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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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시공관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장면 부통령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9월 28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9.28 사태, 시공관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시공관 사태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2 과정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공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장면이 부통령에 취임한지 한달여 만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대표 최고위원에 조병옥을 선출하고 그외에 최고 위원으로 장면, 곽상훈, 박순천, 백남훈이 선출되었다.

장면 부통령은 암살 시도가 있을지 모른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장면이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와 열화와 같이 갈채를 보내는 민주당원들을 뒤로하고 시공관 동문을 통해 나가려 할때 누군가가 장면을 향해 권총을 쏘았다.

총알은 다행이 빗나가 장면의 왼손을 스쳤을 뿐이었다. 일순 장내가 아수라장이 된 가운데 장면은 자신의 안전을 알리기 위해 다시 단상위로 올라가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저는 안전합니다"라고 말한 뒤 내려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3 진상 조사

장면을 저격한 범인은 현장에서 민주당원들에게 붙들려서 흠씬 두들겨 맞은뒤에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급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5분만에 달려온 김종원 당시 치안국장에게 인계되어 경찰로 끌려갔다.

잡힌 범인은 김상붕이었는데 민주당 서울 마포지구당의 구파계 간부였던 김재연이 그의 재종숙이었다. 게다가 김상붕은 현장에서 잡힐때 "조병옥 만세!"라고 외치기도 해서 경찰은 이 사건을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간의 내분으로 인해 벌어진 일인양 발표했다. 그러나 김종원 치안국장이 경찰 간부에게 김상붕으로 하여금 사건의 배후에 대해 말할 내용을 미리 일러주게 한뒤 기자회견을 시킨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하지만 국민들은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사이의 갈등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는 믿지 않았다. 사건에 의혹을 보내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경찰은 구파와 신파의 내분 때문이 아니라 민주당에서 김상붕을 사상범으로 몰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상붕이 배후를 실토했다고 발표했다. 김상붕이 밝힌 배후는 민주당 성동지구당의 간부인 최훈으로 최훈은 체포된 뒤 자신이 권총을 구입해 김상붕에게 주고 장면을 저격하게 시켰다고 자백했지만 그 이상의 것은 밝히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억울했던 최훈의 부인이 최훈에게 암살을 지시한 배후가 따로 있다고 폭로했다. 최훈에게 지시를 내린 배후로는 성동경찰서의 전직 사찰주임 이덕신이 거론되었고 이덕신도 체포되었다. 공판 과정에서 최훈은 이덕신의 배후에 아마도 치안국장 김종원이 있을것이라고 주장해 의혹이 김종원에게로 쏠리자, 김종원은 의혹을 극구 부인했다. 국회차원의 진상조사단이 김종원의 심복인 장영복 치안국 특수정보과장등이 개입되어 있음을 밝혀냈지만 민주당의 진상규명 촉구에 자유당은 "국민을 선동하지 말라"며 맞섰다.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것은 1960년 4.19 혁명이후였다. 자유당 정권 청산 과정에서 김종원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결국 김종원은 자신이 배후였다고 실토했다. 자신의 뒤에는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임흥순이 있었다고 밝힌것. 이로 인해 장면 저격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그 과정이 참 복잡했다.

이기붕임흥순에게 장면이 거슬리니 제거해야 하지 않나라고 지시-> 임흥순은 내무부 장관 이익흥을 불러 지시->이익흥은 치안국장 김종원에게 지시->김종원은 치안국 과장 장영복에게 지시->장영복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지시->박사일은 오충원 서울시경 사찰과장에게 지시->오충원은 이덕신 성동경찰서 사찰주임에게 지시->이덕신은 최훈에게 지시->최훈은 김상붕에게 지시(...). 이 정도면 4.19혁명 전 드러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이다.

4 사건의 배경

사건의 배경에는 이기붕을 비롯한 자유당 세력들의 불안감이 있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재선했지만 당시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나섰던 이기붕은 미끄러졌으며 대신 장면이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승만의 나이가 많았던 탓에 언제 이승만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대통령직을 자동적으로 장면이 승계할 상황이었고 그리되면 권력을 잃을것을 이기붕은 두려워 했다.

그래서 자유당 세력은 대놓고 장면을 비토했다. 정.부통령 취임식에 분명 대통령과 부통령의 자리를 마련해야 함에도 대통령의 자리만 마련하는 찌질한 일이 일어났고 장면은 결국 맨 앞줄 귀빈석의 가장자리에 앉는 굴욕을 당했다.(...) 게다가 취임연설의 기회도 주지 않아 장면은 취임연설을 대신할 성명서를 배포했는데 자유당은 성명서를 트집잡아 국회에 장면 부통령 경고결의안을 의결해 가결하기까지 했다.

사건 당시, 장면은 이미 자신을 암살할 음모가 있을지 모른다는 보고을 받았다고 후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당시 자유당 세력들이 장면을 암살하기 위해 두 가지 플랜을 짜두었는데 첫째는 장면이 전당대회장에 가기 위해 혜화동을 떠나 원남동 로터리 부근을 지날 때 장면의 차를 트럭과 충돌시켜 교통사고를 가장해 죽이는 것이었고, 둘째는 만약 교통사고 위장 암살플랜이 실패할 경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전당대회장에서 장면을 저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탓에 장면은 전당대회에 불참하겠다고 공언한뒤 다른 루트를 통해 시공관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암살범들이 어리벙벙한 탓에 저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상붕은 조병옥 만세를 외치며 장면 저격의 배후가 민주당 구파라고 몰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는게 문제(...). 애당초 장면부터 자신의 암살배후를 이기붕으로 의심했다.

장면이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은뒤 30분 만에 퇴원하여 집에 돌아가자 이기붕이 위로차 방문했다. 장면은 정치를 왜 그런 식으로 하냐면서 이기붕을 쏘아봤고, 당황한 이기붕은 어쩔줄 몰라하다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냐고 겨우 대답한 뒤에 장면의 집을 나섰다고 한다.

이후 열린 공판에서 김상붕, 최훈, 이덕신등 7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장면은 이들을 사형시키는건 너무 가혹하다면서 형을 감해달라고 탄원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고 한다.

후에 최훈은 "곰사냥 작전의 전말-장면 저격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사건의 진상을 기술한 수기를 신동아지에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