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당

후진의 역대 황제
후당 4대 말황제 이종가초대 고조 석경당2대 출황제 석중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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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의 간행본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석경당의 그림.
묘호고조(高祖)
시호성문장무명덕효황제
(聖文章武明德孝皇帝)
석(石)
경당(敬瑭)
생몰년892년 ~ 942년
재위기간936년 ~ 942년(7년)

한족이 바라보았을때 천하의 개쌍놈급인 인물이다. 진회와 더불어 한족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 중 한명.

1 제정신이었던 시절(?)

사타족(沙陀) 출신으로 태원 출생이다. 본래는 후당 장종 이존욱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다가, 명종 이사원(李嗣源)의 가장 충실한 부하가 되어 그를 도와 많은 일을 하였다. 이사원은 그를 신임해서 자신의 딸을 내려 사위로 삼기까지 했다.

그 후 금군장관(禁軍長官)이 된 그는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와 북경유수(北京留守)를 겸하게 되었는데, 청렴하고 일을 잘해 많은 신망을 얻었다. 여기까진 좋았다.

2 쿠데타를 일으키다

문제는 명종이 죽은 후부터 벌어졌다. 당시 황제는 명종의 아들 이종후였는데, 노왕(魯王) 이종가(李從珂)의 반란으로 몹시 위태롭게 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종후는 기병 50기만을 거느리고 간신히 도망쳐 위주(魏州)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석경당과 마주치게 되었다. 석경당은 이사원의 사위고, 이종후는 이사원의 아들이라 자형 사이가 되는데 위급한 이종후로서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석경당은 사정을 듣자 한숨을 쉬면서 영 불안하게 굴더니, 위주자사 왕홍지(王弘贄)와 상의해보고 말을 올리겠다며 우선 그 자리를 떴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왕홍지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도 도망친 황제들은 많았는데 병사 아니면 돈이라도 있었음. 지금 저 천자는 가진 것이라곤 병사 50밖에 없는데 우리가 뭘 함?"

결단을 내린 석경당은 이 말을 이종후의 심복인 궁전고사 사수영(沙守榮)과 황가 시위 분홍진(奔弘進)에게 전했다. 화가 난 분홍진은 석경당을 매우 꾸짖었다.

"황제는 명종의 아들이고 자네는 명종의 사위인데, 황제가 천하에 믿는 사람이 자네밖에 없건만 배신을 하겠다는건가?"

사수영은 석경당을 죽이려고 칼을 뽑고 달려들었고, 석경당의 위사 역시 칼을 뽑고 싸우다 둘 다 죽었다. 이 모습을 본 분홍진은 몹시 노해 자결했다. 석경당은 곧바로 심복인 유지원[1]을 보내 50 명의 병사들을 정리해버렸고, 본인은 낙양으로 달려가 이종가에게 항복했다. 그 사이 왕홍지는 이종후를 잡아다 가두었고, 이종가는 이종후는 물론이고 이종후의 아내와 아들들까지 학살했다. 석경당은 자신을 믿어준 황제의 후손을, 자기의 손으로 죽게 만든 것이다.[2]

3 나는 땅을 넘겨주고 왕이 되겠다

이종가는 일단 황제는 되었지만, 사실 석경당과는 이전부터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날 석경당의 군사들에게 조서를 내려서 위문하였는데, 석경당의 부하들은 석경당에게 만세를 외쳤다. 만세가 보통 황제에게 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래서 석경당을 천평군 절도사로 좌천시켰다.

하지만 석경당은 석경당대로 이종가의 주변에 심복을 많이 만들어놓아서 그의 동태를 살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에 흩어진 재산을 모으고 군비를 확충하며 준비하고 있다가, 자신에게 인사 좌천의 명령이 떨어지자 유지원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유지원은 말했다.

"우리에겐 정예 부대가 있으니 지형을 점하고 싸우면 반드시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하지만 모사인 상유한(桑維翰)은 의견이 달랐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거란과 가깝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란 군주를 대왕으로 모시고 구원을 청하면 무슨 일이어도 저녁이면 지원군이 올터이니, 어찌 근심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석경당은 그게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스스로 요태종 야율덕광의 아들 되기를 간청하는 상주문을 보냈다. 그때 석경당의 나이는 47세이고 야율덕광은 37세였다. 세상천지에 열살 어린 아버지가 탄생한 것.

심지어 석경당은 여기서 후대에까지 영향이 미칠 엄청난 선택을 하고 마는데,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 이에 유지원은 참다 참다 간언을 올렸다.

"신하의 예도 모자라서 아들과 아버지의 예를 맺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도움을 원한다면 재화와 보물만으로도 충분할텐데, 어찌 땅까지 내주시려고 하십니까?"

하지만 석경당은 전부 무시하였다. 일전부터 연운 16주를 노리던 야율덕광은 신이 나서 가을이 되면 군대를 이끌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4 황제가 되었지만...

과연 가을이 되자 야율덕광은 무려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남하였다. 당시 석경당은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있었는데 5만의 군대는 단숨에 전세를 바꾸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이종가는 누각에 불을 질러 분신자살했다.

야율덕광은 석경당을 중원의 황제로 만들어주겠다고 하였고, 책봉식을 거행했다. 이 책봉식에서 야율덕광은 석경당에게 옷을 입혀주었는데, 당연히 거란 옷이었다. 중원의 황제가 다른 나라 황제에게 굽실거리며 거란 옷을 입고 책봉되는 상황이었는데, 당나라 때 이미 중국의 황제가 책봉 간섭을 받거나 아우나라 노릇을 한 적은 있으나 이런 전례는 없었다.

우습게도 그렇게 원하던 황제가 된 석경당은 유지원이 토욕혼에 투항한 뒤, 조덕균, 안중영 등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요나라 조정에서 책망을 받게 되자 근심하다 죽고 만다. 고작 6년만이었다.

5 평가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두 번 배신한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는 받기 힘들지만, 무엇보다 중원요나라위성국가 수준으로 만들어버렸기에 한족 입장에서는 욕 먹기는 충분한 인물이다.[3]

요나라에 줘버린 연운 16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오대십국시대 내내 거란에 시달리고 송나라 시기까지도 그중 2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만다. 송나라는 건국 당시부터 라는 강국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 인물. 남송칭기즈 칸, 원나라의 흥기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중국사 전반을 한족의 입장에서는 나쁜 의미로 뒤바꾸어놓은 인물이다. # 유주(계, 탁 등), 삭주 등의 연운십육주가 얼핏 보기에는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결정적인 면적의 영토가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것은 그곳의 지형. 만리장성은 험준한 방어요충지를 이어 건설되었는데 그 이남이라는 것은 하북 평야지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내려올 수 있을뿐더러 이 지역에서 나는 물산을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연맹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을 스스로의 손으로 넘겨주었으니 병크 중의 병크.
  1. 후한의 고조가 된다.
  2. 훗날 마음에 걸렸는지, 석경당은 황제가 되고 나서 이종후를 민제閔帝로 추존했다.
  3. 중국어 위키에는 아예 '한간'(漢奸)으로 규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