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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 ||||||
네이트 서몬드 | 네이트 아치볼트 | 데이브 빙 | 데이비드 로빈슨 | 데이브 코웬스 | 돌프 세이즈 | 레니 윌킨스 |
래리 버드 | 로버트 패리시 | 릭 베리 | 마이클 조던 | 매직 존슨 | 모제스 말론 | 밥 페팃 |
빌 러셀 | 빌 셔먼 | 빌 커닝햄 | 빌 월튼 | 샤킬 오닐 | 샘 존스 | 스카티 피펜 |
아이재아 토마스 | 얼 먼로 | 엘빈 헤이즈 | 엘진 베일러 | 오스카 로버트슨 | 웨스 언셀드 | 윌리스 리드 |
윌트 체임벌린 | 월트 프레이저 | 제리 루카스 | 제리 웨스트 | 제임스 워디 | 조지 거빈 | 조지 마이칸 |
존 스탁턴 | 존 하블리첵 | 줄리어스 어빙 | 카림 압둘 자바 | 칼 말론 | 케빈 맥헤일 | 클라이드 드렉슬러 |
폴 아리진 | 패트릭 유잉 | 피트 마라비치 | 하킴 올라주원 | 할 그리어 | 찰스 바클리 | 밥 쿠지 |
포토제닉[1]
파일:Attachment/칼 말론/ss.jpg
그의 영원한 파트너 존 스탁턴과 함께
이름 | Karl Anthony Malone |
생년월일 | 1963년 7월 24일 |
신체 조건 | 206cm, 116kg |
포지션 | 파워포워드 |
드래프트 | 1985년 드래프트 1라운드 13순위 유타 재즈에 지명 |
소속팀 | 유타 재즈 (1985~2003) LA 레이커스 (2003~2004) |
등번호 | 32번 (유타 재즈) 11번 (LA 레이커스) |
수상내역 | 정규시즌 MVP 2회 (1997, 1999) NBA All-Star Game MVP 2회 (1989, 1993) NBA All-Star 14회 (1988-1998, 2000-2002) All-NBA First Team 11회 (1989-1999) All-NBA Second Team 2회 (1988, 2000) All-NBA Third Team 1회 (2001) NBA All-Defensive First Team 3회 (1997-1999) NBA All-Defensive Second Team 1회 (1988) NBA All-Rookie First Team (1986) |
유타 재즈 영구결번 |
No. 32 |
1997년 NBA 정규시즌 MVP | |||||
마이클 조던 | → | 칼 말론 | → | 마이클 조던 | |
1999년 NBA 정규시즌 MVP | |||||
마이클 조던 | → | 칼 말론 | → | 샤킬 오닐 |
1989년 NBA 올스타 MVP | |||||
마이클 조던 | → | 칼 말론 | → | 매직 존슨 | |
1993년 NBA 올스타 MVP | |||||
매직 존슨 | → | 칼 말론 & 존 스탁턴 | → | 스카티 피펜 |
1 개요
전 NBA선수. 존 스탁턴과 함께 유타 재즈의 살아있는 전설. 18년간 유타 재즈에 몸담았다. 1996년에는 NBA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NBA가 선정한 역대 위대한 50인의 선수 중 한명이다. 통산 득점 36,928점으로 역대 2위인 선수. 그리고 NBA의 대표적인 콩라인중 한명.
2 전반적인 커리어
루이지애나 공대를 나온 칼 말론은 1985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유타 재즈에 지명된다.[2] 루키 시즌부터 주전을 맡으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년차 시즌에는 20-10을 달성하는 리그의 엘리트 파워포워드로 자리매김 하였고 그 후에는 약점이었던 자유투도 향상시키면서 막기가 까다로운 선수가 되었다. NBA에서 3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의 시즌스탯을 기록한 마지막 선수로써(31.0득점 11.1리바운드) 득점력에 있어서는 역대 NBA 파워포워드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단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시즌 대비 득점과 효율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다.[3]
파일:Attachment/칼 말론/km.jpg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칼 말론의 스탯. 무려 19시즌을 NBA에서 뛰면서 커리어 평균 25-10의 위엄.
존 스탁턴과의 콤비플레이는 지금도 올드팬들에게 많이 기억되는 부분.[4] 둘의 픽앤롤과 픽앤팝은 정말로 알고도 못막는 수준의 무시무시한 전술이었다. 원래 픽앤롤의 경우 농구에서는 기본적인 전술중 하나이지만 당시 NBA에서 지역방어 금지에 모션 오펜스의 도입이 늦었기 때문에, 제리 슬로언의 유타 재즈가 선보이는 모션 오펜스에 NBA팀들은 속수무책이었고, 그 시작인 스탁턴-말론의 픽앤롤 2:2 플레이는 그 모션 오펜스의 시작이자 필살기였다. 팬들은 칼 말론의 꾸준한 플레이를 빗대어 그에게 우편배달부[5]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본인도 마음에 들어하는 별명이었다고.
