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

(동학농민운동에서 넘어옴)

파일:/image/032/2007/02/27/7b2723a.jpg

1 개요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서 봉기 당시 전봉준이 발표한 격문-

진멸권귀(盡滅權貴) :

권세있고 부귀한 무리들을 멸하고,
축멸왜이(逐滅倭夷) :
왜적양이들을 구축하여 없이하며,
제세안민(濟世安民) :
세상을 구원하고 민중을 편안케 한다.

후세 한반도에서 발발한 모든 민족운동, 혁명, 저항권 행사, 항쟁들의 한 전범으로서 남은 역사적 대사건

189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 동학 농민군이 초기에 우세 했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지만, 운동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되었고 또한 민란과 결합되어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은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매천 황현은 이를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하였다.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여길 수 있는 보은 집회를 전후한 시기부터 단순한 종교문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는데, 보은 집회 이후 동학 지도부는 신원 운동이나 다른 청원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이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농민 운동의 지도 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동학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구제활동을 철저화하려는 정치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다고 보기도 한다.# #

조선 말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자, 동아시아사에서도 한반도의 세력 균형이 본격적으로 깨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세계사적 사건이다.[1]

이렇듯 동학농민 운동이 세계사적인 사건이자 국민들의 저항운동이기 때문인지 동학농민운동에 관해 깊게 연구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의 게릴라 장기전은 후일 중국에서의 항일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나타나는 열세에 놓인 아시아국가가 제국주의에 저항한 방식의 선구를 이룬 셈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 때 당시 조선 정부가 한 일들을 보면, 무슨 일이든지 뒷수습을 잘하지 못하면 더욱 큰 환란이 닥쳐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민란이 처음 시작될 때는 단순하게 한반도 농민들의 궐기 운동과 내전 등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조선조정청나라의 군대를 주둔시켰고 일본군이 한반도에 기습적으로 침략해서 결국에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비효과와 같이 동학농민 운동은 양대 세력이 한반도에 주둔하게 되는 명분이 됨으로써 청의 입장에서는 일본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 청과 조선의 사대 관계가 끊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에게는 한반도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에,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조선 관군만으로 동학 농민군을 제압하였다면 청일전쟁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물론, 이런 가정 하에서도 오래전부터 한반도 지배와 이를 통한 중원을 장악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이러한 분란에 개입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2 과정

2.1 배경부터 1차 봉기까지

근원은 1893년 보은 집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2] 남접북접 모두가 참가하여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급기야는 보은 출신의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서 말려야 했던 집회였다. 물론 전봉준도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보은에서 집회가 끝나고도 정치적으로 좀 더 열성적이었던 이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집회를 또 벌였는데, 이는 전라도 지역의 민중들이 수탈로 인하여 가장 큰 고통을 받던 지역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3]

옛부터 전라도는 곡창 지대였는데,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이점으로 인하여 전라도 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다. 당시 전라 고부 군수(지금은 정읍시의 일부) 조병갑은 그 중에서도 대단한 탐관오리였는데, 그는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에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인근 태인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양민들로부터 엄청난 조세와 잡세를 걷고 양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떠밀어 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조병갑에 대한 전라도 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군 사람들은 글 깨나 배웠다는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곤장뿐이었다. 이로 인해 전창혁은 반 죽은 상태로 돌아왔고 보름이 채 안되어 장독[4]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5] 주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장 접주 손화중[6]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손화중은 거절하였다. 당시의 봉기군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뿐만 아니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까지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1968년 발견되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전까지의 민란은 민중들이 아무리 분해도 수령은 왕의 대리인이라고 여겨 수령에게 모욕을 가해도 수령을 죽이지는 않는 분풀이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은 첫 봉기에서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간다고 하는 등 기존의 농민 봉기와 그 시작부터 크게 달랐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받아 유야무야 되었는데,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어 고부로 돌아왔다. 결국 이틀 만인 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켜 만석보를 무너뜨렸고, 고부 관아 창고에 있던 곡식과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7] 사태를 파악한 조정은 신임 군수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박원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 성공적으로 봉기군을 해산시켰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냥 하고 많은 동네 소요에 불과했을 것이다.

