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나이티드/유공과 SK 시절

<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에서 넘어옴)

1 소개

제주 유나이티드는 1982년 유공 코끼리 축구단으로 창단하여 그 후 부천 유공, 부천 SK 이렇게 구단명칭과 연고지가 바뀌어 오늘에 이르며 이 시절 K리그를 한차례(1989년) 우승하였다. 2006년 제주 유나이티드로 개명하면서 기업명을 구단명치에서 완전히 배제했는데 이로 인해 축구팬이 아닌 사람들은 과거에 유공 코끼리와 부천 SK는 들어봤는데 이 구단이 현재 제주도로 가서 제주 유나이티드가 된 줄 모르는 사람들도 종종 볼수 있다.

2 시기별

2.1 유공 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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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 코끼리
1982시즌1983 시즌1984 시즌1985 시즌1986 시즌1987 시즌1988 시즌1989 시즌1990 시즌1991 시즌1992 시즌1993 시즌1994 시즌1995 시즌

1982년 유공 코끼리 축구단이라는 명칭으로 대한민국 두번째 프로축구단으로 창단하였다. 1983년 슈퍼리그 참가시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연고지로 참가하였고 1987년 인천·경기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를 이전하였다.

김정남 감독이 이끌던 시절 호성적을 냈었고, 1989 시즌에 이 팀의 유일한 리그 우승을 일궈내며 현재까지도 유일한 우승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유공 코끼리 동대문 시절 마지막 해인 1995년 당시 같은 서울 연고팀들이었던 일화 천마 (현 성남 FC)와의 동대문 더비 경기

이후 1996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부천시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서울 연고지의 유공 코끼리 축구단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1]1996년부터는 부천 유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공 코끼리 마지막 해인 1995시즌 발레리 니폼니시 [2] 감독이 부임하면서 니포 축구가 시작되면서 리즈 시절이 시작된다.

2.1.1 당시 주요 선수

2.2 부천 유공 / 부천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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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SK
1996 시즌1997 시즌1998 시즌1999 시즌2000 시즌2001 시즌2002 시즌2003 시즌2004 시즌2005 시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시행되어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면서 부천 유공으로 구단명칭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경기장도 없던 도시를 연고지로 선택하면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는 계속 서울에 머물며 목동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루었는데 원래 부천에서 창단하였거나 혹은 부천 연고지인데 경기장 사정 때문에 잠깐 서울 목동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기존 서울 연고지였던 팀이 구단명칭만 부천으로 홈경기는 계속 서울 목동운동장을 사용하는 식이었다 즉 서울 연고팀이지만 잠정적으로는 부천 연고지 팀이 될거라는 그러나 계속 서울에 주저앉아서 서울 연고팀이 될 수도 있고 아무튼 이 때문에 당시 목동 FC 등으로도 불리고 정체성이 모호한 구단이 되어버렸으며 공중파 방송에서는 그냥 서울 연고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상에서 간간히 볼수 있는 목천이라는 용어가 이를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명목상이지만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 후 부천시의 시조였던 보라매를 마스코트로 정한다는 움직임이 있어서 잠깐이지만 부천 유공 보라매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996년 리그컵을 우승하였으며 1997년 10월 부천 유공에서 부천 SK로 구단명칭을 변경하면서 엠블럼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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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블렘의 빨간색은 SK주식회사(현 SK에너지), 파란색은 SK텔레콤[3]을 상징. 단, 이것은 기업 이미지를 갖고 한 비공식적인 해석이고 당시 공식 홈페이지에서 밝힌 의미는 검은색은 힘, 청색은 정직, 적색은 정열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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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지도자로 칭송받는 발레리 니폼니시의 지휘 아래 뻥축구에서 벗어난 패싱 위주의 '니포 축구'는 한국 프로축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부천 SK 시절을 상징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세련된 축구로 인기를 얻었던 수원 삼성 블루윙즈안양 LG 치타스와 수도권 라이벌리를 이끌어 K리그 돌풍을 일으킨 주역었는데, 당시 축구팬들은 '부천 SK는 표값이 아깝지 않은 축구를 한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물론 니폼니시 시절에는 우승과는 인연이 멀었으나[5], 최강의 플레이메이커 윤정환을 주축으로 김기동, 이을용, 故 윤정춘의 최강 허리 라인에 이임생, 조성환, 강철 등의 수비진, 부천 FC 1995의 흑역사 타깃맨 곽경근, 염색머리로 유명했던 조커 이성재, 특이한 모자로 눈길을 사로잡았던 골키퍼 이용발 등 실력에 개성 넘치는 선수들이 많았던 팀으로 기억된다. 그밖에 김한윤, 남기일 등도 이 시절의 주요 선수.

