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보니미르 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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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름즈보니미르 보반 (Zvonimir Boban)
생년월일1968년 10월 8일
국적유고슬라비아크로아티아
출신지이모트스키
신체 조건185cm
포지션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디나모 자그레브 (1985~1991)
AC 밀란 (1991~2001)
AS 바리 (임대) (1991~1992)
레알 클럽 셀타 데 비고(임대) (2001)
국가대항전 커리어유고슬라비아 8경기 1골 (1988~1991)
크로아티아 51경기 12골 (1991~1999)

크로아티아의 국민적 축구영웅, 조지 웨아와 함께 AC 밀란의 오렌지3총사와 2000년대 초반의 과도기를 잇는 플레이어.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 별명은 조로. 현재 은퇴 후 스카이스포츠 이탈리아에서 해설자로 활약 중.

2 커리어

선수생활의 초반, 자국 리그의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6년을 뛰었고, 임대 신분[1]을 제외하면 AC 밀란에서 계속 뛰어왔다.

2.1 디나모 자그레브

1985년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여 6시즌을 보내며 109경기 45골을 기록했다. 단순계산으로 따져도 대략 고등학생 때 이미 프로데뷔를 한 셈이고, 스탯 또한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이었으며, 당시 전 유럽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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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발차기를 받아라

보반이 일약 범국민적 스타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1990년 5월 13일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와의 더비 매치였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에 위치한 디나모 자그레브와 유고연방의 수도이자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에 있던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간의 더비 매치는 시기가 시기인지라 자연히 유고 연방의 분열 위기인 정치적 상황과 연결이 되어 있었으며, 당시 유고연방에서 가장 세력권이 큰데다 당시 유고 연방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중심이 된 세르비아계와 유고연방 제2의 민족인 크로아티아간의 알력이 겹쳐서 분위기가 이미 심상치 않았던 상황. 디나모 자그레브의 주장인 보반 역시 이 경기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분리 독립에 관한 2차 투표가 진행[2]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미 경기 전부터 헬게이트가 열려있던 상황이었다. 위키에 단독 문서로 등재되어 있는 '디나모 자그레브 vs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시위 내용에 따르면 이미 개막 전부터 원정온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 서포터는 세르비아 극우 민병대장인 '아르칸' 젤리코 라즈나토비치[3]의 호위를 받으며 디나모 자그레브의 홈팬들과 시가지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등 엉망진창이었고 사실상 준전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가 시작된 후에도 분위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리고 경기가 격화되자 이미 경기내용은 안중에도 없고 경기를 관전하러 왔다 흥분한 레드 스타의 원정팬 혹은 시위대은 디나모 자그레브의 홈팬들을 향해 돌 투척, 경기장 기물파손, 흉기를 이용한 위협 등을 일삼은데다 분리에 반대하는 플랜카드 등을 부착하며 난동을 부렸다.

참지 못한 디나모 자그레브의 팬들도 역시 반격을 시도했는데, 이 때 유고 연방 경찰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에서 열렸음에도 일방적으로 디나모 자그레브의 팬들을 상대로 강제진압을 시작하였다. 가재는 게편? 대규모 경찰력을 동원하여 물대포등의 수단을 동원해 강력하게 진압하기 시작한다. 이미 경기는 중단되었고 레드 스타의 선수들은 모두 라커룸으로 피신하였지만 디나모 자그레브의 선수들중 주장 보반을 비롯한 몇몇은 경기장에 남아있었는데 홈팬들이 강제진압을 당하는 장면을 보다못한 보반은 경찰을 향해 플라잉 니킥을 꽂았다. 오오.. 박종우의 용기만큼은 한국판 보반이 아닐런지.

이로 인해 보반은 유고 축구협회로부터 6개월 출장정지의 중징계와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었고, 공무집행방해로 검찰에 기소가 되기도 했다.[4] 하지만 보반은 이날의 행동에 대해 "내가 (내려가지 않고) 경기장에 남아있을때 공인으로써 내 삶과 커리어 그리고 모든 것을 던질 각오를 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내가 크로아티아인이라서다."[5]라고 자신의 행동에 한점의 후회도 없음을 밝혔다.

