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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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Theodosius II
본명은 할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와 같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일반적으로는 테오도시우스 2세(Flavius Theodosius, 401년 ~ 450년 7월 28일)라고 한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402년부터 부황 아르카디우스와 함께 공동통치를 했으며, 7세의 나이에 단독황제로 즉위해서 408년부터 450년까지 재위했다.
2 생애
2.1 즉위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와 프랑크족출신의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사이에서 서기 401년 4월 10일,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위에는 누나로 풀케리아가 있다. 3세이던 404년에 어머니 에우독시아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고, 이어 아버지 아르카디우스마저 408년 병으로 30세/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에 겨우 7세의 나이에 즉위했다.
사실 아버지였던 부황 아르카디우스는 무능한 점에서 서로마 제국 황제인 동생 호노리우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다만 그가 임종할 당시, 아내이자 황후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역시 없고, 나이 어린 자기 아들의 신상문제를 걱정해서 궁전 대신 중에서 섭정을 고르려고 하였으나 이마저 여의치 않았다. 또한, 서로마 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와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문제로 사이가 나빠져 있었고, 크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존재라는 판단에 고민하며 망설였다. 결국, 아르카디우스는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몇 세기 동안 싸워 온 이웃나라인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을 대담하게 부탁하기로 하고 사신을 보냈다. 이때 페르시아는 예상치 못한 제의에 영예로운 신뢰라고 하며 보답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아르카디우스의 결정에 감사를 표하고, 그가 생존하는 동안에는 직접적인 적대관계였던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려 하지 않았다.
동시에 아르카디우스는 궁정 안에서 나이 어린 황제를 성실하게 수호하고 훌륭하게 섭정으로서 통치를 도와줄 인물로 안테미우스((Anthemius)[1]을 선정하였다. 그는 405년에 집정관 겸 민정총독에 임명되었던 자로 탁월한 행정가이자 외교가이기도 했다[2]. 동시에 어린 테오도시우스 2세를 위한 또 다른 섭정으로는 2살 위의 누나 풀케리아(Pulcheria)가 9세의 나이에 선정되었다.
2.2 섭정 안테미우스
7살짜리 황제를 보필하게 된 친위대장 안테미우스는 제위를 노리기보다 성실하고 탁월하게 어린 황제를 보필하고 노력했다. 그는 행정과 외교, 국방에 있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는 414년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섭정으로는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에게 넘어갔다.
2.2.1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
먼저 그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문제[3]로 사이가 벌어져있던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쏟아 성공했다. 이 결과, 동방 황실과 서방 황실들은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2.2.2 테오도시우스 성벽
역사상 최고의 성벽 중 하나
콘스탄티노플이 난공불락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게 한 1등 공신
중세 공성전 계의 최종 보스
(테오도시우스 성벽 건설 이후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서로마와의 관계 개선과 동시에 안테미우스는 기존의 콘스탄티누스 성벽만으로는 거세지는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제국 수도 방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추가로 난공불락의 육지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성벽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다. 이 성벽 건설은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함께 테오도시우스 2세 시대의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구조)
크고 아름다운 3중 성벽을 보라!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3중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으로는 마르마라(프로폰티스) 해부터 골든 혼(콘스탄티노폴리스의 내항)까지 이어진 육중한 성벽으로, 이 성벽 건설의 결과 과거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건설한 성벽으로 방어할 수 없었던 넓어진 시가지를 방어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구조를 살펴보면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해자를 갖추고 있는 성벽으로, 해자 뒤의 흉벽과 너비가 2미터 높이가 5미터인 내성벽, 너비 5미터 높이 12미터인 외성벽의 삼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내성벽과 외성벽에는 각각 96개씩의 망루가 설치되어 있어 적을 견제하기에 용이했다. 이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육로에 면한 6 ㎞ 정도만이 앞서 설명한 구조로 되어 있었고 해안가의 성벽은 보통의 단일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건설된 성벽 방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동로마 제국이 약화되어 수도가 침략을 받았을 때조차 정공법으로 이 성벽을 넘어 수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군대는 14세기까지 아무도 없었다[4][5]. 이 성벽은 그 유명한 훈족의 아틸라가 성벽만 보고서는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하게 만들었고, 수도를 포위해 쳐들어온 아랍 군대를 모조리 토양의 양분으로 만드는 등 여러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6] 그러나 영원히 적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성벽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 대륙에 걸친 신흥 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자 했던 21살의 젊은 술탄의 야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고, 결국 콘스탄티노플도 함락, 2천 년 역사의 로마 제국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고.
