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헌공

역대 진나라 군주
18대
진무공 희칭(姬稱)
19대
진헌공(晉獻公) 희궤제(姬詭諸)
20대 희해제(姬奚齊)
(姬)
진(晉)
궤제(詭諸)
아버지진무공 희칭(姬稱)
생몰기간음력? ~ 기원전 651년
재위기간음력기원전 676년 ~ 기원전 651년

1 개요

진(晉)나라의 19대 군주. 진무공의 아들. 진문공, 진혜공의 아버지. 진회공, 진양공의 할아버지. 곡옥백의 방계 자손[1]들을 숙청하여, 진후의 권위를 확립하였다.[2] 곽(霍)나라, 우나라, 괵나라를 멸하여, 진의 세력을 크게 떨쳤으나 말년에 여희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 아들인 희해제를 총애해 태자 신생을 죽이는 등 아들인 진문공이 즉위할 때까지 나라를 망치는 원인을 만들었다.

2 즉위 전

그는 즉위 전 당시 춘추오패로 군림하던 제환공의 딸인 제강(齊姜)과의 혼인이 약조되어 있었으나 아버지인 진무공이 차지해버렸다. NTR? 하지만 진무공은 이미 늙어 제강을 제대로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원래 혼인하기로 한 그와 정을 통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장남 신생을 얻는다. 그리고 적족 여자인 호희(狐姬)와 결혼하여, 훗날 진문공이 되는 중이를 얻는다.[3]

3 즉위에서 숙청 전까지의 행적

진헌공은 기원전 676년 진무공의 뒤를 이어 진후가 된다. 진헌공은 곡옥의 공족들을 숙청하여 자신의 권위를 다지기 전인 진헌공 5년인 기원전 672년 여융을 정벌해 여희[4]를 차지했다.이라 쓰고 내전의 씨앗이라고 읽는[5]

4 곡옥 백의 방계 자손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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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서 진헌공 8년인 기원전 669년에 사위(士蔿)의 설득을 받아 공족들을 숙청하고 취(聚) 땅에 성을 쌓아 그 이름을 강(絳)이라고 했다.[6]

그런데 춘추좌씨전에서는 보다 자세한데 진헌공은 즉위 초부터 환숙과 장백의 후손인 친척들을 숙청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다. 그 숙청은 진헌공 6년인 기원전 671년부터 시작되었다. 진헌공은 심복인 사위에게 그 일을 맡겨, 그들 중 강한 부자(富子)[7] 군공자들을 숙청했다. 진헌공 7년인 기원전 670년 유씨의 자손들을 제거했다.[8] 그리고 사기에 드러난 진헌공 8년 사위가 취읍에 성을 쌓아, 나머지 군공자들을 거기에 거주시킨 뒤 겉으로는 후하게 대접했으나, 진헌공은 같은 해에 그곳을 쳐서 함락시킨 뒤 그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5 본격적인 치세

진헌공 9년인 기원전 668년 공족들을 숙청한 사위의 공을 기려 그를 사공에 봉했다. 같은 해에 공족들 중 일부가 괵으로 달아나자 괵공은 이들의 원수를 갚아준다는 명분으로 진을 공격했으나 헌공은 이들을 능히 막아냈다. 다음 해인 진헌공 10년인 기원전 667년 괵나라의 행위에 분노한 진헌공은 괵을 치려 했으나 사위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극숙호(郤叔虎)라는 자가 적사국이 어지러움을 사위를 통해 토로하자 진헌공은 괵나라 대신에 적사를 쳐서 이겼다.

진헌공 12년인 기원전 665년 진헌공은 여희에게서 아들인 희해제를 보게 되었다.이거야 말로 레알 원상과 원담의 원가 분열 같은 진나라의 대혼란의 시작이다.

진헌공 16년인 기원전 661년 진무공이 1군을 허락받은 후 처음으로 2군을 창설하여, 상군은 자신이, 하군은 자신의 장남 신생에게 주었다. 그리고 신생에게 곽나라와 경(耿)나라와 위나라를 멸했다. 경나라 땅은 조숙에게, 위나라 땅은 필만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이 들었으므로 곽나라 군주였던 곽공 구를 불러 곽나라의 제사를 다시 잇게 허락했다.

진헌공 17년인 기원전 660년 신생에게 북적인 고락씨를 치게해 그들을 직상 땅에서 이겼다.

