 야심차게 영입했던 선수들 마저 부진에 빠지는 등 악재가 겹쳐 결국 리그 리그 3위에 그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16강에서 데포르티보의 돌풍에 덜미를 잡히고 탈락한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던 9년만에 결승에 진출한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라치오에게 패하며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그 전시즌에 비해 초라한 성적을 남긴 리피는 유벤투스 감독직을 사임하며 지난 8년간의 화려했던 유벤투스 커리어를 뒤로 하고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된다.
2.5 이탈리아 대표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감독 커리어의 정점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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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유로 2004의 연이은 실패로 트라파토니 감독이 사임하자 그 후임으로 리피가 이탈리아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펼친 친선 경기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3:1, 독일을 상대로 4:1로 승리를 거두는 등 대회 직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많은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월드컵 본선 가나, 체코, 미국 등과 함께 E조에 편성된 이탈리아는 크리스티안 자카르도의 자책골로 무승부에 그친 미국 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비교적 쉽게 16강에 진출한다. 그러나 핵심 수비수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16강전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며 대회 끝까지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리피 감독은 파이팅 수비로 정평이 나 있는 마르코 마테라치를 칸나바로의 파트너로 기용한다. 16강 상대는 지난 대회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바 있던 히딩크가 이끄는 호주였다. 이탈리아의 공격은 히딩크의 수비 축구에 빈번히 막히며 고전한다. 그러나 후반 추가 시간에 그로소가 얻은 다소 논란이 있던 페널티 킥으로 극적으로 8강에 진출한다.
8강에선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8강에 진출한 셰브첸코의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잔루카 잠브로타의 환상적인 중거리 골과 함께 세리에 A 득점왕 루카 토니가 멀티 골을 뽑아내며, 다소 고전했던 16강전과 달리 3:0으로 가볍게 꺾고 12년만에 4강에 오른다. 4강 상대는 대회 이전 브라질 다음으로 강력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개최국 독일이었다. 독일과의 4강전은 2006 이탈리아를 한 경기로 압축한 상징적인 경기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칸나바로의 수비 퍼포먼스가 압권이었다. 분데스리가 득점왕이자 월드컵 득점 선두이던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칸나바로의 철통 수비에 막혀 경기 내내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베를린 장벽이란 별명도 이 경기로 인해 붙여진다. 좀 처럼 풀리지 않고 득점없이 연장에 돌입한 양 팀의 경기 양상은 119분경, 안드레아 피를로의 패스를 건내받은 파비오 그로소가 극적인 결승골을 뽑아내며, 마침내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로소의 득점 세레모니는 마치 198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터뜨린 전설적인 미드필더 마르코 타르델리의 세레모니를 연상케 했다. 교체 투입된 델 피에로의 쐐기골까지 터진 이탈리아는 연장 120분에 걸친 혈투 끝에 개최국 독일을 2:0으로 꺾는 위력을 보이며 12년만에 월드컵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에서는 노장 지네딘 지단의 MVP급 활약에 힘입어 8년만에 우승을 노리는 프랑스를 만나게 된다. 양팀의 경기는 6년전 유로 2000 결승전의 리벤지 매치로 관심을 모았다.[8] 결승전 경기는 전반 7분 이탈리아의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가 플로랑 말루다에게 파울을 범해 페널티 킥을 내주게 되고 지단이 이를 성공시키며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프랑스에게 끌려가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전반 19분, 실점의 주인공 마테라치가 코너킥 상황에서 비에이라와의 헤딩 경합에서 압도하는 괴력을 선보이며 동점 골을 넣는다. 1:1로 팽팽히 균형을 이룬 양 팀의 경기는 결국 연장에 이르렀는데 경기 도중 110분경 지단이 마테라치와 언쟁을 하다가 그의 도발에 넘어가 결국 박치기를 해 퇴장 당하고 분위기가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게 되는 계기가 된다.[9] 결국 이탈리아가 승부차기에서 승리하여 통산 4번째 우승을 하게 된다. 단순 수비 축구라고 폄하하기엔 이탈리아는 대회 12득점으로 14득점을 한 독일에 이어 대회 두번째 최다 득점팀이었으며, 엔트리에 포함된 공격수 6인방이 모두 선발과 교체를 번갈아가며 골을 넣었다. 이렇듯 리피의 이탈리아는 공수 양면에 걸쳐 최고의 모습으로 대회를 휩쓸었으며 리피 역시 1996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이후 10년만에 다시 최고의 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유럽을 넘어 세계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우뚝 선다.
화려했던 월드컵을 뒤로 하고 사임, 그리고 복귀
2006 월드컵이 끝난 후 리피는 재계약을 하지 않고 명예롭게 대표팀을 떠난다. 후임 감독으로는 90년대 AC 밀란의 레전드, 로베르토 도나도니가 부임한다. 하지만 도나도니가 2년뒤 열린 유로 2008에서 실망스러운 성적만 남기자 2008년 여름, 리피가 2년만에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다.
