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진나라 군주 | ||||
21대 희탁자(姬卓子) | → | 22대 진혜공(晉惠公) 희이오(姬夷吾)[1] | → | 23대 진회공 희어(姬圉) |
성 | 희(姬) | |
씨 | 진(晉) | |
휘 | 이오(夷吾) | |
아버지 | 진헌공 희궤제(姬詭諸) | |
생몰기간 | 음력 | ? ~ 기원전 637년 |
재위기간 | 음력 | 기원전 650년 ~ 기원전 637년 |
1 개요
진(晉)의 22대 군주. 진무공의 손자. 진헌공의 아들. 진문공의 이복 아우. 진헌공 사후 혼란에 빠진 진(晉)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진목공의 원조를 받아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진(秦)과의 신의를 저버리고 진(秦)나라와 자주 다투었다.
2 즉위 전
진헌공은 애첩인 여희의 미모에 반해 그 사이에서 희해제와 희도자를 낳고 그 사이의 장남인 희해제를 태자로 삼기 위해 희신생과 훗날 진문공이 될 희중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진혜공 희이오를 도성에서 내보냈는데, 그는 굴 땅에 봉해졌다.
그런데 기원전 655년 즉 진헌공 21년 여희의 계략에 넘어간 진헌공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의심하여, 희신생을 자결케했다.[2] 그리고 2년 뒤 여희는 후환을 뿌리뽑기 위해 그와 희중이에게 신생을 죽인 일을 원망할 뿐 아니라 신생의 패륜 음모를 뒤집어 씌우니, 결국 대비하려 했으나 형세가 이롭지 못해 양(梁)나라로 달아났는데, 그 이유는 진나라와 가까운 나라이기도 하지만, 희중이와 같이 적(狄)나라 땅으로 달아났다가 암살 혐의가 사실이라는 혐의가 짙어질 것을 우려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곳에서 양나라 군주의 딸과 결혼해 훗날 진회공이 되는 희어[3]와 딸 하나[4]를 낳았다. 이극과 진목공은 혼란에 빠진 진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를 불러들여 진나라의 군주로 끌어들였다.[5] [6] 그가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 진혜공이다.
3 즉위에 이은 배신
진혜공 원년인 기원전 650년 비정을 보내 5성을 주겠다는 약속을 철회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즉위 시키는데 기여한 공신인 이극에게 줄 분수 이북 땅을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권력을 빼앗는 개막장 짓을 했다.이게 바로 진정한 배은망덕의 표본 근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당연히 공신들에게 상도 일체 주지 않았다. 이쯤되면 왜 사는지 궁금하다. 그해 4월 주양왕이 주공 기보[7]과 왕자 당을 사신으로 보내 제의 대부 습붕과 진의 대부와 함께 그를 진나라 군주로 승인했다. 그리고 기예의 말을 듣고 공신인 이극을 죽여버렸는데, 사기에 의하면 외국에 나간 희중이와 내응할까 두려워서라고 했다.[8] 춘추좌씨전에는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두예[9]의 주해에 의하면 찬탈하지 않았다는 분명히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10] 양백준은 임금을 시해한 악인을 죽인 것이라고 알기 쉽게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죽인 뒤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형인 신생의 묘소를 개장했다. 한편 진목공의 진나라로 간 비정은 여생, 극칭, 기예 셋이 진나라에 선물을 주지 않게 하므로 이들을 유인해 진혜공을 몰아내고 희중이를 진나라 군주로 모실 것을 제안했다. 진목공이 거기에 따르자 여생, 극칭, 기예는 비정의 파당을 몰살했다. 사마천의 평에 의하면 그것 때문에 진혜공은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가지가지한다.
진혜공 4년인 기원전 647년 진혜공은 진목공에게 곡식을 팔라고 해서 진목공이 승낙했다. 진혜공 5년인 기원전 646년 진목공의 진나라에 흉년이 들자 진혜공은 대부 괵사의 말을 듣고 쿨하게 거절해버렸다.이쯤되면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그 이유가 가관인게 선물 안준김에 쿨하게 안주지 말자고.....진목공이 판 곡식 돈을 되팔아 받을 생각은 못했나보다. 거기다가 괵사의 말이 더욱 가관인게, 오히려 진목공의 진나라를 치자고 했다.이쯤되면 농담질이 아니라 진짜로 미친 것같다. 물론 간신배가 들끓으면 충신이 있는 법이라 경정이 반대했으나 진혜공은 그것을 씹었다.암군과 간신배의 자못 아름다운 만남은 개뿔! 진나라는 망했어요[11]
4 한원전투와 사망[12]
진혜공 6년인 기원전 645년 봄에 진목공의 진나라를 쳤다. 그러나 3연타로 발려 한원으로 쫓겨났다. 결국 진혜공은 가복도를 차우로, 보양을 융차의 어자로 삼았다. 그리고 정나라 말 소사로 끌게 했으나 경정은 소사가 실전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으나 진혜공은 그것을 씹어 먹었다. 9월 한씨 가문의 당주인 한간에게 정탐하게 했는데, 그는 진목공의 병력의 수는 적으나 사기가 왕성하다고 했는데, 진혜공은 어리석게도 그 말을 개무시하고 전투를 벌였는데, 소사가 놀라는 바람에 일이 꼬였다.신하 말 좀 들어라! 그러나 그는 경정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경정은 구하지 않았다.자업자득이다. 단 여기에는 실드칠 요소는 있는게, 자신의 힘만으로 부족하여 양유미, 한간, 괵사 등에게 구하게 하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그 세명이 잡으려 했던 진목공은 달아나고 진혜공만 사로잡히는 불상사가 벌어졌다.실로 아이러니 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진목공은 진혜공을 풀어주는 대신 태자 희어를 대신 인질로 요구했다. 그리고 하외 5성을 챙겼다.
진혜공 13년인 기원전 638년 병이 들었고, 그것을 핑계로 희어가 돌아왔다. 그리고 1년 뒤인 진혜공 14년인 기원전 637년 죽어 희어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회공이다.
5 평가
진목공의 원조를 받아 즉위해 5개 성을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주지 않았으며, 자신이 흉년이 들 때 진목공에게 징징대고서는 진목공이 흉년이 드니까 입을 싹 씻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원전투를 벌이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자업자득으로 자신이 잡히고, 자신 대신 자신의 세자인 희어가 인질로 잡혔다가 죽기 직전에야 아들을 볼 수 있었다.- ↑ 제의 명재상 관이오와 이름이 같다.
- ↑ 자세한 사항은 진헌공 문서를 참조하시라.
- ↑ 양백에게 점을 치게 하니 신하가 된다하여 그리 지었다.
- ↑ 그 딸의 이름은 첩이다. 절대 농담이 아니다. 역시 양백에게 점을 치게해 첩이 된다고 나와서 그리 지었다.
- ↑ 물론 공짜로 해준 것은 아니고 진혜공이 자신이 진나라의 군주가 되면 진나라의 5개 성을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 ↑ 덤으로 이극 등은 원래 희중의를 맞아들이려 했으나 희중이가 거절했기 때문도 있다.
- ↑ 주공 단의 후손
- ↑ 다만 이것은 막장짓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게, 이극이 희해제와 희도자를 죽여버리고 희중이를 끌어들이려 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삼국지에 나오는 그 두예 맞다.
- ↑ 이극이 희해제와 희도자를 죽인 바탕 위에 즉위한 것을 지적한 것.
- ↑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진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표현
- ↑ 단 후술하듯이 이 전투로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