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

1 18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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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세 때 그려진 초상화. 그림 설명. 역시 리즈 시절은 뭔가 다르다 허리가 말도 안 되게 가는 건 코르셋 때문이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답게 턱이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와있다. 저 턱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시집간 마리 루이즈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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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야속해 너도 애 열여섯 낳아봐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 (재위 1740~1780)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령의 상속자로 실질적인 여제[1]. 카를 6세의 장녀이자 프란츠 1세의 황후,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어딘가의 용족

"역사 속에서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게 된 군주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나의 백성들은 내 첫 아이들입니다."

1.1 즉위 전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엘리자베트[2] 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럽 최고 왕가의 빼어난 미모를 가진 황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카를 6세는 일찍이 즉위초에 딸도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국사조칙[3]을 내렸고 주변 국가들도 이를 승인했다. 이후 태어난 외아들이자 장남이 일찍 죽은 데다 딸만 내리 셋 낳는 바람에 장녀 마리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인이 된다.

1.1.1 결혼

처음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상대자로 거론된 사람 중 한 명은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4]였고, 오스트리아의 국보급 장군 사부아 공자 외젠의 강력추천으로 프로이센 왕세자, 나중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그 프리드리히도 배필로 고려되었다. 그러나 이 혼담은 진지하게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나이만 잘 맞는 상대였을 뿐, 종교의 차이로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했다.[5] 진짜로 두 집안이 하나가 됐다면 다른 나라들에게는 재앙이 됐을 것이다ㅎㄷㄷㄷ;;;[6]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1723년 빈에 유학온 프랑수아 에티엥 드 로렌[7]과 사랑에 빠졌는데, 자기 전에 꿈에서 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시녀들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당시 영국 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카를 6세도 로렌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혈연이 있는 데다[8] 양가의 인연과 인품이나 지성이 쓸 만하다고 여긴 프랑수아를 마음에 들어했고 로렌을 둘러싼 이해관계[9]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애가 맞물리면서 당시로선 보기 드문 (100%는 아니지만) 연애결혼을 했다.[10] 단, 둘째 딸과 프란츠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로렌의 샤를)와 겹사돈 맺는 것은 반대했다. 이 둘은 카를 6세가 죽고 나서야 결혼한다.

로렌의 프랑수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인 로렌(로트링겐)을 포기해야 했는데, 그의 어머니[11]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 고향을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 로렌을 루이 15세의 장인에게 바치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을 받는다는 조건의 서류를 보자 죄책감과 미련, 양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주저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여러 번 펜대를 던졌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때마다 공손하게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던진 펜을 계속 주워다 바쳤고 결국 서명을 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다.

1.2 즉위 후

1.2.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카를 6세가 죽자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수장 지위와 상속령과 여러 나라의 작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인이긴 해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 했었고 그에 따라 계승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주에게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 한 것.[12]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13]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슐레지엔은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 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10살이나 연상인 데다 어려서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정세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기 어렵다 보고 아내를 설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할라 치면 에헤헴~~ 드립으로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나가리…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고 한다. 결과를 보면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똑똑하고 재능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후계자로서의 교육이 부족했으며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 크리로 견문이 짦았던 데다 나이가 젊어(23세) 생긴 일이다.[14]

1741년 3월 13일 넷째이자 첫 아들인 요제프가 태어났고, 6월 25일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넷째 이전에 낳은 세 아이가 모두 딸이라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 시기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적으로 돌아선 상태에 보헤미아는 배신을 때려 카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마저 동요하며 이탈할 움직임이라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기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로 달려가 의회 연설에서 장자 요제프를 선보이며 군자금과 병력을 얻어냈다.[15]

그러나 전쟁 준비가 부족한 데다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에는 빈 코 앞까지 당도해 상황이 급박해졌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해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 적을 하나 줄이고, 한 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합스부르크의 뒤통수를 쳐서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간 사이,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바보 아니야, 이거 바이에른은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하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 7세가 사망하고 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적국 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을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영국과 손 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1.2.2 동맹의 역전