크로아티아계 최고의 슈퍼스타인 보반의 이 행동과 인터뷰는 크로아티아계에 영웅적인 결단으로 찬사받았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의 반 유고연방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결과가 되었고 이는 1년 후 크로아티아의 독립전쟁으로 확산되기 이른다. 2011년 CNN은 이 경기를 "세상을 바꾼 5경기"에 이 경기를 꼽았다.

2.2 AC 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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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이 전쟁터가 된 상황에서 보반은 1991년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AC 밀란에 8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입단한다. 입단과 동시에 as바리로 임대되어 한 시즌동안 리그 적응을 마치고, 복귀 후 로쏘네리의 핵심 멤버로 자리잡게 된다. 팀 합류와 동시에 밀란은 92-93, 93-94년 스쿠데토를 2년 연속 차지하고, 한 박자 쉬고 95-96년 재차 리그에서 우승한다.

1994년 유로피언컵에서는 크루이프의 아이들이라 불리던 바르셀로나와 맞붙게 되는데, 이 경기에서 4:0으로 제압관광보내는 데 중심에 섰다. 이 경기는 아직도 유럽대항전 역사 상 손에 꼽히는 일방적 경기 중 하나이며, 보반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6]

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복귀한 후, 월드컵에서의 부진 아닌 부진을 한풀이라도 하듯 자케로니 감독 아래에서 화려한 공격력을 보여주며 팀을 재차 세리에A 우승으로 이끈다. 이 이후 경기출전이 뜸하다가, 2001년 루이 코스타의 영입[7]으로 인해 셀타 데 비고로 임대를 떠나며, 근 10년에 걸친 밀란에서의 커리어를 끝내게 된다.

보반은 흔히 밀란 제네레이션 / 오렌지 커넥션과 2000년대의 밀란을 이은 가교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오렌지 제너레이션은 1993년 레이카르트의 이적, 1995년 마르코 반 바스텐의 은퇴, 굴리트의 이적으로 인해 해체되었고, 2000년대에 재차 밀란의 전성시대를 잇는 과도기 시점에서 팀을 지켜냈기 때문. 이 시점에 함께 활약한 멤버는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조지 웨아, 올리버 비어호프,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레오나르두 등이 있다.

90년대를 풍미하는 세리에A의 대표 플레이메이커요, 현재도 종종 역대 세리에A 베스트 일레븐에도 이름을 올리곤 한다.

2.3 레알 클럽 셀타 데 비고 ~ 은퇴

밀란에서 후이 코스타에 밀려 주전경쟁에서 밀려난 보반은 셀타 데 비고로의 임대를 통해 기회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셀타의 감독이 보반을 중용하지 않은데다, 러시아산 판타지스타 모스토보이에 밀려서 역시 경기출장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2001년 10월, 셀타 데 비고에서 단 4경기만을 치른 후 은퇴를 선언하고, 2002년 10월 7일 자그레브에서 은퇴경기를 치르며 그라운드를 떠난다.

2.4 국가대항전

선수로서 A매치를 총 59경기를 소화하였고, 그 중 유로96과 98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1987년 U-17 월드컵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이자 우승멤버이지만 유고 내전으로 인해 유로92는 유고슬라비아가 국제대회 출전정지를 먹으면서 출장할 수 없었다.

모국 크로아티아가 독립한뒤 처음 맞는 유로 96과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크로아티아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유로 2000에는 팀이 예선탈락했으며 2001년 은퇴하면서 국가대표 커리어를 마쳤다.

2.4.1 유로96

유로96에서는 독일, 덴마크, 터키와 함께 본선 D조에 편성되었고, 2차전 덴마크전에서 추가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조 2위로 8강에 안착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다만 8강에서 만난 독일을 상대로 석연찮은 판정의 희생양이 되며 탈락하고 만다.

당시 선수들의 면면을 보면, 98월드컵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다보르 슈케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모두 뛰어본 몇 안되는 선수 중 한 명인 로베르트 프로시네츠키 (당시 바르셀로나 소속), 유벤투스 소속 알렌 보크시치, 현 크로아티아 대표팀 감독인 빌리치 등 타 팀에 꿀릴 것 없는 스쿼드를 갖추고 있어, 그 아쉬움은 더하다. 이 멤버에 대부분이 98 프랑스 월드컵에 그대로 선발되는데, 이때가 오히려 하향세였음을 감안하면 오심은 두고두고 아쉬울 법 하다.

