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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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世竹.

1901년 6월 2일 - 1953년. 대한제국일제강점기, 소련 등에서 활동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함흥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났다. 함흥의 영생여학교[1]를 2년 다니다가 경성부로 유학하였다. 3.1 운동에 참여했고 1921년 상하이로 유학을 갔다. 유학 코스만 봐도 당시에 상당히 유복한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하이에는 피아노를 공부하러 갔는데 박헌영김단야를 현지에서 만났다. 1922년에 유학을 마치고 경성부로 돌아왔다.

1925년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헌영과 결혼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고 1926년에 6.10 만세 운동[2] 참가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27년엔 김활란 등이 참여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참가하는 등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활동에도 관심을 지녔다. 1928년엔 만삭으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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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남편 박헌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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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남편 박헌영과 딸 비비안나와 찍은 사진. 주세죽은 그 이후 줄곧 소련에서 지내다가 코민테른의 지시로 1932년 상하이로 갔다. 1933년에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죽었단 소문이 돌았고, 다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김단야는 아내 고명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였고 아내가 죽었다고 판단했다. 단 1929년부터 주세죽과 김단야가 불륜 관계였단 소문도 있고 김단야가 박헌영이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가들 사이엔 이 추문을 두고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박헌영은 넘어갔다. 박헌영은 1939년에 출옥하였는데 상당히 괴로웠던 모양으로,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묻자 죽었다고 답했다고.

1937년엔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대숙청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체포되었고 193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 5년간 복역하였다. 유형 생활 중 김단야와 낳은 아들 김비탈리가 사망하였고 카자흐스탄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광복을 맞았다. 주세죽은 전남편이었던 박헌영이 북한에서 고위 관료가 되었다는 걸 알자 스탈린에게 귀국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946년 7월에 박헌영은 소련을 방문하여 딸 박비비안나를 만났다.

1953년에 딸 비비안나가 있는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가 사망하였다.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

1989년에 소련에서 정식으로 복권되었다.

참여정부 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3] 2007년 대한민국에서 복권되고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다만 일제강점기하 사회주의 계열 활동가들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에 대해서 보수우익 계열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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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인 박 비비안나(1928-2013). 주세죽의 묘비 앞이다.

딸인 박 비비안나는 무용수로 활동했고 1928년 태어나 2013년에 사망하였다. 소련국립민속무용학과 교수로 일했고, 러시아인 화가인 빅토르 마르코프와 결혼하였다. 1991년에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헌영의 고향인 충청남도의 흙을 갖고 러시아로 가 어머니의 묘비에 매장하였다.
  1. 개신교 계통의 사립학교로 1903년에 창학하였다. 자매품(?)으로 남학교인 영생중학교도 있었다. 북한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가 1990년 수원시영생고등학교란 이름으로 교명을 이어 받았다.
  2. 1987년의 6월 항쟁과는 무관하다. 순종 승하 당시에 열린 만세 운동이었다.
  3. 2005년 여운형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