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29대 법왕 부여선 | ← | 30대 무왕 부여장 | → | 31대 의자왕 부여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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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무왕(武王) / 무광왕(武廣王) | |
성 | 부여(扶餘) | |
휘 | 장(璋)[1][2] | |
생몰년도 | 음력 | 580년 ~ 641년 3월 (61세) |
재위기간 | 음력 | 600년 5월 ~ 641년 3월 (약 42년) |
목차
1 개요
서동 설화의 영향으로 흔히 서동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아명이며, 최근 서동이 무왕이 아니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본(古本. 옛 기록)에는 무강(武康)이라 하였으나 잘못된 것이다. 백제에는 무강이 없다.】"라고 하였지만 일본의 여러 문헌에 의해 오히려 무강왕이 무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3]
42년간 즉위하여 혜왕-법왕 때의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여 백제의 안정기를 구축하였다는 평이 있지만 이와 반대로 무리한 토목공사와 정복 전쟁으로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는 악평도 존재한다.
출신이 불확실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오고 일단은 이것이 정설이지만 문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가설이 있긴 하지만 이건 중국 사서인 북사의 오기로 인해 생긴 오해로 판단된다.[4] 대체로 익산의 지방귀족 출신[5]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하지 않다.[6] 여러 가지로 보아 신분은 어쨌든 혜왕 때까지만 해도 그의 처지가 중앙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을 거라는 건 분명한 듯.
무왕은 641년 음력 3월에 사망하였다. 사후 당태종이 광록대부를 추증하였다. 무왕의 능은 공주(웅진)도 아니고 부여(사비)도 아닌 익산시(금마) 팔봉동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나, 이 역시 서동 설화와 관련된 논란거리다. 고려시대 이미 도굴된 바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의 능산리고분의 묘제와 일치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나온 발굴품들을 2016년에 대한민국 학자들이 재조사해보니 출토된 유골이 20-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제 토기가 있어 매장자가 신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왕족급 여성, 즉 선화공주가 아니냐는 추정이 새로 나왔다.
관련기사
2 출신 성분
- 법왕 아들설
- 《삼국사기》의 주장을 따르며 학계의 정설이다. 법왕의 아들이 맞다면 서동설화를 유추하자면 적자가 아니고, 서자일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법왕이 정식으로 입양한 양자일수도 있다. 물론 서동설화 자체가 역사적 근거가 불확실한데다 삼국 시대의 기록의 기초가 되는 삼국사기에 분명히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기에 야사의 기록을 가지고 정사의 기록을 평하긴 어렵다.
- 위덕왕 아들설 또는 위덕왕 서자설
- 일각에서는 《삼국사기》의 주장과는 다른 위덕왕 아들설이 존재하였다. 또 《삼국유사》에도 법왕의 아들이라는 설 외에 금강의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해서 무왕을 얻었다는 설과 무왕이 궁밖에서 자랐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었다. 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쪽의 사서인 《북사》에 근거하지만 정작 《북사》에는 혜왕과 법왕의 존재가 빠지고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통이 바로 넘어간걸로 나오는 까닭에 왕통이 잘못기록된 정황이 명백하다. 참고로 SBS 사극 서동요에서도 이 설을 채택했다.
그리고 덕분에 무왕이 역사상 자기 아버지인 법왕을 강제자살 시키는 패륜 행각이 나온다.
- 진이왕 아들설(위덕왕 손자설)
- 위덕왕 아들설과 법왕 아들설, 위덕왕 서자설 등이 있어서 오랫동안 이견이 분분했지만 1398년 일본인 오우치 요시히로가 조선 정종에게 자신의 조상이 부여명농의 셋째 아들 부여의조라는 것을 확인해달라고 오우치씨의 족보[7]를 보내면서 새로운 존재가 알려지게 된다. 《북사》를 제외한 중국측의 일부 사서[8]와 당나라로 끌려간 의자왕과 부여융의 후손인 부여문선의 비석에는 부여관(夫餘寬)[9]의 아들 부여장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진이왕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
용의 아들설
-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3 서동 설화와의 관계
그와 관련된 걸로 서동 설화와 서동요가 유명하지만,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이 정말 무왕인지는 불분명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이나 이 역시 불분명한 상태. 그러나 최근 익산 미륵사에서 선화공주가 익산의 성주의 딸이란 것이 밝혀졌다. 2015년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미륵사의 창건자가 무왕의 비인 사택왕후로 기록되어 있다. 즉, 무왕에게 익산 지역의 호족이던 사택(사탁)씨 집안 출신의 왕후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또 발굴 결과 확인된 미륵사의 구조가 삼국유사의 서동 설화 관련 내용에 등장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백제 무왕이 신라 왕족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는 설의 신빙성 역시 덩달아 높아진 상황. 사실 이 문제는, 당시의 국왕들에게 결혼이란 정치적 행동의 일부였고, 따라서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뒤 호족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거나, 동시에 여러 비를 두는 일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님을 생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미륵사 발굴에서 확인된 사항 때문에 무왕의 비는 신라 공주가 아니라 익산 호족의 딸이었다고 보는 것은 당시의 결혼 개념을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다. 그냥 왕비가 둘이나 그 이상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위에 나온 것처럼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익산시(금마) 팔봉동 신왕리에서 나온 발굴품들을 2016년에 대한민국 학자들이 재조사해보니 출토된 유골이 20-40대 사이의 여성이고, 부장품 중에 신라제 토기가 있어 매장자가 신라에서 백제로 건너온 왕족급 여성, 즉 선화공주가 아니냐는 추정이 새로 나왔으며, 이 추정을 따르면 사택왕후와 선화공주가 서로 모순이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상세내용은 서동요 항목 참고.
