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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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미군정시기 서울특별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에서 위조지폐를 제작한 사건이다. 사건 당시 재판 절차를 거쳐 매듭을 지었지만 과정상의 의혹으로 인해 그 이후로도 이 사건은 미군정에 의한 조작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 조작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자료 및 서적들을 참고하시라. 다만 어디까지나 '설'이다.

2 사건의 배경

일본인 건물이던 근택빌딩 1층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가 입주해 있었다. '적산관리법'에 따라 미군정으로부터 건물과 함께 인쇄소까지 불하받은 공산당은 인쇄소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고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이때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일해온 이들을 그대로 재고용했다.

문제는 일제 때부터 지폐 인쇄에 종사해오던 직원인 '김창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김창선은 1945년 9월 일본 기술자들이 철수할 때 백원권 징크판 2개 조를 빼돌렸다. 징크판은 지폐원판을 이용해 아연판을 눌러놓은 인쇄용 원판으로, 흑색 청색 적색의 세 가지 색상으로 구성되니 모두 6장을 빼돌린 것이었다. 김창선은 빼돌린 징크판의 일부를 10월 중순 양승구라는 인물에게 팔아넘겼다.

3 사건 발단

양승구라는 인물은 우익단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뚝섬위원회 조직부장인 이원재의 이모부였다. 이원재와 양승구는 여러 대의 소형 인쇄기를 구입해 자신의 독촉사무실에서 지폐를 인쇄하려 시도했으나 장비와 기술이 부족해 거듭 실패해버렸다. 이에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보려고 상대를 물색하던 중 중부경찰서에 적발되고 말았다.

이때가 벌써 1946년 5월로, 당시 조선공산당은 근택빌딩에 입주해 있었고, 인쇄소 직원들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후 공산당에 가입해 있었던 무렵이었다. 관련자들을 체포한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징크판이 조선정판사 기술과장인 김창선에서 나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보고를 받은 미군정은 정판사 직원 전체를 연행하도록 지시했다.

4 당시 경찰의 발표

'1945년 10월 중순 근택빌딩 2층 조선공산당 사무실에서 이관술[1], 권오직[2]이 김창선에게 위조지폐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김창선은 6차례에 걸쳐 9백만원을 인쇄해 이관술에게 제공했는데 아무 보답이 없자 분하게 여기고 징크판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가 발각되었다'라는 것이 당시 군정경찰의 발표였다.

여기서 이관술을 엮어 넣은 것은 이관술이 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이라는 명분이었지만, 이관술은 사람들 사이에서 부당수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남한의 공산화를 도모하던 박헌영에게는 제2인자를 잃은 타격이 되었다.

5 재판 과정

담당 검사는 민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조재천이었다.

연행된 14명의 정판사 직원들은 처음에는 위조지폐를 찍은 일이 절대 없다고 부인했으나 수사 며칠만에 김창선의 진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당사자들의 진실인지, 격한 심문에 따른 허위 진술이었을련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공산당은 이를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 주장했고 그 근거로 담당관들의 처사가 일제 시절 못지 않게 잔혹했음을 들기도 한다.

아무튼 공산당은 고문으로 조작된 누명이라는 성명을 내고 전면적인 항의투쟁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이 사건이 '조선 공산당과는 관계가 없는 경제사건'이라 발표하기도 하고 '한국인 경찰의 조작일 경우는 크게 엄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이러한 수사 결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인 이관술과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이 주범으로 지목되었고 정판사 사장 박낙종[3], 서무과장 송언필이 이들의 지시 하에 위조 지폐를 인쇄해 유통시킨 것으로 조사되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권오직은 북한으로 도주했지만 국내에 잔류중인 이관술에 대해서는 수배에 들어갔다.

6 후폭풍

이 사건을 기화로 당시 우익적 스탠스를 취하던 단체들은 '공산당이 위조지폐 찍었다'는 확신 하에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5월 12일, 서울운동장[4]에서 '독립전취 국민대회'를 마친 우익청년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민전[5]산하 각 단체와 언론부를 공격하기도 했고, 자유신문(해방정국 좌익 계열 신문사)사에 침입해 기계, 의류, 종이를 가져가고 가옥을 파괴하기도 했다. 경성자동차서비스회사에 침입해 도끼로 사람을 상해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서울 시내는 혼란에 휩싸였다. 다만 이러한 와중에도 경찰은 딱히 치안 회복에 힘을 쓰지 않았다.

