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자영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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逐字靈感說
verbal inspiration

1 개요

성서(성경)이 기록된 것이 영감(靈感)을 받아서 쓴 것인데 그 영감의 방법이 축자적인 방법이라는 것. 축자(逐字)라는 단어의 뜻이 글자를 옮겨적다는 뜻이기 때문에 다른 용어로는 기계적 영감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한국의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들은 이 용어가 기계적 영감설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에 따르면 아래 설명 중 일부는 틀린 것이 될 수도 있다.
성서의 기록이 신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인(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모두가 동의하는 것[1][2][3]인데 그 영감의 방법에 대한 해석은 교파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축자영감설은 그 해석 중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해석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글자를 옮겨적은 것이기에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신이 직접 골라서 알려준 글자이기 때문에 애초에 성경 자체의 단어에도 오류[4]가 있을 수 없다는 것. 애초에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나온 교리가 바로 이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이다. 단순한 설정으로 볼 수 없는게 이걸 인정하는 순간 성서비평학이나 역사비평학과는 타협할 여지가 없어지고 실제로 한국의 교단들이 분열한 주요 이유도 모두 여기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1.1 축자영감설의 종류

단순히 기계적으로 받아적은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적으로 받아적게 한 방법에 대해서도 근본주의자들의 견해가 갈린다.

  • 축자영감된 비중에 따른 분류
    • 완전축자영감설 : 두말할 것 없이 성서 전체[5]가 100% 축자영감되었다고 믿는 경우. 이 항목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주로 이쪽이다.
    • 부분축자영감설 : 전체적인 맥락은 축자영감되었으나 일부 단어나 문화적인 부분은 축자영감되지 않았다고 보는 부분.
  • 축자영감의 방식에 따른 분류
    • 받아쓰기 : 성령이 옆에서 불러주고 사람이 받아적었다는 것.
    • 기계적 영감설 : 옆에서 불러주면 틀리게 받아적을 수 있으므로 아예 성서 저자의 팔을 붙잡고(...) 그 팔을 움직여서 기록하였다는 것. 어찌보면 뜨악할 수준의 얘기지만 의외로 이걸 지지하는 목사들이 많다.
    • 성령감동축자영감설 : 쉽게 말해서 성령에 신들려서(빙의?) 성령이 지시조종하는대로 썼다는 것. 일반적인 성령감동설[6]과는 다르게 개인의 의지나 사고방식이 100%배제된 상태에서 썼다는 것이다.

2 비판

2.1 당시의 성서와 지금의 성서는 다르다

일단 디모데후서나 다른 신약성경이 씌여질 당시의 시기는 지금의 성경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애초에 신약성경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정경이라는 개념이 잡힌 것은 이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난 시기에 잡힌 것이라 이 당시의 성서 개념만으로 접근한다면 구약만이 여기에 해당된다. 즉 가장 보수적인꼴통 완전축자영감설을 인정하더라도 이것은 당시 개념상 구약성경에만 한정된 것이므로 신약은 여기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전체 66권[7]중에서 신약 27권이 빠진 39권만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 이 방식으로 본다면 영감설을 언급한 디모데후서는 영감되지 못한 성서일 수도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미래에 신약성경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믿어버리면 편하다

시나이 산 수도원에서 발견된 2세기경의 성경(이를 '시나이(시내) 사본'이라 한다)을 살펴보면 세월에 따라서 계속해서 성경 내용에 수정을 가한 부분들이 보인다.이 성경이 처음 발견된 19세기 유럽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고 이 성경에서 후대에 수정을 가한 부분들을 제거하고 원본 그대로 번역한 성경이 나오자 거리에서 폭동이 날 뻔했다고 한다. 이유는... "내가 제일 좋아하던 성경구절은 이런 모습이 아니야!!"[8] 이것 때문에 이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나중에 발견된 고대의 사본을 사탄이 고쳐쓴 사탄의 사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지부조화.