해당 문서 참조

1.2.3 7년 전쟁

즉위초와 달리 통치 경험이 원숙해진 데다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공고해졌기에 왕위 계승 전쟁 때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주도하게 되는데, 십여 년간 내정 개혁과 군제 개혁을 실시하면서 카우니츠[16]를 등용해 프랑스에게 접근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의 실세인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동맹을 유도했고, 개인적으로 프로이센 까에 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하는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협력해 프로이센 공격을 감행한다. 초반에는 그 동안 힘을 쌓은 보람도 없이 또 프로이센 군대에 털리면서 프라하까지 밀렸지만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이었고[17] 너무 깊숙이 쳐들어오다가 보급대가 습격당하면서 자국으로 철수 위기를 넘긴다.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길 만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기는 잡지 못 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면서[18]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독일 홀슈타인 지방 출신의 중증 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19]

그 결과 러시아는 전쟁에서 빠지고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털려서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앉았는데, 이전 재정 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7년 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 수입인 2억 6천만 굴덴을 쏟아부었고,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 해인 1763년에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 3배(7000만 굴덴)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0]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2.4 통치

7년 전쟁이 끝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내정 개혁을 실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이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 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서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델로 여겨졌다.[21]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다.[22]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고, 여성은 밤길을 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리고 이를 어기는 자에게는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해 감화원을 설치해 이들을 격리수용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에게 예의를 표하라고 지시해야 했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예카테리나 2세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프로이센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 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여제는 우려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에 대해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모두 철저하게 취했다고 비꼬았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로는 그다지 시원찮았다. 오스트리아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로스바흐에서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패퇴하고 일찍 독일 전역에서 이탈하자 슐레지엔을 빼앗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를 할양한다는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1777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때 또 한 번 프로이센과 충돌했을 때 프랑스는 파병을 거부했다. 안습

마리아 테레지아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여왕(1741~1780), 보헤미아 여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 등등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리킬 때는 공식 칭호와 상관 없이 '여제'라 불린다.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실권 대부분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갖고 있어서 사실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통치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23]

공동 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는 여러 관계 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24]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은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라는 지위를 주었지만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인 것. 남편은 알아서 재정 분야를 제외하곤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고, 아들 요제프의 팽창 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 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으며 군제 개혁과 교육 정책에는 모자의 뜻이 일치했다.[25] 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 개혁이나 종교 정책에서는 진짜 주인의 권한으로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1.3 평가

지성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운이 없는 군주

같은 시대의 먼치킨에 운빨까지 좋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처럼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 반면, 7년 전쟁은 질 수 없는 싸움[26]을 운빨로 날려먹었다. 여러 개혁 조치를 시행했지만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 보고 보수 정책으로 회귀하게 된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한계도 있었다. 뛰어난 능력과 달리 즉위 초반의 거의 2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임신-출산 크리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27] 직접 전쟁에 참가해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에 맞서기에는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해 타고난 의지력과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낸 것은 분명한 업적이다. 덤으로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되찾아왔으며,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냈다. 게다가 후계자(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들마저 잘 키워냈으니 능력 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를 통틀어 합스부르크 최강 완벽초인카를 5세 정도를 제외하면 마리아 테레지아만큼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군주는 없었다.[28]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들에게 진정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 느슨한 동군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겪으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다. 살아 생전 이미 '국모'[29]로 불릴 정도였고, 그의 사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 정책 방향은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을 고수하며 오랜 안정을 유지했으며 후계자과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1.4 사생활

1.4.1 성격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상당한 다혈질에 자존심도 셌다. 30대까지는 빼어난 미모와 달변을 자랑했고 밤새 춤추고 노는 것을 즐겼다. 레알 핫 걸이었던 공주님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서도 내가 임신중만 아니었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성격이었다. 허례허식을 혐오해 궁정의 경직된 예법을 혁파했으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위의 각종 도덕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도 이 때문.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4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래서 점점 살이 쪘고, 평생 처녀 시절의 날씬한 몸매로 돌아가지 못 했다.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