2.2 승리, 그리고 확산

정부는 고부의 난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8]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 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하여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놈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조를 어기고 동학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뒷처리 수준[9]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0]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11]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인 태인 접주 김개남과 고부민란 때 포섭에 실패했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1차 동학 농민 봉기이다.[12]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여기에 호응해 점차 봉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홍계훈[13]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팔백 명의 경군을 주어 봉기를 분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경군이 소유하던 무기들이 상당히 고급이었는데,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티센크루프식 야포와 미국 레밍턴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틀링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대단한 화력을 보유한 경군이었으나 정작 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 병사들은 기강이 썩 좋지 못하였다. 홍계훈의 팔백 명의 경군이 군산포에 상륙한 직후 800명 중 330명이 탈영해버리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는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 조정에서 부상병들을 치료를 해주지 않고 제대시켜 버린다는 소문이 돈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14]

단발 그것도 전장식 소총을 보유한 민병대와 후장식 선진화기 그리고 개틀링과 같은 자동식 화기를 보유한 군대의 전투력은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자동화기만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분대단위의 군대가 자동화기가 없는 대대단위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다. (막아낼 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식민 제국 군대가 피식민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단, 어디까지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근대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즉 800명이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자동화기의 재배치와 주둔지 요새화를 강구하였다면[15] 충분히 관군 수준에서 동학 농민군을 막아내고, 경우에 따라선 진압까지 가능했다는 말이다. 농민군 입장에선 진압 못한 게 다행이긴 하다. 즉 이 사태는 그 당시 조선 조정의 능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확연한 사태였다.

한편 전라 감사 김문현은 전주 감영군을 모아놓고 대기 중인 상태였다. 화력이 우수한 경군이 남하하고 있으므로 경군과 합세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겠으나, 김문현은 단독으로 공을 세울 욕심으로 무리하게 출병을 결정한다. 김문현은 수령으로써 잘못된 통치로 봉기를 허락한 죄가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서 죄를 갚으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훈련 상태도 형편없고 기강도 무너진 상태였던 감영군은, 기세등등한 농민군과 황토현에서 맞붙었다가 대패를 하게 된다. 이때가 4월 7일.

농민군은 전라 감영군을 박살낸 후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며 경군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화력이 강력한 경군과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하려는 전략이었다. 농민군은 꼬리에 경군을 달고 고창군, 영광군, 함평군서해를 끼고 남하하다가 나주를 기점으로 급격히 북상하여 장성 황룡촌에서 마침내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경군은 지휘관 이학승이 전사하고 대패하게 되는데, 이것이 장성 황룡촌 전투이다. 이때가 4월 23일.

기세가 잔뜩 오른 동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주성을 무혈점령한다. 이때가 4월 27일.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왕가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고부 이외에 황주, 금성, 김해 등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동네들도 많았다. 일례로 나주는 민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 전북은 남원도 거부해보았지만 남원은 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

도마 안중근 의사도 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16] 이 시절은 흑역사 취급 중….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 밖에 없다. [17] 참고로 백백교의 시조 백도교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 전봉준과 동학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18]

2.3 외국의 개입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정부군은 잔여 세력을 수습하고 병력을 보강하여 전주성 함락 다음날부터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나 전주성을 탈환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왕조 왕가의 본거지인 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조선 정부는 크게 동요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를 바꾸게 되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청에게 동학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청일전쟁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 제국주의 시대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전주성에 묶인 상태이므로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차병안을 제기하였다. 김병시가 톈진조약에 의거해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대부분의 대신들은 “강력한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일본군이 감히 개길 수 있겠어?” 하고 상콤하게 무시해버렸다. 청은 강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 하던데[19]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됐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였던 것이다. 고종 정신력이 유리멘탈인 게 큰 문제.

그리하여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였는데,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 달리 바로 다음날인 5월 6일에 일본군이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청 군대가 조선에 출병 시 왜군도 동시에 출병한다는 톈진 조약에 근거하여 전격적으로 인천에 상륙한다.

2.4 일시 해산

이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서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할 것을 기도하였다. 톈진조약에 의거하면 조선의 변란이 진정될 때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군은 외국군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1; 지구전은 불리한데다, 2; 모내기도 해야 되고, 3; 무엇보다도 이대로는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홍계훈이 “정부에서 너네한테 나쁜 짓 한 군수하고 안핵사 등을 다 벌줬으니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만 둬라”라고 했다.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정부는 교정청,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 이때 실시된 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