보반은 유로96 이후 받은 포상금을 크로아티아의 재건과 고아교육을 위해 전액 기부를 한다. 오오 대인배.

2.4.2 98 프랑스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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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랑과의 접전

우리에겐 5:0으로 뼈아프게 친숙한 프랑스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는 4강을 달성한다. 당시 멤버는 유로96에서 그대로 올라갔다고 보면 되고, 보반은 등번호 10번에 주장완장을 차고 팀의 공격을 전두지휘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보반은 포메이션 상으로는 공격진을 움직이는 사령관이었으나, 실제로는 AC 밀란에서 보여줬던 플레이메이커로서의 화려함보다 실속있는 움직임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복시치의 부상으로 인해 공격진의 누수가 생겼는데, 이를 미드필더의 추가로 해결하였다. 이 때 생기는 미드필더와 공격진 간의 밸런스 조정을 보반의 전술적 움직임으로 해소하였다.

당시 보반은 90년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두고 지네딘 지단과 경쟁을 하던 시기였다. 96년 마르세유에서 유벤투스로 이적해, 팀을 연속 2회 우승과 챔피언스리그 결승으로 올린 지단은 떠오르는 유벤투스에서도 빛나는 존재였다. 반면 자신의 이적 후 밀란에서 3회의 스쿠데토, 1번의 유러피안컵을 들어올린 보반은 당시 세리에 최강의 플레이메이커였다. 굴러온 돌 vs 박힌 돌? 월드컵 4강에서의 대결은 현재와 향후의 세리에A 플레이메이커 본좌를 가리는 경기라 할 수 있다. 빅매치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둘은 등번호 10번을 달고 등장했고, 공격진 아래 플레이메이커 자리에서 경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단은 풀타임을 활약하며 프랑스를 전두지휘했으나,[8] 보반은 부상으로 인해 저조한 플레이를 일관하다 후반 교체되어 나갔다.

3 여담

은퇴 시 "내가 은퇴한다면 금전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을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 자존심"이라는 말을 남겼다.

사실 실력보다 기행이 먼저 앞서는 플레이어들을 생각하면, 보반이 지닌 스토리나 성장과정은 남자다움을 물씬 풍긴다. 자신의 조국과 팬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발차기를 날리거나, 자신이 받은 포상금을 전액 고국을 위해 쓰고, 자신보다 팀을 먼저 내세우며 희생을 아끼지 않는 등. 지금의 축구선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멘탈을 지닌 선수라 할 수 있다.

은퇴 후 자그레브 대학에서 학사과정을 이수하였다. 전공은 역사학.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편이라고 하더라.

축구계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였으나, 감독이 아닌 행정방면이 될 듯 하다. 감독해도 잘 할 것 같은데..

자케로니에 의해 밀란에서 토사구팽당했어도 밀란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여 현재도 계속 조언과 독설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의 축구만화 환타지스타에서 나오는 AC밀란의 10번 밀코 바예비치의 모델로 추정된다.
  1. 91-92시즌 세리에A AS바리, 01~02시즌 프리메라리가 셀타 데 비고
  2. 1차 선거는 4월 22일 시작, 2차 선거는 5월 6일 시작.
  3. 이 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항목을 읽어보면 된다.
  4. 몇년후 취하되긴 했다. 그에게 맞은 경찰은 보스니아계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5. 영어로 번역된 당시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Here I was, a public face prepared to risk his life, career, and everything that fame could have brought, all because of one ideal, one cause; the Croatian cause.
  6. 사실 이 때 기록이 93-94년 리그 우승, 94년 유러피언컵 우승, 94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으로 트레블이라 추정되나, 밀란의 트레블로 기록이 되지 않는다. 당시 유럽을 씹어먹던 밀란은 코파 이탈리아에서는 지독한 불운이 겹쳐 03-04시즌에 우승하기까지 20년넘게 우승하지 못했다. 무었보다 슈퍼컵우승을 트레블로 치진 않는다.
  7. 말이 좋아 루이코스타에게 밀렸다 표현하는거지, 자케로니 감독이 99-00시즌부터는 보반을 중용하지 않았다. 보반이나 팀 수뇌부 등은 밀란에서의 은퇴를 내심 바랬다고.
  8. 튀랑의 A매치에서의 유일한 2골로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