1.4.2 가정

남편복과 자식복이 많았다. 거의 20년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아이를 낳아서 다른 유럽 왕가들이 부러워했다고.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아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30]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아내의 비위를 잘 맞추어주는 등 데릴사위 주제 파악을 잘 했고, 여러 대에 걸친 근친혼으로 구성원들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시 번성시키는 훌륭한 씨내리(?) 역할도 매우 잘 해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는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바람핀 건 빼고

남편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 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마누라에게 알아서 설설 기었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 생활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유일한 동생[31]인 마리아 안나는 전술한 대로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로렌(로트링겐)의 샤를(카를)과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렌 가문과 너무 단단히 맺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바람에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의 여파로 일찍 사망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렌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시동생 카를은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전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벨기에 총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코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군 지휘를 맡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맨날 깨졌다. 7년 전쟁 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 번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일 때 또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시동생에다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자신이나 남편의 체면상 자르지도 못 했고, 결국 전쟁에 지는 데 한 몫 했다. 아님 이길 때까지 함 써보자는 고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워낙에 먼치킨이라서 카를(샤를)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 총 16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나 이 중 5명은 요절하고 11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의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랄 만한 생존률을 보여준 셈.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아이들에 대한 기대는 지나치게 크면서도 칭찬에 인색했다. 그리고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아서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고,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는 못을 박기에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전혀 관계 없는 삶을 살았던 데다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딸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아서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시집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위와 같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16세에게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런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 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신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이때 남편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4.3 자녀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자식들은 다음과 같다.