진헌공 19년인 기원전 658년 괵 침공을 본격적으로 기획하는데, 모사인 순식의 진언을 받아들여, 우나라에게 뇌물을 주어 길을 빌려 하는데, 우나라의 대부인 궁지기가 순망치한을 말하며 반대했으나 우나라 군주는 듣지 않고 뇌물에 혹해 들어주었다. 그리고 진헌공은 괵을 멸한 뒤 복귀하는 길에 우나라를 멸하였다. 이것이 바로 가도멸괵(假道滅虢) 일명 차도멸괵(借道滅虢)의 어원이다. 그리고 우공과 그 신하들을 진(秦)나라로 시집가는 딸 목희의 잉신으로 삼았다.[9]

6 여희 때문에 꼬인 진나라

여희는 신생의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하였는데,[10] 그래서 신생과 헌공을 이간질했으나 그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치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비밀리에 사통하는 광대를 통해 이극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권해 성공했다. 진헌공 21년인 기원전 656년 신생은 어머니인 제강의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헌공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희는 헌공이 사냥 나간 사이에 독을 치고, 헌공이 오자 헌공의 눈 앞에서 개에게 먹여 개가 죽는 것을 보자 헌공을 크게 노하여 태부 두원관을 사형에 처하고 신생에게 자결을 명했다.

진헌공 22년인 기원전 655년 진헌공은 희중이를 죽이라고 명했다.[11] 하지만 희중이는 진헌공이 보낸 자객에게 소맷부리가 잘리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적나라로 달아난다.

진헌공 23년인 기원전 654년 진헌공은 희이오마저 죽이게 하니 희이오는 양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그 해 법령을 만들어 국내에 공족을 남겨두지 못하게 했다.

진헌공 25년인 기원전 652년 적을 공략했으나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진헌공 26년인 기원전 651년 제환공이 규구라는 곳에서 연 9번째 회맹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이미 끝나버렸는지 주왕의 사자인 재공에게 만류를 받았고 그게 한이 되었는지 아니면 지병이 있었는지 그 병 때문에 죽을 것을 안 진헌공은 태자인 해제를 순식에게 맡기고 병사한다.

7 후일담

그리고 순식은 진의 재상으로서 희해제를 진후로 모셨으나 이극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극은 그 뒤를 이은 희탁자마저 살해했다. 그리고 이극은 희중이를 불러 진후의 자리를 잇게 하려 했으나 희중이가 거절하여 결국 희이오를 불러 그를 진후에 앉히니 그가 바로 진혜공이다. 때는 기원전 650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면서 진목공의 도움을 받았고, 그 도움의 대가로 5개 성을 주기로 했으나 진혜공이 입을 싹 씻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기원전 647년 진에 흉년이 들자 진목공에게 도움을 요청해 곡식을 지원받았으나 기원전 646년 진목공이 다스리는 진나라가 흉년이 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들어주기는 커녕 한원전투를 일으켰다가 처참하게 박살나고 말았으며, 진혜공은 진목공의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진회공이 되는 희어를 볼모로 하는 대가로 진혜공이 풀려났지만 기원전 637년 죽고 진에서 빠져나온 희어가 진후가 되니 그가 진회공이다. 그러나 그 진회공은 진문공이 될 백부 희중이를 두려워 하여 그를 따라간 신하들의 가솔들을 죽이는 초강수를 두나 그것이 무리수가 되어 내쫓기고 진목공의 지원을 받은 진문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 봉건제가 대세였던 당시 특성상 범위에서 보면 계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진팔왕의 난이나 전한오초칠국의 난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들을 숙청해야만 했다.
  2. 그 시호와는 달리 일단 진나라는 후국이다.
  3. 진문공은 호희의 남매인 호언과 호모 형제의 도움을 받아 진나라 군주 자리에 오른다.
  4. 여희는 여융족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5. 근데 이게 취소선을 그었어도 절대 빈말이 아니다. 진헌공이 여희의 계략에 넘어가 신생을 죽인 탓에 아버지와 자신이 만든 강대한 진나라가 혼란에 빠져 진문공이 즉위할 때까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6. 여기가 진나라가 2개 성읍이 남을 때까지 남은 성 중 하나다.
  7. 절대 돈 많은 부자가 아니다. 공족을 일컫는 명칭일 뿐.
  8. 이들 또한 공족으로 보여진다.
  9. 참고로 그 대열에 노현자 백리해(百里奚: 성이 백리씨.)가 있었다.
  10. 사실 여희의 공작으로 신생이 전장에 나가 싸웠다.
  11. 단 이건 명백한 병크인게, 신생 건이야 독살하려 했다는 여희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서 이해할 건덕지는 있지만, 진문공진혜공은 당시에 드러난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