2.5 2차 봉기

청군과 일본군에게 조선 조정이 이제 상황 종결되었으니 이제 돌아가라고 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이렇게 하늘이 준 기회[20]를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철군 요구에 “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주둔을 천명했다.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21]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 이홍장은 청군과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청나라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했다. 청나라는 “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일본군의 역습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한양을 점거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하고 고종의 이름을 빌어 조선의 모든 청군은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함으로 이는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된다. 조선을 집어삼키려 했고 조선을 입맛대로 개혁시키기 위하여 경복궁에 침입하고 남산대포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이라고 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간섭이라고 읽는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22] [23]

2.6 패퇴

이 때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중심이라 할만한 북접은 전봉준을 부정하였지만[24]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게 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합류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25]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0만에 이르는 대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했다. 이때 이 전투의 관군 & 일본군 연합에서 지휘권을 가지고 전투를 주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26] 농민군은 정부군과 일본 연합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무기 숙련도가 높은 일본군이 돕는 정부군에게는 화력에서 열세[27]였고, 결국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이 대패하고 이 후 각개격파를 당하면서 사실상 와해되고 만다. 네이버캐스트의 우금치 전투[28]

이후 중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잡힌 후 바로 효수되었으며[29]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집결하려 했으나 1894년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정부군에 체포되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채경선, 서장옥 등도 체포되었다. 재판 공초를 보면 배후, 특히 대원군과의 관계를 캐묻는 심문관과 이에 대해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는 전봉준의 모습이 나타난다.[30] 일본군은 전봉준을 포섭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살려보려 하였으나 전봉준은 그럴 마음 따윈 없어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31] 녹두장군은 그렇게 갔다. 봉기가 시작된지 고작 1년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894~95년,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였기에 황해도의 동학도도 봉기하였다. 여기서는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다! 위인전에는 단순히 동학군에 참여했다고만 나와있지만…. 그리고 이 때 동학군을 토벌한 민병대가 바로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되어 김창수에게 도움을 주고,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좋은 친분을 가지게 된다.[32] 그리고 안태훈의 장남이 도마 안중근 의사다.

3 의의

아래의 명칭 논란에서도 언급되지만 동학 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교적 근왕주의에 바탕을 둔 전통적 민란에서부터 카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 말하는 근대적 계급 투쟁의 시초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국정 교과서를 비롯, 정설은 반봉건 반외세에 기초해 근대성을 지향한 투쟁이었다는 것이나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은 유교적 근왕주의에 기초한 민란으로 지칭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특히 동학 운동의 근대성의 가장 큰 근거였던 폐정개혁안 12조의 실재에 의문이 제기[33]되었으며, 이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동학사에만 출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실제 전봉준이 작성한 무장 창의문을 보면 근왕주의적 색채가 매우 뚜렷하며, 도리어 계급주의적 색채는 전봉준이 아닌 김개남에게서 나타나는데, 김개남은 철저하게 반봉건 반외세로 일관하여 (단, 김개남이 설계하고자 했던 체제는 근대적 국가가 아닌 또 다른 전근대적 왕조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스스로 왕을 참칭하기도 하였다.

전주 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반외세를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써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만 향반 지주 계층과 농민군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농민군 진압 후 에도 관련자 색출 및 학살은 이어졌다. 의병을 이끈 향반층은 곧 농민군에 대항한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의병 전쟁기까지 살아남은 농민군도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4 후대에 끼친 영향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학 농민 운동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중화주의 외교 질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류큐, 대만, 조선을 편입하고 일본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민중사관에서 높이 평가받는 동학농민운동이기에 북한에서도 그럴 것 같지만 북한은 동학 농민 운동을 복벽 계열의 운동으로 보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34] 이에 반해 북한은 북부를 중심으로 한 홍경래이괄을 숭상시한다. 북한에서는 홍경래를 인민 해방의 선봉장이자 영웅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월북 소설가 박태원이 말년에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으며, 이는 박태원의 마지막 작품이다.

5 국가적 재평가

국가적 재평가는 박정희 정권부터 시작됐다.

1963년 10월 3일에는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참여한 상태에서 갑오동학혁명의 전승지에서 녹두 장군을 추모하는 기념탑제막식이 열렸다. 탑 이름은 동학혁명기념탑이다. #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이날에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의 도약에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서 정신은 길이 계승되어야한다"고 말하며 "5.16 혁명도 이념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동학혁명은 비록성공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봉건잔재 타파에 커다란 이정도표가 됐다",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목표를 삼아야하며 그렇지못하다면 백성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과 전국교인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탑이다. 박정희가 탑의 제자에다가 "동학혁명군위령탑"이라고 썼다. #

이승만 정권에도 간혹 언론에서 동학혁명 같은 용어를 쓴 경우는 있으나 국가적으로 쓰진 않았고 공식명칭도 아니나 박정희는 공식적이며 주도적으로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재평가를 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2007년부터 나와 2015년 12월 31일에 최종공포했다. #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되었다.