4 업적
무왕 3년 관륵(觀勒)을 일본에 파견하여 천문, 지리, 역법(曆法) 등에 대한 서적과 불교를 전달하였다. 630년 사비 왕궁을 수리하였으나 가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 634년 궁남지를 건설하였으며[10], 미륵사를 건설하는 등 토목공사를 자주 벌이고 신라와의 전쟁이 잦아 국력을 소모하는 등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탁월한 정치역량을 바탕으로 한 외교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높였고 군사력을 크게 신장시킨 치적을 남긴다.
결론적으로 동성왕과 함께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전성기 이후로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린 왕으로 평가받는다. 백제의 세번째 전성기를 연 왕. 하지만 다음 대에서 나라가...
4.1 토목공사
이로 인해 외부적으로 백제가 안정되자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단행했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하였으나 가뭄으로 중지하였고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호수와 그 안에 인공섬이 조영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궁남지다. 궁남지가 통일신라의 안압지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사찰인 629년에 익산의 미륵사를 완공하였다. 미륵사가 왕흥사라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다.[11]
4.2 전쟁
선화공주가 정말 신라의 공주로 실존인물이었다면 참 난감하게도 재위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 600년 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신라와 자주 충돌하였다. 재위기간 중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가잠성(椵岑城), 모산성(母山城), 늑노현(勒弩縣), 주제성과 신라 북서쪽의 두 성과 서곡성(西谷城) ·독산성(獨山城) 등을 공격하였다.
또한 무왕은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여러번 고구려 공격을 청하였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한 뒤에도 친선 정책을 전개하였다.
624년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당 고조(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627년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침공을 시도하였으나, 당 태종이 니들 고마해라백제와 신라의 화친을 권유했으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신라 서쪽 변방에 대한 집요한 공격은 562년 가야 멸망 이후 처음으로 백제의 낙동강 진출로 이어져 신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한층 가중시켰다.[12] 혜왕-법왕으로 이어지는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관산성 패전 이후 계속 패전만 했던 것과 달리 신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쇠락해가던 백제가 안정감과 함께 자신감을 찾아갖고 이에 기존의 소극적인 자세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국제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무왕의 업적으로 인해 백제는 다시 중흥기를 맞게 된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였던 고구려와 수나라가 재충돌 할 때 무왕은 위덕왕과는 달리 사태를 관망하면서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했다.[13]
4.3 익산 천도계획
正觀十三年 百濟武廣王遷都枳慕密地639년(무왕 40년)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14]로 천도했다.
《관세음응험기》 백제 기사 제석사본탑조.
익산은 무왕의 별도였다.(今益山武王置別都於址) (익산은) 본래 백제의 금마지(金馬只)인데 무강왕(武康王) 때 성을 쌓고는 별도(別都)를 두어 금마저(金馬渚)라고 불렀다.
《대동지지》, 김정호
재위 후반기에 무왕은 익산 지역을 중시하여 이곳으로 천도할 계획까지 세웠다. 실제로 그는 왕궁 평성을 축조하였고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15] 다만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16] 한 가지 확실한건 익산 지역이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다는 것. 익산 왕궁리 유적은 완벽한 도성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실제로 궁성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왜 익산으로 천도하려 했는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고대왕조가 지배세력의 교체 차원에서 천도를 단행하던 전례에 비춰보면 무왕이 기존의 사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17]
그러나 의자왕대에 익산 천도를 포기한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의자왕의 등극과정에서 사비세력과 타협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일각에선 무왕의 익산천도가 백제의 지배층 분열의 뿌리가 되어 백제 패망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재위 말기에 사치스러운 연회와 토목공사가 빈번한 것도 이와 연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대규모 행사를 계속 진행함으로서 왕권을 과시하고 지배 계층 인사들을 권위로 내리 누르려는 의도였다는 것.