그러나 니폼니시 감독과 후임인 조윤환 감독 사임 이후 영광의 주역이 하나둘 팀을 떠나면서 부천 SK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부천 시절부터 계속된 모기업의 투자 부재는 연고 이전 이후로도 한동안 개선되지 않아 상위권 도약이 요원한 상태였다.

이렇게 1990년대 말 K리그의 인기팀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성적도 어느 정도 내던 부천 SK였지만, 모기업의 투자 감소로 점점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이 야기되기 시작한건 IMF 외환위기 이후. SK그룹에서 운영하던 스포츠팀들이 줄줄이 해체되었다.[6]

그래도 축구단은 2000년엔 K리그 준우승으로 저력을 보여줬고 2001년에는 드디어 부천종합운동장으로 이전하면서 진정한 부천 연고팀으로 부천 시대를 열었지만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축구단은 큰 폭풍은 피하기는 하였지만 모기업 지원금이 줄어듬과 동시에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선수 연봉에 대해 경영효율화란 명분하에 새로운 고과평가제도가 실시되었다.[7] 또한 신임 금지어강성길 단장은 축구단 운영에 매우 비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인물[8]이었는데 홍보효과도 없는 축구단은 최소비용으로 운영하겠다.가 이 양반의 축구 철학이었다. 이런 양반이 단장이 되었으니 축구단에 투자는 기대할 수 없었고, 쓸만한 선수는 다 팔아먹고, 있는 선수로 돌려막으면서 그냥그냥 운영하는 팀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이 당시 부천 SK 구단 홈페이지는 다른 구단들의 홈페이지와 비교했을 때 디자인과 구성 수준이 거의 개인 홈페이지를 연상시킬만큼 좋지 않았다.

여기에 똥누는 놈 주저앉히는 계기가 된 결정적인 사건이 소버린 사태. 2003년 소버린 사태로 인해 그룹의 존망 위기에까지 내몰린 SK는 축구단 매각매각이지 해체가 아니다!을 검토했으며 실제로 부천시에 무상기부, 중국 스더그룹[9]에 매각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흐지부지되었다.

그룹 사정이 나빴던만큼 축구단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이미 그 전 시즌 2002년에 뜬금없이 최윤겸 감독을 사실상 경질하고 이을용의 터키 진출과 연관이 있었는지[10] 터키 출신의 트나즈 트르판 감독을 영입했는데, 당연히 멀쩡히 팀을 지휘하던 감독을 갑자기 경질하니 선수단에 동요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단에서는 언론을 통해 최윤겸 감독을 경질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축구팬들은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트나즈 트르판 감독을 터키 국가대표 감독과 페네르바체 SK 감독을 한 명장이라고 추켜세웠지만 터키 국가대표 감독으로는 1988년에서 1989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에서 오스트리아 동독을 상대로 선전하긴 했으나 결국 3위로 탈락했으며 페네르바체 감독으로는 1991년 잠깐 있었으며 그 외의 팀에선 길어야 3년을 넘기지 못하고 터키 국내에서도 저니맨 신세였다. 이런 사람이 당장 문화가 다른 곳에 오니 적응하기가 쉬울 리가 없었다. 트나즈 감독 체제에서 첫승은 5경기만에 거뒀으며 2002 시즌 마지막 경기는 수원에게 5-0으로 완패당하며 2003년 시즌의 불안한 행보를 예고했다.

