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감독) | |||
세리그 감독 | 파리그 감독 | |||
50px | 마나카 미쓰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50px | 타카하시 요시노부 (요미우리 자이언츠) |
60px | 알렉스 라미레스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 60px | 모리 시게카즈 (주니치 드래곤즈) |
50px | 가네모토 도모아키 (한신 타이거스) | 50px | 오가타 고이치 (히로시마 도요 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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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
이제는 쿄진의 감독
요미우리 자이언츠 No.24 | |
다카하시 요시노부 (高橋由伸) | |
생년월일 | 1975년 4월 3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치바 현 |
포지션 | 외야수, 1루수 |
투타 | 우투좌타 |
체격 | 180cm, 87kg |
프로입단 | 1997년 드래프트 1위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8~2015) |
지도자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2015)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2016~) |
요미우리 자이언츠 역대 감독 | ||||||
하라 다쓰노리(2006~2015) | → | 다카하시 요시노부(2016~) | → | 현직 |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이자 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를 대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여담으로 요미우리 역대 감독 중 최연소로(40세) 부임한 감독이다.
교진의 박용택
2 선수 생활
게이오기주쿠대학시절 도쿄 6대학 리그 역대 최다인 23개의 홈런을 쏘아올리는 맹활약으로 주목받았으며 1997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입단 첫 해인 1998년부터 주전 우익수로 출전하며 .300 19홈런 75타점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는데, 센트럴리그에서 프로 1년차 신인이 3할 타율을 기록한 것은 1958년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40년 만이었다. 다만 신인왕은 14승 6패 평균자책점 2.57을 기록한 주니치 드래곤즈의 가와카미 켄신에게 내줬다.
이듬해인 1999년에는 요미우리의 제 66대 4번타자가 되어 마쓰이 히데키, 로베르토 페타지니와 홈런왕을 다투는 등 맹활약했지만 9월 중순에 펜스에 충돌하며 입은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래도 .315 34홈런 98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으며 시즌 후 연봉도 1억 엔으로 상승, 3년차 선수로는 최초로 연봉 1억 엔 고지를 밟게 된다.
2000, 2001년에는 건강하게 두 시즌 연속 전경기 출장에 성공했고, 특히 2000, 2002년에는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2004년에는 5년만에 30홈런을 넘겼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동메달 획득에 성공했으나, 그 다음 해부터 2006년까지 갑작스럽게 부상을 당하며 각각 88경기와 97경기에만 출장했다.
2007년에는 높은 출루율을 살려 1번타자로 나섰는데, 개막전부터 홈런을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그 시즌에 9개의 선두타자 홈런을 때리는 등[1] 35개의 홈런을 때리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타카하시의 부활에 힘입은 요미우리도 5년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패하며 일본시리즈 진출은 실패했다.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작년과 다를 바 없이 1번타자로 주로 출장했다. 하지만 또다시 허리와 무릎 부상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타격 부진까지 겹쳐, 타율이 2할 3푼대로 추락하는 등 심각한 부진을 보였다. 결국 2009시즌을 개점휴업하며 보냈고, 2010시즌부터는 수비 부담을 줄이고자 1루수로 출장했다. 그로 인해 이승엽은 시즌 내내 벤치 신세..(...)
이후에는 나이와 부상 등으로 인해 1루나 좌익수 위주로 출장하고 있고 주전경쟁에서는 꽤 밀려난 상태. 하지만 2012시즌에는 2007년 이후 최다인 130경기에 출전하며 통산 300홈런을 기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우승에 힘을 보탰고, 2013시즌에는 개막 직후 부상으로 몇 달간 결장했지만 시즌 중반 복귀 후 연일 맹타를 휘두르며 (비록 규정타석은 미달이지만) .303 10홈런 35타점 OPS .950이라는 꽤나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다.
2014년에는 주로 대타 겸 백업 야수로 나서며 .286 6홈런 29타점의 괜찮은 활약을 보였고, 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시즌 후, 플레잉 코치로 임명되면서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5년에는 팀의 1군 타격 코치를 겸하며 전년과 마찬가지로 대타 겸 백업 야수로 활약, .278 5홈런 21타점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동년 10월 23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후 사퇴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뒤를 이어 요미우리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왔다.
사실 기량이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라 예전 후루타 아츠야나 다니시게 모토노부처럼 선수 겸 감독으로 뛸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결국 선수로서는 완전히 은퇴하고 감독직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은퇴 후 바로 감독직을 맡은 것은 이 분하고 비슷하다. 결국 2015년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야쿠르트와의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1승 3패로 몰린 4차전 9회초 2아웃에 대타로 들어와서 삼진을 당하면서 팀의 탈락을 확정지은 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통산 성적은 1819경기 출장 .291 1753안타 321홈런 986타점 OPS .872.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에 명문 게이오대 출신이라는 학벌까지 갖춰서 그야말로 요미우리를 대표할만한 스타로 손색이 없었으며, 2003년에는 선수회장을 맡았고 차기 감독감으로도 인정받았다. 한때는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음에도 뒤에서 타팀 선수와 농담이나 주고받는 모습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등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후배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베테랑으로서의 역할도 나름대로 수행해나갔다.