  •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요한나 (1738~1789)
차녀지만 장녀가 3살 때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첫째 아이로 취급받았다. 아들을 기대했지만 딸로 태어나 마리아 테레지아를 실망시킨 불쌍한 딸. 뒤이어 동생 요제프가 태어나면서 거의 묻히다시피 했다. 19세 때 늑막염을 앓고 등도 굽어 결혼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자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 했다. 병약하나 매우 총명하고 성실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 했고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만이 이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동생인 요제프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요제프의 아내인 이사벨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프란츠 슈테판이 사망한 후 1766년 프라하의 황실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가 1771년 은퇴하고 클라겐푸르트로 이주해 그곳에 궁을 지어 죽을 때까지 거주하며 자선과 연구활동을 했다. 특히 과학 전반, 화학 실험, 고고학 등의 연구를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 또한 학문에 열중했는데, 이는 당대의 귀족 여성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따뜻했다. 차도남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 아들. 프란츠 1세 사망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1742~1798)
4녀. 통칭 미미로, 태어난 날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라 모녀가 늘 함께 축하받았다. 아름답고 총명하고 그림 실력도 뛰어난 데다 성격도 어머니와 많이 닮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애가 유별났고, 어머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걸 믿고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느라 어머니에게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잔소리를 해대서 그들과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더욱이 크리스티나는 자식들 중 유일하게 연애결혼을 허락받았고, 그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지만 결혼하면서 막대한 지참금에 남편이 테셴의 공작으로 임명되는 특권을 받은 데다 락센부르크의 대저택[32]까지 하사받았기에 자매들이 특히 미워했다. 프레스부르크에 있으면서 평생 어머니의 곁을 지켰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에는 형제들의 냉대와 경멸을 참아내야 했다.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크리스티나를 가리켜 "어머니의 얼굴을 제일 많이 봤다"며 불평했을 정도.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에 편히 있을 수 있었다지만 자식복은 없었다. 하나 둔 딸은 일찍 죽었고 그 후 다시 아이를 갖지 못 해 양자를 들여야 했다.
  • 마리아 엘리자베트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3~1808)
5녀. 애칭은 리슬.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 제일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으로 거만하고 경박했지만 크리스티나 못지 않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았으며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좋았던 거의 유일한 형제. 2녀 안나의 건강이 나빠진 게 엘리자베트의 탓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크리스티나와 짜고 큰언니 안나를 따돌리고 어머니와 안나 사이를 이간질했다. 덕분에 안나와 사이가 좋았던 아말리아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결혼과 수도원행으로 헤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1767년 궁정에 천연두가 퍼졌고 엘리자베트 역시 천연두에 감염됐다. 회복은 됐으나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려 다른 왕실과의 혼담이 영영 깨지고 말았다. 결국 수녀가 됐으며 나중에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 카를 요제프 에마누엘 요한 네포무크 안톤 프로콥 (1745–1761)
차남.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가 가장 총애하던 자식이었다. 형인 요제프가 조용하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과 달리 외향적인 성격이었다 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지성을 잘 물려받았다고 생각해 자식들 중 편애해서 장남인 요제프와 라이벌이 됐고 사이도 약간 불편했다고 한다. 형인 요제프가 당연히 그를 경계했고, 자신도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고. 그러나 16세 때 천연두에 감염되어 요절했다.
  •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46~1804)
6녀. 예쁘고 재능도 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준에는 못 미쳤는지 차녀 안나와 함께 찬밥 취급받았던 공주. 크리스티나에 비해 애교가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항상 아말리아를 크리스티나와 비교했기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서 크리스티나를 매우 증오하게 되었다. 게다가 연인이 있었음에도 파르마의 페르디난트와의 정략결혼으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고, 그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어머니를 평생 미워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반기를 들고 꾸준히 외도를 저질렀으며 더 나아가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이익이 되는 길과는 반대로 갔다.
3남. 전근대 이전 시대에는 장남은 대를 이을 후계자이고,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차남까지는 '보험용'으로 관심을 받지만 그 이하의 아들들은 그러기 힘들었는데, 레오폴트도 3남인 탓에 성장기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 했다. 장남 요제프는 어머니의 작위를, 차남 카를은 아버지의 영지 토스카나를 물려받고, 레오폴트는 밀라노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둘째 형이 일찍 죽고 1765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고, 1790년 형 요제프 2세가 죽은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 레오폴트 2세가 된다.
  • 마리아 요제파 가브리엘라 요한나 안토니아 안나
9녀. 예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형제들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767년 빈에 천연두가 돌았고[33]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납골당에서 기도를 하고 왔으나 그 직후 마리아 요제파는 천연두에 걸렸고, 결국 사망했다.
  •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자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752~1814)
10녀. 마리 앙투아네트 바로 위의 언니. 활달하고 강한 성격으로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이름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언니 카롤리나의 이름에서 땄고, 나중에 마리 테레즈가 마리아 테레지아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모를 가장 사랑하셨어요"라고 언급했을 정도. 그리고 이 사람이 원래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프랑스 왕세자와 혼담이 예정되어있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 요제파가 결혼했어야 할 나폴리 왕세자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바로 위의 언니가 죽어서 결혼 순서가 한 줄씩 당겨진 것. 요제파 대신 나폴리로 시집가서는 많은 자식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을 때까지 나폴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즈리로 가기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대의 외교 표준 언어이자 전 유럽 궁중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는데[34]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로는 평생 프랑스인들을 증오해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 의해 나폴리 왕국을 빼앗긴 데다 자신의 딸이 원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의 아들 루이 필리프[35]와 연애결혼하는 걸 보아야 했다. 마리아 아말리아와 달리 딸을 프란츠 1세의 황후로 시집 보내거나 레오폴트의 딸을 며느리로 들였다.
  •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요제프 요한 스타니슬라스 (1754~1806)
4남. 모데나 공작. 이쪽은 아버지처럼 모데나 공작령의 상속녀에게 데릴사위로 팔려(?)간다. 실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일찌감치 미래의 며느리를 매의 눈으로 노리고 4남의 결혼 상대로 찍어놓고서는 다른 데서 못 채가게 빈의 궁정에서 놔주지 않았다고 한다.
11녀.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다. 원래는 혼담이 없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죽은 후 마리아 카롤리나 대신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야심만만하고 드센 언니들에 비해 유순하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최후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가장 안습한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막시밀리앙 프란츠 그자비에 요제프 요한 안톤. (1756~1801)
5남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아이.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가 된다. 머리가 나쁜 데다 무례하고 자신의 지위(황제의 아들이자 동생이자 선제후)를 지나치게 뽐내는 성격이어서 형제들을 항상 곤란하게 했다고.