전성기가 정말로 길었던, 존 스탁턴과 함께 NBA를 대표하는 철인중 한명이였다. 11년 연속 All-NBA First Team은 수 많은 NBA선수들중에서 오직 말론만이 기록한 기록이다. 현역 생활을 한 19시즌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며, 2002년11월3일 나이 39살 100일 근처에서 데뷔 이래 최초로 경기에서 무득점하였다.흠좀무
1992년과 1996년 올림픽에서 미국농구대표팀 드림팀 1, 3의 멤버로 두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 두번의 올림픽때도 존 스탁턴과 함께 했다.
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97년도와 98년도에는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았으나 상대팀은 막강전력을 자랑하는 시카고 불스였고 이들은 분전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다. 2003년 존 스탁턴은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말 우승 한번 해보는게 소원이었던 칼 말론은 18년간 정든 유타 재즈를 떠나 LA 레이커스와 150만달러라는 헐값에 계약했다. 전년도 연봉으로 무려 1900만달러를 받던 말론이 얼마나 우승을 하고 싶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
그러나 레이커스가 사용하던 전술인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적응하느라 고생했고, 이제 좀 적응을 하는가 싶더니 부상크리를 당하면서 시즌 절반가량을 개점휴업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타에서의 1옵션이 아닌 블루워커로서 리바운드와 수비에 주력하는 스타일로 경기스타일을 바꾸면서 최고령 트리플더블을 달성하는등 40세의 나이를 고려하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으며 플레이오프에서도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케빈 가넷과 팀 던컨을 상대로 좋은 수비를 보여주면서 팀은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파이널에 올라 이젠 우승을 하는가 싶더니... 의외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말론은 04-05시즌에도 선수생활을 하려고 했다. 부상을 당해 재활을 하던 중이었지만 많은팀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부상회복이 더딘 탓이었을까. 선수생활지속이냐 은퇴냐를 두고 고민하던 칼 말론은 결국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때 자신이 유타 재즈 시절 달던 32번이 델타 센터 천장에 오르는 걸 희망했다. "지금 사용하는 유니폼이 아닌 옛날 유니폼으로 걸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은퇴 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2010년에 명예의 전당에 개인자격과 1992년 드림팀1의 멤버 자격으로 헌액되는 감격도 누렸다.
3 더티 플레이어
뛰어난 선수이긴 하지만 커리어 내내 더티 플레이때문에 말이 많았다. 특히 상대의 밀착수비를 팔꿈치를 휘둘러 떨어뜨리는 비신사적 플레이가 대표적.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팔뚝굵기도 장난이 아니어서 맞은 상대는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버린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아이재아 토마스의 경우는 경기중 칼 말론의 보복성 팔꿈치공격[6]으로 이마쪽을 40바늘이나 꿰메고 한동안 큰 원수사이가 되었었다. 세월이 지나 은퇴후 칼 말론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둘이 화해를 했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그후 아이재아 토마스가 방송에서 한 발언[7]등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앙금은 남아있다고 봐야 옳다.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는 마이클 조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옆으로 몇센치만 더 안으로 들어왔다면 안면함몰이 될뻔했다.조니 맥도웰과 허재의 그 장면이 떠오른다
데이비드 로빈슨은 그의 가격에 뇌진탕을 일으켜 실려가기도.
이런 더러운 플레이 덕분에 2004년 ESPN이 선정한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더티 플레이어 2위" 당당히 선정되었다.(...)[8] 그래서인지 위에 언급한 위대한 50인 선정발표때 유이하게 야유를 받은 인물이다.(...) 한명은 샤킬 오닐.[9] 야유의 이유는 확신할수 없으나 팔꿈치 사용이 주 원인이었을지도.
4 이것저것
- 보다시피 저게 농구선수인지 프로레슬러인지 구분이 안될 근육맨이라 WCW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한적이 있다. DDP와 함께 태그팀으로 헐크 호건과 데니스 로드먼 팀과 경기를 하기도 했다. 단발성 출연은 아니었고 몇 번 나오기도 했다. 또한 피트니스 영상도 찍었을 정도로 몸관리가 매우 철저했던 선수이다. 대학시절부터 근육질의 몸으로 유명했던 선수였는데, 프로초창기부터 꾸준하게 벌크업을 해서 90년대 중반이후 사진처럼 벌크업된 몸을 완성했다.