6 기타

6.1 일본의 연구

일본 학계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을 연구하는 사례도 있는데 몇 부분에선 한국도 놓친 부분을 일구어내는 높은 성과를 보였다. 그 예로 이노우에 가쓰오 라는 학자가 있다. 이 학자는 홋카이도 대학 연구실에서 우연히 동학 농민군의 유골을 발견하고 의문이 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 연구를 하였으며, 일본군이 벌인 동학 농민군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연구하였다. [35] 흔히 제노사이드라 하면 6.25 전쟁을 생각하는데 이 부분으로 성과를 이룬 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업적이다.

일본의 마에다 겐지 다큐멘터리 감독이 동학 농민 운동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 본 감독의 경우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향해 벌였던 수많은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할 것이며 제대로 된 역사를 전파할 것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를 수 편 제작했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았다. 일단 이 감독의 다큐가 제작이 끝날 때쯤 넷우익부터 야쿠자까지 온갖 협박을 받으면서도 제작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거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영화로 동학 농민 운동에 대한 다큐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일본만화 왕도의 개 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이 묘사된다.

6.2 명칭 관련 논란

대개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비롯되어 동학란, 동학 폭동, 동학 농민 봉기, 동학 혁명, 갑오 농민 전쟁 등 다양한 칭호로 불리기도 하나, 비교적 중립적인 성향을 띤 동학 농민 운동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 쓰인다.

동학란이나 동학 폭동이라는 칭호는 (동학란이 덜하긴 하고, 재평가 이전까지 잘 쓰이긴 했지만) 딱 봐도 비칭의 느낌이 강하니 설명 생략. 동학 농민 봉기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전에 소규모로 빈발하던 농민 봉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 동학 혁명은 진보나 사회주의 세력 등에서 농민이 주도적으로 국가 정치의 대변혁을 시도했음을 높이 사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활동이 혁명이라기에는 이념의 구심점이 약했다는 비판이나 혁명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갑오 농민 전'의 경우에는 16세기 독일농민 전쟁에 영향을 받은 칭호이나 둘간의 차이가 상당하고 동학군은 조선 왕조 자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이란 용어도 많이 쓴다. 이 경우는 운동이나 봉기같은 축소단어가 아니며 격렬한 전투를 나타내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은 잘 나타내고 있다.

다만 동학 농민 운동도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는 지적도 꽤 된다. 비슷한 경우로 3.1 운동도 '운동'이라는 이름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쓰이는 실정. 사실 성격이 무력 전쟁의 성격이 강한 점에서는 동학은 3·1 운동과도 다르다. 영어로는 비슷한 사건에 규모와 큰 상관 없이 Rebellion(반란, 모반)나 Uprising(봉기)를 많이 붙이는 편이다. 예컨데 의화단의 난은 Boxer Rebellion, 태평천국은 Taiping Rebellion, 더블린 봉기(aka 부활절 봉기)는 Easter Rising, 영문판 위키백과 항목명은 Donghak Peasant Revolution, 즉 동학 농민 혁명이라고 되어있고, Movement라고 병기되어 있다. # 솔직히 홍경래의 난도 그 혁명적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동학농민란,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하는게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황건적의 난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황건기의’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정부에서는 공식명칭을 동학농민혁명이라 정하고 있다. 다만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아 출판되는 한국사 교과서와 각종 EBS 교재에는 '동학 농민 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에서도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6.3 기념 사업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읍 등 관련 지역민들의 주도로 전봉준에 대한 기념 사업을 조촐하게 이어 오다가 1980년대 부터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추모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여기에는 당시 전두환의 의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민중 항쟁을 탄압하여 집권한 인물이 민중 항쟁을 기념하였으니 대단한 아이러니. 다만 거창한 사업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졸속으로 고증하여 엉터리로 복원한 기념 작품들이 많다.