2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대공비

1855~1944.

1번 항목이자 흔히들 마리아 테레지아 하면 떠올리는 '여제'와는 동명이인.

아버지는 포르투갈 왕 미겔 1세, 어머니는 아델하이트 왕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동생인 카를 루트비히 대공(1833~1896)과 결혼했다.[36] 남편과 나이 차이가 상당했고(22세 차이), 그의 둘째 부인(마리아 안눈치아타: 1843~1871)의 자식[37]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포함해 넷(3남 1녀)이나 있었음에도 대단히 아껴주었다고 한다.

상당히 개방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양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을 지지했으며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사실상 유일한 황실 인사였다.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한 후 그의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는데, 귀천상혼이란 이유로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에게 연금 지급을 거부하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본인이 받는 연금을 대신 주겠다고 나섰다. 당시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황실내에서는 가장 발언권이 강한 여성[38]이어서 마리아의 행동을 무시하기는 곤란했고, 이 때문에 연금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1. 마리아 테레지아는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제'로 불리는 이유는 아래의 통치 항목을 참고.
  2. 후일 이 가문은 주로 영국이나 프로이센 왕가와 결혼하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6촌 겸 이종조카),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외삼촌 겸 고모부가 프라드리히 대왕)(7촌)과 그의 딸인 조지 4세의 아내 역시 여기 출신이다
  3. 국사조칙은 마리아 테레지아를 책봉하고 나서가 아니라 첫 자식이 태어나기도 전에 공표한 것이다. 1713년에 공표했으므로 1717년 태어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혜를 받았을 뿐, 애초에 딸에게 상속할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으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성하고 나서도 아들 낳기를 포기하지 못 했다. 국사조칙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 6세 항목 참조할 것.
  4.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의 아들로 이 당시에는 앞선 순위로 형이 둘(루이스 1세, 페르난도 6세)이나 있어서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는 아니었다.
  5. 합스부르크 왕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임하는데, 황제는 '가톨릭 교회의 보호자요, 신앙의 수호자'이다. 수십 년 전 30년 전쟁으로 신교도들한테 털린 역사가 있는데 신교도와의 결혼은 상대방이 개종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프로이센 입장에서도 종교 문제 + 왕세자를 데릴사위로 바치는 꼴이기 때문에 잠시 거론만 된 수준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일찍이 사촌인 영국 공주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 가문 출신 여성과 결혼한다.
  6. 농담이 아니다. 만약 두 나라가 종교를 무시하고 혼인을 통해 동맹, 심지어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면 프로이센의 강력한 군대 육성 방식과 개혁적인 내정 시스템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이 될 프리드리히 2세의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오스트리아에 이식되어 덩치만으로도 강력하기 그지없는 오스트리아를 루이 14세 시절의 프랑스는 명함도 못 내밀 강대국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스페인 연합왕국만큼 무서운 게 프로이센-합스부르크 제국이었을 것. 뭐야 이거
  7. 결혼 후의 독일식 이름으로는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이 된다.
  8. 프란츠의 할머니는 카를 6세의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는 8촌. 역시 근친덕후 합스부르크
  9. 로렌 가문은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적당히 지체가 높고 로렌 공국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 영방에 속하면서도 프랑스 왕국 깊숙이 자리잡은 위치에 있었기에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킬 위험이 없었다. 거기에 로렌은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10. 프란츠의 아버지 레오폴트 로렌 공작은 프란츠의 형이 살아있을 때부터 후계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 장가 보내려는 시도를 했다. 사돈인 프랑스 왕실(레오폴트의 배우자는 루이 14세의 조카)에서 경악해서 경고할 정도.
  11. 프란츠의 어머니는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의 딸이다. 완전 프랑스인. 대신 동생 카를 알렉산더는 적극 찬성했다.