재판 이후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선판 히틀러 테러'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조선인민보(좌익계열 신문)에 '공산당은 방화라든가 지폐 위조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식입니다. 왜나하면 공산당은 인민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민대중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 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주하 등 공산당 필진들도 억울한 누명임을 강조하는 주장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5월 18일. 미군 대위의 인솔 아래 수백명의 미군장교와 헌병들이 근택빌딩을 포위한 후 공산당 중앙당 사무실과 '해방일보'를 샅샅이 수색해 공산당 관련 서류 일체를 압수해갔다. 미군정 적산관리과는 조선공산당으로부터 근택빌딩을 회수, 공산당은 5월 30일 남대문 앞 일화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경찰에 의해 위폐 사건 주범으로 지목되어 전국에 수배되었던 이관술은 두달 만인 7월 6일, 충신동에서 체포되었다. 이관술은 변론 과정에서 "체포되기 전부터 자신이 운영하던 책방인 '해방서점'에 주기적으로 나타나 장부를 점검했고 체포되던 날도 낮에 서점에서 몇 권의 책을 들고 집에 돌아갔다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하게 한 주범이 이처럼 반공개적으로 돌아다녔는데 용의점이 있느냐"며 항변했다. 체포된 그는 한달간 계속된 심문 기간 중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이는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들은 검사의 논고를 상세히 보도하는 반면 좌익 공산당의 반론에 대해 서는 축소 또는 반박 기사를 내보냈다. 이렇게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의혹은 점차 기정사실화에 들어갔고,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수감된 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대전 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7 의혹

공산당 측은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김창선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고 김창선이 양승구에게 인쇄소를 양도할 당시까지 아직 공산당이 근택빌딩에 입주하기 전이었다고 한다. 당시 건물을 조선공산당 중앙당은 이미 불하받긴 했으나 여러 달이 지난 1946년 1월부터 비어 있던 2층에 입주해 업무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이관술과는 무관하다. 공산당은 처음 입주 직후 정판사 직원들이 체포되었을 때만해도 김창선 개인의 부정이라 생각했다고 하며, 사건을 지휘한 경찰청장 장택상이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위폐사건에 대해 자신은 결정권이 없으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밝힌 것을 들어 간접적으로 이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입증한 것이라 주장했다.

또 해방된 지 불과 2개월밖에 안 된 그 시기에는 공산당의 위세가 대단해서 화신백화점 박흥식 등 여러 재벌들이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이관술을 찾아올 때고 일본 화폐가 남한 공산당에 대량으로 유입되던 시기였는데 뭐가 아쉬워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찍었겠느냐는 반론도 폈다.

또한 당시 재판부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산당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만 완고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예로 '사도법관'이라 불리던 검사 김홍섭이 재판 도중 사표를 제출했고 미군정 법무관 중 일부는 이 사건이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무시되었음을 들기도 한다.

김규식은 수도경찰서장 장택상의 경질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러치는 장택상을 경질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장택상은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진실을 폭로할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소련군정문서 자료가 나왔다.(...)

8 이 사건의 여파

이 사건은 남한 내에서 매우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근거로 1946년 7월에 실시된 '조선여론협회'가 서울시민 6671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대통령감으로는 이승만이 29%(1916명)로 압도했고, 김구(702명), 김규식(694명), 여운형(689명)이 10% 선을 유지한 반면, 박헌영은 1%(84명)밖에 얻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여론조사에 응한 6671명 가운데 '잘 모르겠다'고 택한 응답자가 2476명(37%)라는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 쉬쉬하고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후 박헌영은 무력이 아니고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이내 월북하여 수년 후 한국전쟁의 비극을 야기하는 장본인 중 하나가 되었다.