이듬해 개최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이탈리아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지만 이벤트성이 짙은 이 대회 특성상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지는 않았다.
연말에 열린 2010 월드컵 조 추첨식에서 이탈리아는 파라과이, 슬로바키아, 뉴질랜드 등과 함께 F조에 편성되며 대회 1시드국들 가운데 가장 수월한 조 편성을 맞이하였다. 특히, 뉴질랜드는 월드컵 참가 횟수가 고작 2회에 지나지 않았고, 슬로바키아는 한번도 없었을 정도로 축구 약소국이었다.
2010 월드컵을 앞둔 시점, 리피는 마리오 발로텔리, 쥐세페 로시 등 젊은 공격수들을 기용하지 않고 2006년 우승 멤버들을 대거 중용한다. 또한 안토니오 카사노 같은 키 플레이어도 제외했다. 이러한 리피의 선택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4년전 월드컵 우승을 안겨주었고 이탈리아 내에선 둘째 가라면 서러울 명장이었기에 대다수의 팬들은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본선 첫 경기 상대는 남미 예선을 위로 뚫고 올라온 파라과이였다. 조 1, 2위를 다투는 두 팀의 경기는 수중전 속에서 서로 1골씩 주고 받으며 1:1로 끝이 난다. 하지만 이탈리아로써는 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것보다 주장 칸나바로와 함께 팀의 정신적 버팀복이었던 부폰이 경기 도중 허리 부상으로 인해 앞으로의 대회 출장이 어려워진 것이 더 큰 뼈아팠다.
F조 두번째 경기인 뉴질랜드 전. 이탈리아는 90분 내내 답답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결국 본선 32강중 최약팀과 1:1로 비긴다. 첫 경기도 아닌 두경기째 무승부로 인해 이탈리아는 디펜딩 챔피언이었음도 16강 진출 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사활을 걸어야 했던 슬로바키아 전. 당시 슬로바키아는 1무 1패로 조 꼴찌를 기록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탈리아의 우세가 점쳐진 상황. 경기가 시작되고 이탈리아는 전반 24분, 로베르토 비텍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끌려간다. 그러나 실점 후에도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후반 73분, 비텍에게 또다시 골을 헌납하며 결국 2:3으로 패하고 만다.
이탈리아 국민들은 역대 최상의 대진이라는 호평 속에서 대회 2연패를 꿈꿨으나 결국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최악의 성적으로 대회가 마무리되는걸 지켜봐야 했다.
이탈리아로 귀국한 이후 리피는 결국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난다. 이미 감독으로써 모든걸 이뤄냈기에 유로 이후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한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오판이었던 셈이다. 재취임 이전에는 툭하면 여러 빅클럽들과 링크가 났으나 2010년을 기점으로 쑥 들어가게 된다.
2010 월드컵은 현재까지도 리피 감독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2.6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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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머니가 2010년대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중국 축구판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이었던 광저우 헝다의 돌풍은 2010년 3월, 헝다 그룹의 쉬자인 회장이 구단을 전격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막대한 투자로 다리오 콘카, 루카스 바리오스, 무리키, 클레오 등 유럽과 남미에서 활약하던 걸출한 선수들을 끌어모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감독 자리에도 유럽 출신의 명장을 원했던 그들의 욕망은 결국 2년간 팀을 이끌어 온 이장수 감독을 경질하고 2010 월드컵 이후로 야인 생활을 하던 리피 마저 불러들이게 된다. 계약 기간은 2014년 11월 30일까지 2년 6개월이며, 연봉은 약 1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10] 부임과 동시에 AFC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FC 도쿄를 꺾고 8강에 진출시키며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8월에는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으로 활약한 중앙 수비수 김영권이 영입되어 한국 축구팬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다. 김영권은 리피의 신임을 받으며 곧바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한다.
9월 20일 펼쳐진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 FC에게 1차전 원정 2:4 대패를 당한 탓에 2차전에서 2:1 승리를 하고도 결국 탈락하고 만다.
그래도 적수가 없던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부임과 동시에 계속 1위를 질주한 끝에 10월 27일 랴오닝 훙윈과의 29 라운드 경기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확정한다.
그리고 11월에 열린 중국 FA컵 결승에서도 구이저우 런허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3 승리를 하였고 리피는 부임 첫시즌 더블을 일궈낸다.