5 미디어에서
5.1 서동요
SBS 사극 서동요에서는 주인공이며 조현재가 연기했다. 드라마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으로, 이병훈 PD 사극의 주인공답게 온갖 역경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이겨내고 왕이 된다. 하필 가장 인정 못받는 가설인 위덕왕의 아들 설을 따라 위덕왕의 서자이자 아좌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나온다. 역사상 실제로 무왕의 아버지인 법왕이 이 드라마에서는 위덕왕과 아좌태자를 위협하는 악역이자 서동의 적으로 나온다. 결국 법왕의 손에 위덕왕과 아좌태자가 암살당하지만 서동은 와신상담 끝에 법왕을 물리치고 백제의 왕이 되어 백제를 부흥시킨다.
이 사극에서 선화공주[18]는 설화대로 실제 신라의 공주(진평왕의 셋째딸, 선덕여왕과 천명공주(김춘추의 어머니)의 동생으로 나온다. 서동이 어린 시절 법왕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신라에 피신해 있을 때 선화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설정. 서동이 속해있는 백제의 기술집단 태학사가 정변으로 신라에 망명한 뒤 백제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신라 궁궐에 납품을 해, 백제인에다 평민인 서동이 신라 궁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선화공주는 서동이 평민인데다[19] 백제인이라는 것을 알고도 서동과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서동과 백제로 건너간다. 그 뒤 서동이 온갖 역경 끝에 백제 왕이 되자 왕으로서 신라의 공주인 선화공주에게 정식 청혼해 백제 왕후가 된다.
그런데 친정아버지인 진평왕이 선화공주가 백제 왕후가 된 뒤에도 계속 백제에 전쟁을 걸어(...) 백제 신료들이 선화공주를 폐비시키자, 사형시키자고 아우성치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무왕은 이 상황에서 선화공주를 지키기 위해 친히 신라와 전쟁을 선포한다. 무왕이 전쟁에 나갈 때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지켜보는 선화공주와 괴롭게 뒤를 돌아보는 무왕의 모습이 인상적. 이후는 실제 역사대로 무왕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백제를 부강하게 하고, 군주로서는 성공하지만 선화공주는 아버지와 남편의 나라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며 마음의 병을 얻게 되고 결국 사극 서동요는 선화공주가 친정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만 실컷 하다 병이 들어 일찍 죽어버리는 안습한 결말을 맺게 되었다. 신라 공주라는 설정과 무왕 재위 기간 중 신라와 자주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둘 다 살리려다 나온 전개인데, 정말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후였다면 정말 이런 이유로 일찍 사망했을 수도 있긴 하겠다.
5.2 계백
배역은 탤런트배우 겸 정화예대 교수인 최종환. 드라마 계백에서도 초반부에 선화공주가 등장한다. 사택비를 필두로 한 반신라파에게 간첩으로 몰리면서 선화공주는 계백의 아버지와 더불어 신라로 달아나다시피 출궁된다. 그러다가 추격하는 위제단(사택비 휘하 자객단)에게 따라잡히고 종국에는 아들 의자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다. 이런 전개는 선화공주와 대립하는 사택비라는 인물이 무왕 대 세워진 미륵사지 석탑을 2009년에 해체하다가 그 밑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 중 백제 무왕의 왕비가 사택왕후라고 쓰여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래서 기존의 무왕왕비와 알려진 선화공주와 최근에 밝혀진 무왕의 왕비 사택왕후의 대립설정으로 하여, 훨씬 일찍 제작된 드라마 서동요의 혜안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그리고 선화공주는 앞으로도 편히 눈감긴 글렀다.