7 관련 항목

동학 농민 운동이 성공한 후의 이야기를 다룬 대체 역사 라이트 노벨.
  1. 게임 마치 오브 워에서는 이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들어온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일본이 아시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묘사되었다.
  2. 이때 충청도 관찰사는 조병식이었다. 조병갑의 친척이자 역시 탐관오리로, 방약무인하여 동학도들의 말을 무시하였다.
  3. 3월 11일자에 나온 보은 집회의 1차 통유문은 교조 신원과 사회 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3월 16일에 2차로 나온 통유문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보은 집회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이하 링크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 #
  4. 태형으로 인한 체력 약화와 상처가 감염되어 생기는 병.
  5. 전창혁의 사망 경위는 명확치 않다. 대체로 조병갑에 항의하다 장살(杖殺)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만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린 1893년 11월 경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생각된다.
  6. 인망이 있어 그를 따르는 동학도만 약 2천이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7. 조병갑은 급하게 도망을 하였으나 사태 수습을 위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강진군 고금도에서 잠시 근신을 하고 곧 복귀하여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 재판관(오늘날의 고등법원 판사)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1911년에 67세의 나이로 타계하었다. 풍양 조씨 조두순이 큰아버지라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하지만 이런 현실은 조선조 탐관오리들의 영원한 레퍼토리기도 했다.
  8. 이용태는 나중에 경술국치 때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예비목록에도 올라와 있다.
  9. 수괴급은 사형. 그 외 주동자급 및 중죄를 저지른 게 밝혀진 사람은 귀양. 나머지 단순 가담자들은 훈방 또는 무죄. 임술민란 때도 대부분 이 정도로 처리되었다.
  10. 당장 임술민란 때도 유계춘 같은 주모자들이 여럿 참수되었지만 그 때문에 사태가 대책없이 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술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계속 이어진 건 정부에서 삼정의 문란을 고치겠다고 약속 해놓고 입 씻거나 실효성 없는 정책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11. 이용태는 신임 군수 박원명까지 협박해가면서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참여자를 색출해냈고, 이렇게 그가 색출해내었던 농민은 모두 동학교도라고 규정한 뒤, 동학교도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집을 불태운 뒤 교도들과 연좌제를 적용하여 교도들의 처자식까지 잡아서 살육하였다. 아무리 연좌제가 용인되던 당시의 사회풍조라도 이 정도면 고을 하나가 사라질만한 일가족 몰살에 줄초상까지 벌어질 참담한 만행이었다. 거기에 동학교도가 아니던 단순 가담자들을 역시 모두 동학교도로 단정하여 그들역시 죽였으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
  12. 상이 자생적 고부 민란이 확대되었다는 견해에 입각한 서술이며 또한 정설이나,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바가 있어 서로가 안면이 있었고,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에 전주성 점령 및 한양으로의 진격이 명시된 데 비추어 보아 대원군이 발단에 개입한 계획적 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모병 과정에서 강조하였으며, 대원군 또한 난 발발 이전부터 동학의 지속적인 청원을 이용해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였던 손화중도 대원군과 그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13. 임오군란명성황후 민씨를 구하고 을미사변 때 시위대로서 근무하여 민씨를 보호하다 살해당한 그 홍계훈 맞다.
  14. 물론 가장 크게 기여한 건 바로 봉급문제. 사실 임오군란 이후에도 아직도 정신 못차린 조정에게 홀대 받은 군인들이 분개하여 민란을 일으키는 군민들에게 동정심+동질감을 느껴버리고 탈영한 뒤, 아예 동학농민군에 가담하는 경우까지 연출하고 말았다.
  15. 콘크리트, 하다못해 모래, 더 상황이 안 된다면 단순히 땅을 판 참호를 이용한 요새만 해도 근대의 야포까지 방어할 수 있었다. 괜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요새에 대한 확실한 제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전차, 지진폭탄, 항공폭탄, 고폭탄, 대전차 화기 등이 개발되면서 가능해졌다. (대전차 화기의 경우 전차의 강철을 뚫을 정도니 경우에 따라선 참호, 요새의 제압에 사용되었다.) 즉 제1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의 당시에는 야포도 기관총도 없는 상대이니만큼 이 정도의 요새만 구축해도 충분히 수배, 열 배 이상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
  16.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데다가 서학을 지지하였던 편이었기 때문에 동학 조직이 주도하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취했다. 또 안중근이 사형 직전에 쓴 《안응칠 자서전》을 보면, 안중근은 동학 농민군이랑 일진회를 동족으로 알고 있었다.
  17. 농민이 시초도 아니고 봉기라고 할 수 없던,양치기로 시작하여 농민도 일부 참여한 양치기 십자군도 도적짓을 저질러 결국 프랑스군에게 무수히 참살당하며 진압되었다...
  18. 김구의 고향에서는 “창수가 동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을 정도. 참고로 창수는 김구의 원래 이름이다.
  19. 아마도 태평천국의 난을 말하는 듯... 당연하지만 영국은 군대를 빌려준 게 아니라 자기들에게 태평천국보다 청이 낫다고 생각해서 진압한 것이고, 그 길로 중국 내에서 세력은 더 키웠다.