12월, 브라질의 보타포구 FR로부터 570만 유로에 엘케손을 영입하며 다음시즌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리피 부임 2년차인 2013 시즌,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와 같은 조에 편성되며 K리그 팬들에게도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11] 광저우는 F조 2차전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이날 경기 리피의 태도로 인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리피는 전주 월드컵 경기장에서 예정되있던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는데 광저우 측이 기자회견 시간을 변경할 것을 요청해서 전북이 이를 응했음에도 또다시 시간 변경을 요청하자 전북이 거절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으며 많은 비판을 들었다. 광저우와 전북은 5월에 텐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F조 6차전에서도 0:0으로 비기며 나란히 16강에 진출하였다.
리피의 광저우는 16강에서 호주의 센트럴 코스트 매리너스를 상대로 1, 2차전 합계 5:1 승, 8강에서는 카타르의 레퀴아를 6:1로, 4강에서는 일본의 가시와 레이솔을 8:1로 차례로 꺾으며 결승 무대로 이끈다.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으며 리그 3연패에 성공하였고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결승에서는 FC 서울을 만나게 되는데 지난번 전북과의 경기에서 리피의 태도로 인해 열불이 오른 한국 축구팬들은 광저우 만큼은 FC 서울이 잡길 바라는 상황. 광저우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차전에서 2:2로 비겼는데 2골의 원정골을 넣었기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홈구장 텐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1차전의 이점을 잘 살린 끝에 1:1로 비겨 결국 창단 이래 첫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리피는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챔피언스리그를 재패한 감독으로 이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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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곧이어 지난 시즌에 이어 이번 시즌에도 FA컵 결승에 진출하여 아시아 역사상 2번째 트레블에 도전하였지만 지난시즌 결승에서 꺾은 바 있던 구이저우 런허를 만나며 1차전 원정에서 0:2로 패했고 톈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2차전에서 2:1로 승리하는 데에 그치며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는 실패한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자격으로 참가한 FIFA 클럽 월드컵에선 이집트의 알 아흘리를 상대로 엘케손과 다리오 콘카가 나란히 골을 기록하며 2-0으로 승리하여 4강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유럽 챔피언인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0:3으로 털리면서 역시 아무리 돈다발 무장해도 유럽 챔피언을 넘어서진 못했다. 3, 4위전에서는 브라질의 아틀레티코 미쿠를 상대로 2:3으로 역전패하여 4위로 대회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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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FIFA 클럽월드컵 준결승에서 만난 펩 과르디올라>
새 시즌의 본격적인 개막을 앞둔 2014년 2월, 광저우는 볼로냐 FC의 이탈리아 대표팀 미드필더 알레산드로 디아만티를 690만 유로에 영입한다.
한편, 리피는 광저우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2014년을 끝으로 클럽 감독을 은퇴하겠다고 밝혔었지만, 개막을 앞둔 2월말, 쉬자인 회장의 설득 끝에 광저우와의 계약을 2017년까지로 3년 연장하였다.
2014년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2012, 2013 시즌에 이어 또다시 전북 현대 모터스와 같은 조에 편성되며 주목을 끌었다. 텐허 스타디움에서 먼저 열린 3차전 경기에서 광저우는 전북을 3:1로 격파한다. 그러나 4월 2일에 있던 4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0:1로 패한다. 여기서 리피는 지난시즌에 이어 또다시 전주 월드컵 경기장 공식 기자회견에 불참하여 다시금 논란이 있었다. 양팀은 지난 시즌에 이어 나란히 조 1, 2위로 16강에 진출한다. 리피 사단은 16강에서 세레소 오사카를 5:2로 격파하며 AFC 챔피언스 리그 2연패를 향한 큰 걸음을 이어간다. 그러나 8강에서 만난 호주의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와의 1차전 원정 경기에서 0:1로 패배한다. 게다가 경기가 끝날 즈음에 두 명이 퇴장당하자 리피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기장에 난입해 주심에게 항의했다가 1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고 2차전을 지휘할 수 없게 된다. 결국 2차전 홈에서 2:1로 이겼음에도 원정 다득점 원칙에 발목잡혀 2연속 우승의 꿈이 4강 문턱에서 좌절됬다.
시즌 도중이던 2014년 7월, 광저우는 또다시 돈을 풀어 이번에는 리피가 그토록 원했던 이탈리아 공격수 알베르토 질라르디노를 영입한다. 여기에는 리피 감독의 아들이자 축구 에이전트인 다비데 리피의 역할이 있었는데 엘케손과 헤네 주니오르, 알레산드로 디아만티 등도 그에 의해 영입된 선수들이었다.