  12.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첫 자식이자 유일한 아들 레오폴드가 태어나기 3년 전(당연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취한 조치였다.
  13. 무려 200년 전 문서를 들고 나왔다. 오스트리아는 2~3년 전 카를 6세의 말년(1737~1738)에 치러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이탈리아 전선에서 패배해 나폴리, 시칠리아를 잃었고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해 동남부 영토를 잃었다. 전쟁에서 패했고 거기서 2년밖에 안 지났으니 주변국들이 호구로 보고 뜯어먹을 구석을 찾은 것.
  14. 적국의 프리드리히 2세도 5살 연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왕세자로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처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책을 저질렀다. (1741년의 첫 전투에서 줄행랑치는 병크를 저질렀는데도 군대가 무너지지 않고 부하들이 잘 마무리해주어서 이길 수 있었다.)
  15. 이전까지 헝가리 의회와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크든 작든 반항적인 자세로 일관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과단성에 감복해 여왕에게 3만명의 병력과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정치적으로는 유의미한 사건이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이기도… 한 것은 좋으나 보내준다는 병력은 늦게 와서 별 도움은 안 되었고 실제로는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력으로 막은 거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가 유일할 정도였고, 이 시기를 가리켜 헝가리 귀족들의 황금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16. 시동생 카를의 수하로 벨기에를 잘 다스린 공적으로 재상으로 등용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179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재상을 역임했고, 오스트리아 역사상 유이한 국가재상(슈타츠칸츨러, Staatskanzler) 유이한 국가재상 후임자는 손녀사위이자 빈 회의를 주도한 메테르니히다.
  17. 러시아, 프랑스를 제외하고도 작센, 스웨덴도 동맹을 맺었다. 바이에른은 중립, 스페인은 부르봉 가문이 왕위에 등극한 지 2~ 3세대이던 시절이라 프랑스 2중대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승리해 그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등극한 아우구스트 3세 시절이었는데, 왕위에 오른 과정이 과정인 만큼 당연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측에 붙었고 직접적인 군사행동은 안 했지만 통행로와 주둔지 제공 등으로 러시아군을 서포트. 당대 유럽 국가 대부분이 적이었다. 사방이 적이라는 것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도 서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으로 작센과 오스트리아, 북쪽 스웨덴, 동쪽 러시아로 완전히 둘러싸여있었다.
  18. 국내 인터넷에는 갑자기 사망한 걸로 알려졌는데, 본래 건강이 좋지 않아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기 전인 전쟁 중반부터 오늘내일 했다고 한다.
  19. 어처구니 없게도 표트르 3세 정도는 아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며 후계자 요제프 2세까지도 적국의 원쑤 프리드리히 2세 빠가 되면서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고.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프리드리히 빠 정도가 아니라 숭배 분위기가 퍼져있었고, 프리드리히 2세가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영국에서도 (프랑스 털어주니까) 인기가 엄청나게 높았으며,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프리드리히 빠가 많았다. 훗날의 나폴레옹도 프리드리히 빠였는데, 나폴레옹 이전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숭배 수준이었다.
  20. 프란츠 1세 항목에 전쟁 중 왕실은 돈을 꽤 벌었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왕실 예산은 3% 내외(사치가 심한 프랑스는 5%)였기 때문에 국가 예산과 비교가 안 된다. 당시 가장 큰 지출인 상비군 수십만 명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고, 현대에도 돈 잡아먹는 귀신인 화기, 군함, 대포 등은 당시 경제활동 상황을 고려해보면 국가에 큰 부담이었다. 적국 프로이센도 전쟁으로 국토가 잿더미에 빚이 쌓였으므로 당분간 서로 충돌할 일은 없었다만. 그렇지만 남편이 벌어놓은 재산 덕에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고 하니 왕실 재산 규모가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건 사실인 듯.
  21. 다만 이런 조치는 적국인 프로이센에서는 100년 전 대선제후 시절에 했던 것이다. 아들 요제프 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한 면도 있었다.
