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德威
(? ~ 918)
당나라, 오대십국 인물, 자는 진원(鎭遠), 아명은 양오(陽五)이다.
1 생애
1.1 이극용을 섬기다
삭주 마읍[1] 사람으로 황소의 난 시기 독안룡 이극용과의 내기에서 져버린 바람에 이극용을 섬기게 되었다. 장수가 되어 철림군사를 지냈다. 왕행유를 격파해 아내지휘사로 승진했다. 899년, 후량군이 진의 태원을 포위했다. 주전충은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 주덕위를 생포하는 자에게는 자사직을 주겠다고 했다. 그때 후량군의 장수 중에서 사납기로 유명한 진야의가 앞장서서 주덕위를 사로잡고자 했다. 진왕은 덕위에게 “진야의가 그대를 잡아서 자사를 구하고자 하니, 백마에 붉은 갑옷인 자를 보면, 의당 잘 방비해야 하오!” 라고 말하자 주덕위는 웃으면서 “진장은 큰 소리치길 좋아할 뿐인데, 어찌 자사는 신이 만들어주는 게 아님을 알겠습니까?” 라며 득의양양했다. 주덕위는 병사들과 같은 옷을 입고 병졸인 척하다가 마침내 진야의가 들어오자 유인시켜 주덕위가 직접 철퇴로 내리쳐 진야의를 생포했다. 역관광?
1.2 절도사에 승진
906년, 후량이 군사를 일으켜 연(燕)[2]을 공격하자 진왕은 주덕위에게 군사 5만을 내어주어 연을 돕도록 했다. 후량군은 연을 포기하고 급하게 군사를 노주로 돌렸다. 노주를 취하고 있던 노주 수장 이사소는 평소 주덕위와 사이가 나빠 이를 두고 진왕이 몹시 괴로워했다. 당시 전진(前晉)[3]은 나라의 안정이 바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덕위를 위험하다고 생각해 본국으로 소환시켰다. 908년, 주덕위의 충성을 재확인한 이존욱은 주덕위와 함께 협성을 공격해 깨뜨렸고, 부도소를 참수했다. 이 공로로 진무군절도사, 동중서문평장사에 제수되었다.
1.3 백향 전투에서의 승리
909년, 유지준이 후량을 배반하고 후당에 구걸하자 주덕위가 진주를 공취하고 후량군을 패배시켰다. 910년, 후량의 장수 왕경인이 군사 7만을 이끌고[4] 조를 공격하자 후진 역시 조주에 주덕위를 파견하여 진수하도록 했다. 후량군이 백향에 당도하자 이존욱과 주덕위도 백향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주덕위는 기병을 중점적으로 이용하여 적진을 나아가 후량군을 대패시켰다. 당시 후량군은 식량이 부족했는데 평원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백향 전투에서 약 2만여명의 수급을 베었고, 주덕위는 여세를 몰아 박주, 여양, 하진, 위주 등 후량 변경을 노략질했다.
1.4 연나라의 멸망
911년, 연의 대부분 주현이 모두 진의 세력으로 들어왔으나 오로지 유주만이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연왕 유수광이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이윽고 배신했다. 주덕위가 군사 3만을 이끌어 연의 유주를 함락시켰다. 유수광은 태원에서 참수되었다. 이 공으로 주덕위는 노룡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후량의 주전충은 군사적 교계지인 위박지역을 완전히 통치하기 위하여 유심에게 군사 6만을 내어주어 위주로 진입해 위주 백성들을 탄압했다. 진의 이존욱과 대치하자 유심은 밤에 태원을 습격했다. 그런데, 유주를 총괄하고 있던 주덕위가 추격했다. 주덕위의 활약으로 유심의 군사는 박살났다. 이를 기세로 후진은 9월까지 하북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다. 당시 진은 위주를 통해 황하를 건너 후량의 수도 변주를 취하고자 했다. 황하를 끼고 진과 후량은 계속 대치하던중 917년 3월, 막북지역을 기점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던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진의 신주를 공격했다. 진왕 이존욱은 주덕위에게 반격하도록 했다. 주덕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으나, 야율아보기가 3만의 증원군을 파병함으로써 수적의 열세로 주덕위는 패배했다. 야율아보기는 승세를 타 유주를 포위했다. 그런데, 진을 치고 있을 무렵 진군이 시야를 가리고 역습하자 거란군은 대패했고, 수만명이 전사했다.