2003년에도 위에 언급된 운영방침과 모기업의 어려움의 영향으로 트나즈 감독의 강력한 잔류요구에도 이임생, 김기동이 이적했으며 곽경근까지 이적하며 팀의 구심점이 될 고참 선수들이 계속 나가 팀 분위기가 흉흉했으며 트나즈 감독의 영향으로 영입된 터키 리그 출신의 외국인 선수들은 적응 실패인지 여관방에서 라면 먹는데 잘 할 리가 좋은 기량을 보이지 못하며 개막전부터 내리 6연패를 당하며 결국 5월 트나즈 감독이 경질되고 하재훈 감독 대행으로 가서 7월 달에야 개막전의 상대였던 부산 아이파크를 상대로 원정에서 어렵게 2-1로 첫승을 거뒀다. 이 날 승리는 2002 시즌까지 포함해서 무려 22연속 무승[11] 끝에 거둔 승리였다.
결국 2003년 시즌은 단 3승만 거두는 등 최악의 한해를 보냈다.

어찌저찌 소버린 사태가 잘 수습된 이후 2004년부터는 축구단 정상화를 위해 정해성 감독을 영입하고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김정수, 조준호 등을 영입하는 등 본격적인 정상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2004 시즌에는 FA컵 준우승을 거뒀다.
다만 FA컵 준우승 축하연 겸 송년회에서 강성길 단장이 원정에서 이기면 SK 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진다는 발언과 축구단 해체라는 발언을 하며 축구단에 비관적인 태도가 언론에 또 전해져 축구팬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일었다. 오히려 이 발언으로 축구팬들의 SK 그룹에 대한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 부천SK, 준우승 선물은 축구단 해체?, 부천 해체 발언에 네티즌들 격분
그래서 인근 지역의 신생 시민구단인 인천 유나이티드 안종복 단장의 운영방식과 비교되기도 했다. 프로축구단 두 단장,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하지만 이제 와서 보면.....
이듬해인 2005 시즌에는 단장이 바뀌고 팀이 더욱 정비되어 플레이오프 진출을 눈앞에 두고 탈락하기도 했으며[12] 평균관중도 대폭 상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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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말에서 2006년 연고이전 전까지 사용된 엠블렘

그런데 엄청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2006년 2월 2일 오전. 공식 홈페이지에 제주도 서귀포시로 연고이전을 한다는 발표를 한다. 연고이전의 이유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클럽하우스 문제였다. 당시 부천SK는 인천광역시 용현동에 위치한 SK저유소 부지내에 위치한 클럽하우스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 부지가 재개발이 됨에 따라 새로운 클럽하우스를 구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부천시측에 새로운 클럽하우스 건설을 위한 부지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부천시에서는 단칼에 거절, 전국 최고의 인구밀도와 도시화를 자랑하는 부천시에 클럽하우스 건설 부지를 구입하는 것은 비용이 한두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무리 대기업인 SK라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 문제를 고심하던 SK는 축구단을 부천시에 유지, 제주도로 연고이전, 제3지역으로 연고이전의 세가지 방안을 놓고 외주용역조사를 하였으나 결국은 클럽하우스 부지 무상제공을 떡밥으로 던진 서귀포시로 연고이전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현재의 제주 유나이티드가 되었다.[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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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부천 SK가 영원하다고는 안그랬다.