위 부분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의 부여장은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르게 나약한 군주 포지션으로서 지못미라는 한 마디로 모든 설명이 가능하다. (쓰는 의미로도, 당하는 의미로도.) 신라에 미실이 있다면, 백제에는 사택비가 있다
그래도 최후의 순간 아들인 의자왕에게 자신보다 더 강인하고 훌륭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며 나름대로의 군주론을 유언으로 남기며 눈을 감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부성(父性)을 잘 표현했다는 호평을 듣긴했다. 그마저도 권력을 쥐고있던 사택비와 대립하고살며 사택가문의 전횡아래서 자기권력을 지키기 급급했던 무왕의 피해의식에 불과하다며 까이는평이 더많기는 했지만.....[20]
5.3 대왕의 꿈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박철호가 연기하는데 신라에 대해 파상공세를 펼쳤던 역사 속 무왕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재위 내내 신라를 호시탐탐 노릴 만큼 호전적이며 현명한 아들 의자를 매우 신임하고 있다. 위 작품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실제에 가까운 용맹스럽고 호탕한 실제 무왕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호전적인 것 뿐만 아니라 처세술과 지모 역시 뛰어나서, 아들 의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계략을 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신임하는 장수에게는 막대한 병권을 선뜻 쥐어주는 쿨가이스러운 모습 역시 보여준다.
결국 숙업인 신라 정복의 뜻을 이루지는 못한 채, 아들 의자왕에게 자신의 과업을 물려주고 눈을 감는다.
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무왕이 즉위하다
三年秋八月 신라의 아막산성을 공격하다
六年春二月 각산성을 쌓다
六年秋八月 신라가 동쪽 변경을 공격하다
七年春三月 서울에 흙비가 내리다
七年夏四月 가물어 기근이 들다
八年春三月 수에 한솔 연문진을 사절로 파견하다
八年夏五月 고구려가 송산성과 석두성을 공격하다
九年春三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三月 수 사절이 왜국으로 가면서 백제의 남쪽 길을 통과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十二年春二月 수에 국지모를 보내 고구려 공격을 논의하다
十二年秋八月 적암성을 쌓다
十二年冬十月 신라의 가잠성을 함락하다
十三年 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자 양단책을 펼치다
十三年夏四月 대궐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三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 인가가 유실되다
十七年冬十月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하다
十七年冬十一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九年 신라가 가잠성을 공격하다
二十四年冬十月 당에 사절을 보내 과하마를 보내다
二十四年 신라의 늑로현을 공격하다
二十四年春一月 당에 대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四年秋七月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五年冬十月 신라의 속함성 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六年冬十一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七年 당에 사신을 보내 명광개 등을 선사하다
二十七年秋八月 신라의 왕재성을 공격하다
二十七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八年秋七月 신라 서부 변경의 두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二十八年秋八月 당에 복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九年春二月 신라의 가잠성을 공격하다
三十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一年春二月 사비의 궁전을 중수하다
三十一年 가뭄이 들어 궁전 중수를 중단하다
三十一年秋七月 왕이 웅진에서 돌아오다
三十二年秋九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三年春一月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다
三十三年春二月 마천성을 개축하다
三十三年秋七月 신라를 공격하다
三十三年 왕이 생초원에서 사냥하다
三十三年冬十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四年秋八月 신라의 서곡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다
三十五年春二月 왕흥사를 준공하다
三十五年春三月 대궐 남쪽에 연못을 파다
三十七年春二月 당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三十七年春三月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연회를 열다
三十七年夏五月 장군 우소가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하다
三十七年夏六月 가뭄이 발생하다
三十七年秋八月 망해루에서 잔치를 벌이다
- ↑ <수서>에는 여장(餘璋)이라고 기록했는데 백제 왕성이 복성인 걸 착각한 모양.
- ↑ 그밖에 헌병(獻丙), 일기사덕(一耆篩德)이라는 이름도 있다. 출처는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무왕의 이름. 일기사덕의 경우 무왕이 어릴 때 이름이라고도 한다.
- ↑ 마한의 왕으로 알려진 무강왕과 시호가 같은 것으로 보아 마한의 무강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마한의 무강왕은 고조선의 왕 준왕이라는 설도 존재.
- ↑ 북사에는 혜왕, 법왕의 존재에 대한 기록 없이 바로 위덕왕에서 무왕으로 왕위가 이어진걸로 기록되는데, 여기서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인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혜왕, 법왕이 워낙 재위기간이 짧기에 북사 편찬자들이 이들의 존재를 모른 채, 무왕이 위덕왕의 아들이겠거니 여기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 ↑ 왕족이 아니고 귀족?이라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왕위계승권과 거리가 먼 왕족들은 분가하여 독립된 가문을 세우는 경우가 세계사를 막론 하고 왕왕 있었다. 물론 왕족이 아닌 귀족으로 신분이 격하되자만 엄연한 왕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왕실로부터 은근히 견제도 많이 당하고 왕의 직계 혈통이 단절되면 해당 가문의 적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 ↑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무왕을 위덕왕의 자제가 아닌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먼 익산출신의 방계왕족이라는 주장도 제기한다.