1.5 호류파 혈전 그리고 전사
거란군과 유주에서 전투를 치루는 동안에도 황하방면의 양측 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황하가 결빙되자 이존욱은 24일 군사를 이끌고 양유성을 함락시켰다. 그 소식을 들은 후량의 장수 사언장이 양유성을 공격하였고, 황하의 둑을 풀어 양군은 다시 대치상태로 돌아갔다. 진군이 도강해 황하를 건너자 후량군은 뒤를 밟았다. 그런데, 진군이 중류 부근에서 다시 재반격해 후량군을 대파했다. 진왕은 다시 군사 10만을 가지고 마가도 동북지역에 주둔하고, 사언장은 마가도 서남지역에 주둔해 약 백일간 대치했다. 12월 초 후량군과 진군이 다시 진을 치고 교전했다. 그 틈을 타 진왕의 10만 대군이 변주로 입성했다. 그 뒤를 하환이 추격했으나 패배했다. 진군이 호류파에 주둔하자 후량군이 달려들었다. 이존욱은 지혜를 얻기위해 주덕위에게 전략을 물었다. 주덕위가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주덕위가 대답하길 : “여기는 변주와의 거리가, 이틀을 묵으면 될 정도로 가까운데, 양군의 부모와 처자식은 모두 그 안에 있어서, 양인들의 가정과 국가는 이 일거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깊이 들어온 군으로, 그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을 당면할 것이라, 계책으로는 싸울 수 있으나, 더불어 힘써 다투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한 우리군이 먼저 이곳에 이르러, 양식과 취사도구와 영채가 완비됐으니, 이일대로(以逸待勞)할 군이라고 이를 수 있습니다. 왕께선 의당 군을 눌러 움직이지 마셔야 하며, 신은 기병으로 그들을 귀찮게 해, 그들의 영채가 완성될 수 없고, 땔나무를 하고 밥을 지어도 공급할 틈이 없게 하길 청하오니, 그들이 고달프고 지침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신오대사 당신전 주덕위전 中[5]
그러나, 이존욱은 주덕위의 직언을 듣지 않고, 하루빨리 후량군을 공격하자고 재촉했다. 당시 진군의 병진을 보면, 왕이 중앙, 진, 정의 군이 좌측, 주덕위가 우측, 그리고 치중은 우측 서쪽에 있었다. 이존욱이 은창군을 이끌고, 후량군을 공격해 경미한 손실을 입히고 돌아왔다. 치중은 후량의 붉은 깃발을 보고 놀라 주덕위군으로 도망가 이윽고, 주덕위의 군대가 붕괴되었는데, 후량군이 이를 틈타 주덕위 부자를 죽였다. 이존욱은 이 일로 크게 비탄했다. 주덕위는 오대십국 초기 제일로 명망있는 노령의 장수로 누구나 존경의 대상이었다. 주덕위의 소자는 양오였는데, 당시 양(梁) · 진(晉) 교체기에, 주양오의 이름으로 용맹을 천하에 떨쳤다. 이존욱이 즉위할 때 태사로 추증했고, 명종 이사원은 장종의 묘에 배향했다. 후진 고조 석경당은 주덕위를 연왕으로 추봉했다.
2 참고 사료
『구오대사』 권56 · 『신오대사』 권25
『자치통감』 권261 · 262 · 263 · 264 · 265 · 266 · 267 ·268 · 269 ·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