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어스 어빙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네이트 서몬드네이트 아치볼트데이브 빙데이비드 로빈슨데이브 코웬스돌프 세이즈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로버트 패리시릭 베리마이클 조던매직 존슨모제스 말론밥 페팃
빌 러셀빌 셔먼빌 커닝햄빌 월튼샤킬 오닐샘 존스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얼 먼로엘빈 헤이즈엘진 베일러오스카 로버트슨웨스 언셀드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월트 프레이저제리 루카스제리 웨스트제임스 워디조지 거빈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카림 압둘 자바칼 말론케빈 맥헤일클라이드 드렉슬러
폴 아리진패트릭 유잉피트 마라비치하킴 올라주원할 그리어찰스 바클리밥 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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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줄리어스 윈필드 '닥터 J' 어빙 2세
Julius Winfield Erving II(Dr.J)
생년월일1950년 2월 22일
201cm
체중95kg
출신학교매사추세츠 대학교
포지션스몰 포워드
드래프트NBA 197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2번, 밀워키 벅스)
역대 소속팀버지니아 스콰이어스-ABA (1971~1973)
뉴욕 네츠-ABA (1973~1976)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1976~1987)
등번호32번(ABA), 6번(NBA)
수상내역아래 항목 참조
1981년 NBA 정규시즌 MVP
카림 압둘 자바줄리어스 어빙모제스 말론
1977년 NBA 올스타 MVP
데이브 빙줄리어스 어빙랜디 스미스
1983년 NBA 올스타 MVP
래리 버드줄리어스 어빙아이재아 토마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영구결번
No. 6
브루클린 네츠 영구결번
No. 32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날에 하는 것을 말한다."

(Being a professional is doing the things you love to do, on the days you don't feel like doing them.)

"전설이 되고 싶다면 자신의 목표에 한계를 정해서는 안 됩니다."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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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의 전 농구선수. 닥터 J(Dr.J)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농구 역사에 있어서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바로 윗 세대에서 1970~80년대 초까지 미국 농구를 이끌던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모제스 말론과 함께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떨어지는 농구 레전드중 하나인데, 이는 어빙과 말론의 시대인 1970년대~80년대 초는 NBA의 암흑기이자 파이널 녹화방송의 흑역사시기였기 때문. 그 후배들인 매직과 버드가 NBA의 흥행과 세계화를 이끌면서 NBA가 인기를 회복하지만 그때는 이미 어빙과 말론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

또한, 말론과 함께 어빙은 NBA 레전드인 그가 ABA의 전설의 레전드인 탓에 동시대 NBA에서 최강자였던 오스카 로버트슨, 카림 압둘 자바같은 슈퍼스타에 비하면 통산기록이나 리그에 남긴 족적들이 부족하기에 인정받기 어려운 것.

그래도 은퇴후 어빙은 NBA TV에서 제작한 OPEN COURT, INSIDE THE NBA에도 종종 출연하고 슬램덩크 콘테스트 심사위원이나 기타 이벤트에도 자주 참여했다. 어빙과 활동시기가 비슷한 빌 월튼은 NBA 레전드이고 미국내 인기도 상당했지만 한국에선 어빙 이상으로 인지도가 없다. 모제스 말론이나 다른 ABA 스타들에 비하면 어빙이 암흑기 슈퍼스타중엔 가장 꾸준하게 대외활동을 해온 편.]

2 상세

2.1 아마추어 시절

1950년 2월 22일 뉴욕 주의 루즈벨트라는 곳에서 출생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으로 루즈벨트 고교를 이끌었고. 길거리 농구의 전설 러커 파크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Dr.J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고교를 졸업한 어빙은 1968년 매사추세츠대학에 입학해 평균 26.3점-20.2리바운드을 기록하며 대학농구를 폭격한다.

2.2 ABA 시절

이미 대학에서 더 보여줄 것이 없던 이 농구천재를 NBA가 주목하지만, NBA는 대학을 졸업해야 드래프트에 지명될 수 있었고 어빙은 좀더 일찍 농구로 돈을 벌고 싶어했다. 그런 어빙의 눈에 들어온 리그는 당시 NBA의 경쟁 리그였던 ABA. NBA의 후발주자로써 NBA를 따라잡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1]를 해오던 ABA는 과감하게 대학 중퇴선수에게도 문호를 개방했고, 어빙은 대학 3학년을 마친 1971년 ABA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 자유계약 선수로 입단했다[2]. 그리고 루키 시즌 어빙은 평균 27.3점을 기록하고 ALL-ABA 세컨드팀에 선정됐으며 신인상까지 거머쥐고, 스콰이어스는 45승 39패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ABA에서 화려한 루키시즌을 마친 어빙은 1972년 NBA 드래프트 지원이 가능하게 되자 NBA 드래프트를 신청한다. 그는 1라운드 12위로 밀워키 벅스에 지명되지만, 실제로는 그의 에이전트가 어빙과는 상관없이 애틀랜타 호크스와 계약을 맺게 되어 삼중계약자(스콰이어스,벅스,호크스) 신분이 된다. 때문에 가장 먼저 계약했던 스콰이어스가 어빙과 NBA에 소송을 걸고, 승소하면서 어빙은 ABA 스콰이어스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계약난항 끝에 스파이어스에서 1시즌 더 뛴 어빙은 ABA의 최강팀인 뉴욕 네츠로 트레이드된다. 어빙의 몸값을 감당하기에 스콰이어스의 자금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 뉴욕 네츠에서 활약한 어빙은 2차례의 득점왕, 3연속 MVP, 2차례 플레이오프 MVP등 ABA를 씹어먹는 대활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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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어스 어빙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1972년 열린 슈퍼게임 2. 올스타전항목에 일부 소개되어 있지만, NBA vs ABA의 대결이었던 이 경기에서 맹활약하며 ABA를 이끄는 차세대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다.

