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쿠코치

전체 이름토니 쿠코치(Toni Kukoč)
생년월일1968년 9월 28일
신장211cm
체중107kg
포지션포워드
드래프트1990년 드래프트 2라운드 29순위
시카고 불스에 지명
소속팀유고플라스티카 스필트[1](1985~1991)
트레비소 SPA (1991~1993)
시카고 불스 (1993~2000)
필라델피아 76ers (2000~2001)
애틀랜타 호크스 (2001~2002)
밀워키 벅스 (2002~2006)
등번호7번
수상내역NBA 우승 3회 (1996-1998)
NBA 올해의 식스맨 (1996)
NBA 루키 세컨드 팀 (1994)
유로리그 우승 3회 (1989, 1990, 1991)
유로바스켓 우승 2회 (1989, 1991)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4회 (1988, 1989, 1990, 1991)
유고슬라브 컵 우승 2회 (1990, 1991)
이탈리안 리그 우승 (1992)
이탈리안 컵 우승 (1993)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 3회 (1989, 1990, 1991)
FIBA 세계 남자 농구선수권 MVP (1990)
유로리그 파이널 MVP 3회 (1990, 1991, 1993)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 4회 (1990, 1991, 1992, 1996)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 5회 (1990, 1991, 1994, 1996, 1998)
FIBA 유로바스켓 MVP (1991)
FIBA 선정 50인의 위대한 선수 (1991)

1 개요

유럽 리그와 NBA에서 뛰었던 크로아티아 출신의 전 농구 선수. 포지션은 포워드였지만 6-11(211cm)라는 매우 큰 키에도 슈팅 능력과 볼 핸들링, 패싱이 뛰어난 선수라서 공격력이 매우 출중했던 선수이다.

유럽에서 뛰었을 때에는 유럽 최고의 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시카고 불스필라델피아 76ers등의 팀에서 뛰며 식스 맨으로 활약했다.

2 선수 시절

2.1 NBA 이전

쿠코치는 1985년 유고슬라브 리그의 유고플라스티카 스필트에 입단한다.신인때 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7년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출전한 세계주니어 선수권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거머쥔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쿠코치는 1988년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도 유고슬라비아 대표로 출전해서 동메달을 따는데 기여한다.

1989년에는 팀의 유로리그우승과 유고슬라브 리그 2연패,유로바스켓 우승에 주역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 활약으로 쿠코치는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었다.

1990년, 쿠코치는 팀이 유로리그 2연패를 달성하는데 주역으로 맹활약하며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된다,또한 유고슬라브 컵 우승,유고슬라브 리그 3연패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런 맹활약으로 FIBA에서 개최한 세계선수권 챔피언십에 크로아티아 국가대표로 출전해 팀의 우승을 이끌으며 대회 MVP로 선정되었으며,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과 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전년도에 이은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는등 최고의 해를 보낸다.[2]

1991년, 쿠코치는 팀의 유고슬라브 리그 우승 4연패, 유고슬라브 컵 2연패에 기여하고 유로바스켓 우승과 유로리그 3연패에 주역으로 활약하며 유로바스켓 MVP와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유로스카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또한 3년연속으로 크로아티아 올해의 스포츠맨에 선정되고, FIBA에서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선수 50인에 선정되었다. 쿠코치는 이 시즌 도중 이탈리아리그의 트레비소 SPA로 이적했다.

1992년, 쿠코치는 팀의 이탈리아리그 우승을 이끌었고,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크로아티아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3] 비록 은메달이었지만 쿠코치는 NBA 스카우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4] 또한 미스터 유로파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팀의 이탈리안 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유로리그 파이널 MVP에 선정되었다. 1992-93 시즌이 끝나자 쿠코치는 드래프트에 신청하여 2라운드 29순위로 드래프트되어 예정대로 미국 NBA의 시카고 불스에 입단했다.[5]

2.2 NBA

2.2.1 시카고 불스

불스에 입단한 쿠코치는 1993-94시즌 직전 아버지의 죽음로 인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조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입단 첫 해인 93-94시즌부터 팀의 주축선수로 뛰었다.

처음에는 수비도 평균 이하였고, 늘 볼을 오래 소유했을뿐만이 아니라 종종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도 헤메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쿠코치는 팀에 적응을 하기 시작했고 그해 NBA 올 루키 세컨드 팀에 포함되었으며 시즌 평균 10.9득점을 기록한다. 물론 유럽에서 뛰었을때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었지만, 그래도 플레이스타일이 다른 NBA에 어느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평가 받았다.[6]

다음 해인 1994-95시즌, 쿠코치는 1경기를 제외하고 시즌 전경기에 출전해 팀내 2옵션을 맡아 시즌 평균 15.7득점을 기록했다. 또한 시즌 후반 조던이 돌아오면서 쿠코치는 자신이 오랫동안 존경하던 조던과 같이 경기를 뛰게 되었다.

