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

1 축구선수

2011_ch.jpg

이름최현(崔炫)
생년월일1978년 11월 7일
신체조건193cm, 93kg
국적대한민국
출신지부산광역시
포지션골키퍼
학력해운대초-광안중-동아고-중앙대
소속팀부천 SK(2002~2005)
제주 유나이티드(2006-2007)
경남 FC(2008)
부산 아이파크(2008-2010)
대전 시티즌(2011~2012)
종교불교

부산 출신의 축구선수로서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중앙대졸업하고 2002년에 부천 SK에 입단해서 2007년 제주 시절까지 6년을 보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한 후 2008년 경남에 입단했으나 시즌 중 신승경과 트레이드되어 고향팀 부산으로 가게 되었고, 2009시즌에 개인 최다출장 기록을 세우며 부산의 1선발 골키퍼로서 나름 활약했으나 부상중임에도 무리한 출장탓에 2010년엔 단 1경기 출장에 그쳤다. 시즌후 부산에서 방출되었으나 2011시즌 시작전에 대전에 입단했다. 2012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여담으로 경남만 만나면 대량실점을 해서 경남팬들이 상당히 고마워한다고 한다.

2 다이스(웹툰) 등장인물

최현(다이스) 항목 참조

3 북한의 군인

1907년 음력 6월 6일 중국 길림성 훈춘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최득권이다. 그의 부친은 최화심(崔化心)으로 당시 독립운동을 펼쳤던 홍범도 부대의 일원이었다. 훗날 북한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의 동료들 가운데서도 최현은 유일한 독립군 가문 출신인 것. 그 뒤 간도에 돌아와 민족주의 성향 단체인 동만청년총동맹에 가입했다. 1925년에는 중국 군벌에게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2년까지 연길의 감옥에 복역했다.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최현은 출소한 해 7월 연길현에서 적위대에 가입했다. 이듬해 9월 김일성과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활동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최현은 김일성의 눈에 들어 유격대 내에서 빠른 승진을 한 결과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이 됐다. 최현은 동북항일연군 제1단장으로 김일성과 함께 1937년 보천보전투에 참가했으며 광복 이후 김일성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왔다.

한국전쟁 전에는 내무성 산하 38선 경비여단장,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이 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제2군단장이 되어 인민군 후퇴 시기 UN군 배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후 1956년 6월 내각 민족보위성 부상, 1958년 4월 내각 체신상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말에 김창봉, 허봉학, 최광 등이 숙청되면서 민족보위상(후에 인민무력부로 개칭)이 되었다. 1972년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76년 5월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준 뒤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6차 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과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나 1982년 사망했다.

처음에는 고속 승진을 했으나 이후 후배인 오진우에게 인민무력부장을 넘겨주는 등 점차 뒤쳐졌는데 이것은 그가 제대로 된 학교교육을 받지 못해 군사적인 것에만 맴돌아 논공행상에서 좀 뒤쳐져 있던 탓도 있고, 거기다가 성격이 직선적인 것도 한몫했다.[1]

참고로 김정일이 수령자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최현의 도움이 있었는데 1972년 김일성의 회갑 잔치에서 빨치산 원로들에게 김일성이 "내 아들이 두셋 있는데 누가 다음으로 좋겠나?"하고 물었다. 근데 원로들은 김평일을 점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는데 김일성의 바로 왼편에 앉았던 최현이 "수령님, 당연히 수령님 장손이 해야죠. 장남이 하지 누가 합니까?"라고 외치자 김일성이 "그래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라고 하자 그야말로 분위기가 경직되어 확정된 것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후계자 문제 잘못 거론했다가 집안이 줄초상 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아무도 반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훗날 김정일은 최현이 죽자 그를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묻어 은혜를 갚았다고.[2]
북한의 2인자인 최룡해가 최현의 아들이다.

4 야구선수

  1. 김일성의 집무실에서 권총을 차고 들어간 유일한 인물이라고 할 정도
  2. 혁명열사릉은 우리나라로 치면 현충원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