- 명예의 전당 헌액때 받은 자켓을 기부했고, 또 모교인 루이지애나 공대에도 35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 그가 27세 때에 결혼한 부인인 케이 말론은 미스 아이다호 출신의 미녀이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후에 그가 결혼하기 전에 낳은 다른 숨겨진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미지가 엄청나게 실추되었다. 2012년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공격 라인맨으로 뛰고 있는 드미트레스 벨(1984년생)이 바로 말론이 20살에 당시 13살이었던 드미트레스의 어머니 글로리아에게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었던 것. 하지만 말론은 벨과 부자관계 성립을 거부한 반면, 벨의 어머니가 아닌 그가 17살에 사귄 다른 여자인 보니타 포드와 사이에서 낳은 또다른 아이들인 쌍둥이 남매(1981년생) 데릴 포드와 셰릴 포드와는 부녀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 많이 까였다. 더군다나 벨 가족측이 벨의 양육비를 보내달라고 했을때도 거절했다해서 또 까였다. 벨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성인이 된 후에야 칼 말론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론이 "뭐 이제와서 친한척하기도 그러니까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남자. 포드 남매와 드미트레스는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 가장 흑인문화가 발달한 루이지애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취미 생활은 낚시와 사냥이라고 한다.(...) 바클리의 말에 따르면 흑인의 탈을 쓴 백인 우월주의자라고 평할 정도로 좋아한다고. [10] 물론 젊은 시절에 루이지애나에서 살았지 농구선수가 된 이후에는 오랜 기간을 사냥과 낚시하기 딱 좋은 유타주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 NBA 역사상 가장 유명한 콩라인중 한명으로 통산득점순위 2위, 파워포워드 랭킹 2위, 준우승만 3회(...)(그중 조던에게만 2년연속 준우승을 당했다), espn선정 최악의 더티플레이어 2위인 선수이다... 여담으로 NBA 콩라인계의 대부인 엘진 베일러 란 선수가 있어 그중 에서도 2위...[11]
- ↑ 해당 덩크는 말론의 현역 시절 말론만 하는 시그니쳐 덩크로 유명했으며, 이후 후배 선수들은 르브론 제임스, 블레이크 그리핀이 선보였고 유타 재즈 직속 후배인 제레미 에반스는 아예 덩크 콘테스트에서 말론의 져지까지 입고 한 적이 있다. 이 덩크는 칼 말론의 별명인 Mailman(우편배달부)를 따서 일명 "Mailman Dunk" 혹은 "Special Delivery Dunk"로 불린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포즈로 그가 덩크를 한 건지 아무도 모른다. 영상을 보면 이게 순간캡쳐로 나온 장면도 아니고 진짜로 덩크하는 도중갑자기 한 손을 머리 뒤에 얹는다. 마이클 조던의 경우 혀를 내미는 요상한 습관은 아버지가 집중할때 나오던 버릇을 어렸을 때부터 따라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밝혔고, 따라서 집중할 때마다 거의 7~80%의 확률로 혀를 내미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말론은 이 포즈 자체가 가끔 나오기 때문에 집중해서라고 추측하기도 애매하고, 무엇보다 플레이 도중 나오기엔 너무 생뚱맞고 부자연스럽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힌 이유도 없으니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부분...
- ↑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말론의 평가는 대단히 높은 편이었으나, 말론은 대학에서 학년이 오를수록 스탯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여 평가를 상당히 깎아먹었고 드래프트에서 13픽까지 밀리게 되었다. 덕분에 유타는 명전급 빅맨을 겨우 13픽으로 득템하고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우승을 못했다 - ↑ 승부처에서 소극적이었던면도 마이너스요소중 하나. 당시 유타 재즈의 승부처 해결사는 스탁턴의 몫이였다.
- ↑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를 뽑으라면 한명이면 마이클 조던, 두명이면 존 스탁턴&칼 말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
- ↑ 비가오나 눈이오나...
- ↑ 이전경기에서 디트로이트가 유타의 존 스탁턴에게 고의로 거친 파울을 했었고 말론은 이에 다음경기에서 복수하겠다는 인터뷰를 한적이 있었다.
- ↑ "말론은 스탁턴과 함께했었기 때문에 그정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요지의 발언.
- ↑ 1위는 그 유명한 타이 콥.
- ↑ 이때 위대한 50인 선정발표때 세 명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피트 마라비치는 이미 고인이었고, 제리 웨스트는 지병때문에 불참. 샤킬 오닐은 무릎부상을 이유로 불참했는데, 당시 최연소 선정자였음에도 얼굴도 비추지 않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
- ↑ 물론 이 말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게 아니라, roughneck이라는 말로 불리는 사냥과 낚시, 총기, 거대한 오토바이 등을 즐기는 미국 백인 촌사람들같이 행동한다는 뜻이다. 바클리는 다른 NBA선수들처럼 골프를 즐겼는데 (모종의 이유로 현재는 안 한다. 찰스 바클리 항목 참고), 말론은 골프장을 딱 보고 "땅을 낭비하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 ↑ 참고로 엘진 베일러는 등번호가 22번일뿐더러 준우승만 수차례 차지했던 선수이다. 항목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