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황룡촌 전투 | ||
날짜 | ||
1894년 음력 4월 22일 ~ 4월 23일 | ||
장소 | ||
조선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 | ||
교전당사자 | 관군 | 동학농민군 |
지휘관 | 이학승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
병력 | 300명 | 6000-7000명 |
피해 규모 | 100여명 | 50여명 |
결과 | ||
동학농민군의 승리 |
長城 黃龍村 戰鬪 (1894년)
1 개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4월 22일부터 23일 사이에 전라도 장성군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 사이의 전투. 전투가 벌어진 황룡촌은 현재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소재지인 월평리 일대로 비정된다. 이 동네는 서쪽에 황룡강이 흐르고 동쪽은 못재고개, 북쪽으로는 장성읍과 맞닿아 있다.
2 전투 상황
1894년 3월 봉기이후 동학군의 세력이 전라도에서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자. 이러한 사태에 다급함을 느낀 정부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삼아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홍계훈은 서울을 지키던 정예부대인 장위영 군대 약 800명을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갔다. 이들은 서양식 무기와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실력있는 청나라 용병 10여 명과 기관포 2문까지 보유한 강력한 부대였다.
홍계훈의 부대가 4월 5일,전주성에 입성하였다. 화력에서 열세인 동학군은 전주성 공략을 뒤로 미루고 관군을 피해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정읍, 고창, 흥덕 등을 장악해 나갔다. 관군의 전력을 자세히 확인한 전봉준은 동학군에게 전면전을 피하고 부대를 나누어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관군은 4월 18일경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홍계훈은 동학군을 과소평가하고 여유롭게 진군했던것 같다. 그러나 동학군은 이미 전봉준의 지시대로 관군의 진격루트를 피해 장성까지 북상한 뒤였다. 장성에 도착한 동학군은 삼봉에 진을 쳤다. 자신이 동학군에게 속은 것을 안 홍계훈은 즉시 군사 300여명을 삼봉으로 급파했는데, 이들의 대장이 이학승이었다.
이학승의 부대는 비록 300명 뿐이었지만, 정규 훈련을 받은 정규군이었고, 서양식 총과 기관포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동학군으로선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이학승은 삼봉과 마주하고 있는 황룡강 근처에 진을 치고 동학군을 휘유하는 서신을 동학군 측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학승은 그 답이 오기도 전에 동학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이학승 부대는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동학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고, 갑작스런 공격에 동학군 여럿이 죽거나 다쳤다.
전봉준은 즉시 학익진을 펼치라 명령하고, 관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런데 관군의 수는 불과 수백명 뿐이었고, 후방에 지원부대도 전혀 없는 것을 보자, 전봉준은 한번 싸워볼만 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관군의 신식무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였다.
고민 끝에 전봉준은 손재주가 있는 농민들을 불러모아 방어용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 방어용 무기란 다름아닌 장태였다. 장태는 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이어붙인 것으로, 원래 병아리를 기르기 위한 일종의 둥지같은 것이었다. 대충 죽부인의 대형화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동학군은 이 장태 속에 짚을 넣고 밖에 칼을 꽂아 관군을 향해 굴렸다. 당황한 관군은 총과 포를 쏘며 진격했지만 관군이 쏘는 총탄은 전부 장태에 박힐 뿐이었다. 신식무기가 무력화되자, 수적으로 열세인 관군은 강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관군을 뒤쫓아 개발살내고, 대장인 이학승의 목도 베었다. 거기다가 관군이 보유했던 총과 포를 대량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할 수 있었다.
3 전투 이후
이 전투는 동학군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중앙군을 상대로 최초로 거둔 승리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이 전투 이후 동학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으며, 반대로 관군은 지휘관의 뺄짓으로 정예군을 잃고 반란군의 전력을 강화시켜준 꼴이 되었다.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贈左承旨李公學承殉義碑)
월평에 전사한 관군 대장 이학승을 기념하는 순의비가 서있다. 이학승은 죽은 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