2.3 NBA 시절

ABA시절의 맹활약에도 ABA는 결국 NBA와의 흥행대결에서 패했고 ABA는 도산했다. ABA에 속해있던 팀중 덴버 너기츠, 뉴욕 네츠, 샌안토니오 스퍼스, 인디애나 페이서스 4팀은 NBA에 편입되었다. 어빙의 소속팀 네츠는 NBA에 편입했지만, NBA에서는 이들 ABA팀을 이런 저런 문제로 압박했으며 뉴욕 네츠는 결국 줄리어스 어빙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내줄 수 밖에 없었다. 왜인지는 브루클린 네츠문서를 참조바람.

그렇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소속으로 NBA에 데뷔한 줄리어스 어빙은 팀내 득점 1위(21.6)와 리바운드 2위(8.5)에 오르며 유일하게 82경기를 모두 출전하여 팀을 이끌었고 식서스는 76-77시즌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빌 월튼이 이끈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 패배했지만 어빙이 이끄는 식서스는 동부의 강력한 우승후보팀이었다. 식서스를 지속적으로 강팀으로 이끈 어빙은 80-81시즌 리그 MVP에 올랐다. 이 때 보스턴 셀틱스의 래리 버드가 2위에 올랐는데, 이는 이후 'The Bird vs Dr.J'라는 향후 10년을 넘게 이어갈 라이벌 시리즈의 시작이었다.[3] 보스턴 셀틱스와 치열한 경쟁을 펼쳤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는 우승을 위해 휴스턴 로케츠에서 81-82시즌 MVP 모제스 말론을 영입했고, 결국 82-83시즌 보스턴 셀틱스를 동부 파이널에서 꺾고 세미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뉴욕 닉스를,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밀워키 벅스를 물리치고 올라갔으며, NBA 파이널에서 매직 존슨,카림 압둘 자바가 이끌던 LA 레이커스를 스윕하며 식서스의 통산 3번째이자 마지막 NBA 타이틀을 얻었다.[4]

2.4 플레이 스타일

엘진 베일러가 쇼타임 농구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면, 줄리어스 어빙은 이를 완성한 선수이다. 강력한 센터가 중심이었던 농구판에서 가드와 포워드를 넘나들면서 현란한 움직임과 슬램덩크로 팬을 끌어모음과 동시에 팀을 승리로 이끌수 있던 슈퍼스타.

한참 TV가 막 보급되고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던 그 시절 어빙은 슬램덩크로 많은 어린이들을 설레이게 했다. 그 시절 어빙만큼 멋지게 덩크를 하는 선수는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림을 내리 찍듯이 누르는 슬램덩크는 물론이고, 한 손으로 공을 잡고서 허공에서 스윙하면서 덩크를 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우리들이 마이클 조던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고 있는 자유투 라인에서 날아올라 덩크를 내리 꽂는 장면을 1976년 ABA 올스타전을 통해 최초로 전국에 소개했다.

마이클 조던은 "제가 어빙의 업적들을 볼 수 없었다면 제가 펼쳐보인 모든 버전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어빙을 칭송했고, 그랜트 힐 역시 "제게 있어서 어빙은 NBA의 전부로 여겨졌습니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운동장으로 뛰어가서 어빙의 덩크를 시도했지만 흉내조차 낼 수 없었죠"라며 어빙에 대해 말했다. 90년대 NBA의 최전성기를 이끈 슈퍼스타들은 모두 어빙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농구를 시작하고 어빙의 플레이를 배운 선수들이다. 특히 현역 NBA 최고의 스타인 르브론 제임스는 본인 입으로는 마이클 조던을 동경하고 마이클 조던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하지만, 전문가들 대부분은 조던이 아니라 어빙의 플레이를 더 많이 닮았다고 평가한다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르브론이 그랜트 힐이나 매직 존슨을 많이 닮았다고 평한다. [5]

3 기타

필라델피아나 펜실베이니아를 배경으로 한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1993년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필라델피아 지역 로펌의 꼴통 높으신 분들이 식서스의 경기를 관람할 때 스위트룸을 찾아 비위를 맞추는 본인 역으로 카메오 출연을 했고 오피스에서도 카메오로 나오기도 했다.

