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에서 넘어옴)

Gaius Cassius Longinus기원전 85년 10월 3일 ~ 기원전 42년 10월 3일

1 개요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활동한 원로원 의원이자 무장. 무장으로의 재능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으나 그의 이름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기억하게 만든 것은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3월 15일의 주역이었기 때문.

2

2.1 초기

대단한 집안 출신도 아니었던만큼 그리 썩 많은 것이 알려져있지는 않다.[1]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유년기 시절 술라[2]의 아들과 술라의 통치에 관해 키배를 뜨면서 독재자를 싫어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는 기록이 남긴 하지만 <플루타크 영웅전>이 1차 사료가 아니라 이 시기로부터 100년 이상 지난 뒤에 작성된 2차 사료인만큼 신뢰도는 글쎄... 이후 로도스로 유학을 갔으며 32세였던 기원전 53년에는 크라수스와 함께 카르헤 전투의 기병 지휘관으로 참전한다.[3]

2.2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전면전이 일어나자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폼페이우스 파에 가담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형이었던 루키우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활약한다.[4] 폼페이우스 파에서 해군을 지휘하면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파르살루스 회전을 끝으로 내전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난다. 물론 이후에도 잔존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등지에서 이따금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시우스는 이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로마로 귀환한다.[5]

2.3 카이사르 암살과 그 이후

RSC_0004a.6.jpg
암살 이후 그리스에서 스스로 발행한 화폐. 왕관으로 상징된 자유를 자기자신의 머리에 씌웠다
내전이 종결된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은채 로마에서 칩거하던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부르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을 주도한다.[6] 그렇지만 기쁨은 너무나 짧아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권력을 쥐고[7] 대중들 역시 암살자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8] 결국 시리아 총독이라는 형태로[9] 로마를 떠난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제2차 삼두정치가 수립되고 삼두정치 세력들이 카이사르의 복수를 명분으로 곧 자신을 공격할 것이 명확해지자 브루투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대규모 군대를 조직한다. 그렇지만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에게 발리면서 망했어요. 결국 이 전투 이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 사실 개나소나 다 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년시절조차 그렇게 대단히 알려져있는 것이 없는 실정이니 롱기누스 정도야 뭐...
  2. 당시 로마를 철권통치하던 독재자
  3. 전투 막판 패배가 자명해지자 기병 500기만을 거느리고 탈출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때 나머지 패잔병을 버렸기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두고두고 그를 등용은 하지만 전폭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4. 사실 가족들끼리 지지세력이 엇갈리는 이런 현상은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굉장히 잦았다. 당장 열렬 공화주의자였던 키케로의 아들도 카이사르 지지파였다. 물론 키케로가 기겁을 하고 그리스로 끌고 데려가긴 했지만...
  5. 내전 시기 관용으로 유명했던 카이사르인만큼 당연히 원로원 의석도 유지됐다...
  6. 통상 암살계획을 주도한 것은 카시우스지만 암살 이후 암살자들의 리더로 부상한 것은 브루투스라고 얘기된다.
  7. 나중에 카시우스와 키케로는 '그 날 안토니우스도 같이 죽여버렸어야 하는건데...' 라고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8. 대놓고 암살자들을 '애비를 죽인 놈'이라고 불렀다. 안토니우스의 뒷공작도 있었겠지만 카이사르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도 원체 엄청났기에...
  9. 말이 좋아 총독부임이지 사실상의 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