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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宗元
역대 치안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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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절대로 사람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군의 흑역사.
대한민국의 기무라 헤이타로.
학살에는 귀신, 하지만 전투에는 등신인 새끼.
2 일생
경상북도 경산시 출신, 1940년 그는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하사관에 자원입대했다. 이후 파푸아뉴기니 전투, 필리핀 전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를 수료하고 육군 제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그는 성격이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파푸아뉴기니 전투 당시 인육을 먹었던 얘기를 태연히 하고 다녔으며, 육군 장교가 되기 전 잠시 경찰로 있으면서 하급자를 마구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다. 군에 들어간 뒤에도 병사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말이 많았고 파면이 되기도 했다.[1]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했다. '육사졸업생'을 쓴 장창국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품행과 학업이 불량하여 퇴교대상에 올랐으나, 민족의식이 강한 한 생도가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과 반목끝에 자퇴하여 김종원이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梧洞島)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日本刀)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31쪽)
여순사건 당시 5연대 1대대장으로 진압하다 한심한 지휘와 통솔로 희생이 많이 따른 탓에 완전히 진압된 후 용공혐의자들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쏘고 일본도로 목을 자르는 등 즉결처형으로 보복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이 때 희생자가 대충 100여명이란 설이 있다. 또한 참수한 용의자의 목을 자루에 담아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하여 대경실색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가히 천하의 개쌍놈.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백두산 호랑이라 자처하는 호랑이에게 물려갈 소리를 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동해안 방면의 8사단이 육군본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에 원주-제천 방면으로 후퇴해버리자 그 빈자리를 매꾸기 위해 대구-부산을 담당하는 3사단 23연대가 차출되어 동해안방면으로 올라가 북한의 공격을 막았다. 이때의 23연대장이 김종원. 그러나 꼴랑 1개 연대로 북한의 최정예 5사단(중공군 164사단이 인민군으로 신분전환)과 예비사단인 인민군 12사단은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였다. 그바람에 연전연패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적의 공격을 몸빵으로 막아내면서 선전하였다. 계속 후퇴하던중 경북 영덕군 봉화까지 후퇴하였을 때 김종원 중령의 23연대는 인민군과 7월 19일부터 공식 기록상으로만 4번 빼앗고 빼았기는 격전을 반복한다. 그러다 7월 25일경 봉화의 181고지를 사단장 이준식 준장에게 재탈환 하라고 명령을 받는데...
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자기연대가 181고지를 적에 빼앗기고 탈환공격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대장을 즉결처분하고 사병 1명도 즉결처분했다. 미군고문은 이런 김중령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상부에 건의하여 그를 해임케 했다. 원래 김종원 중령은 6.25전에도 미고문관 구타사건으로 군을 떠나 경찰에 투신했다가 적의 남침 후 다시 군에 복귀했는데, 그 후에도 미고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중앙일보 <민족의 증언>(전8권)
대체 몇 번을 짤려야 만족하는 거냐?
그 후 부산지구에서 계엄군 사령관을 하다가 거창 양민 학살사건으로 인해 직위 해제되면서 구속되었다. 다만 이때 행위가 엽기적인데, 휘하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하여 조사를 위해 찾아온 국회의원들을 습격해버렸다! 이후 그대로 뭍히는 듯 하였으나 외신들의 대대적인 언론보도[2]로 재수사가 진행되어 국회의원들의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 3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물론 다 복역하지 않고 3개월만에 이승만의 특사로 풀려난 후 전남경찰국장으로 임명된 후 승승장구 한다. 이승만은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 하다’뭐가어째???"며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1956년 이승만으로부터 부정선거를 도운 공을 인정받아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으나 1961년 12월 당뇨로 인해 병보석을 받았다. 이후 1964년 1월 30일, 천벌을 받아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사망 후, 그에 의한 원귀들이 김종원을 무덤에서 끌어내 데려갔다는 '고만이 귀신'-도시괴담의 주인공이다.죽을때까지 빨갱이 욕하면서 자기가 저지른 짓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어찌나 찐따같았는지 처조카 손자조차 독립영화로 김종원의 행적을 찍으면서 김종원을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반공 극렬 수꼴조차도 웬만해서는 이 작자에 대하여 언급하는 걸 피하는데 (90년대 한국논단에서조차도! 일부 한국군이 너무 잔혹하게 굴긴 했다며 가볍게 언급할 정도이다!) 그 한국논단조차 외면했다. 위에 서술하듯이 참수하고 그걸 자랑하고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한 탓에 당시 상관들조차도 미친 놈이라고 피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90년대 KBS 1TV에서 하던 반공 다큐멘터리에서조차 무차별로 참수하고 자랑한 탓에 되려 반감만 불러왔다고 깠을 정도다! 당시 인터뷰하던 반공 보수인사도 이런 지나친 처벌이 되려 반국군 감정만 불러일으켰다고 할 정도였으니...
3 미디어에서의 모습
제2공화국에서는 백인철이 담당했으며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룬 장면에서 잠시 등장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단순무식한 모습으로 나오며 처음에 양민 학살사건이 알려지자 분노를 터뜨리지만 이 사건을 그냥 덮자는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명령에 복종해 국회의 진상조사를 집요하게 방해한다.
야인시대에서는 김세민이 담당해 6.25 때 김두한이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부산지구 계엄군 사령관으로 첫등장을 했다.
여기서도 매우 찌질한 인간 쓰레기로 거창 양민 학살사건 당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국회조사단을 빨치산으로 위장한 한국군 병력으로 습격하다가 들통나 구속당한다. 그러나 자유당의 빽으로 다시 풀려나 치안국장에 앉는다.
이후 반독재시위를 진압하는 책임자로 다시 등장, 시위대를 폭력진압하나 앞에 서 있던 김두한의 대활약[3]으로 철수한다.
그런데 얼마 후 쥐도 새도 모르게 치안국장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다. 부통령 저격 사건때문인가?
계속 4달러만 요구하는 김두한에게 3배까지 올랐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계속 김두한이 4달러를 요구했고, 결국 한발 물러선다.
딴지일보 2016년 5월 24일자 칼럼에서 그를 다뤘다. 개차반인 성격에 반공을 무기삼아 살육을 즐기던 악마가 이승만의 비호를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 읽다보면 정말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