辰爾王
시호 | 진이왕(辰爾王) | |
성 | 부여(扶餘) | |
휘 | 관(寬) | |
생몰년도 | 음력 | ? ~ ? |
백제의 왕족으로 무왕의 생부로 추정되는 인물이며, 위덕왕 혹은 법왕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 위덕왕 또는 법왕과의 관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중국 측 일부 사서에는 부여관(夫餘寬)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의 이름은 19세기에 알려졌다.[2][3]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한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 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 기간이 1년[4]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 손자라는 설이 있었으며, 삼국유사에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5]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됐다.
무왕의 생부가 알려지지 않으면서, 중국 북사에는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고, 한때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가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인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그 뒤 19세기에는 실학자 이규경이 중국의 사서와 당나라 부여문선의 묘지명 '百濟國王夫餘寬生璋。號帶方郡王。生義慈。唐拜帶方郡王金紫光祿大夫。生隆。熊州都督隆。生文宣。司膳卿左衛大將軍樂浪郡公'을 전하면서 진이왕의 이름이 알려졌다.[6]
후주서(後周書)와 풍속통(風俗通)과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에는 이름인 부여관으로 등장한다.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통해 알려졌다. 일본 도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 다음 무왕 사이에 나타난다.[7]- ↑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
- ↑ 부여관이 법왕 부여선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규경이 부여문선의 묘지명에 있는 글자를 필사하면서, 법왕의 이름인 부여선(夫餘宣)을 부여관(夫餘寬)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라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 ↑ 현재 이규경이 보았던 부여문선의 묘지명은 행방불명 상태이다.
- ↑ 5개월 또는 6개월 설도 있다.
- ↑ 왕 또는 왕자를 뜻한다.
- ↑ 만약에 부여관이라는 이름이 부여선의 오기라면 진이왕의 이름이 아니다.
- ↑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