다만 이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조차도 정공법으로 성벽을 완벽하게 넘은 것은 아니었다. 수비대장의 부상으로 병력의 통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성문을 열고 닫는 과정에 미스가 있었는데 그걸 집요하게 파고든 결과였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정면 돌파 및 수비군 궤멸을 통한 성벽 함락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7]
추가로 이 성벽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나스 티리스와 실마릴리온에 나오는 곤돌린의 모델이 되었으며, 토탈워 아틸라에서 실제로 구현되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실제 성벽보다 훨씬 너프되었지만, 그럼에도 후덜덜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성벽이다.
2.3 누나 풀케리아
414년 친위대장이자 섭정인 안테미우스가 병사하자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가 불과 16세의 나이에 황후(아우구스타)에 올랐다. 아우구스타는 황제의 누이나 아내, 어머니에 대한 존칭으로써 그녀는 죽기 전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신앙심이 깊고 의지력이 강한 풀케리아는 섭정이자 아우구스타로 도덕적, 정치적으로 동생 테오도시우스 2세를 직접 교육하고 보호하였다. 그 결과, 궁정 문화와 생활은 수도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경건하게 바뀌였고, 황제와 풀케리아의 두 여동생은 풀케리아의 설복에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기로 서약했다. 풀케리아는 공식적으로 테오도시우스2세가 15세 생일을 맞은 날부터 섭정으로써 임무가 끝이 났지만, 그뒤에도 오랫동안 실세로 남았다.
2.4 아일리아 에우도키아(아테나이스) 황후
풀케리아는 421년 동생 테오도시우스2세의 배필로 그리스 아테네 출신의 처녀를 골랐다. 이 소녀는 이교도이자 아테네 철학자 레온티우스(Leontius)의 딸 아테나이스(Athenais)였다. 아테나이스는 아름답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점잖았기에 점잖고 학구적인 테오도시우스2세의 배필로 손색이 없었다. 아테나이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시어머니와 같은 이름인 아일리아 에우도키아라고 새로이 이름을 취했다. 특히, 그녀가 황후가 된 사건은 당시 동로마 상류층 인사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교 지식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기도 했다.
테오도시우스2세와의 사이에서 이듬해 리키니아 에우독시아[8]라는 딸을 낳았고 423년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는 질투심많고 권력욕이 강한 시누이 풀케리아에게 반감을 갖게 만들게 되었다. 특히 개종 이후에도 에우도키아의 헬레니즘적인 배경은 두 사람 사이를 더욱 갈라놓았다. 하지만 에우도키아는 황궁 안에 그리스적인 분위기를 많이 가져왔고 동로마 제국이 그리스와 융합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425년 테오도시우스2세는 알렉산드리아, 아테네의 대학들과 경쟁할 수 있는 본격적인 대학교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웠다. 대학의 강의실들은 원로원 의사당에 마련되었고, 그리스어 문법과 라틴어 문법에 각각 10명의 교수들이 배정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그리스 수사학에 5명의 교수를, 라틴 수사학에 3명의 교수를, 법학에 2명, 철학에 1명의 교수를 두어 학생들을 길렀다.
2.5 테오도시우스 법전
테오도시우스2세 치세 중 테오도시우스 성벽과 함께 치세 중 최고의 업적으로 불린다. 이 사업은 대학교 설립(425년) 4년 뒤에 직속위원회가 설치됨으로써 착수되었다. 그 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자신의 치세에 이르기까지 공포한 법, 칙령 등 제국 내 모든 법들이 단권의 참고서 안에 집대성되었다. 이 법전은 9년 뒤인 438년 2월 15일, 16명의 법학자들의 노력으로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2세와 서로마 제국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공동 명의로 발행되었다.
2.6 누나와 아내의 실각과 환관 크리사피우스
황후 에우도키아가 궁정에서 발휘한 헬레니즘 문화 등의 영향력은 자연스레 풀케리아의 영향력과 상호 경쟁을 일으켰고, 이 관계는 20년 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환관 크리사피우스(Chrysaphius)가 두 황후 사이의 경쟁을 이용하여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움으로써, 두 사람 모두 궁정을 떠나게 되었다. 440년 풀케리아는 궁정을 떠났고, 에우도키아 역시 444년 불륜 혐의를 뒤집어 쓰고 실각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남은 16년 간의 여생을 보냈다.
2.7 페르시아, 반달족, 훈족
페르시아의 왕 바라네스 5세(Varanes, Vahram, Varahan, Bahram)은 421년 테오도시우스2세가 페르시아에서 망명한 그리스도교도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구실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동로마는 이들의 침략을 단호히 격퇴했다.