2.2 성서 내용상의 문제와 번역의 문제 등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축자영감되었기 때문에 성경이 오류가 없다라는 부분을 확대해석하여 과학적인 영역에까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해 버리면 심히 골룸해진다. 단적인 예로 구약에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라고 기록[9][10]된 것만 봐도 그렇다. 좀 더 나가면 천동설까지 가게 된다. 자세한 건 성서무오설 참조.
그리고 성서비평학상으로 보면 애초에 성서의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성경의 글자 수 만큼의 사본은 존재한다.) 과연 본문이 아닌 사본도 영감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성경의 사본의 내용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 내용들이 존재한다. 성경상에 없음이라고 표기된 부분이다 대괄호 처리한 부분들이 바로 사본들끼리 다른 내용이 존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대표적 사례로 마가복음항목 참조하자 긴 결말과 짧은 결말이 이 문제로 생긴 것이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가 더해지면 머리가 더 아파진다. 아예 코란처럼 번역을 금지하지 않는 한 원문의 내용과 미묘하게나마 달라지는 번역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 부분은 성경/번역항목을 참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2.3 애초에 이 해석법은 전통적이지도 않고 정통적이지도 않다.

축자영감설을 부정하면 현대주의나 자유주의에 물든 이단이라는 식으로 거품을 무는 자칭 정통 종파 신자들이 있는데 개소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1권 1문제 9절 및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9절: 성경은 은유적, 상징적 화법을 쓰고 있다.

10절: 성경은 한 구절안에서 문자적, 알레고리적, 도덕적, 전의(轉義)적, 신비적 의미 등을 동시에 내포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개신교에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라서 찜찜하다면, 교부 시대의 관점을 보자. 그리스도교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공인 받기 한참 이전인 2세기에 이미 오리게네스가 알레고리 해석법을 성경에 도입했다. 물론 오리게네스는 관할 주교의 허락 없이 다른 주교에게 서품을 받은 문제 때문에 당시에는 영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법을 발전시켰고, 교부 시대의 가장 명성있는 학파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따라서 알레고리를 혐오하는 쪽이야말로 오히려 비전통적이고 비정통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2.4 성경 내부에서의 모순점

신이 마음이 제멋대로 변하지 않은 한 팔을 붙잡고 성서 저자를 타자기삼아 쓴 것이 맞다면 앞뒤가 맞아야 정상일 것이다.
이에 대한 부분은 성경/논란항목을 참조하자.

3 다른 영감설들

  • 성령감동설
  • 유기적 영감설
  • 문학적 영감설

4 같이 보기

근본주의
성경
성서무오설 :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바로 이 축자영감설이다.[11]
신사도 운동
예수쟁이
장 칼뱅 : 사실상 축자영감설의 시초로 본다.[12]
장로회 : 칼뱅주의자들의 후예로 보면 된다.
영감

  1. 근거는 디모데후서 3:16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2. 이외에 갈라디아서 3:16이나 베드로후서 1:21에도 이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다만 디모데후서가 워낙 유명하니까 왠만한 기독교인이라면 디모데후서가 먼저 떠오르지 수련회 때 요절 암송하면 꼭 들어간다. 밥 먹으려면 외워라
  3. 천주교 미사나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 성경 강독하고나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끝 맺는다.
  4. 이 오류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신학적 오류가 되고 확대해석하면 성서에 나온 모든 것이다. 과학적 오류까지 포함해서
  5. 대체로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강조한다.
  6. 성령이 내용상의 감동은 주었으나 개인의 사고와 의지는 남아있고 그게 성경 기록에 영향을 주었다는 입장.
  7. 개신교 성서 기준
  8. 심지어 아예 없어져 버린 경우도 있다(...)
  9.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11:6) 부분인데,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즉, 전지한자가 모르는게 있다는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10. 되새김질의 정의를 다른것까지(토끼가 소화가 덜된 똥을 다시먹는것) 포함하게 정의한다면 해결 가능한 문제긴 하지만, 이 경우 미래에 이런 토론이 일어날것이며 결과적으로 성경에 반감을 가지게 될 사람이 발생하는것은 어쩔수없다. 그리고 결국 신은 전지자이므로 이런 논란이 일어날것을 알고서도 이렇게 표기했다는게 된다
  11. 그러나 유기적 영감설이나 신앙적 관점에 국한한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계적 영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그러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칼뱅은 신학적 관점에서의 성서무오설을 주장했지 모든 자구에 대한 성경의 무오를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칼뱅이 주장한 것은 유기적 영감설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