사건 이 후로 '정판사'는 당시에 우파 노선을 걷던 천주교회에 불하 되어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되었다. 해방일보는 무기한 정간으로 사실상 폐간 조치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미 군정의 태도가 싹 바뀌어 남한에서의 남조선로동당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46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박헌영은 더이상 남한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위 피고인들 정신감정 및 인쇄판에 대한 기술 자문으로 의학은 백인제 박사가 인쇄판은 안과 치료를 받으려 온 이극로 주장에 공감하여, 만들게 된 한글타자기로 유명한 공병우 박사가 참여했다. 장기려 박사 평전에서는 이것이 백인제박사가 괘심죄에 걸려, 납북되는 결정타였다는 목록이 나오는데, 반대로 공병우박사는 역시 억류 되었으나, 납북되지 않고 도주하는데 성공. 후에 대한민국 해군에서 한글타자기를 납품. 정부 문서화가 발달하는데, 일익이 된다.

바로 위 대구 10.1 항쟁과 연관한다면, 안창호 계열이 여러모로 꼬이고, 비극이 지속되었다.

9 매체

워낙 불투명하고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는 사건이라서 그렇게 극화되는 편은 아니다. 애초에 해방 전후사가 제대로 극화되기에는 여러 카더라 통신도 난무하고 확실한 사료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9.1 북의 시인에서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일본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북의 시인"(번역본- 북의 시인 임화)에서는 위에 언급된 말대로 미군정의 공작설을 강하게 암시한다. 작가가 일본의 검은 안개 시리즈를 쓴 경력을 본다면 상상할만한 전개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임화의 에이전트설을 암시하는 주제로 이어령에게 제대로 까였다. 일명 마쓰모토 정신병자설(…).

9.2 이병주의 정판사

이병주의 산하에서는 정판사에서 취객이랑 싸움붙은 주인공이 우연찮게 위폐 뭉치를 발견하는 걸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MBC에서 이영후 주연으로 방영된바 있다. 이영후의 부인이 김자옥, 오오 인생의 승리자

9.3 드라마, 새벽에서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1985년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서는 사건 전말을 음험한 처삼촌 공산당들의 모략으로 못 박고 있다. 공산당이었다가 나중에 전향하고 후회하면서 죽는 캐릭터 김기섭이 정판사 위폐를 받아서 흥청망청 쓰는 장면이 버젓히 나온다. 이런 묘사에도 '좌익을 은근히 미화한다'라는 지적을 받으며 드라마가 산으로 가다가 후속작 없이 조기종영되었다.

9.4 야인시대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야인시대의 중요 사건/사고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중앙극장 습격 사건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황금마차 습격사건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충정로 도끼 사건고대생 습격 사건국회 오물 투척사건


2003년 SBS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패에게 국군준비대가 개발살나고, 신불출은 다리가 박살, 심영중앙극장에서 습격을 당해 고자가 되어 월북한 영향으로 공산당의 세가 약해지자 박헌영이 남한의 경제를 붕괴시키고 조선청년전위대의 자금을 확보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찍어낸 걸로 나온다. 물론 당연히 들통나고 그걸 계기로 전위대의 규모가 더욱 더 축소되어 망했어요.

9.5 서울1945에서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2006년 KBS 1TV 서울1945에서는 주인공 최운혁의 스승이자 공산주의자인 문동기가 일으킨 사건으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문동기박헌영이 속해 있는 남로당 소속의 가상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9.6 웹툰, 인천상륙작전에서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2013년. 인천상륙작전(웹툰)에선 이 사건에 유죄판결이 근거가 없으며 자백은 고문에 따른 것으로 나와있다. 링크 공산당이 위폐를 만들었다고 자백한 것이 고문 이후라는 점을 다룬 창작 매체 중 영상매체로는 이게 최초이다.
  1.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에 이은 2인자
  2.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주필
  3. 이 사람이 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인 박지원 의원의 조부라는 소문이 유포되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여러차례 소송 등 어그로를 끈 바 있는 우익논객 지만원도 잘못이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다.# 박낙종은 경남 사천 출신이고, 박지원 의원의 조부는 전남 진도 출신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4. 동대문 운동장
  5. 민주주의민족전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