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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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5대 총대주교 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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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1.1 개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문장[1]

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總大主敎. 정교회 자치 독립 교회들의 최고 명예 수장. 공식 직함은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자 세계총대주교(ο Αρχιεπίσκοπος Κωνσταντινουπόλεως, Νέας Ρώμης και Οικουμενικός Πατριάρχης)'이다.

터키 정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의 로마인의 정교회 총대주교(İstanbul Rum Ortodoks Patriği)'[2]라 칭하고 있다. 세계총대주교(Ekümenik Patrik) 또는 로마 총대주교(Rum Patriği)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 로마는 동로마 제국을 뜻한다.[3] 성하(聖下, His/Your Holiness, Patrik Hazretleri)라고 예칭한다.

2016년 현재 총대주교는 제271대 바르톨로메오스 1세 총대주교이다.

1.2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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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경의 전승에 따르면 비잔티움의 주교구는 예수12사도 가운데 한 사람인 사도 성 안드레아가 세웠으며, 그의 제자인 스타키스가 초대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38~54).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긴(330) 직후 도시 이름을 로마 노바(= 신(新)로마)로 바꾸었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더 많이 쓰였지만... 어쨌든 이와 동시에 헤라클레아 관구에 속해 있던 콘스탄티노플 지역이 독립 관구로 설정되었다. 이후,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구역에 넣었으며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로마의 교황 다음의 명예를 지닌 주교직으로 격상되어 종래 동방 지역 교회의 양대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두 교구를 뛰어넘어 일약 동방 교회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6세기부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공식 직함은 '새로운 로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자 세계 총대주교'가 되었다.

1.3 권위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는 3억 명에 달하는 모든 정교회인들의 정신적인 수장이며 '동등한 가운데의 첫 번째'(Primus inter pares) 주교로서 전체 주교단 중 수석주교이며 가장 높은 명예를 지닌 직책이다. '세계 총대주교'라는 직함 때문에 마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로마 교황마냥 모든 재치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세계(Οικουμένη)'라는 명칭은 고대 로마 제국부터 동로마 제국 시기까지 제국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워낙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로마는 자신들의 영토를 문명을 이룩한 전체 세계를 로마 제국과 등가로 취급했고 그 국체가 그대로 이어진 동로마 제국 역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에 각각 발을 걸쳐 놓은 국가로서 로마 제국의 세계 제국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4] 그래서 동로마 제국을 관할하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당연히 세계총대주교라는 직함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 콘스탄티노플 대관구의 주교: 가장 기본적인 역할로 세계총대주교에게 맡겨진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다스리는 역할이다. 세계총대주교는 기본적으로 터키와 크레타, 그리고 해외에 퍼진 그리스인 공동체들을 관할하며 이들을 직접 다스릴 권한을 가진다. 한자어로 이를 '재치권(哉治權)'이라고 하는데 이들 교회에서는 이 콘스탄티노플 세계총대주교가 가장 최고 권위를 실질적으로 행사하며 상소심, 지역교회 회의를 주관하며 성직자(특히 주교)들을 임명하고, 수도원들을 설립할 수 있는 최종승인권한을 가진다. 한마디로 이 동네에서는 가톨릭 교황이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주교단의 (명예상) 수석(의장) 주교: 정교회 일치의 구심점으로서, 세계총대주교는 정교회 일치를 위한 대변인이며 주교회의,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가진다. 또한 수많은 교구들의 활동을 조정하고 지원하며 정교회 소속 독립교회들의 연결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덧붙여 교회일치운동에도 수석 주교이자 정교회 대표로서 많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가끔 이 부분은 서열 5위인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딴지 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위 수석주교의 지위는 원래 로마 교황이 수행하였으나 수위권 문제로 갈라선 뒤 2위 서열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대신 수행하는 부분이다. 사실 동등한 가운데에 첫 번째라는 말의 의미에서도 드러나듯, 어디까지나 세계총대주교는 맏형의 역할로 각 독립 교회들의 역할들을 조정하고 지원해 줄 뿐, 각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권한도 갖고 있지 않다. 만일 교회 내부에 문제가 생길 경우 수석 주교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 소집과 의장의 역할이 전부이며, 공의회 이후의 결과 공포 역시 세계총대주교의 권위가 아닌 전체 교회의 권한으로 선포하기 때문에, 정말로 여기는 명예상 대표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교회일치운동에 상당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유이다.