1995-96시즌, 조던의 복귀와 데니스 로드맨의 영입으로 쿠코치는 식스맨 역할을 맡게되며 조던,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옵션으로 활약하며 시즌 평균 13.1득점을 기록하며 팀내 득점 3위에 오른다. 이 해 식스맨으로 맹활약한 쿠코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NBA 올해의 식스맨 상을 수상했으며 소속팀인 불스는 72승 10패로 NBA역사상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1997-98시즌 쿠코치는 시즌 평균 13.3득점을 기록하며 조던과 피펜에 이은 제 3의 공격옵션이자 식스맨으로 활약한다. 그러나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조던의 은퇴, 피펜이 휴스턴 로켓츠로 이적, 로드맨의 팀 이탈, 그리고 필 잭슨 감독의 사직등으로 불스의 에이스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98-99시즌,불스 왕조의 주역들이 사라지자 불스의 에이스 자리는 쿠코치에게 넘어왔다. 쿠코치는 이 해에 시즌 평균 37.6분, 평균 18.8득점을 기록하며 외로운 에이스로 활약했다. 이렇게 혼자 고군분투하던 쿠코치는 99-00시즌 불스가 팀 재정비에 나서면서 필라델피아 76ers로 이적했다.

2.2.2 그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적한 쿠코치는 시즌 전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할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쿠코치는 아이버슨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불스 시절보다 성적이 더 떨어졌다. 이후 쿠코치는 애틀랜타 호크스로 이적했다가 다시 밀워키 벅스로 이적했고 벅스에서도 부상으로 인해 초라한 성적을 남기며 2006년 은퇴를 선언한다.

3 은퇴 후

은퇴 후 미국에 정착했으며 골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2011년 크로아티아 전국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아들인 마린 쿠코치도 현재 농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4 플레이스타일

NBA 기준으로도 센터급 신장인 6-11(211cm)의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포지션은 SF이다. 그것도 래리 버드줄리어스 어빙, 찰스 바클리(데뷔 초기에는 스몰포워드로 뛰었다) 같이 골대 근처에서 많이 뛰며 골밑 플레이 위주의 SF가 아니라 르브론 제임스나 스카티 피펜처럼 외곽에서 주로 뛰면서 게임리딩도 같이 하는 포인트 포워드에 가까웠다.

그가 실질적인 전성기를 달렸던 90년대 초중반까지 유럽에서 뛰던 모습, 그리고 드림팀을 92올림픽에서 상대할 때 경기모습을 보면 쿠코치는 포인트가드처럼 볼을 운반하고 게임리딩을 했다. 무엇보다 그는 7피트에 가까운 키에도 실제로 가드로 분류되었다.[7] 그가 NBA로 처음 올 당시 그의 가장 큰 장점은 패스능력이었으며 이때문에 "웨이터" "백인 매직 존슨"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불스 합류 초기에 고생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를 파워포워드로 기용했기 때문인데, 키는 센터만큼 커도 몸무게가 가볍고, 무엇보다 한번도 골밑요원으로 뛴 적이 없는 선수를 파워포워드로 쓰니 잘 뛸리가 없다. 94년 당시 시카고 트리뷴의 유명 기자 샘 스미스는 당시 올스타급으로 성장하던 BJ암스트롱을 트래이드하고 토니 쿠코치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올리자면서 포인트가드가 쿠코치의 재능을 가장 살릴 수 있는 포지션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레알 윤대협[8]

마이클 조던과 호레이스 그랜트가 빠진 1994-95 시즌부터는 피펜에 이어 팀내 No.2 옵션이었고 94-95 시즌 도중 조던이 합류한 뒤에는 팀내 No.3 옵션이긴 했지만 중거리 슛이 기복이 매우 심했던 피펜에 비해 가끔 피펜을 제치고 No.2 옵션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공격력보다 수비력이 너무 약했기 때문에 95-96 시즌 시작전 로드맨의 합류 이후에는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어 매경기 25-30분 정도 출장하는 식스맨으로 활약해서 조던/피펜 둘중 하나가 게임에서 빠지는 경우에는 2옵션 및 제한적인 게임 메이킹 롤을 맡기도 했다. 시카고 불스가 쓰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포인트가드의 역할이 제한적인 팀이라[9] 쿠코치는 벤치 득점원의 역할을 해야했다. 이때 그는 포인트가드 론 하퍼[10]와 센터 룩 롱리의 교체선수 역할을 했는데, 실력으로 따지면 롱리보다 쿠코치가 훨씬 위지만 그는 센터가 아니었기 때문에 롱리가 빠지면 불스 골밑의 무게가 크게 약해지곤 했다.