  20.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말을 할만했던 게, 당시 일본 제국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상주안을 가결시켜 버려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는 물론이고 내각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하늘이 일본제국에게 준 기회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따지자면 자기에게 준 기회라는 뜻이 강하다(...)
  21. 사실 청 내부에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닌데, 주류는 아니었다. 당장 이홍장도 조선 식민지화는 되도 않은 소리라고 반대했다. 지금처럼 속국 관계나 유지시키자는 게 당시 청의 주류 의견이었으니 무리하게 조약을 어기거나 할 이유가 없었던 셈.
  22. 역시 이에 대해서도 대원군의 사주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구한말 정변에는 모두 대원군 개입설이 있으며 상당히 유력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침공이 있었으므로 고종이 억류된 상황이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준에게 봉기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동학의 2차 봉기가 고종과 연결되어 있는지, 대원군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뭐 결국 실패하면서 크게 영향력이 없어져 버렸지만.
  23. 한편 일본군 참모 가와키미 소로쿠와 히라오카 쇼타로가 ‘청국을 토벌한다’는 묵계 아래 우치다 료헤이 등 14명의 낭인들이 천후협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조선으로 가 전봉준을 만나 거사를 촉구하고 무기를 지원하였으며, 홍계훈이 농민군에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물론 동학군이 승리했다는 둥, 지명이나 인원이 훨씬 적고 쌩뚱맞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아니다, 동학측 기록인 《천도교 창건사》에도 “일본인 다케다 한지(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2차 봉기 이후, 대원군 등에 의해 성격이 청과 (전략적으로) 손잡고 일본과 싸운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FAIL.
  24. 사실 처음에는 부정 수준이 아니라 남접군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띄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25. 사실 남접의 중심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다. 허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
  26. 이 때 일본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과 스나이더 등을 썼다.
  27. 일단 개인화기의 수준 차이, 보유 수량 차이도 컸지만, 일본군에게는 야포개틀링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안다면 동학농민군의 운명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28. 우금치 전투 항목이 작성되면 이 링크는 지우거나 옮겨주길 바람.
  29. 이는 당시 법률로 불법인데, 이는 전라 감사의 독단이었다. 애초에 감사에게 죄인 그것도 거물급 국사범을 처형할 권한이 없는데다 당시에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참형이 폐지된 상태였다. 나중에 전봉준 등이 반역자로 찍혔음에도 교형 판결을 받은것도 이때문... 매천 황현은 김개남을 처형한 후 원한이 있던 자들이 그의 내장을 씹어먹고 인육을 제삿상에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전라 감사의 독단으로 인해 일본과 마찰이 생긴다.
  30. 사실 동학군의 목적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가장 흔한 학설은 대원군과 연계되어서 대원군 복위와 국왕 교체(고종의 큰 형의 아들인 이준용 등극하고 고종을 상왕 옹립)를 노렸다는 것이고, 그 외에 고종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주장이 뭐냐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것. 이 시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고종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재봉기 시 고종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봉기가 미뤄졌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군에게 궐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목적은 당연히 고종을 보위한다…가 아니라 자신의 재집권. 그 과정에서 이재면의 즉위도 실제로 대원군이 수차례 시행한 일이므로 자연스럽게 확률이 높아진다. 전봉준-대원군-고종을 묶는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대원군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고종과 동학을 모두 이용한 천하의 개쌍놈이 된다.
  31. 바로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수형 집행 사례였다. 교수형은 갑신정변의 주축이었던 서광범이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주장한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보다 경각심을 주고 더 인도적인 대우를 하기 위해서였다. 손화중 등 체포된 농민군의 주요 인사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
  32.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이 먼저 김구측에 접근하여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청하고 후에 동학이 몰락하자 김구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잘 대우했다고 한다.
  33. 이 개혁안은 오지영이 1940년대 쓴 《동학사》에만 등장하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 소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오지영의 ‘소설’이란 표현은 겸양의 표현일 뿐 픽션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반박이 있다.
  34. 위에서 보듯이 뉴라이트 계열도 동학농민운동의 반봉건성을 평가절하하고 복벽 계열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극과 극은 통한다.
  3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