1.4 터키 내 현황

오스만 제국시기에는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하자마자 옌나디오스를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처음으로 교회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그후 밀레트(millet) 제도에 의해 교회는 정교회를 믿는 오스만 제국 내 모든 신민들에 대한 종교적, 세속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 정부에게 보낼 세금도 평신도들이 교회에 내는 십일조에서 일부를 떼서 징수할 정도였으며, 교회는 이 과정에서 제국 정부에서 할당한 세금량보다 많은 세금을 교회세로 거두어 운용했다. 기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교회정책은 "니들 알아서 해라. 그런데 기어오르면 알지?"(...) 입장이라, 교회를 통해 정교회 신자들을 통제했으며 교회가 제국 정부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총대주교를 입맛에 맞는 인물로 갈아버리는 식으로 통제했다. 그리고 19세기 초 민족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리스인들이 독립운동을 시작하는 등 제국 곳곳에서 소요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역시 시범케이스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공개처형을 당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참고로 당시 총대주교는 그리스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 "이건 종교도 없는 세속주의자들이 일으킨 소요사태에 불과하며 황제께 충성하지 않고 반란군에 합류하는 이들은 파문한다." 라는 성명을 발표했음에도 처형되었다. 후새드

공화국 시기에 들어서는 1925년에 아타튀르크에 의해, 터키 정교회의 성립이 진지하게 논의되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세속주의 공화국을 바탕으로 한 신생 터키공화국이 바로 전해에 칼리프제도를 폐지하고 터키 공화국 종교부(T.C.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가 이를 대신해 무슬림들을 통제한 것과 맞물려 국가가 기독교 또한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터키 정부는 공화국 종교부가 이슬람과 관련된 일만을 하도록 하는 대신, 오스만 제국 시절 총대주교가 가지고 있던 권한들을 중앙정부로 회수하는 식으로 통제했다.

한편 총대주교 스스로가 터키에 주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터키 당국은 그리 사이가 좋지 않은 그리스인들이 교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이들을 견제하고 있다. 먼저, 총대주교는 반드시 터키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총대주교를 선출하는 시노드의 구성임원들도 반드시 터키 국적자여야 한다. 다만 에르도안 집권기 이후로 시노드의 구성 임원 자격 조건이 완화되어 외국인 주교라 하더라도 시노드에 참석하면 터키 국적이 주어지게 되었다. 민감한 문제인 호칭에 있어서는 '세계 총대주교'라는 호칭을 과거에는 사용하지 못하게 했지만, 현재는 이것의 터키어인 Ekümenik을 언론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신학 교육과 외부 활동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는데, 특히 1971년 할키 신학교 폐쇄로 본토 지역 교구의 사제 양성이 중단된 적이 있다. 이는 터키 당국이 강경하게 고수하고 있는 교육에서의 세속주의 원칙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강한 자율적 운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폐쇄 압박을 받은 결과였다.[5] 이미 1924년 로잔 조약 체결 후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아나톨리아 지역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본국으로 추방되어 명의교구들만 잔뜩 양산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돌아가는 4개 관구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후술할 5개의 관구들이 교구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는 로잔 조약에 의거한 인구교환에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및 그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예외로 쳤기 때문이었다.[6] 하지만 이 인구 교환이 150만 그리스인들에게 '소아시아 재앙'(Μικρασιατική καταστροφή)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리스인들이 빠져나간 데다가, 그리스인과 터키인의 사이가 엄청 나빠지면서 나가지 않아도 된다 뿐이지 실제로는 엄청난 갈등관계에 빠지게 된 것이었다.

정말 골때리는 것은, 추방된 그리스인의 기준이 다름아닌 정교회 신자 여부에 따라 갈라졌다는 것. 즉, 제아무리 터키어를 쓰고 터키 문화 속에 산 사람도 정교회 신자가 되는 순간 '그리스인'으로 분류되어 추방된 것이었다. 당연히 그리스에서도 그 역이 성립하여 그리스인 이슬람교도들도 모조리 추방당했다. 하지만 터키어에 익숙하고 터키풍 문화와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던 그리스인들은 정작 본국에서 그리스인으로 대우받지 못해 나중에 공산당이나 좌익쪽으로 가는 이들이 많았다. 그리스보다 차별이 덜했던 터키에선 그리스계 이슬람인이 변두리로 나가 살아가다가도 돈을 벌어 이스탄불이나 대도시 지역으로 이주하여 상당수가 꽤 큰 부유층이 된 반면, 그리스로 간 그리스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오랫동안 어렵게 살아갔다. 터키로 추방된 이들은 40만 명으로 그리스보다 4배 가까이 적은 수이긴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현대에까지 지속되어 1955년,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의 폭동을 근거로 벌어진 터키인들의 보복 폭동(이른바 Istanbul Pogrom)으로 성당과 수도원들이 큰 피해를 입게되었다. 리즈시절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해 20만여 명을 아우르던 그리스인들의 숫자는 1955년과 65년 사이에 그 1/4인 4만8천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1978년 통계에서는 무려 7천8백 명선으로 급격히 위축되었다. 지속적인 터키 당국의 압박[7]으로 전성기 이스탄불 주변 거주 그리스인의 10분의 1도 안되는 2천5백 명선으로 떨어졌다.