3 감독 생활
하지만 외야수인 그가 감독 자리를 물려받으면 잘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섞인 시선도 남아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거인 팬들은 차라리 하라 타츠노리가 백발될 때까지 감독하고 우츠미 테츠야나 아베 신노스케를 차기 감독후보로 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외야수 출신이 감독을 맡아서 제대로 된 사례가 없다는 소리도 곁들이면서... 누군가가 생각난다 물론 기본적으로 요미우리는 2차대전 기간 중에 선수 겸 감독을 맡은 나카지마 하루야스 외에는 외야수 출신이 감독을 맡은 적이 없기는 하다. 굳이 따지자면 다카하시 선수시절 대부분 동안 감독이었던 하라가 선수생활 중반에 잠깐 좌익수를 맡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본 포지션은 3루. 그러니 외야수 출신이 감독해서 제대로 된 적이 없고 자시고도 없다.[2] 다른 구단의 경우 외야수 출신이 감독해서 우승한 경우가 있기는 하다. 당장 2011년과 2014년 우승팀 소프트뱅크의 감독인 아키야마 코지가 외야수 출신이고, 2001년에 우승한 야쿠르트 감독 와카마츠 츠토무도 외야수 출신이다.[3] 한 때 마쓰이 히데키가 은퇴한 뒤로 감독이나 구단 회장까지 마쓰이를 차기 감독감으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이고 있어 입지가 다소 미묘해지는 듯 했으나, 그런데 마쓰이도 외야수다 결국 요미우리의 사령탑이 되어 팀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서 세리그 6팀 중 5팀의 감독이 외야수 출신으로 기용되었다! [4] '외야수는 감독감이 못된다'라는 야구팬들 사이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꽤나 괴리가 나타나는 현상. 센트럴 리그의 하향평준화가 예상된다? 교류전을 보면 이미 하향평준화 끝난 듯.
시즌 종료 후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선수단에서 벌어진 도박 관련 논란 때문인지, 선수단에게 지시를 내려서 밤 10시(휴식일은 밤 12시) 이후로는 외출금지, 주말에 골프를 치러 나가는 행위, 납회 등을 금지시켰다.#그러나 팀의 주장이란 사람이 이국 땅에서 화끈하게 저질러 버렸다..
거기다가 2016년 시즌 전부터 OB 기요하라 카즈히로가 마약을 피워 체포되질 않나, 게다가 기요하라가 선수시절부터 동료 노무라 타카히토에게 중개로 마약을 피웠다는 사실이 발각된 데다가 또 교진군 선수 타카기 쿄스케가 도박사건을 일으켜 이로 인해 일본프로야구를 좌지우지하던 와타나베 츠네오 등의 고위 구단관계자들이 잇달아 사임하며 명문구단이라 손꼽히던 요미우리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이 가는 영 좋지 않은 일이 계속 터지며 첫 해 감독생활을 잘 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단 야쿠르트와의 개막 3연전을 스윕한 것을 시작으로 4월은 0.5경기 차 선두로 시작해 과거 ON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골든 위크 기간 동안에 야쿠르트, 주니치와의 3연전을 각각 스윕당한 것을 시작으로 DTD를 시전, 5월 27일 자로 5위까지 추락했다(...) 다행히 교류전을 5할 승률로 마치고, 다른팀들이 교류전을 망치면서 어부지리로 2위를 탈환했으나, 문제는 1위 히로시마 카프와의 승차가 5게임 안팎으로 좁혀질 기미를 보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 때문에 리그 우승 이상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팬들의 반응은 아직까진 싸늘한듯하다 . 벌써부터 경기 후 인터뷰 등의 발언을 두고 "도대체 생각은 하고 사는 거냐", " 지금 이 난국을 타개할 복안은 있는 거냐" 등등의 비판이 나오는 중. 결국 9월 10일, 히로시마에게 6-4로 패하여 리그 우승을 내주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구단 사상 처음으로 출전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게 심판빨 오지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승 2패로 밀리며 탈락하고 만다(...)[5]전년도에 이어 2년연속 일본시리즈 진출실패
4 기타
여담으로 당장 같은 센트럴리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구로다 히로키와 동갑이다. 옆 나라 KBO 리그의 이병규, 최영필보다도 한 살이 어리고 조인성, 손민한과는 1975년생으로 동갑내기다.
거인군이 도쿄 돔 입주 이 후 세 차례[6] 원정팀 감독의 헹가래를 허용했는데, 세 차례 모두 현장에서 굴욕적인 장면을 목격한 흑역사가 있다.- ↑ 첫회 선두타자 홈런 일본 기록이다.
- ↑ 하지만 이 분의 예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외야수 출신이 아니라고 해서 팀이 안 망하는 건 아니다.
- ↑ 하지만 역대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중에서 외야수 출신 감독은 그 둘이 전부다.
아키야마가 프야매 수준에 가까운 사기적인 선수빨, 와카마츠가 후루타 아츠야의 카게무샤였다는 점은 넘어가기로 하자. - ↑ 나머지 외야수 출신이 아닌 감독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주니치 드래곤즈의 포수 출신 감독 다니시게 모토노부.
근데 성적부진으로 사퇴 - ↑ 대표적인 장면이 1차전 8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요코하마 수비진이 완벽한 2루 견제를 했는데도 심판이 세잎, 아웃은 커녕 아예 판정을 안해버린 사건. 잘 보면 2루심이 못본게 아니라 보고 나서 은근 슬쩍 고개를 돌려서 못본 척 한다(...)
- ↑ 1회: 2006년 10월 10일 주니치의 센트럴 리그 우승/2회: 2008년 11월 9일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우승/3회: 2016년 9월 10일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