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멜리에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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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s Méliès, 본명은 마리-조르주 장 멜리에스(Marie-Georges-Jean Méliès). 프랑스의 위대한 영화 감독, 제작자이며 1861년 12월 8일 태어나 1938년 1월 21일 향년 76세로 사망했다.

영상이라는 매체를 창작과 예술의 영역으로 발전시켜 영화라는 매체로 만든 인물, 그 외에도 각종 영화기법과 특수효과를 창작해낸 천재 예술가이다. 실로 창의력이 대단하다.

2 영화에 손을 대기 이전

본래 연극마술을 병행하며 자신의 극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마술사를 하기 위해선 필수 조건인 손재주가 훌륭해 마술에 쓰이는 기계 장치를 손수 만들었고 이 외에도 부업으로 장난감 등도 만들었다.

3 영화 제작

조르주 멜리에스는 마술을 하면서도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 토머스 에디슨딕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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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즐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라프로 만든 영화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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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자 영사기를 구입하고 영화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사기를 이리저리 굴려보고 자신 나름대로 개조를 하며 이 취미 활동에 점점 열을 올린다.

그러던 어느 날, 카메라로 길거리를 촬영하다가 한 차량이 등장하는 타이밍에 실수로 카메라가 멈춰 버렸고, 그 차량은 카메라를 다시 작동시키기 이전에 떠나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차량이 등장하고, 이 필름을 돌려보던 멜리에스는 필름에 마치 순식간에 서 있는 차량이 바뀐 것 같은 영상이 담긴 것을 보고 영화에 편집이 가능함을 인식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필름을 돌리며 열심히 영사하다가 실수로 필름이 엉켜버리는 사고가 일어난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그 겹쳐버린 필름을 보자 이미지가 겹쳐보이는 것을 보았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곧장 그 필름을 영사해보았고 결과는 두 필름이 서로 겹쳐 보였던 것이다. 이때서부터 조르주 멜리에스는 필름을 이용한 편집이 가능함을 깨닫고 수만가지 편집기술을 창작해내곤 했다.어느 것이 진짜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멜리에스 이전까지는 뤼미에르 형제를 비롯해 그냥 일상의 풍경을 담고 그것을 신기해 하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게 영화의 전부였다. 최초의 영화인 《열차의 도착》을 보면 그냥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찍은 게 전부다. 그것만 보여줘도 관객들은 신기해하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열차에 질겁을 하며 몸을 피하는 등 신기해 했다. 영화란 건 단순히 사진이 움직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 참고로 영상도 1분 남짓한 분량이었다. 초창기의 영화가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란 명칭으로 불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멜리에스는 영화에 편집이 가능함을 알아내었고, 픽션을 도입한다. 다재다능한 기술자이자 예술적 기질도 충분했던 그는 세트를 세우고 미니어처를 도입해 촬영을 하고, 필름을 자르고 이어붙여 최초의 '편집'을 하고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을 도입하는 등 현재 영화에 쓰이는 수많은 기술과 개념을 고안한다. 그가 세운 촬영소는 현재 영화의 '스튜디오' 개념이다.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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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형제가 기술적 개념으로 영상를 최초로 발명했다면, 조르주 멜리에스는 현재 창작물과 예술로서의 영화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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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작 《The Indian Rubber Head]》

멜리에스는 최초로 영상에 합성을 시도한 감독이기도 하다. 매트 기법을 사용한 이중노출로 현재 봐도 전혀 손색없는 합성을 가능케 했다. 멜리에스가 고안한 매트 기법은 디지털 크로마키 까지 이어지는 영상 합성의 기본이 된다.

최초의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유명했던 고딕 호러 장르를 채택해 1896년에 《악마의 성》이라는 영화를 감독했다. 멜리에스 자신은 이 영화에서 악마를 연기한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무려 530편이나 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1902년에 제작된 《달 세계 여행》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최초의 SF 등 수 많은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달 세계 여행》은 미국으로 수출되어 에디슨 스튜디오 소속의 에드윈 S. 포터라는 감독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에드윈 S. 포터가 영감을 받아 에디슨 스튜디오 자료들을 짜집기해서 만든 《미국 소방관의 하루》는 미국 최초의 극영화라고 기록된다.

4 말년

하지만 말년은 불행했다. 1920년대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도 멜리에스의 기술을 다 흡수한 상태였으며, 멜리에스가 환상적인 영화들을 만들어냈지만 관객들은 좀더 사실주의적인 영화들을 요구했고 조르주 멜리에의 영화의 인기를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멜리에스는 특유의 장인적 고집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때에는 고집을 잘못 부렸다. 게다가 돈 관리를 잘 하지 못했던 조르주 멜리에스는 거액의 돈이 들어오자 관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또한 멜리에스는 프랑스 대형영화사인 파테 영화사 [1]와 저작권 문제로 패소하여 만들던 영화들을 헐값에 넘기고[2] 이후로 만든 영화들이 망하면서 결국 파산하여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아내와 같이 작은(사탕 및 장난감을 파는) 구멍가게를 하면서 겨우 벌어먹으면서 잊혀 갔다가, 그의 팬인 레옹 드뤼오라는 프랑스 영화잡지 편집장이 알아보고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다.

드뤼오의 회고록을 보면, 역가에 있는 작고 초라한 가게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며 졸던 노인 얼굴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찾아가서 "멜리에스 씨죠?" 질문하자 눈을 뜨던 멜리에스는 "나 같은 노인을 아는 댁은 장난감이라도 사러 오셨소?"라고 말했는데 "아닙니다... 당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잡지 편집장입니다." 말하자 멜리에스는 그의 두 손을 잡고 울었단다... "이제서야… 이제서야 오셨구려!"

1929년 12월. 이미 70대에 이른 몸이며 아내를 잃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멜리에스는 모처럼 만에 프랑스 영화인들이 주선하는 명예인사 기념 잔치에 나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재평가되면서 이 영화 달세계 여행이라든지 몇몇 영화들 필름이 보존되어 남게 된다.

이 일화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휴고》를 통해 각색된다.

5 여담

  • 라이어 소프트스팀펑크 시리즈 외전 《울타르고: 달 세계의 문》의 주인공으로 《기술쌍왕》뤼미에르 형제에게서 발명과 기술을 배운 기술사로 전각동영상 작가로서 옛날 이야기 같은 무성 영화를 만들고 있다. 본편에선「달세계에」라는 전언을 남기고 사라진 미셸 알댄을 쫓아 달에 가는 일을 결의한다. 그 후 바론 뮌히하우젠이 흥미를 가져 접촉하고, 결사의 협력을 얻어 1900년 8월에 달로 향하고 그 이후의 소식은 불명이다.
  1. 아직도 있는 회사이며 지금은 레아 세두의 할아버지 제롬 세두가 운영하고 있다.
  2. 필름들은 폐기되어 신발 재료가 되어 이제 세상에 없다고 한다... 그가 만든 영화필름들 90%가 이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