현재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은 생각보다 많고 대부분 로마 제국 시대로 소급되기까지 하지만, 정작 로마 제국 시대부터 남아있는 성당들 태반은 모스크 혹은 박물관으로 쓰인다. 즉, 제 기능을 하는 성당들이 극히 드물다. 성당으로 멀쩡하게 잘 쓰는 건물들은 19세기경 근대 시대에 그리스인들의 세력이 잠시 커지면서 세워진 성당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벽돌에 고풍스러워보이는 건물 대신 19세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석조건물과 높은 종탑들이 붙어있는 성당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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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총대주교좌 성당인 페네르(Fener)[8]의 성 요르고스 성당. 정교회의 본부격이지만, 정교회 성당 건축의 정수인 돔 형태의 그리스 양식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건축인 전형적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총대주교좌를 3번 옮긴 끝에 19세기에 최종적으로 이곳에 정착했다.

1054년 이후 동방정교회의 총본산이자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 소재지는 아야소피아 성당이었다. 그러나 1453년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자 사흘만에 아야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 후 총대주교좌는 성 사도 성당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인 1454년에 수녀원이던 판마카리스토스(행복한 성모) 성당으로 옮겨져 132년 동안 총대주교좌로 있었다.

그러나 판마카리스토스 성당이 1591년 무라드 2세의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전승을 기념하여 페티예(Fethiye, 승리의) 모스크[9]로 바뀌면서, 1586년 총대주교좌는 다시 아요스 디미트리오스 카나피스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후 1603년에 페네르의 성 요르고스 성당으로 다시 옮겨져 지금까지 총대주교좌로 남아 있다. 총대주교좌 성당을 방문하려면 에미뇌뉘(Eminönü) 환승센터에서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예니 보스나(Yeni Bosna)쪽으로 가는 아무 버스나 잡아탄 다음에 운카파느 다음 정거장에서 내린 다음 바닷가를 등지고 길을 건넌 다음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이콘 기념품 가게 몇 곳을 지나친 다음(...) 삼거리까지 50m 정도 올라갔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막다른 골목에 성당의 입구가 위치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전 문서에서는 성당의 크기가 아주 작다고 언급되어 있었는데, 아야소피아 정도랑(...) 비교하니까 작게 느껴질 뿐 그리스의 성당들과 비교해도 나름대로 주교좌성당으로 쓰일 만큼의 크기는 된다. 만약 총대주교를 만나고 싶다면 한국 정교회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한국 정교회 교구장)의 추천서가 효험이 있다. 총대주교는 방문객에게 30분 정도 말씀과 강복을 베푼 뒤에 초콜릿을 준다고 한다. 참고로 아무래도 이스탄불 토박이시고 터키 국적이다보니 터키어가 매우 유창하시다.

1.5 관할 교구

※이 문서에서는 구분을 위해 Metropolis를 관구로, Archdiocese를 대교구로 번역했으나, 현재 한국정교회에서는 Metropolis 또한 대교구로 번역하고 있다.

현재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교구는 제외한다.

  • 콘스탄티노플 대교구(총대주교 직할)
    • 칼케돈 관구
    • 데르코이 관구
    • 임브로스&테네도스 관구
    • 프린스제도 관구
  • 크레타 대교구
    • 고르티나&아르카디아 관구
    • 레팀논&아블로포타모스 관구
    • 카이도니아&아포코로노스 관구
    • 람피&시브리토스&스파키아 관구
    • 이에라페트라&시티아 관구
    • 페트라&체로니소스 관구
    • 키사모스&셀리노 관구
    • 아르칼로초리온&카스텔리온&비아노스 관구
  • 디아테이라&영국 대교구
  • 도데카네스 제도의 관구들(도데카네스에는 딱히 대교구가 없다.)
    • 카르파토스&카소스 관구
    • 코스&니시로스 관구
    • 레로스&칼림노스&아스티팔라이아 관구
    • 로도스 관구
    • 시메 관구

이외에 그리스 북부의 36개의 관구가 있는데, 이 지방은 그리스가 처음 독립할 당시에는 얻지 못하였다가 훗날 발칸 전쟁을 치른 후 그리스의 영토가 된 지역이다. 이 36개의 관구들은 원칙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할하에 있으나 행정 편의상 그리스 교회의 수장,즉 아테네 대주교가 관리하고 있다.