  22. 한때 퐁파두르에게 'cousin'이라고 쓴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는 추문이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한 번도 퐁파두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당대 예법으로는 신분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체면이 깎이는데 편지를 썼을 리가.
  23. 7년 전쟁에서 실패와 남편 프란츠의 사망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국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영향도 있다.
  24. 물론 아들 많다고 후계자를 입맛대로 갈아치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본인도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승계했고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은 현직 왕이라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훗날 손자대의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로는 2세) 시절 승계자 페르디난트 1세는 신체장애에 정신지체까지 앓던 폐인이었지만 다른 이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조차 꺼내지 못 했다.
  25. 영토 문제에 있어서 아들의 팽창 정책인 1차 폴란드 분할(1772년)이 개시되기 전에도 오스트리아 단독으로 1769년에 폴란드 왕국령을 침략한 적이 있는데, 이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투르크 령의 부코비나를 합병하는 것은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
  26. 시동생 카를 알렉산더(로렌의 샤를)이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에서 박살나고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훗날 장조카 요제프 2세 때 삼촌이자 이모부를 다시 등용하려지만 결단코 사양한다.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 시절 사보이의 외젠을 명장이라고 은퇴도 못 하게 노인학대(?)한 전력이 있다.
  27. 부부간 금슬이 나빴거나 손이 귀해 자식이 적었다면 임신으로 인한 리스크는 경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주제에서 대를 이을 후손의 생산은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이므로 등한시할 수 없다. 더욱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자 후손이 없어서 여자의 몸으로 왕관을 쓰게 되어 승계 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치른 입장이었다.
  28. 굳이 따지자면 후손 프란츠 요제프 1세 정도지만 역시 좀 모자라다.
  29. 동아시아에서 유교 윤리에 따라 왕비를 국모라 부르는 것과 달리 업적에 대한 평가다.
  30.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적응하기 더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족이어도 사생활이 있었는데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그런데 묘하게도 궁정문화 자체는 오스트리아 쪽이 더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31. 막내 여동생도 요절했다. 1남 3녀인 카를 6세의 자식들 중 딸 둘만 남았다.
  32. 외국으로 시집간 다른 딸들이 평생 그리워하던 가족 나들이용 별궁.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본딴 소 트리아농을 베르사유 안에 건설하기까지 했다.
  33.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와 마리아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회복했고, 요제프 2세의 황태자비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는 사망했다.
  34. 그들 남매의 부친인 프란츠 1세는 불어권에서 장가와서 일평생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쓰고 살았다고 할 정도였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에 시집가거나 심지어 왕위를 계승하러 가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이 덕분이었다.
  35.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으로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왕족이었음에도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베는 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36. 합스부르크 가계가 마리아 테레지아-둘째 아들레오폴트 2세-프란츠 2세-셋째 아들 프란츠 카를 대공(1802~1878)-프란츠 요제프 1세/막시밀리안 1세/카를 루트비히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위 여제의 고손자의 후처(세 번째 부인)이 된다.
  37. 첫째 부인 마르가리타(1840~1858)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38.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는 1898년에 이미 암살당했고, 요제프 1세의 첫째 동생 막시밀리안 1세의 아내인 샤를로테는 막시밀리안 1세가 멕시코에서 정부군에 의해 사형을 당해 받은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아 유폐생활을 하고 있어서 그 다음 서열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큰어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