아무튼 진짜로 가드처럼 뛰었던 유럽과 달리 NBA에서 그는 패스능력은 특급인 팀내 2-3의 득점원 정도로 제한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천재성을 살려 폭발적인 득점으로 팀을 이끈 적도 있지만, NBA 커리어만 놓고 보면 그는 알토란 같은 활약을 해주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냥 평범한 롤플레이어였다.

가장 큰 이유는 위에 언급된 수비력. 지역방어가 허용되던 유럽과 달리 당시 NBA는 맨투맨 수비만 가능했는데 (2001년에 지역방어 재도입), 스몰포워드를 막기에는 키가 너무 커서 반응속도가 느리고, 파워포워드를 막기엔 힘이 약했던 쿠코치는 특히 수비를 중시하는 불스에서 뛸 자리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그는 체중을 늘려서 파워를 늘리고자 했는데, 이 덕분에 그는 NBA 포워드들과 그나마 매치업할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던 순발력을 많이 잃었다.[11] 쿠코치가 불스왕조의 일원으로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벌긴 했지만, 그의 재능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업적을 남긴 셈인데, 만약 수비를 중시하던 불스보다 달리는 농구, 스몰라인업을 추구하는 다른 팀(예를 들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즈)에 입단했다면 주전으로서 훨씬 더 위력적인 선수가 되었을 수도 있다.

가정일 뿐이지만 쿠코치가 만약 그의 약한 수비력을 가려줄 수 있는 지역방어가 재도입된 2000년대 NBA에서 뛰었다면, 슈퍼스타급으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04년 당시 강력한 MVP 후보였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페자 스토야코비치 역시 약한 수비력, 장신에도 빈약한 파워, 뛰어난 슈팅력을 지닌 스몰포워드로 쿠코치와 유사했지만 지역방어 덕분에 그의 단점이 가려져서 슈퍼스타급 활약을 펼쳤다. 오히려 쿠코치는 여기에 특급 패싱력까지 갖췄으니 성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5 여담

불스 입단 당시에 쿠코치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피펜과 갈등이 있었는데,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1993-94시즌 닉스와의 컨퍼런스 준결승 4차전. 당시 스코어가 102 대 102로 팽팽히 맞서던 상황에서 1.8초가 남은 상황이었다. 필 잭슨 감독은 쿠코치에게 마지막 슛을 맡겼고 이에 피펜은 펄쩍 뛰며 경기 출전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러든 말든 쿠코치는 슛을 성공시키며 불스는 4차전 승리를 가져갔다.[12]

그러나 쿠코치와 피펜은 이후 1998년까지 함께 뛰면서 관계가 회복된다. 실제로 쿠코치는 불스 입단 당시 조던과 함께 뛸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조던은 쿠코치 입단 직전에 은퇴하고 야구하러 갔다) 것에 대해 실망할 정도로 조던빠였지만, 이후 3연패 기간동안 자신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동료로 피펜을 꼽기에 이른다. 실제로 강압적인 리더쉽을 가진 조던과 달리, 피펜의 리더쉽은 다른 동료들을 묵묵히 서포트해주는 것이었다.