- ↑ 오우치 씨의 후손은 오우치(大內) 씨와 오우치씨 종손 가문의 방계인 도요타(豊田) 씨가 현재 존재한다.
- ↑ 《후주서(後周書)》와 《풍속통(風俗通)》과 《만성통보(萬姓統譜)》, 《성보(姓譜)》 등
- ↑ 문제는 원본인 부여문선의 비석이 현재는 소재불명이고, 실학자 이규경이 비문의 내용을 필사한 기록만이 있어서 논란이 있다. 부여관의 정체에 대해 그가 백제 법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관(寬)이라는 글자가 법왕의 이름인 선(宣)을 관으로 착각하여 생긴 오류라는 주장이 있다.
- ↑ 왕흥사와 같이 언급되지만, 현재 발굴된 부여 왕흥사는 위덕왕 대에 건축된 것이다. 이 왕흥사가 건립되었다는 언급이 위덕왕, 법왕, 무왕의 3명의 왕 항목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익산 등지에 동명이찰의 왕흥사가 건립된 것이 아니라면 왕흥사의 건립자는 위덕왕이다.
- ↑ 위덕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진 부여 왕흥사와 동명이찰이 익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무왕 대에 지어진 왕흥사는 미륵사를 언급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백제왕의 원찰을 왕흥사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다.
- ↑ 이는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 신라가 당과 더 긴밀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 ↑ 위덕왕은 노골적으로 한쪽 편을 들다 되려 위기에 빠졌다.
- ↑ 왕궁리 인근의 옛이름이 지마마지인데, 이것의 오기다.
- ↑ 다만 제석사는 창건 후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벼락을 맞고 완전히 불타버렸다.
- ↑ 애초에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축조된 익산 왕성에 대한 기록이 없다.
- ↑ 익산 쌍릉이 백제 말기 무덤이고 능산리 고분을 잇는 양식이어서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다.
- ↑ 이보영이 연기했다. 아역은 최진리. 바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f(x)출신의 설리이다. 설리는 원래 아역배우 출신으로 f(x)활동을 하기 전에 출연한 것이다. 이 드라마가 바로 데뷔작.
- ↑ 이때는 서동도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 자신이 평민인 줄 알았다.
- ↑ 여기서 무왕은 아들 의자왕에게 작중 아들의 절친한 친구이자 의동생인 계백에 대해 이야기하며 '계백은 강열한 용맹과 현명한 지혜로써 전쟁와 외교에서 승리하면서도 자애로운 인격과 의로운 성품으로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신비스런 힘을 가지고있다. 그건 오직 나라의 주인인 임금 한 사람에게만 허락되야할 능력이고 신하된 자가 가져선 안될 능력이다. 또 아비는 너의 마음속에 친동생처럼 생각하면서도 너보다 뛰어난 계백에 대한 우애심과 질투심이 동시에 존재한다는걸 아는데 네가 아비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다음엔 너의 왕권을 위해서 그 둘중하나를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계백이 만고의 영웅이 되었어도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를 제일 따르고 좋아한다면 그럴필요 없겠지만 백성들이 임금님인 너보다도 계백을 더 따르고 좋아한다면 마음이 아파도 선택을 분명히 해야할것이다. 나라의 우두머리인 임금이 중심에 있던 질서가 무너질때 모든 혼동은 시작되는 법이다. 너는 이 아비가 평생 사택가문과 권력을 두고 싸우고살며 어떤 고통과 치욕을 감내했는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지 않았더냐.' 라는 유언을 남긴다. 겉보기엔 대의명분 내세우며 멋져보이는 군주학으로 보일지 몰라도 속뜻을 풀이해보면 '백성들이 왕인 너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충신을 좋아하면 너의 왕권을 위해 그 상대가 절친한 친구라도, 또 아무리 존경받는 충신이라고 해도 죽이도록 해라. 넌 왕이니까 너의 권력을 지키기위해선 그게 정당화될수 있다.' 라는 뜻이니..... 인륜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어떠한 미사여구로 치장해도 임금의 왕권을 위해서라면 계백처럼 훌륭한 의인을 죽이는것도 불사해야 한다는 결론이 올바를 수는 없다. 물론 위덕왕과 혜왕과 법왕때까지 3대에 걸쳐 무너져가던 백제왕의 왕권을 되찾기위해 혼자서 모든 권력을 쥐고있던 막강한 사택가문과 30년이 넘게 싸우고 살며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했던 무왕의 입장에선 정말로 피해의식이라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수밖에 없는것도 사실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