한편, 중국 슈퍼 리그에서는 2014년 11월 2일 산둥 루넝과의 경기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리피는 3년의 계약 기간을 남겨두고 감독직에서 사임을 표명했다. 이로써 폰테데라, 로부르 시에나, 피스토이에세, 카라레세, 체세나, 루체세, 아탈란타, 나폴리, 유벤투스, 인터 밀란 등 수많은 구단을 거치며 다사다난했던 리피의 29년간의 기나긴 클럽 커리어가 광저우에서 막을 내린다. 리피는 체력적인 문제로 인해 클럽 감독직 은퇴를 선언하지만 국가 대표팀 감독직은 아직 무리가 없다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후임 감독으로는 이탈리아의 2006 월드컵 우승의 주인공 파비오 칸나바로를 수뇌부에 추천하여 감독으로 임명시키고, 이후 본인은 광저우 헝다 최고 기술 고문직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리피는 석달 뒤인 2015년 2월 26일 기술 고문직에서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스승의 비호를 받지 못한 칸나바로는 결국 해고당한다(...)
2.7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3년 6월, 카마초 중국 대표팀 감독이 경질된 이후 중국 축구 협회는 리피에게 수없이 러브콜을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013년 당시의 리피는 광저우 헝다의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2013 시즌이 끝나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리피는 훗날 중국 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도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그리고 1년뒤 2014년 말, 리피는 광저우 감독직을 내려 놓았고, 중국 축구 협회와 중국 국가 체육 총국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2016년 10월 22일,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다.
현재 중국 대표팀 상황은 그리 좋지 않은데 중국은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조 꼴찌이며 이란, 카타르 원정이 남아있다. 아랍권 원정에서 유달리 약한 중국이 이 경기들을 비롯하여 남은 경기를 다 이겨도 다른 팀 경기 결과를 봐야하기 때문에 플레이오프를 여럿 치뤄야 하는 조 3위 조차도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인지 중국 언론은 이번 월드컵도은 포기하고 리피 체제에서 2019년 아시안컵 결과를 더 기대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2.8 우승 기록
- 유벤투스(1994/95 - 1998/99, 2001/02 - 2003/04)
- 이탈리아 세리에 A (5) : 1994/95, 1996/97, 1997/98, 2001/02, 2002/03
- 코파 이탈리아 (1): 1994/95
- UEFA 챔피언스 리그 (1): 1995/96 ; 준우승 (3) : 1996/97, 1997/98, 2002/03
- UEFA 슈퍼 컵 (1): 1996
- 인터콘티넨탈 컵 (1): 1996
-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2012 - 2014)
- 중국 슈퍼 리그 (3): 2012, 2013, 2014
- 중국 FA 컵 (1): 2012
- AFC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1): 2013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2004 - 2006, 2008 - 2010)
- 2006 FIFA 독일 월드컵 우승
- ↑ 파일:129049902403302229882241543798626.jpg 항상 손에 시가가 들려있을 정도로 애연가이다. FIFA가 주관한 축구장 금연 정책의 최대 피해자로 불리기도.
금연령이 내려진 이후 금단현상으로 한동안 부진했다. - ↑ 단 유로컵 우승 경력은 없다. 그래서 UEFA 챔피언스리그, FIFA 월드컵, 유로컵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이 가져갔다.
- ↑ 한 때 유벤투스의 대괄호, 그 분 으로 불리고 있는 그 페라라가 맞다.
- ↑ 리피의 유벤투스 이후, 2016년 현재까지 유럽의 그 어떤 클럽도 3년 연속 챔피언스리그 결승 무대를 밟지 못했다.
- ↑ 살라예타의 이 골 장면은 아직까지도 올드 유베팬들의 뇌리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 ↑ 그런데 생각해 보아야할건 리피의 챔스 3연속 결승 진출 및 챔스 통산 4번 결승 진출도 결코 쉬운 업적이 아니다. 챔스 4강에 한 번 가는 것도 월드컵, 유로와 같이 굉장히 힘들고, 챔스 결승 진출이나 챔스를 우승하는 것은 월드컵, 유로와 마찬가지로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피의 역대 챔스 최다 결승 진출인 4회와 챔스 3연속 결승 진출이라는 기록은 정말 놀라운 업적이다. 또한 리그 우승도 경험하지 못한 팀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업적이다.
- ↑ 영입경쟁에서 패배한 AS 로마는 차선책으로 크리스티안 키부를 영입한다.
- ↑ 유로 2000 당시는 트레제게의 골든골로 프랑스가 우승했다.
- ↑ 마테라치는 박치기 사건 이후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다.
- ↑ 이 금액의 연봉은 당연히 아시아 클럽 감독 1위이고, 심지어는 전세계 축구 감독들 중에서도 펩 과르디올라, 주제 무리뉴 다음의 3위(!)다. K리그 팬들은 이 정도의 연봉을 줄 수 있는 광저우의 재정 수준에 부러워하는 듯하다. 150억이면 왠만한 구단 1~2년 예산이니까...
- ↑ 전북은 2012 시즌에도 조별 예선에서 광저우(리피가 부임하기 이전)를 만나서 패하고 16강 진출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