2.2.1 당시 주요 선수

3 관련 항목

  1. 단, 홈구장은 부천종합운동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목동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썼기 때문에 사실상 2000년까지는 무늬는 부천 연고팀이지만 실제로는 서울 연고지 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2.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카메룬을 8강까지 이끌었던 명장이었다.
  3. 당시 SK텔레콤의 CI 컬러는 파란색이었다.
  4. 초창기엔 당시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에 따라 'Bucheon'이 아닌 'Puchon'으로 썼다.푸촌?! 그리고 공식 지역명 표기 변경과 함께 엠블렘도 덩달아 바뀌었다. 그리고 연고이전 직전인 2006년 초에는 SK그룹 CI 변경으로 엠블렘의 SK 또한 현재 SK의 CI로 변경되었다.
  5. 그래도 1996년 리그컵 우승을 했다.
  6. 여자농구 SK증권 농구단과 여자배구 SK케미칼 배구단이 대표적이었다. SK증권은 1998년 2월에 농구대잔치 우승을 한 다음 날에 해체라는 어이가 가출한 발표로 여자농구팀의 연쇄 해체를 이끈 시발점이었으며, 여자배구 역시 슈퍼리그 준우승을 기록한 준수한 팀이었으나 역시 1998년 4월에 해체가 됐다. 당시 두 팀의 선수들이 현재는 각각 여자농구와 여자배구의 레전드급 선수들이 있었고, 이 때문에 SK그룹에 대해 악감정을 가진 올드 스포츠팬들이 많다.
  7. 기본급은 줄이고 출전수당을 대폭 늘리는 방식이었는데(즉, 먹튀를 막겠단 뜻) 주전급 고참 선수들은 이에 반발했으며 주장 강철을 비롯한 많은 고참급 선수들이 팀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8. 선수들이 전지훈련 갔을 때 열악한 숙소 문제로 하소연을 하자, "다음번엔 여관방으로 잡고 식사도 라면으로 때워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더구나 이 인간, "전국에 SK정유소가 몇 개인데 축구단 따위로 홍보하느냐?"...라는 소리까지 지껄였다.
  9. 축구팬에게 익숙한 중국 리그의 강팀 다롄 스더 FC를 소유하던 그룹이었다. 그룹의 막대한 지원을 업은 축구단은 중국 슈퍼리그에서 무려 8번이나 우승하며 최다 우승 기록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룹의 회장이 보시라이와 너무 가까운 사이였던 탓에 보시라이의 실각과 함께 비리까지 까발려지며 그룹이 몰락하고 회장은 2015년 12월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축구단도 2012 시즌이 끝나고 다롄 아얼빈(이후 다롄 이팡으로 이름이 바뀜)과 합병되어 사라졌다. 이후 다롄 스더의 팬들과 시민들이 서명, 모금운동을 이어가면서 1년 만에 다롄 챠오유에란 이름으로 재창단하는데 성공. 2014년 을급 리그 참가 2년 만에 갑급 리그로 올라서며 다롄 이팡과 더비전을 벌이게 되었다.
  10. SK 그룹 이름이 터키 스포츠팀들에 많이 붙는 SK라는 이름과 어쩌다가 맞았고 2002 월드컵 터키 형제국가 드립붐을 타서 터키에 진출할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2002 월드컵 당시 (원래 목적은 중국에 사업 진출 관련으로 그랬겠지만) SK 그룹 인사들이 중국과 터키 경기를 관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룹에선 터키 진출을 당장하지는 않았고 2005년부터 최태원 회장이 터키를 방문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며 2010년대 들어서 터키에 진출하며 성과를 보이고 있다. 1, 2
  11. 1997년 대전시티즌과 2006년 부산 아이파크와 타이 기록이었다. 이 기록을 깬 건 2008년 23경기 연속 무승의 광주 상무였다.
  12. 정규시즌 최종전 대전과의 홈경기에서 최철우의 헤딩 선제골로 앞서나가며 플옵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왔으나 경기 종료 5분 전 대전 알리송이 각도가 없는 위치에서 지른 개사기스러운 아웃프런트 감아차기 슈팅에 일격을 당하며 고춧가루를 얻어맞았다. 알리송의 동점골은 시즌 종료 후 KBS 비바K리그에 의해 해당 시즌 베스트골 반열에 이름을 올렸으며, 경기 자체도 선수들의 투혼이 빛났던 명승부로 회자된다.
  13. 아이러니 하게도 연고지 용역조사 결과는 부천시 연고 유지가 최선이라고 결과가 나왔다.
  14. 여담으로 연고 이전 당시 기자가 "제주 있다가 나중에 또 연고 이전 합니까?"...라는 질문에 구단 측이 "한국에서 안 되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갈 수도 있는 거 아니냐."...는 식의 발언을 내뱉은 적도 있었다.
  15. 포지션은 골키퍼. 배우로 유명한 그 조한선이 맞다. 부상으로 인해 일찍 은퇴를 하고 배우로 전향을 해서 축구선수로서 남긴 족적을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