사실 이 갈등은 스코티 피펜 항목에도 일부 서술되어있지만, 진짜 원인은 쿠코치를 영입한 제리 크라우스 당시 단장에 있다. 크라우스는 피펜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할때는 필사적이었지만, 피펜이 조던의 밑에서 리그 최고의 스몰포워드로 성장한 이후 피펜이 그에 걸맞는 고액연봉을 요구하자 돈 몇푼 아끼려고 정을 떼버리고, 피펜을 트레이드해버리려고 피펜 대체자로 쿠코치를 영입한 것이다. 실제로 피펜은 쿠코치 영입이후 롤이 겹치는 등 여러가지 이유로 불만을 표시하며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트레이드 성사 직전까지 간적도 있다. 하지만 불스 왕조 위기의 순간 조던이 돌아오면서 피펜을 지킬것을 요구했다. 피펜도 조던의 지원에 잠시 불만표출을 접었고 자연스럽게 교통정리가 되면서 쿠코치가 식스맨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원래 공격에 장점이 있던 장신 3번 플레이어를 큰 키로 몸빵수비만 시키다보니 원래도 약했던 수비문제가 더욱 악화되면서 한때 선수들이 뽑는 리그 최악의 수비수에 매번 꼽히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반지 3개를 얻긴 했지만 쿠코치 개인으로써는 다소 아쉬운 커리어인 셈.
  1. 현 KK 스필트.
  2. 전부터 쿠코치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시카고 불스는 이 해 드래프트에서 쿠코치를 지명했고,92-93시즌이 끝나면 불스에 데뷔시키는 조건하에 쿠코치와 계약에 성공했다
  3. 금메달을 못 딴 이유는 결승전 상대가 드림팀 1기였기 때문이다.
  4. 하지만 정작 쿠코치를 결승에서 상대한 찰스 바클리칼 말론은 각각 그저 유럽내에서만 최고의 선수다. 별로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다라며 쿠코치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사실 그럴 수도 있는게, 이때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은 팀의 제리 크라우스 단장이 쿠코치를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면서 메달리는 걸 고깝게 여겼고, 밑에 나온 대로 결승에서 쿠코치를 번갈아가며 막아서 유럽 최고의 선수인 쿠코치가 턴오버쇼와 더불어 거의 활약을 못하게 했다. 피펜과 조던의 집중마크를 당해낼 만한 선수가 nba에서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5. 하지만 정작 마이클 조던스카티 피펜은 별로 쿠코치의 입단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당시 결승에서 쿠코치의 크로아티아를 개발살낸 기억도 있고, 아무리 잘해봤자 NBA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쿠코치에 대한 기대는 "적응" 정도가 아니었기에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다. 사실 쿠코치는 앨런 아이버슨과 마찬기자로 사이즈에 안 맞는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선수라 맨투맨 수비에서 활용법에 에로사항이 꽃핀다.(다만 지역방어 하에선 엄청나게 빛날 선수) 맨투맨에서 그나마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스몰포워드 수비를 맡기고 공격에서 프리롤을 줘야하는데, 시카고는 다들 알다시피 스몰포워드에 레전드 스카티 피펜이 있고 공격에서는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운영하는 팀이다. 트라이앵글에서 보통 PG는 역할이 극히 제한되며 심지어 마이클 조던조차 어느 정도 제약알 받았다. (물론 조던을 트라이앵글 안에서만 활용하는 건 낭비므로 조던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었다. 특히 다른 선수들의 부진으로 트라이앵글이 힘을 잃을때 공격의 활로를 뚫은건 조던의 1대1) 또한 피펜이 아무리 1번에서 5번까지 막을 수 있어도 진짜로 파워포워드를 경기 내내 막는건 무리이자 재능낭비이므로 (피펜은 기본적으로 외곽수비수다) 쿠코치를 배려해 피펜을 4번으로 기용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쿠코치는 어울리지도 않는 파워포워드를 봐야했고, 한번도 해보지 않은 골밑수비에서 당연히 재앙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밑에도 나오지만 불스에서 쿠코치는 자기가 가진 재능에 비해 극히 일부인 득점 지원만을 주로 보였다. 그가 유럽 최고의 가드(실제로 가드라고 표기됐다) 겸 포워드 중 하나였단 걸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쿠코치와 쌍벽을 이룬 드라젠 페트로비치는 비록 올스타는 못됐지만 그보다 더 빡센 올NBA 써드팀 (전체 NBA 가드 중 6위 내에 들어야 함)에 뽑히며 슈퍼스타로 성장중이었다는 걸 (이듬해에 교통사고로 요절)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7. http://www.si.com/vault/1992/06/22/126703/mens-basketball-the-toni-award-at-23-toni-kukoc-a-6-ft10-in-guard-is-already-europes-best-player-and-a-prize-coveted-by-the-chicago-bulls 1992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기사인데, "6피트10인치의 가드인 쿠코치는 이미 유럽 최고의 선수이며 불스가 노리는 상품이다"라고 되어있다.
  8.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94-11-09/sports/9411160467_1_bulls-toni-kukoc-salary-cap
  9. 실제로 이 때문에 2004년 레이커스에서는 당시 아직 스타급 실력을 유지하던 게리 페이튼이 트라이앵글로 인해 급격히 평범한 선수가 된 적이 있다.
  10. 하퍼의 원래 포지션은 슈팅가드지만, 불스에서는 PG가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수비력이 뛰어난 그를 PG로 쓰고 실질적인 리딩은 피펜이 메인, 조던이 서브였다.
  11. 물론 시카고 시절에도 다른 백인 7푸터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긴 했지만, 가드처럼 뛰던 유럽시절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12. 후에 잭슨 감독은 피펜에게 가장 실망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