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태자

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1 소개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의조(義照). 일본의 성씨 오우치(大內)씨와 도요타(豊田)씨의 시조. 성왕 혹은 위덕왕의 셋째 아들인 걸로 추정된다. 오우치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1]

2 일본으로 도래

성왕이 신라와의 관산성 전투에서 패사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타타라(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일본 불교의 확산과 제철기술을 전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코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왕으로부터 받았다는 검이 남아있다고 한다.

3 실존 인물?

14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인물인것으로 보아서 창작인물일 가능성이 높다.[2]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단종 1년(1453년) 6월 스오, 나가토, 이와미, 이즈미, 기이의 슈고인 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예인지 확인해달라고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 그가 '충청도에 있는 조상들의 영지를 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여서 조선 대신들의 어이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보냈다고(...).[3] 이 때 말고도 서일본의 유력 다이묘였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 후손을 자처하며 조선에 사신을 보낸 예가 매우 많다. 이후 오우치가 당주가 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는 자신이 백제의 후예임을 내세워 조선과의 무역에서 특권을 받을려고했으나 실패했다. 여담으로 오우치가는 1557년 32대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大內義長)가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패해 자결하면서 멸망했으나[4] 방계혈통이 간간히 내려오고있다.

조선시대 일본으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이름이 비슷한 임정태자(臨政太子)라 나오며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오우치의 좌경대부가 되어 오우치도노라 불리며 그 후손은 47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다만 실제 오우치가는 31대인 오우치 요시타카 때 멸망.[5] 종손 가문은 31대에서 전멸했지만, 종손 가문의 다른 아들들이 도요타 씨로 성을 바꿔서 살아남았다.[6] 그밖에 임성태자 사후부터 1400년대까지 여러 세대를 내려오면서 수많은 방계들이 존재했다.

사실 당시 다이묘 가문들은 멋대로 일본의 주요 명문가 우지를 참칭하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오우치 가문이 다른 다이묘 가문들과 같이 겐지, 헤이케, 후지와라 기타등등의 메이저한 우지(氏)를 택하지 않고 비교적 마이너한 백제계 조상인 타타라(多々良)를 택한 것은 다분히 경제적,정치적 이유가 있다고 보아진다. 아시카가 막부가 기능하고 있던 전국시대 이전 한반도 및 대륙과의 간합무역에서 오우치는 아시카가 쇼군가와 호소카와 가문과 함께 주요한 3축으로 활동했지만 쇼군가인 아시카가와 막부관료 가계인 호소카와에 비해 대외적으로 내세울 이름이 부족했던 오우치는 한반도와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백제계 도래인들의 자손임을 자칭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도 단순한 정황 증거로서 오우치가 진짜 도래인 계열일 확률도 부정할 수는 없다. 대외적으로 지배권을 정당화 시키고 가문의 격을 올리는 것이 주요목적이었던 우지(氏) 참칭인 만큼 일본내에서 마이너한 성인 타타라(多々良)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외적으로는 백제의 후손을 자칭하고 내부적으로는 다른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할수도 있고(오우치의 분계는 후지와라를 참칭했다)

4 트리비아

  • 2010년 3월 30일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임성태자의 45대손인 오우치 키미오(大內公夫)씨 부부를 익산명예흥보대사로 임명하였다.
  1. [1] (9분 14초부터 주목)
  2. 다타라라는 성씨 자체는 이미 9세기경 나라 시대목간에서 확인되기는 한다.
  3. 정종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는 "계보만 적어주시면 영지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라고 나왔었다.
  4. 아이러니하다면 아이러니한 것이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모리 씨의 선대는 임성태자를 따라 왜로 건너 왔던 종자(하인)이라고 전하고 있다. 물론 모리 씨의 경우는 오에를 혼세로 하지만,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의 일상인 하극상은 오우치 씨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로 풀이할 수도 있다.
  5. 32대 당주인 오우치 요시나가는 오토모가에서 들여온 양자로 파양되었다가 스에 하루카타가 모반을 일으켜 당주 요시타카를 살해한 후 당주로 앉힌 인물이다.
  6. 이거 토요타 가문의 족보 http://www.nichiren.ac/houzennji/toyotakeifu.htm에도 백제 왕가 족보가 표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