상당한 패션센스를 자랑하셨다. 30줄 넘어가시기 전에는 특유의 아프로 머리와 70년대 상징인 나팔 바지를 고수했는데 사진을 보면 소싯적에 여자들 꽤나 홀리셨을 것 같다. [6] 현재는 나이가 들면서 탈모가 진행된 많은 슈퍼스타들과 달리 백발이 무성한 머리와 수염을 고수하시는데 정장을 입고 있는 사진을 보면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로 멋있게 늙었다. 백발간지

결혼한 부인 외에도 두번에 걸친 혼외정사로 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는 1980년 스포츠 기자였던 Samantha Stevenson 으로부터 낳은 Alexandra Stevenson, 둘의 관계는 1999년 딸인 알렉산드라 스티븐슨이 윔블던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두번째 아이는 2003년에 다른 여자로부터 태어났는데 이로 인해 어빙은 본처였던 Turquoise Erving과 이혼하였다.

쓸데없는 여담이지만 손이 정말 크다. 마이클 조던이 신인 시절 조던과 공을 같이 잡으며 포즈를 취한 사진이 있는데 손 크기로 유명한 조던보다도 한 마디가 더 크다. 일설에는 27cm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는 조던은 물론이고 216에 달하는 샤킬오닐보다도 크다. 동시대에 활약한 데랄 도킨스는 "어빙이 공을 잡으면 무슨 오렌지 잡는듯 했다"고 하며 실제로 큰 손을 이용해 한손으로 리바운드를 잡거나 보통 선수들은 양손으로 잡고 하는 고난도 볼핸들링을 한손으로 하기도 했다. 또 손이 워낙 커서인지 유독 투핸드 덩크 장면이 적다.

TNT의 '오픈 코트'에서 그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 어빙은 팀을 대표하는 정도가 아닌 리그를 대표하는 '대사'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라 평했다. 오닐, 웨버, 바클리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극찬에 극찬을 거듭하고 어린 시절 '난 닥터 J야' 하며 놀았다고. 선수 시절 닥터 제이와의 악수 한 번에 영광스러워했고, 웨버 같은 경우 어빙이 쓰던 컵을 몰래 가져와 소장하고 있다는 일화를 밝히는 등 후배들에 엄청난 존경심을 받는 선수다.

본인이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전설이기도 하고 당연한 소리지만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보통 젠틀하고 말을 아끼는 이미지이지만 세븐티식서스 에 대한 소식이면 가끔 쓴 소리를 한다. 앤드류 바이넘에 대해서는 "기껏 큰 맘 먹고 트레이드해서 얻은게 이런 망가진 물건(damaged goods) 이라니" 라고 탄식했었고 2014년 NBA 드래프트에서 세븐티식서스가 3rd, 10th picks 를 얻자 (대부분 사람들이 더 높은 픽을 얻을거라고 생각했다. 로터리 운이 없었을 뿐...) 뚱한 표정을 지어서 해외 NBA 커뮤니티에 좋은 짤방이 되었다. dr-j-shocked.jpg
  1. 3점슛, 치어리더, 덩크 콘테스트등 다양한 시도가 많았다.
  2. 사실 여기엔 NBA의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드로 꼽히는 빌 러셀의 조언도 한몫했다.
  3. 이는 매직 존슨래리 버드의 경쟁구도와 함께 당시 NBA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4. 당시 모제스 말론은 "Fo, Fo, Fo!!"라는 발언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4경기만에 경기를 끝내겠다, 즉 스윕을 하겠다는 엄청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는 4경기-5경기-4경기로 동부 파이널에서 밀워키 벅스를 4-1로 꺾었다.
  5. 르브론과 어빙의 스타일이 닮았다는 전문가는 별로 없다. 어빙시대의 스몰포워드는 2000년대의 스몰포워드와 플레이스타일이 매우 달랐다.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빈도수가 많았으며 힐, 르브론, 스카티 피펜같이 올라운드형 포워드는 드물었다. 까놓고 말해 현란한 공중플레이를 제외하면 두 선수의 공통점은 많지 않다. 어빙은 골밑과 중거리에서 득점을 많이 올렸는데 반면 르브론은 돌파의 비중이 크긴 했지만 어빙보다 훨씬 더 외곽에 치우쳐져 있다. 또한 어빙은 셋과 달리 패스나 리딩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르브론은 84년생으로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서 어빙은 은퇴했는데 롤모델로 삼기는 좀 무리지 않을까. 가난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르브론이라 인터넷을 통해 예전 영상을 맘대로 찾아볼수도 없을 뿐더러, 르브론이 성장하던 시기는 마이클 조던이 nba를 지배하던 시기다. 그리고 르브론이 조던을 동경한 것은 그가 23번을 택하고 "23번은 조던에 대한 예우로 전구단 영구결번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명백하다. 이것만 봐도 조던에 대한 존경심이 립서비스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조던이 어빙에 대한 존경심을 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롤모델이자 우상은 현란한 득점력을 자랑했던 "스카이워커" 데이빗 톰슨이었다. 조던이 본인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때 소개자로(기존 명예의 전당 멤버 중 한명이 새로 헌액될 사람을 소개해주는 것이 관례다) 톰슨을 택한 것만 봐도 알수 있다.
  6. 실제로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임에도 2번이나 혼외정사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