테오도시우스2세 치하에서 동로마는 주기적으로 페르시아, 훈족에게 위협을 받았다. 특히, 훈족은 제국이 페르시아와 전선을 형성할 때마다 어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했다. 실제로 바라네스 5세의 선전포고로 양국이 전쟁을 벌일 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훈족의 왕 루아는 트라키아를 침공했고, 테오도시우스2세와 동로마는 매년 금 350만 파운드를 주곘다는 약속을 하며 그들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434년,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반달족과 싸우고 있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2세는 서로마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지원했는데 부대는 패했고, 훈족의 루아는 동로마 전력의 공백을 틈타 평화유지비로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이때 루아가 갑자기 죽었고, 새로운 후임자 블레다는 연례 공납금으로 700파운드로 증액하여 받아내었다.
441년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동로마의 다른 대병력이 서로마로 떠난 사이,페르시아가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블레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테오도시우스 2세는 442년 페르시아 군대를 완전히 격퇴했지만, 한동안 블레다에 대해서는 많은 도시들이 유린되고 로마인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묵인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동로마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시작할 준비를 하면서도 블레다에게 금 6000만 파운드를 일시불로 지불하고 매년 2100파운드라는 살인적인 공납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447년,동로마는 아틸라의 공격을 받았다. 훈족은 동로마군을 쳐부순 다음 도나우 강 유역의 로마 점령 지대를 5일 간 여행할 길만큼 비우라고 요구했다. 이에 449년 실권을 쥐고 있던 크리사피우스는 아틸라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크리사피우스의 이런 시도는 아틸라의 응징보다는 훈족의 공격대상을 바꾸게 만들어 아틸라는 공격의 칼을 서쪽으로 돌려 이동했다.
계속되는 굴욕 속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부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훈족에게 바치는 거액의 공납금에 대해 분노했다. 이들은 크리사피우스의 정책들로 부담해야하는 금액들이 자신들이 부담해야 된다는 것에 더 화를 냈다. 또한 크리사피우스의 아틸라 제거 계획도 실패하면서 제국의 위신이 떨어졌다는 것도 이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크리사피우스는 위신이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2.8 종교 문제
427년 테오도시우스2세와 총리대신 노무스는 단성론(單性論,Monophysitism)[9]에 대해 내려진 단죄를 철회함으로써 고위직에 있는 여러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을 격분시켰다.
한편 427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열성적으로 아리우스파를 배척했고 그리스도가 니케아 신경에서처럼 단일한 위격(位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위격과 신의 위격, 서로 다른 두개의 위격을 가지고 있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급격히 대중의 호응을 얻어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키릴로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에 찬성했다. 그러나 키릴로스 총대주교는 황제의 누나 풀케리아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 파는 파문당하게 된다. 이때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5년 네스토리우스를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유배보내게 된다.
2.9 사망
450년 테오도시우스2세는 취미였던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사고로 죽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새로운 계승자로 트라키아 출신의 장군 마르키아누스(Flavius Marcianus, 396년 - 457년)가 형식적으로 풀케리아와 결혼하여 뒤를 이었다.
2.10 여담
테오도시우스2세는 그림그리기와 필사본 제작이라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아버지와 누나처럼 종교에 관심이 있기보다는 철학, 라틴 사상, 그리스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칼리그라포스(서예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 그는 사냥을 즐겼으며 오늘날의 폴로에 해당하는 추칸이라는 경기를 페르시아에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입했다.
- ↑ 훗날인 467년에 서로마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 동명인(안테미우스 황제)의 조부되는 사람.
- ↑ 결론부터 말하면 이 선택은 옳았다.
- ↑ 아르카디우스 참조.
- ↑ 1453년의 오스만 제국군도 15만 명을 투입했지만, 성내의 1만 남짓한 군대를 상대로 50여 일 동안 고전해야 했다.
- ↑ 이전까지는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아무도 없었다' 라고 했지만, 1261년에 니카이아 제국군 8백 명이 테오도시오스 성벽을 넘어 도시를 점령한 일이 있다. 다만 이는 내부의 호응이 있는 가운데 밤중에 몰래 성벽을 넘은 것이라, 정공법으로 성벽을 넘었다고 하기는 조금 뭣하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오늘날에는 보통 '아무도 없었다'라고 해 주는 경향이 있는데 공성전이란 무슨 방법을 쓰든지 간에 성을 점령하면 점령한 것이지 무슨 '성벽을 정공법으로 함락시켜야 점령'같은 건 없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 ↑ 물론 희대의 사기템 그리스의 불의 도움도 컸다.
- ↑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최초로 뚫은 것은 적의 공격이 아니라 이스탄불의 지하철과 트램공사였다고 말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 ↑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훗날 서로마 황제인 발렌티아누스3세와 결혼한다.
- ↑ 그리스도가 하나의 본성, 곧 신성을 지녔고 그것이 인성(人性)을 흡수했다는 에우티케스의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