또한 핀란드 대교구와 에스토니아 대교구는 본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할이나 자치권을 인정받아 사실상 독립된 교회로 본다.

알바니아인, 혹은 러시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이 미국과 캐나다 등 세계 각지에서 세운 후 콘스탄티노플 교회 아래로 들어온 교구는 대략 15개 정도이다.

1.6 역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역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문서 참고.

2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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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공식 직함은 '콘스탄티노플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총대주교(Պատրիարքութիւն Հայոց Կոստանդնուպոլսոյ)'. 물론 터키에 가면 터키법상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총대주교(İstanbul Ermeni Patriği)'라고 불러줘야 한다. 권위는 보편교회에서 교황 다음가는 인물이자 전세계 3억 명의 정교회 신도들의 정신적 큰형님이나 다름없는 1에 비할 바 못되지만, 적어도 터키 내에서의 교세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정교회보다 커도 훨씬 크다. 이쪽도 1처럼 반드시 터키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 총대주교는 메스롭 2세이다. 총대주교좌는 이스탄불 파티흐구의 쿰카프[10]에 있는 Surp Asdvadzadzin Patriarchal Church에 위치해 있다.

2.2 역사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오스만 제국은 제국내 아르메니아인들을 통합 시키기 위해 밀레트 제도에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일원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461년 이스탄불에 총대주교구를 설치하고 호바킴 1세를 총대주교에 앉혀 아르메니아인들의 종교적·세속적 지도자로 삼았다.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역대 총대주교 목록을 보면 이건 뭐 자리를 3년이라도 지키면 다행인 판에 아예 공석이었던 적도 많고, 가라베드 2세는 살아생전 총대주교를 5번이나 맡는 등, 술탄 비위에 거슬리면 그냥 갈아버렸다.[11] 그 와중에 제국 말기에는 아르메니아 학살이라는 참사가 일어나 교회가 사실상 궤멸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겨우 교세를 수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터키 내 최대 기독교 공동체는 단연 약 3만 5천~4만 5천 명의 신자가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이며,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관하의 신자 수는 9만~10만에 육박한다.
  1. 십자가 사이에 적힌 그리스 문자들은 현 총대주교의 이름인 '바르톨로메오스'이다.
  2. 터키어로 Rum은 과거 동로마 제국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지칭하는 그리스어 Ρωμαίοι (로메이)를 그대로 차용한 단어이다. 현재는 그리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과 구분해서 터키 내에 거주하고 터키 국적을 가진 그리스계이자 기독교인인 터키인, 혹은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3.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로마의 총대주교라 할 수 있는 교황은 그냥 유럽식으로 Papa라고 부른다.
  4. 그리고 이는 동로마의 영토가 갈수록 쪼그라들 때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5. 오해해서는 안되는게, 그 당시에는 엄격한 세속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이슬람 학교 또한 금지였으며, 이맘이든 신부든 랍비든 뭐든 종교인이 종교행사를 제외하고 성직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 또한 금지였다.
  6. 대신 그리스에서는 서부 트라키아 지역의 터키인이 잔류하게 되었다.
  7. 신생 터키공화국 수립 이후, 터키 당국은 그리스 시민권을 가진 이스탄불 및 주변 거주 그리스인들의 재산을 압류하고 적성국 국민 혹은 스파이 혐의로 사실상 추방 형식으로 이들을 출국시키기까지 했다. 이들은 24년 인구교환 대상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인들을 보내버린 것이었다.
  8. 이스탄불 파티흐구에 있으며, 운카파느(Unkapanı) 옆동네에 있다. 옛 성벽 내의 시가지 중에선 비교적 외진 편으로, 이스탄불 내에 있는 그리스인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중심지인 구역이다.
  9. 참고로 현재 총대주교좌성당 근처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대략 5분 거리
  10. kumkapı, 마르마라해와 접해있으며, 터키 내 아르메니아인들의 주요 거주지이다. 이 지역 바로 옆에 블루 모스크, 아야 소피아 등의 관광지로 유명한 술탄아흐멧 지구가 있다.
  11. 이건 사실 위의 정교회 총대주교들도 겪은 일이다. 이쪽은 다행인지 공석 기간은 없지만(...) 1년도 못 채운 총대주교, 여러 번 사임과 착좌를 거듭한 총대주교가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총대주교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오스만 개객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