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Power Pop
간단히 말해, 록의 에너지와 팝의 멜로디를 결합시킨 대중 음악 장르.[1]
혹자는 '미국인 중 자신이 영국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 사람이 만든 음악', '1970년대에 활동하면서도 1960년대가 더 좋았다고 생각한 뮤지션들이 만든 음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적으면 등장 당시 무척 인기를 끌었을 것 같지만... (누가 힘찬 에너지를 지닌 멜로디를 거부하겠는가?) 정 반대 였다.
2 안습과 비운의 파워 팝 뮤지션의 일대기
- 파워 팝의 창시자 중 하나인 Badfinger는 비틀즈 워너비여서 그들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음악을 했다. 후일 존 레논의 솔로 앨범 Imagine과 조지 해리슨의 솔로 앨범 All Things Must Pass에도 참여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이들은 대접 받지 못했으며 (당시 시대의 유행이 그들이 하는 음악과 맞지 않았다.) 계약 문제까지 겹쳐서 결국 보컬과 기타리스트였던 피터 햄은 1975년 27살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자살했다. 이후 해체 몇 년후, 겨우 재결성 하나 했더니 이번에는 베이시스트이자 보컬이었던 톰 에반스가 자살 , 밴드는 완전하게 해체하게 된다. 특이하게 이 뒤를 잇는 파워 팝 밴드와 달리 영국 출신이다.
- 빅 스타 역시 안습의 판매고를 자랑하다가 결국 2집 때 핵심 멤버였던 크리스 벨이 지친 나머지 탈퇴하고 만다. (그리고 그는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지못미) 3번째 앨범 역시 발매 지연이 계속 겹치는 등 악재를 겪다가(앨범 명이 두 개의 제목을 엮어 만든 것도 그 때문이다.) 결국 3집 내고 해체. 다행히 1991년 재결성 돼서 활동하여 겨우 재평가받고 알렉스 칠튼이 세상을 떠났다.
- 슈즈는 첫 앨범 마스터 테이프를 홍수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 드와이트 트윌리 밴드는 내놓는 앨범마다 1-2년 씩 발매가 지체되었다. 소소한 히트곡은 있었지만...
- 치프 트릭은 그나마 대중적인 성공을 누린 운좋은 케이스이나, 초창기에는 완전 안습이였다. 그나마 일본에서 성공을 거두지 않았으면 저 위의 밴드처럼 될 뻔했다. (아시다시피 일본 음악 시장은 어마어마하다. 쥬다스 프리스트도 본거지에서 쫓겨나 일본에서 계약하던 시기가 있을 정도.) 그리고 결국 At Budokan이라는 일본 라이브 앨범을 내면서 겨우 성공.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스매싱 펌킨스의 리더 빌리 코건이 치프 트릭의 창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2]
2.1 디비스의 불운 편
이 중에서도 디비스는 그 불운이 상당한 편이어서 두고두고 회자된다.
영국 레이블 알비온(Albion)을 통해 발표된 이들의 데뷔 앨범 Stands For deciBels는 예상대로 영국 평단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며 세상에 등장했다. 그러나 뉴 로맨틱스와 신쓰팝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있던 당시의 영국 음악계에서 이들과 같은 기타 팝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국에서의 판매는 극히 저조했고 이로 인해 미국 시장 발매를 추진하던 알비온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이들은 이 앨범이 스웨덴 앨범 차트 20위권에 진입한 것을 최대의 성공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 나온 두 번째 앨범 Repercussion은 전작의 음악적 탁월함을 그대로 재현하면서도 프로듀서 스콧 릿(Scott Litt)의 영입으로 사운드에 보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다. 이 앨범 역시 평단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앨범이 발매된 직후 알비온이 도산한 때문이었다. 결국 이 앨범은 들어본 사람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연속되는 불운에 좌절한 크리스 스태미는 더 이상의 그룹 활동에 의욕을 잃고 디비스를 떠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이들은 피터 홀서플을 중심으로 그룹을 재정비하고 미국 레이블 베어스빌(Bearsville)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베어스빌에서의 첫 작품으로 견실한 컨트리/팝 앨범 Like This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베어스빌은 배급사인 워너 브라더스와의 재계약에 실패하고 레이블 소유주인 앨버트 그로스만(Albert Grossman)[3]마저 급사하는 등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디비스의 새 앨범에 신경을 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은 이들은 이번에는 승승장구하던 인디 레이블 IRS와 계약을 맺고 4집 앨범 The Sound Of Music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들의 불운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IRS는 같은 시기에 출반된 R.E.M.의 Document를 성공시키는데 모든 역량을 투입했고 심지어 R.E.M.의 앨범을 찍어내기 위해 이들의 앨범을 출시 몇 주만에 절판시켜 버리는 초 강수까지 동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앨범 The Sound Of Music을 끝으로 비운에 찬 그룹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해산.[4]
3 기타
사실 이러한 파워 팝에 대한 안습한 시선은 낵(The Knack) [5]이라는 밴드 탓이 크다. 이 My Sharona라는 곡 하나만으로 엄청난 인기를 끄는 바람에 음악 산업은 영국의 펑크와 미국의 디스코를 물리칠 책략으로 이 밴드를 제 2의 비틀즈로 띄우고 파워 팝을 융성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하지만 2집은 이런 시도가 무색하게도 완전 폭망했고(...), 파워 팝은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결국 안습의 파워 팝 대접을 만든 주범은 음악 산업.
다행히 얼터너티브 열풍과 R.E.M.의 성공 등으로 이런 불운의 역사와 냉대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 최근 인기를 끈 파워팝 밴드라면 위저, 틴에이지 팬클럽이 있다. 기발한 뮤직비디오로 유명한 OK Go도 이 장르로 분류된다.